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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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제목이 낯간지러운데 원제는 "단 하나의 이야기the only story"이다. 한국어 번역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연애가 아니라 기억에 관한 소설이다. 누구에게나 사랑에 관한 또는 연애에 관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본문 중에 나온다. 사랑에 대한 기억은 전적으로 기억을 하는 사람의 것이다.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의 요구에 따라 정리되고 길러진다. (...) 기억은 무엇이 되었든 그 기억을 갖고 사는 사람이 계속 살아가도록 돕는 데 가장 유용한 것을 우선시하는 듯하다."(39)

사랑의 기억은 왜곡되고, 기억하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재구성된다. 반스의 이야기 구조 역시, 퍼즐 조각처럼 비 연대기 순으로 펼쳐진다. 19세의 청년과 두 딸이 있는 사십 대 중년 여자, 수전의 10여 년에 걸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청년의 일인칭 관점에서 이야기가 서술되는데 사십 대에 아들 뻘 남자와 바람이 난 수전의 관점은 배제되어 있어서 청년의 눈을 통해서만 수전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중산층 부부 사이에 일어나는 교묘한 가정폭력 속에서 수전은 청년을 도피처로 삼았다. 결혼 생활의 무게와 연애의 가볍지만 진짜 기쁨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한 수전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집을 나와서 대학생인 청년과 함께 살면서 수전은 늙어가고, 청년은 어른이 되어 간다. 청년이 어른 세계에 들어가면서 수전만 늙어가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의 관계도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 수전은 알코올 중독이 되어 서서히 파괴되어가고, 그런 수전을 바라보는 청년은 찾아오는 무기력에 자기방어를 하게 된다. 두 사람의 사랑은 후반으로 갈수록 바싹 말라서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질 거 같다. 쾌락과 열정을 동반한 사랑의 그림자에는 의무감이 남는다. 한때 사랑했던 흔적은 지울 수 없어서 청년은 더 이상 수전을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그녀 곁에 머문다.

2장에서는 청년의 관점을 "너"라는 2인칭 시점을 사용한다.
"그녀의 웃음을 터뜨리는 불경한 태도 밑에, 공포와 혼란이 얼마나 깔려 있는 것인지 네가 깨닫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네가 그대로, 흔들림 없이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너는 이 역할을 기꺼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떠맡았다. 보증인이 되니 어른이 된 느낌이 든다. 물론 이것은 네가 이십 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네 세대의 다른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누리던 것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269)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수전에 대한 연민이 점점 커진다. 수전이 선택한 사랑의 상처를 견디지 못하는 건 청년이 아니라 수전이다. 두 딸과 남편을 버리고 아들 같은 남자와 달아나기로 결정한 수전의 상황은 다뤄지지 않는다. 단순한 열정이나 치기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라는걸, 청년의 기억을 통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바라보는 의혹이 담긴 사회적 시선도 견뎌야 했다. 그녀는 가정에 남아있어도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수전의 고통스러운 일대기로 읽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그게 단 하나의 진짜 질문이다,라고 나는, 결국 생각한다."(13)

2. 나이가 들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걸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다. <연애의 기억>은 두 연인의 아픈 사랑에 대한 픽션이지만 단지 소설적 이야기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현실이 때로는 더 허구 같을 때가 많아서 지구 어딘가에 이런 커플이 존재할 것만 같다. 소설은 어떤 면에서는 아주 유해하다. 사람이 감정대로 사는 게 옳다고 부추기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감정을 억누르고, 이성의 지배대로 사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되는 부작용이 있다. 모두 감정대로 산다면 세상은 혼돈 그 자체일 테니 감정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존경을 보내는 게, 이번 생에서 내 역할이라고 믿고 싶다.

3. 정영목 번역인데 상당히 문장이 거칠다. 원문이 그런가? 아무튼 무지 가독성이 떨어져서 어떤 문장은 읽고 또 읽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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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때 극장에서는 <체실 비치에서> 한 편 밖에 못 봤다. 극장에 가는 일도 체력을 몹시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라니..대신 집에서 누워서 <4월 이야기>, <사과>를 봤다. 책 좀 봐야지 했던 연휴는 수다로 점철되고, 매일 몇 시간씩 수다를 떨다보니 체력은 한없이 방전되고, 내 체력 방전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연휴는 끝이 났다. 친구들을 많이 만나기는 했는데 몹시 허무한 연휴라고 할 수 있겠다.

<체실 비치에서>는 이언 매큐언의 소설이 원작이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은 안 읽어봤는데 영화 <어톤먼트>도 그렇고, 감정 전달력이 약하다. 남녀가 서로 만나서 끌리는데 별 이유가 없고, 헤어지는데도, 어쩌면 별 이유가 없을 수 있다. 나는 아는 상대방의 단점을, 정작 상대는 단점으로 보지 않을 뿐 아니라 인지조차 못할 때가 많다. 체실 비치에서 사랑하는 젊은 남녀가 결혼식을 올리고 체실 비치로 신혼여행을 간 첫날 헤어진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

여자의 집안은 아버지가 회사를 운영하는 신흥 중산층에 속하고, 남자의 집안은 그림에 미쳐있고, 자연과 교감하겠다고 나체로 집마당을 돌아다니는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의 존재는 어머니이므로 남자와 뗄 수 없는 관계였으나 여자를 만나면서 어머니와 남자는 동일체라는 강박을 벗어날 수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주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포용한다. 어색한 분위기마저도 마법처럼 친화력을 발휘한다. 남자의 집을 찾아 기차역에서 숲을 통해 걷는 기나긴 길도 조금만 가면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한다. 남자 역시 역사학을 전공했지만 여자의 아버지 회사에서 맞지 않은 일을 하기로 한다. 여자를 위해서. 서로의 미래를 서로를 위해 희생하려는 굳건한 믿음이 있던 커플이 아름다운 체실 비치에서 헤어지고 만다. 남녀의 사랑이라는 건 얇은 유리같아서 언제든 쉽게 깨질 수 있는 걸 보여준다.

그 이유는 첫날밤, 여자가 섹스에 대한 혐오감을 참지 못해서고 남자는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남자는 분노로 심장이 터질듯해서 말도 안 되는 여자의 제안에 더욱더 화를 낸다. 아름다운 비치에서...싸우는 장면마저 아름답게 담긴 화면, 영화 내내 흐르는 바흐의 파르티타 곡.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너무 젊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원래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이해 못하도록 태어난 종인가...아무튼 이 아름다운 커플이 깨지는 이야기인데 이언 매큐언 소설도 안 읽고, 영화도 두 편 밖에 안 봐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형식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울림이 별로 없다. 플래시백으로 두 사람의 가정 환경과 학교에서 성격 등이 드러나는 방법도 구태의연해서 좀 답답하고.

특히 결말은 더더욱 마음에 안 든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여자는 첼리스트랑 결혼해서 자식과 손주들까지 낳고 바이올리니스트로 연주를 하는데 그곳에서 남자는 회환의 눈물을 흘린다. 청년과 장년의 시간을 압축해서 넣은 장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 오랜 시간동안 두 사람의 감정을 잇는 그 무언가를 관객이 느끼기에는, 너무 젊다. 청년기의 사랑이 노년기에 돌아보면 아릿할 수 있을까. 궁금하네. 감정도 근육이 생기고, 상처난 가슴에는 새로운 살도 솟는다. 한때 찢어진 가슴은 이어지고 살다보면 흔적은 남지만 통증은 바래고 아팠던 기억만 남아있는 거 아닌가. 아무튼 영화는 별로였다는 말이고, 이언 매큐언의 소설에는 전혀 손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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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영화 재미없다는 네티즌들의 반응 때문에 안 볼 뻔했는데 친구가 보자고 해서 봤다. 기대를 하나도 안 하고 봐서 그런지 무척 재미있었다. 딸 찾는 이야기라 뻔하겠지 했는데 안 뻔하다! 추리물로는 자극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SNS의 속성을 스크린을 통해 잘 묘사했을 뿐 아니라 인간관계 왜곡된 시선도 잘 담았다. 특히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대한 입장차이도 잘 담았다. 그래서 무척 흥미로운 텍스트다.

2.  딸의 실종으로 아빠는 딸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닫는다. 딸이 피아노만 보면 죽은 엄마 생각이 나서  6개월 전에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딸이 없어진 후에 알게 된다. 딸과 아빠의 관계여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안다고 말하는 일은, 지극히 경계해야한다. 내가 어떤 이에 대해 안다는 가정은 단지 그가 내게 보여준 단면만을 아는 것이라는 걸을 인정해야 한다. 이걸 인정하는데 꽤 오래 걸렸다. 온전히 한 사람을 이해하고 아는 건 불가능하고,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그렇지만 가까울수록 안다는 착각에 빠져서 나중에 자신이 모르는 모습을 발견할 때, 우리는 상대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왜 그랬는지 추궁하고, 어떻게 니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니, 하고 반문한다. 아빠 역시 딸의 물리적 실종으로 딸과 자신과의 사이에 씽크홀sinkhole같은 커다란 구멍을 발견한다.

첫 반응은 충격이고 딸을 찾아야하기에 딸에 대해 더 서치를 해나가면서 딸이 피아노만 보면 엄마 생각이 나서 괴로워서 피아노 레슨을 그만두었고, 친구가 없이 늘 혼자 점심을 먹고, 어느 호숫가 혼자 앉아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 걸 알게 된다. 16세가 되어가는 딸은 세상과 점차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는 걸 딸이 없어진 후에나 알게 된다. 애착 대상이 부재 후에나 성찰적 태도를 지니게 되는 건, 안타깝게도 사람의 속성이 아닐까.

딸에 대해 이렇게 상세하게 알게 되는 과정이 바로 SNS 서치를 통해서다. 딸의 각종 SNS 계정, 페이스북부터 텀블러, 인스타그램, 유캐스에 로그인하자 딸의 진짜 세계가 쭉 펼쳐진다. 현실 세계보다 더 진지하고 진짜 딸을 볼 수 있는 넷의 세계다. 영화를 보면서 무서웠다. 누군가 내 블로그나 SNS 계정을 추적하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물론 나를 특정 목적으로 추적하는 누군가가 있을리 없을테지만(그러리라 믿고 싶은데 이따금씩 방문자 USR를 들여다볼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수상한(?) 기록을 발견하고 잠시 불안하긴 하다)

가상세계는 자신에 대한 편집이 가능해서 거짓을 꾸며내기 좋은 수단이기도 하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진짜 자신을 노출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해서 받아들이는 일은 상대의 몫으로 남겨진다.아빠는 딸의 가상세계에서 진실을 본다.

3. SNS의 속성이 영화에서는 딸의 행방을 추적하는데 쓰여서 긍정적으로 기능하는 편이지만 한없이 가볍고 속이기 쉬운 속성도 집단 심리를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 2백 명이 넘는 친구들에게 전화했을 때, 모두 딸과 안 친하고 잘 모른다는 반응을 보였던 이들이 미디어에 공개수사로 노출되면서 SNS에는 딸을 그리워하는 친구들의 피드가 올라오고 댓글과 감정이모티콘들이 쌓인다. 사람이 사라져도 손가락으로 슬퍼요를 누르고, 보고싶어, 하는 친절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데 여기에 담긴 진심의 깊이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슬퍼요, 보고싶어, 하는 댓글을 달지 않으면 안 걱정하는걸까? 현실세계에서 무관심이 넷상의 군중심리로 표현되는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4. 담당 수사관은 아들을 키우는 엄마다. 실종된 딸과 아빠의 관계와 대립항으로 볼 수 있다. 엄마는 아들에 대해 너무 잘 안다고 가정하는 오류를 범한다. 아이가 사회에 약간 부적응한 예민한 성격이라는 단정이 지나친 모성을 발휘하게 한다. 엄마의 적극적 개입이 없었더라면 아들은 어땠을까? 누군가를 잘 안다는 단정은, 아주아주 위험하다는 걸 알려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5. 영화는 해피엔딩이라 나오는 마음 가볍게 극장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제 나는 해피엔딩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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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주 토요일, 오랜만에 상암동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에 갔다. MBC가 상암동에 쳐들어온 이후로 영상자료원 밖과 안 모두 사람들로 넘쳐난다. MBC 주변은 대형 식음료 체인점들이 성업 중이고, 이따금씩 갈 때마다 커다란 음악과 지역 마켓 부스들로 광장은 가득찬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미로를 헤치며 간신히 극장에 도착해서 (영화 상영 후에는 입장 불가 정책은 이따금씩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정책이다) 상영관에 들어서면 역시 할아버지, 할머니 관객들로 좌석이 거의 만석이다. 씨네필 노년 인구일 수도 있지만 무료 상영이라 마땅히 갈 곳 없는 노년 인구들이 극장에 앉아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런 경우 영화 상영 중에도 서로 큰 소리로 대화하고, 전화 받고...ㅜ 우리 아빠도 귀가 어두워서 공공장소에서 전화받을 때 저렇게 크게 소리치듯 전화해서 누군가가 눈살을 찌푸리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이해하려고 한다. 내 귀도 안 어두워지리란 보장이 없으니^^;

2. 영화는 일본으로 온 미얀마 난민 가족이야기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남자는 일본으로 온 이유를 말한다. 살기에 안전하지 않아서 더 좋은 환경을 찾아서 왔노라고. 불안하고 안전하게 느끼지 않는 증거를 내라고 하면 낼 수 없다고 말한다. 마치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불안을 느끼지만 그 증거를 명확하게 내놓기 힘든 것처럼. 남자는 한 식당에서 일하고 좁은 집에서 아내와 두 아들과 산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단칸방에서 밥도 먹고 두 아들과 장난도 친다. 아이들은 생활고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일본 국적을 갖게 되면서 고향이란 개념도 없어진다. 이민 2세대가 그렇듯이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은 희미해지고, 자신이 일본인이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부모는 다르다. 부모의 비자 만료로 불법체류자가 되어버리고, 삶의 무게는 남자의 어깨와 아내의 마음을 짓누른다. 아내는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마음이라도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미얀마로 돌아가기로 한다. 남편은 일본에 남고. 고향에 돌아온 여자는 가족들을 만나고, 아이들에게 미얀마의 문화를 가르치려고 한다. 미얀마에서 아이들은 이방인이 되어 불편하고 불결한 물리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체성 혼돈을 겪게 된다. 자신은 일본인인데 왜 미얀마에서 살아야 하는지 반문하고, 아버지의 부재는 아이들의 마음을 닫게 만든다. 잘 살기 위해 택한 이주가 결국 그 누구의 마음도 편치않게 만든다.

3. 제6회 디아스포라 영화제 때 상영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사는 건 이 가족의 여정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 더 안전해 보이고, 찾아가 볼 만해 보이지만 막상 '그곳'에 가면 '그곳' 역시 불안한 요소들로 가득 차있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곳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걸 확인했을 때, 좌절은 더 크지만 상황 파악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추스리고 수습하는데 힘을 기울이는 게 인생아닐까. 하루하루 살아가다보면 불안과 불확실성도 내성이 생겨 익숙해져서 둔감해지는 날도 오고.

4. 조금만 더 기력이 왕성했으면 좋겠다. 불안과 불확실성에 도전하려면 기력도 중요하니까. 밥은 많이 먹는데 기력이 없는 건 왜 일까. 요상한 결론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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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사막 마카롱 에디션
프랑수아 모리아크 지음, 최율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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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악이 모리아크로 표기법이 바뀐 걸 모를 정도로 오랜만에 모리아크 소설. 이십대 초반에 나를 괴롭히던(?) 작가였는데 지금 다시 읽다 보니 너무나 당연하다. 모리아크의 작품에 공감하는 이십대를 보내는 사람이 있을까? 인생의 쓴 맛을 본 후 읽는다면 모리아크의 작품들은 인간의 본성과 윤리 사이에서 개인이 취하는 입장이 절절하게 와 닿는다. 금욕적 입장을 취하고, 죽음을 통한 구원을 추구하는 작가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법은 내게는 아주 매혹적이다. 어린 시절, 내가 끌렸던 이유는 생각한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인간의 이중성이었다.

<사랑의 사막>은 개인의 이중성을 넘어서 가족 내에서 역할과 갈등을 일으키는 권력 관계를 묘사하는데 한국 사회의 고부 사이와 닮아있기도 하다. 가족 살림을 하는 하녀를 누가,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한 의견 차이 등등과 식탁에서 벌어지는 가족간의 오고가는 대화 속에 사위에 대한 아버지의 적의감, 아버지와 아들과의 대립관계도 흥미롭니다. 성인이 함께 모여 사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성인이란 자신의 주관대로 세상을 살아갈 것으로 기대되고 또 그렇게 하기 때문에 성인 자식과 부모 사이에는 세대차이라는 말로 대충 얼버무리게 되는 갈등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한 가족이라는, 한 배를 탔다는 의식 때문에, 둘은 관계의 균형을 위협하는 것을 꺼렸다. 인생이라는 갤리선에 함께 승선한 노예로서, 자기들이 타고 있는 배에 화재를 일으키지 않으려는 생존 본능일까? 그리하여 이제 식탁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70)

우리는 혼자 살 수 없어서 사람들로 늘 둘러싸여 있지만 혼자 있을 때 개인의 본성이 가장 잘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혼자 남겨지자마자 미친 사람이 된다. 우리 자신에 의한, 우리 자신에 대한 통제는, 타인이 우리에게 행사하는 통제가 있을 때에만 작동한다."(62) 우리의 미친(?) 본성을 다스리는 건 결국 내가 아니라 타인일 수 있겠다.

<사랑의 사막>은 쿠레주 가(家)를 다루는 가족 소설이지만 그 중심에는 아버지쿠레주 박사와 아들 레몽 쿠레주가 한 여자 마리아 크로스를 사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의사인 아버지는 환자와 연구에만 몰두하는 줄 알려져 있지만 마음 속에 마리아란 커다란 불을 품고 살아가고, 아들 레몽은 소년기에 마리아를 보고 반하면서 소년이 아버지를 떠나 청년이 되는 과정을 그렸다. 나는 청년의 마음보다는 아버지의 마음에 더 감정이 이입되었다. 혼자 마리아를 사랑하고 단념하는 문장을 이렇게 묘사했다. "모르핀 주사를 맞듯이, 그는 일상의 근심거리들을 자신에게 투약했다."(94) 많은 사람들이 실연을 하고 택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모리아크는 우아한 작가라 아들과 아버지가 연적이라고 공공연하게 밝혀지는 걸 택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지를 상상하면서 고통을 받는, 사랑의 속성인 질투를 묘사한다.

"이 고독한 사랑은 왜 이다지도 매혹적인가? 팽팽하던 긴장 속에서 상대가 사라지고 나자 그 사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자기의 정염의 맹렬함뿐이었다. (...) 때로 이런 고독한 정열이 정상적인 사랑의 교류보다 더 강력하고 매혹적일 수 있음을, 마리아는 배우게 되었다."(152)

세 인물 모두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자신의 정염을 더 사랑한 게 아닐까. 모리아크는 인간들간의 사랑을 좀 가엾게 여기고 신의 구원을 통한 더 큰 사랑을 믿는 작가라 이렇게 표현했지만 사랑의 속성은 그 누구보다 예리하게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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