사연있는 나무 이야기
서울특별시 엮음 / 서울책방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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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관한 책을 뒤지면 무궁무진하게 나온다. 그 많은 책 중에 역사를 담아 골목을 산책하는 이야기를 담은 책을 보면 파리가 지닌 문화유산이 부럽고, 그 골목을 누비는 이의 시선이 탐나곤했다. 서울도 이런 관점으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만했는데 심봤다!를 외치고 싶은 책이다.

멀리서 사는 친구가 동생책이라며 알려줘서 알게된 책. 근데 저자가 서울시여서 내용을 보지 않으면 읽기 쉽지 않은 책이다. 너무 좋은 책인데... 발행인만 서울시로 하고 저자를 실제 작가로 사용하면 홍보책자로서 더 가치가 있을텐데. 관리들의 마인드란..참.

서울시 홍보책자, 특히 서울에 있는 보호수에 관한 이야기와 그림이다. 사대문 안과 사대문 밖 두 카테고리로 나눠져있다. 사대문 안은 익숙한 공간인데 나무를 중심으로 시선을 옮기니까 아주 새롭고, 이 책을 들고 사대문 안을 걷고 싶다. 한 도시에 살면 특히 서울같은 거대 도시에 살면 행동반경이 비슷해서 늘 가는 곳만 가고 보는 것만 본다. 영화평론이나 리뷰가 관심없는 영화를 관심 속으로 가져오는 역할을 하는 기능이 있듯이, 이런 책 역시 서울을 잘 안다고 착각하는 환상을 깰 수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서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거 같은 성찰을 하게 된다. 나무를 중심으로 역사 이야기, 개발 속에서 나무가 그 자리를 지키기까지의 우여곡절 등이 담겨있다. 무엇보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의 시선이 돋보인다. 나무에 대한 깊은 애정어린 시선은 과하지 않아 거부감이 없으면서 차분히 나무 이야기를 읽고 나무 그림을 감상하게 이끈다.

나는 식물에 까막눈이라 자주 등장하는 회화나무가 읽는 내내 너무 궁금했다. 회화나무 보러 창덕궁에도 가보고. 더위가 힘을 잃어 선선한 바람에 자리를 내주면 이 책을 들고 사대문 안을 산책해봐야지, 하는 의지를 돋게 한다. 서울 다르게 보기에 안내서로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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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race (Paperback)
존 쿳시 지음 / Penguin U.S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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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덥기만 한 게 아니라 습해서 몇 걸음만 걸어도 모든 땀구멍에서 땀이 분출해서 동남아에 살고 있는 거 같다. 당면한 여러 가지 일들로 너무 정신없는 나날들이라 책과는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고 있고, 시간이 있어도 의욕없이 누워있는 시간이 너무 많고ㅜ 집중력은 가출한지 너무 오래되서 오래전부터 찜해둔 존 쿳시의 <추락>을 꽤 여러 날에 걸쳐 읽었다. 읽은 지 꽤 됐는데도 밑줄 그은 부분을 정리 안해서 찝찝하게 책을 째려보다가 오늘은 <덩케르크> 보러 가기 전에 마음 먹고 정리를 한번 해보자.

존 쿳시의 대표작으로 존 쿳시의 소설은 처음인데 꽤 흥미롭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절대로 말할 수 없으며 자신이 같은 고통을 겪은 후에야 타인의 고통을 돌아볼 수 있다는 관점이다. 사실 내러티브가 너무 극단적이라 꼭 이렇게까지 밀고 나가야하는 반감이 들기도 하지만 자극적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심리의 양가성을 실험하기 위한 장치라고 받아들이면 오히려 흥미롭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백인 대학교수, 즉 1세계 출신으로 성적 충동과 같은 본능적 욕망에 대해 꽤 당당한 입장을 이야기 처음에 밝힌다.

"One can punish a dog, it seems to me, for an offence like chewing a slipper. A dog will accept the justice of that: a beating for a chewing. But desire is another sotry. No animal will accept the justice of being punished for following its instincts."(88)

그는 자신의 수업을 듣는 여학생의 수동적 태도를 이용해서 욕망을 채운 후, 어떤 죄책감도 없다. 다만 대학이라는 제도 내에서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처벌을 논할 때 그는 교수직을 내놓는 것으로 자신을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후반부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들어간다. 원주민의 땅에서 혼자 농장을 하면서 살아가는 딸과 그 이웃들의 삶은 그가 여태까지 알았던 질서에서 벗어난다. 유기견 안락사를 시키는 벨 쇼브를 보면서 그는 인간의 양면성에 대해 생각한다. 유기된 개를 사랑으로 극진히 보살피다 입양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한 개를 죽음으로 던지는 일이 개에 대한 사랑인가 아니면 잔혹함인가?
"He assumes that people from whom cruelty is demanded in the line of duty, perople who work in slaughterhouses, for instance, grow carapaces over their souls. Habit hardens: it must be so in most cases, but it does not seem to be so in his. He does not seem to have the gift of hardeness."(140)

벨 쇼브는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하고 그 누군가가 자신이라고. 사랑과 잔혹함은 다른 얼굴이지만 한 몸이라는 것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 많은 유기견을 어떻게 할 것인가, 란 문제가 남는다. 이런 질서에 따라 살고 있는 딸의 주변에서 그는 이방인이다. 대학을 벗어나자 그는 무기력할 뿐이다.
"But there are other people to do things-the animal welfare thing, the social rehabilitation thing, even the Byron thing. He saves the honour of corpses because there is no one else stupid enough to do it. That is what he is becoming: stupid, daft, wrongheaded."(143)

이렇게 아프리카 대륙 한가운데서 자신이 알던 질서와 다른 질서에 들어와 가치관 혼동을 겪으면서 그는 바이런을 버리지도 못하고 나아가지도 못한다. 그러는 중에 딸은 원주민 청년들한테 강간을 당하고 임신을 한다. 그는 아버지로서 딸의 안전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설득하지만 딸은 원주민의 질서에 순응하겠다는 선택을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 데이비드한테 이렇게 말한다.

"David, I can't run my life according to whether or not you like what I do. Not any more. You behave as if everything I do is par of the story of your life. You are the main character, I am a minor character who doesn't make an appearance until halfway through. Well, contray to what you think, people are not divided into major and minor."(193)

결국 아버지는 딸의 삶을 망치는 게 자신의 삶을 망치는 거라는 무의식에서 기인한다. 딸은 백인사회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세계에서 독립을 하기로 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기준과 어긋날지라도. 딸이 겪은 극단적 고난을 통해 쿳시는 질서가 다른 두 세계는 옳고 그른 것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삶의 이치는 우리가 믿는 이성, 실은 학습되어 계몽된 이성 하나만으로 재단할 수 없다. 딸이 선택한 질서는 서구의 이성이 가르치지 않은 아프리카의 이성이고, 더 나아가 딸이 살아가면서 체득한 이성으로 인정해야한다.

한 지식인이 물리적 변화를 겪으면서 어떤 정신적 방랑을 하게 되는지 서늘한 문체로 쓰여있다. 단문에 거의 현재시제를 사용하는데 현재시제는 묘한 긴장감을 주고 사건에서 거리두기로 작용한다. 과거시제가 사건을 전달하고 확정하는 면이 있다는 걸 쿳시 글을 읽고 깨달음.

*바이런에 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오는데 낭만주의 시인으로서 그의 여성편력 탓도 있겠지만 아마도 시의 정서에 본능에 충실한 무언가가 있나, 하는 궁금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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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식 여성 원탑 히어로 영화다.  기존 질서, 즉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진  힘의 세계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복수하는 한 여자가 있다. 힘에는 힘이라는 논리로 맞서는 미셸.  미셸을 둘러싼 환경은 남성 중심주의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마을에서 벌인 살인과 그 순간에 희생자지만 미디어의 힘에 의해 진실은 버려지고, 단 하나의 왜곡된 이미지로 어린 미셸을 판단하는 세상. 아버지에 대한 증오, 세상에 대한 냉담한 시선으로 삶을 꾸려왔을 그녀. 이제는 게임회사 운영자다. 가상세계에서 극단적 폭력은 허용되고 남성들로 이루어진 게임 개발자들 사이에서 미셸은 결정권자 되어있다. 새로운 게임 개발에 대한 혹독한 비평으로 개발자들은 그녀한테 소극적 복수, 하지만 남자들이 흔히 하는 성희롱(혹은 추행)을 게임 캐릭터로 보복한다. 그러나 이성을 잃지않는 미셸.

그녀는 남자들이 세운 질서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배우자가 있는 남자들과 바람 피우기, 이웃집 남자를 망원경으로 훔쳐보면서 자위하기 등등. 그녀는 기존 질서라고 받아들인 것에 이런 식으로 저항한다. 셸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타인의 도움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른 여인의 연대가 전제조건으로 깔려있다. 가령 미셸의 아들이 갓난 아기일 때 아들한테 젖을 준 안나는 동료이자 절친이다. 안나의 남편과 바람을 피우고 치근덕거리는 안나의 남편을 떼어버리기 위해 안나한테 사실대로 말해버린다. 안나는 남편을 버리고 미셸과의 우정을 택한다. 보통 여자들이 하는 선택과는 다른다. 안나와 미셸의 연대는 어찌보면 동양적 정서가 녹아있기도 하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한 남자를 매개로 두 사람이 친구나 자매처럼 지내는 이야기가 한국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꽤 다뤄졌다.

이웃집 남자에 대해 미셸은 성적 충동을 갖지만 이웃집 남자가 접근하는 폭력적 방식에 대해서 미셸은 놀라지만 당황하지 않는다. 그녀의 심장은 차갑고 머리는 이성적이다. 두려운 게 없는 것처럼 보이고.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담담하고 그녀 덕분(?)에 교도소에서 자살을 한 아버지 시신 앞에서 복수극을 끝내는 한마디를 한다.

불편하기 이를데 없는 서사다. 복수에는 복수로 맞서는 냉랭하고 두려움 없는 여자의 이야기. 어제 영화를 보고 이런 느낌이었다.

2.
오늘 오전에 친구한테 전화를 받았다. 유통회사에 다니는 친구는 단순한 실수로 고객과 문제가 있었고 슈퍼 갑인 고객 중심으로 일을 처리하겠다고 결정한 회사 전화를 받았다. 회사는 갑이고 직원인 친구는 슈퍼 을이다. 고객>회사>직원이라는 구조적 힘을 가진 조직이다. 친구는 억울해서 상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슈퍼갑과 갑은 을의 상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 비상식적 슈퍼갑과 갑은 을의 상식을 이기고 나도 조직에 맞설 수 없으니 그냥 받아들이라고 했다. 억울하더라도 살아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게 과연 옳은가? 을의 복종이 계속되는한 갑질은 영원할 것이다.

3.
그래서 어제는 불편했던 <엘르>의 미셸의 살아가는 방식이 오늘은 그럴듯해보인다. 제도란 개인의 저항으로 바꾸기에 너무 힘드니까 폭력에는 폭력으로라는 세계관을, 영화 속에서라도 이뤄봐야하는 거 아닌가. 만약 미셸이 경찰에 신고하고 제도권의 도움으로 일을 처리하려면 그녀 역시 제도권 내에 속하는 힘이 있어야하는 게 아닌가. 결국 시스템의 힘을 깰 수 있는 건 개인의 방법이라고 여자 원탑 히어로 영화들이 말하고 있다. 사실 이러면 공동 자멸인데....

4.
이자벨 위페르는 따뜻한 연기보다는 차가운 역할이 참 잘 어울린다. 실제는 어떤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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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하고 10분동안 어마무시한 살상이 벌어진다. 카메라가 이동하면서 프레임 안에는 백 여명 정도되는 조폭이 숨소리와 화면 자락에 보이는 칼에의해 청소(?)된다. 건물의 좁은 통로는 피가 튀기고. 칼을 맞은 사람은 피를 뿜어댄다. 마치 격투기 게임같은 장면이 이어진다. 눈을 질끈 감고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폭력 그자체로 쾌감을 줄 수 있으니 이런 장면을 만들었겠지ㅜ 왜 이런 장면을 오프닝에 배치했는지가 <악녀>의 줄거리다.

제목은 캐릭터에 어울리지 않는다. 숙희란 여자가 킬러로 살아가는데 자신의 의지나 주관은 몰살당하는 비운의 여자의 일생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킬러로 다시 태어났지만 원수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 조직에 철저히 이용당하고 국정원에 잡혀서 다시 태어나 딸을 지키기 위해 원치않는 킬러로 살아간다. 숙희는 철저하게 모든 사람한테 착취당하는 인물이다. 이런 구시대적 인고하는 여인상에 대한 착취를 액션과 시간을 재구성하는 편집 기술로 가렸다.

여자 원탑 히어로 영화가 계속 나오는데 여자한테 이쁜거는 당연하고(군살없는 몸매에 자신보다 두배는 등치 큰 남자들과 대결해도 일당 백을 할 수 있도록 단련해서 장애물을 제거하고 문제 해결까지 하라고 강요하는 거 같아 피로감이 몰려온다.

숙희가 국정원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으면서 여자동료들이 숙희를 희롱하는 말이 있다. 반반하게 생겼다, 원판이 이쁘겠지...등등. 국정원 남자직원들은 모니터를 숙희를 감시하면서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다. 사람을 죽이고 피칠갑하는 장면만큼 불쾌한 장면들로 가득차있다.  몹시 찝찝한 영화다.

이 영화를 본 이유는 균신 때문인데 비열한 캐릭터고 의외로 조연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을버스 안에서 숙희와의 액션신을 보면서 난 왤케 안스러운 마음이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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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스트 인 파리>보고 독특한 코미디를 부부가 만드는데 급흥미가 있어 찾아봤다. 남편 아벨은 벨기에인이고 아내 피오나는 호주에서 태어난 캐나다인. 아, 그런데 이런 코미디라니...세상에 이 보다 더 나쁠 순 없다, 가 이 영화의 주제가 되겠다. 원래 도미니크 아벨은 코미디언이라고 한다. 마임적 개그를 해서 손짓, 몸짓, 표정을 보고 있으면 독특한 아우라가 있다. 유투브에 <로스트 인 파리>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를 위해 CGV에 온 동영상이 올라와있다. 영상 처음에 말했듯이, 이들의 유머는 불행한 상황에서 나온다. 불행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면 웃음을 만들 수 있다고 하는데 <룸바>는 정말 웃어도 될까, 하는 죄책감이 들게 하는 영화다.

2. 라틴 춤 경연대회에 갔다 오다가 자살을 결심한 한 남자가 차에 치려고 길에 서 있는다. 그를 피하기 위해 핸들을 꺽었다가 두 사람은 사고가 난다. 남편 돔은 기억상실에 걸리고 피오나는 한쪽 다리를 잃는다. 두 사람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피오나는 병원에서 퇴원 후 목발을 짚고 학생들 앞에 선다. 불편한 다리로 아이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서서 자리에 앉기 까지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슬랩스틱으로 이어지는데 과연 웃어야할지...아이들은 물론 웃지않는다. 이 영화가 그래서 굉장히 독특하다. 불행을 희화해서 그런지 웃긴데 웃지 않는...그후 누군가가 나무로 된 의족을 보내오고 피오나는 목발을 버리고 나무 의족을 쓰는데 캠프파이어하다가 의족에 불이 붙고 접을 수 없는 의족을 이리저리 옮기다 집이 홀랑 다 타버린다. 재만 남은 집터에서 밤을 보내는데 폭우가 쏟아지고, 다음날 빵을 사러간 돔은 기억상실증이라 빵을 탐내는 사람한테 폭행을 당하고...피오나는 남편이 죽은 줄 알다가 일년 후 재회하는 이야기다. 밝은 화면과 생략하는 영화 언어를 써서 그렇지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거 아닌가.

3. 한국독립영화가 많이 다룬 주제이기도 한데 영화 표현방식에 너무너무 놀라게 된다. 두 배우의 외모에서 풍기는 절대적인 분위기도 한 몫하지만 이들의 연출력은 독특하다. 생략과 비약을 많이 사용한다. 가령 교통사고 장면에서 죽음을 결심한 남자의 비관하는 상반신을 카메라는 담고, 사운드로 차 다른 곳에 부딪친 걸 처리한다. 남자의 프레임 안으로 사고를 알리는 자동차 연기만이 들어온다. 집이 완전 재로 변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불이 여기저기 붙어서 허둥지둥 끄려고 하는 모습을 담고 그 다음 장면에서 날이 밝고 모두 재로 변한 것 위에 두 사람이 앉아있는 모습이다. 스펙터클 없이도 슬픔을 전달해서 웃지 못하게 하는 연출법이다.

4.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안 놓는 게 다르덴 형제와 일맥상통하는 벨기에 감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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