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입장을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게 과연 가능한가? 표면적으로 이해나 공감은 가능한 것 처럼 보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의 슬픔, 더구나 그게 사고였다면 어떨까. 영화는 아주 기이한데 아름답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영화를 처음 접한 건 <더 랍스터>를 통해서다. <더 랍스터>역시 아주 특이한 영화였다. 스타일도, 영화를 전개하는 방식도. <킬링 디어>는 판타지가 현실에 결합되어 어디까지가 판타지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지점까지 극을 밀어붙인다. 문득 그런 이런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초현실은 어쩌면 사실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가령, 내 경우를 보자.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염이 심해진다. 밤에 잠을 못 잘 정도로 아플 때도 있다. 지난 몇 달간 윗배를 칼로 베는 듯한 통증에 시달렸다. 12월에 위내시경을 했기에 다시 하는 걸 참았다. 수면 마취 부작용 때문에 망설이면서 내 위염에 대해 스스로 스트레스일거야, 라고 최면을 걸면서도 혹시 위염이 아니면 어쩌지, 하는 불안에 떨었다. 몇 달을 이런 상태로 지내다가 이번 달에 스트레스 요인이 사라졌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위염 증상이 사라졌다. 물론 나는 만성위염이어서 언제든 증상이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영화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왜 내 위염 이야기를 하냐면, 이 영화가 바로 이런 심리적 스트레스 증상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조건을 가진 한 외과의사가 있다. 병원에서도, 집에서도. 흠 없는 예쁜 아내, 아들, 딸. 식탁에서 벌어지는 풍경에서 어린 아들의 긴머리가 남자는 마음에 안 들지만 결코 강압적으로 자르라고 하지 않는 인품의 소유자이다. 파티에서도 술 한 모금 안 마시고 적절히 사람들과 어울리다 일찍 귀가한다. 집안의 분위기 역시 살균처리 된 것처럼 정돈되고 깔끔하다. 그런데 한 십대 소년과 주기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적 이야기를 나눈다. 남자한테 소년은 친구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지만 물리적 나이와 지위를 떠나 대등한 힘이 느껴진다. 이 대등한 힘의 근원을 찾아나가는 여정이 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남자는 수술하다 자신의 실수로, 하지만 인정하지 않는 소년의 아버지를 죽였다. 남자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수술은 문제없다고 말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지만 무의식까지 속일 수는 없다. 그는 안다. 자신의 실수라는 것을. 소년도 알고. 두 사람의 힘의 역학 관계는 여기서 나오고 소년은 아버지를 잃은 대신 남편이 없는 엄마의 남편을 구해주기로 한다. 엄마가 남자를 좋아하니까. 소년은 아빠로 그를 받아들일 적극적 의지보다는 남자에게 엄마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함으로써 남자에게 벌을 준다. 남자는 완벽한 가정이 있을 뿐 아니라 소년의 엄마는 자신의 실수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니까. 이 사건을 계기로 남자는 소년을 멀리하고 소년을 멀리하자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남자의 어린 아들, 십대 딸의 다리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남자가 속죄하지 않으면 그를 제외한 가족이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받는다. 잘못은 남자가 했는데 왜 벌은 가족이 받나...바로 고통이 벌이다. 남자가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을 때, 무너지는 고통을 소년은 원했다.
사실, 영화 속에서 소년은 그 어떤 초능력도 쓰지 않았다. 그저 저주의 말을 했을 뿐이고, 남자는 처음에는 현대 의학을 동원해서 그 저주를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하고 남자와 남자의 아내는 점점 그 저주를 믿게 되고 결국 가족 중 한 사람을 희생하기도 결정한다. 소년의 바람대로. 남자는 결국 자신의 죗값을 치렀고, 완벽한 가족에 구멍이 났으며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게 어떤 고통인지 알게 되었다. 영화 내내 카메라는 남자를 지켜보는 것같은 각도로 남자를 따라다닌다. 그래서 마치 어떤 전능한 힘이 스크린 밖에서 소년과 공모해서 남자의 숨을 옥죄는 것 같은 효과를 주고, 지켜보면서 침을 꿀꺽 삼키게 된다. 으스스한 분위기를 이렇게도 전달할 수 있는 것에 놀라면서 정돈되고 깔끔한 병원 병실, 집안이 아주 공포스럽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