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구두
헤닝 만켈 지음, 전은경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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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블로그에서 보고 읽기 시작했는데 폭염을 조금 누그러뜨릴 서늘한 문문장들이 들어있다. 책임을 지기 두려워하는 한 남자는 계속 도망을 친다.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말도 없이 사라지고, 직업적 실수로 멀쩡한 팔을 절단하는 의료사고를 내고는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무인도로 도망쳐 12년 동안 살아간다. 그리고는 무인도에서 무의미한 일기라고 할 수 없는 일지를 쓴다. "나는 감각을 상실한 어떤 삶에 대한 연대기를 쓴다."(21)

살아가는 건 기쁨만이 아니라 고통, 슬픔 등을 느끼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즐거움과 쾌락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것같지만 고독만큼 공허한 삶으로 채워질지 모른다. 남자는 자신의 고립된 고독 속에서 살아있다는 걸 느끼기 위해 얼음 구멍을 만들어놓고 매일 얼음 속에 들어간다. 차가운 물이 살에 닿을 때 살아있는 걸 느끼는 남자. 감각을 상실한 남자가 감각을 찾는 물리적 방법이기도 하다. 세상에 등지고 기록할 것 없는 삶을 살아가는 남자의 삶은 외롭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부족하다. 무중력 상태 자체가 엄청난 고통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남자는 그걸 부인한 채 살아가기로 결심했지만 서서히 과거에 만든 끈이 어느날 그의 섬에 찾아온다.

사랑했던 여인 하리에트가 암에 걸려 곧 세상과 작별을 하기 전에 그에게 묻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온다. 왜 말도 없이 떠났는지...사랑했던 이의 출현으로 그가 세상과 단절을 조금씩 깨기 시작한다. 사랑은 누군가의 삶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을 원래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수정하는 일을 해낸다. 그래서 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는 건가? 내가 가던 길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길로 함께 가야하니까.

아무튼 하리에트의 출현은 남자의 삶에서 분기점이 된다. 둘 사이에 생긴 딸의 존재도 알게 되고, 흔한 가족의 형태는 아니지만 세상에 홀홀단신이었다가 갑지가 가족이 생겼다. 그리고 이웃들을 만나게 되고, 젊은 시절 자신의 엄청난 실수를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잘 못 수술한 장래가 유망했던 수영선수를 만나서 그녀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렀는지 보게 된다. 단순히 미안하다는 말로는 해결될 수 없는 과거를 마주하면서 남자는 이웃들도 만나게 된다. 고립된 세계에서 나와 한걸음씩 세상으로 내딛는다. 그러면서 얼음 목욕을 하는 횟수가 줄어든다.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얼음 목욕이 주는 강렬함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그것이 내가 내용이 없는 일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매일 기억나게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공허한 삶을 확인하기 위해 황여새에 대해 썼다."(244)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감정을 그리워했다.
"내가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감정,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잠깐이나마 외로움이 사라졌다."(91)

오랫동안 소설을 안 읽었는데 요즘 소설들을 읽고 있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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