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녜스 바르다 감독이 제이알을 만났다. 제이알은 보통 사람의 사진을 찍어서 크게 인화해서 그 사진을 어디든 붙이는 아티스트이다. 그의 작업 과정을 바르다 감독 특유의 발랄한 시선으로 카메라에 담은 다큐멘터리인데 묘하게 극영화같기도 하다. 올해 한국 나이로 89세인 바르다 감독과 삼십대 후반인 제이알의 케미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바르다의 불만은 이렇다. 늘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제이알에게 눈을 볼 수가 없어 둘 사이에 거리감이 있는거 같다고. 하지만 제이알은 바르다의 지적과 불평에도 자신의 습관을 버릴 의지가 전혀 없다. 두 사람이 사소한 걸로 티격태겨하는 걸 지켜보는 게, 스크린 밖에 앉아있는 내게 묘하게 따뜻함을 전해주었다. 무엇보다 내가 바르다 감독을 애정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2.
요즘은 영화를 많이 보지도 않지만 전만큼 재미없게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은 이걸 기록해두려고 열흘 전에 본 영화 이야기를 한다. 이유는? 마음에 와 닿은 이웃의 글을 하나 읽고 이 이웃님을 어찌 알게 되었지 추적(?)하다가 첫번째 포스팅을 보았다. 내 청춘기를 함께 보냈던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의 OST 영상이었다. 영상을 보면서 청킹 익스프레스가 떠올랐다. 지난 달 홍콩에 갔을 때, 청킹 맨션 주변을 10번은 족히 지나쳤다. 예전 같으면 영화 속 장소에 대한 흥분과 감흥이 가득했을텐데...청킹 맨션은 그저 한국인들에게 위험하다는 소문이 난 건물로 인식되었다. 이런 인식의 변화는 영화는, 지금 이 순간, 더 이상 내게 하나의 인생 텍스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책보다도 어쩌면 더 영화를 내 인생의 텍스트로 삼았었는데.(그리고 지금은 아닐지라도 앞으로 다시 내 인생의 거대한 텍스트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현재 내 인생의 텍스트는 뭘까. 사람이다.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는데 작년부터 사람만이 의지할 대상같은 강한 끌림이 있다. 올해는 그 생각이 더 심해서 괴롭고. 사람의 마음은 내 마음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느끼는대로 해석하는 게 힘들다. 영화나 책은 일방적 수용과 비판이 가능한데 사람이란 텍스트는 상호작용이란 중요한 요소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빨리 예전의 나로 돌아왔으면 좋겠지만 그게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3.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바르다 감독과 제이알이 만나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누군가의 엄마고, 노동자이고, 농부이기도 하고. 헛간에, 마을 입구 건물 벽에, 자신이 일하는 공장의 큰 물탱크에 크게 붙은 자신의 사진을 보는 일은 익숙한 나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객관적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이다. 출연자 모두 낯설어하면서도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경험에 모두 미소를 짓는다. 외벽에 걸린 사진은 비바람에 씻겨 곧 사라지겠지만 사라질 때까지 그들은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시간을 선사받는다. 개인의 인생은 개인이 주인공인데 우리는 이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사진 속 주인공들이 낯선 경험에 대한 감정을 말할 때, 어색해하면서 낯선 기분이 좋은 걸 바라보면서 일상에서 소소한 이벤트는 꼭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1.
내 관심이 영화, 즉 허구에서 빠져나와 진짜 내 삶에 있는 건, 훗날 돌이켜볼 때,  긍정적일 수 있다. 나는 지금 내 주변을 텍스트로 그동안 지켜봐왔던 허구와 현실의 간극을 체험하고 그 간극을 메꾸려는 중인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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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식 SF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고등학교 기술 선생님인 지킬 여사는 아이들의 놀림거리였는데 어느 날, 번개를 맞고 몸에 초고압 전류가 흐르는 초능력을 지니게 되고 무기력한 성격을 떨치고 능동적으로 변해서 카리스마를 갖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헐리우드 영화라면 초능력으로 자신을 괴롭혔던 이들을 쓸어버리고, 나아가 거시적으로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영웅으로 대접받는 줄거리로 흘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프랑스 영화이다. 지킬 여사가 갖게 된 초능력은, 자신을 위해서 사용한다. 늘 반 친구들의 무시를 받는 말릭이란 학생에게 몹시 감정을 이입한 지킬 여사는, 말릭을 친구들 무리에 섞이도록 선택해서 교육을 시킨다. 다리가 불편한 말릭을 또래들은 배척하지만 말릭은 또래의 막말을 듣고, 지킬 여사한테 막말을 한다. 지킬 여사의 분노는 초능력을 통해 발현한다. 정의가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 대한 억압에 대한 일종의 복수를 위해 초능력이 발휘된다. 너무나 인간적인 초능력 사용이다.

2. 이타심은 이기심에 기반을 두기에 전적인 이타심은 가식일 뿐이다. 누군가를 도움으로써 칭찬을 받는다면 결국 그 칭찬을 얻고 자존감 회복을 위한 행동일 뿐이다. 진화생물학에서 이타심을 진화의 요소로 꼽는 이론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영화는 초능력자를 영웅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초능력을 둘러싼 주변의 시선을 다룬다. 가장 가까운 남편, 이웃은 낯설어 하고, 좌절한다. 그녀의 초능력을 모르는 교육제도는 갑작스럽게 눈에 띄는 능력에 찬사를 보낸다. 지킬 여사 본인은 정작 하이드적 능력에 대해 마냥 기뻐하지만은 않는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 확보를 위해 적절히 사용하고,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과도하게 사용한다. 약자에 대한 약자의 비웃음에는 가차없는 분노를 표현한다.

3. 지킬 여사는 자신의 초능력 남용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느낀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상호작용에 대한 짧지 않은 역설이다. 상호작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걸 말한다. 예를 들면, 한 개체의 성장에 유전자와 환경의 함수관계는 독립적으로 계산될 수 없고, 가설만이 가능하다. 하지만 힘에 미치는 전기와 중력의 관계는 상호적이지 않다. 둘 사이의 관계는 그 어떤 함수관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의 초능력은 그녀의 분노 혹은 약자 위치와 상호작용해서 남용이 일어났다. 분노가 없었다면 초능력과 지킬 여사는 전기와 중력의 관계와 같았을 지도 모른다.

4. 인간사에서 모든 상황에서 각각의 요소는 상호작용적일지도 모른다. 특히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내가 기분이 저조한 건 상황 탓이기도 하고, 상황 탓에 기분이 저조할 수도 있다. 기분과 상황은 독립된 요소가 아니다. 기분과 상황은 유전자와 환경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5. 영화를 보면서 사실 딴 생각을 엄청했다. 영화 내내 괴로웠고, 영화가 끝나고도 강도는 좀 약해졌지만 괴로웠다. 요즘은 어둠 속에서 스크린에 집중하고 있으면 잊고 있던 생각들이 머릿속을 나와 상영시간 내내 괴롭힌다. 이 증상을 없애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는데 효과는 썩 좋진 않다. 잠재의식에 매복해 있는 상념들이 어둠 속에서 나와 춤을 추는데 무기력해져서 이리저리 움직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또 세우는 나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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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 영화를 아주 안 보는 건 아닌데 어쩌구 저쩌구 감상을 남기는 게 좀 힘들다. 모든 게 습관인데. 기억력은 하루하루 희미해져 간다. 수요일에는 <트립 투 이탈리아>를 예매했는데 예매한 사실조차 잊었다. 갑자기 처리할 일이 생겨서 보러갈 시간이 안 났고, 예매한 사실 조차 잊어서 예매 취소도 못했다. 이런 내 기억력이 화요일에 본 영화에 대해 뭘 기억할까, 싶지만-.-; 내 기억 속에 이 영화는  모든 감정은 진실이라는 명제를 믿는 남자와 모든 감정은 허구며 놀이라는 남자의 맞짱 뜨기로 남아있다. 상당히 흥미롭다.

2. 먼저 사람과 사람은 어떻게 만나는가? 영화가 시작하면 우리는 불안한 카메라의 움직임이 누군가가 힘겹게 짐을 옮기는 뒷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한쪽 어깨에 짐이 있어서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채 걷는 이의 뒷모습을 따라가면 정돈 어수선한 거리를 본다. 건물 정면에서는 가게 오픈 행사에서 흔히 보는 행사 모델들이 마이크를 들고, 거리 풍경에서 도르라진 액센트를 만든다. 관객은 짐 나르는 이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행사 모델은 그의 주머니에 쪽지를 넣는다. 궁금증이 증폭되는데 곧 밝혀진다. 두 사람은 종수와 해미, 초등학교 동창이다. 해미는 종수를 한번에 알아봤고,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을 떠났다가 만난 벤을 종수에게 소개한다. 언뜻보면 줄거리는 러브 트라이앵글처럼 보이지만 그러기에는 벤이 종수에게 갖는 관심과 종수가 벤에게 갖는 호기심의 뿌리가 깊다. 우리는 그 뿌리를 추적하게 되고, 두 사람의 심리전이 스릴러란 장르를 만들어낸다.

3. 해미는 팬토마임을 배운다. 귤을 먹는 걸 표한할 때 귤이 있다고 상상하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걸 잊는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 진짜 입에서 침이 고이고 맛있다고. 벤은 종수와 해미를 집에 식사초대를 하고, 파스타를 만들면서 요리는 요리하는 사람 마음대로 만들 수 있고, 자신이 먹으니 요리는 곧 자신의 제물이 된다는 말을 한다. 세 사람은 무척 다른 환경과 성격을 지닌 거 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무척 닮아있기도 하다. 해미가 하는 말을 종수는 모두 믿고, 해미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벤은 타인의 감정만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도 잘 느끼지 못하고, 모든 감정은 놀이일 뿐이라고 말한다. 대마초를 피우고 웃는 건 진짜 웃음이 아닌 것처럼.

4. 종수는 자신과 너무 다른 사회적 계급의 벤에게 끌리면서도 경계를 품는다. 경계심은 처음에는 해미를 향해 솟아나는 사랑 때문이었지만 나중에 해미는 벤과 종수를 이어주는 메타포일 뿐이었다. 사회, 경제적 계급 분류에서 다른 사다리에 있는 벤과 종수는 심리적, 무의식 계급 분류에서는 소시오패스라는 칸을 차지할 수도 있겠다. 내가 이런 결론을 내린데는 사실 아무런 근거가 없다.

아무런 근거가 없게 연출한 이창동 감독의 연출 덕분이다. 모든 미장센은 단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단서란 게 심증과 결합되어서 확증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나는 어느새 종수를 따라가고 있었다. 종수가 벤을 소시오패스라고 내심 단정하고 정황을 파악하고 물증을 찾아내려고 하고 미행을 한다. 종수가 이리저리 뛰어다는 걸 보면서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벤에게 들킬까봐. 사실 벤이 뭘 하고 있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그러면서 종수가 왜 벤에게 집착하는지, 종수의 정신적 균열이 서서히, 그리고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고집세고 폭력적인 아버지는 폭행으로 재판을 받는 중이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아버지의 폭행에 집을 나간 어머니, 그리고는 이십 여년 만에 만난 어머니가 돈이 필요하다는 말. 종수는 소설을 쓰는데 해미가 팬토마임을 배우고, 벤이 요리를 하고 이따금 같은 부류의 친구들과 지루한 파티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 수 있다. 모두 현실부정을 위한 자신만의 도피법이다.


5. 영화 내내 사건은 사건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고, 인물들의 행동과 그 행동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시선이 있는데 마지막 하나의 큰 사건을 위해 모두 수렴된다. 종수의 계획은 반은 계획적이고 반은 무의식적이다. 무의식이 수면으로 올라와 의식 속에 있는 계획과 만나면서 영화 내내 만들었던 긴장이 한꺼번에 폭발한다. 쾅! 올해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영화가 될 거 같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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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케이트 윈슬렛이 주연인 영화고 주변인의 고통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중산층 주부들이 낮에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며 잡담하는 데서 시작한다. 주부의 일상적 모습은 문화를 초월해서 대동소이하다. 양육이란 이름 아래 집단이기주의로 뭉친 계급 속에 자아의 상실을 혼란스러워하는 새라(케이트 윈슬렛)가 있다. 새라의 혼란과 권태, 그리고 놀이터에 아이를 데리고 등장하는 남자, 브래드(패트릭 윌슨). 두 사람의 만남은 아이들을 통해서이다. 그네를 밀어주는 엄마와 아빠. 통념데로라면, 아빠라면 직장에 있어야 할 시간에 아들의 그네를 밀어주는 남자라니. 엄마들 무리에서 심한 권태를 느끼는 새라는 이 '아빠'의 등장에 가장 민첩하고 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 그랬듯이.

두 사람은 예상대로 불륜 관계에 빠진다. 영화가 두 사람의 불륜만을 묘사했다면 언급할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불륜에 빠지는 이유를 몹시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짐작하겠지만 배우자가 성공 지향적이라 자신의 삶에 그닥 관심이 없다. 객관적으로는 훌륭한(?) 배우자이지만 훌륭하다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이다. 훌륭한 배우자를 둔 사람들은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깊은 우울의 샘에 빠진다. 그 우울의 샘에서 걸어나올 수 있는 원천은 같은 처지의 사람이고. 나는 나와 달라도 좀 어울려야 한다는 입장인데 내가 몹시 애정하는 후배는 나와 달리 아주 단호히 유유상종을 신봉한다. 사람은 나이들어서 맟추는 게 아니라 맞는 사람끼리 어울리는 게 맞다고 늘 말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 후배의 말은 꽤 유효하다.

이 영화에서도 새라와 브래드는 같은 처지고, 같은 육체적 욕망을 지니고(배우자와 섹스를 안 해서 성적 불만족이 절정이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가정을 깰 수 없다는 도덕관을 지녔다. 바람을 피우는데 한 사람이 사생결단으로 덤비면 호러가 되는데 두 사람은 아주 찰떡 궁합이다.

이 커플 이외에 주변인이 등장한다. 전직 경찰이지만 아마도 사람이 죽는 폭력 사건에 연루되서 트라우마를 간직한 남자, 그리고 소아성욕자인 변태가 등장한다. 두 사람의 결핍은 서로에 대한 분노와 그 다음에 이루어지는 폭력으로 표현이 된다. 새라와 브래드가 결핍에 대한 해결책으로 불륜을 선택한 반면에 변태와  전직 경찰은 폭력으로만 나타난다.

인간에게 결핍은 행동을 추진하는 힘인 동시에 이상 심리를 만드는 동력이기도 하다. 새라와 브래드가 서로 바람을 필 수 있는 이유도 결핍이고, 변태성욕자가 변태성을 드러내고, 전직 경찰이 변태성욕자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는 이유도 결핍이다. 결핍이 박탈로 작용해서 부정적 결과를 생산할 때와 라깡의 이론대로 생산적으로 작용할 때의 경계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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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 거윅이 주연한 <프란시스 하>를 아주 재미있게 봤었다. <프란시스 하>는 어떻게 살아야할지 우왕좌왕하는 비혼으로 살 것만 같은 여자의 이야기이다. 사랑도 중요하고 우정도 중요하지만 프란시스 하는 사랑보다는 우정에 더 무게를 두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배우가 되고 싶지만 막연한 미래를 두고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야기인데 그레타 거윅의 아우라가 영화에서 돋보인다. 그 그레타 거윅이 감독을 한 영화 <레이디 버드>.

17살의 소녀가 부모가 지어준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을 거부하고 직접 '레이디 버드'라고 이름을 짓고 레이디 버드라고 불리기를 원한다. 개성도 강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여과없이 생각을 바로 입으로 쏟아내는 열일곱. 무서울 거 없는 십대고, 이런 십대 소녀를 둘러싼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학교에서 우정, 그리고 막 피어나기 시작한 이성에 대한 관심과 이성의 육체, 그리고 애증의 관계에 있는 가족. 레이디 버드는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관계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한다.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는 절친과 소원해지고 마음 속 깊이 사랑하지만 늘 미움으로 대화를 시작하고 끝내는 엄마, 칭찬을 하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지 서로 헐뜯기만 하는 오빠.

레이디 버드의 일상은 아마도 평범하게 펼쳐지지만 사건을 만드는 건 레이디 버드 자신. 강한 성격으로 모든 사람과 부딪치고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공격적으로 대응하고...사실 이런 일은 몹시 현실적이다. 레이디 버드의 꿈은 고향, 새크라멘토를 떠나 동부로 가는 것. 우여곡절 끝에 꿈대로 뉴욕에 있는 대학에 진학을 하면서 레이디 버드의 꿈은 실현된다.

낮선 도시에서 아마도 신입생 환영회(?) 쯤 되는 모임에서 혼수상태에 빠질 정도로 술을 마신다. 응급실에 실려가는 소동이 있고, 다음 날 레이디 버드는 다시 태어난다. 크리스틴이란 부모님이 준 이름으로. 카톨릭 고등학교를 나와 카톨릭에는 얼씬도 안 하겠다는 다짐과는 반대로 일요일 생경한 도시에서 성당에 찾아가 미사를 보며 자신의 뿌리를 강하게 느낀다. 무의식은 이렇게 의식을 지배한다. 벗어나려고 했던 그 모든 애증의 대상은 어느새 성인이 된 소녀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고, 소녀는 어떤 삶을 살게 될 지 모르지만 아마도 가족, 우정, 사랑이 분리되고 선명한 것이 아니라 서로 혼재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어젯밤 엄마랑 커다란 말다툼을 했고, 엄마는 내게 자신은 말로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이라는 걸 명심하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나와 엄마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점이 서로 닮았다. 나는 말의 폭력성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하게 굴면서 정작 나는 다른 이들에게 자꾸 폭력적인 말을 해서 기분이 몹시 안 좋은 요즘이다. 마음 속에 화의 불길이 치솟을 때, 한 템포만 입을 다물어야지 다짐하는데 쉽지 않다. 요즘 내 최대 고민이다. 내 마음에 안 들면 안 든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이 공격성을 좀 누르고 완곡하게 말해야할텐데. 열입곱도 아니거늘 뭐 때문에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졌을까. 레이디 버드를 보면서 어제 엄마와 싸운 찝찝함이 내내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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