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의 그림과 생애
야콥 부르크하르트 지음, 최승규 옮김 / 한명출판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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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에 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마리아 데 메디치의 연작 뿐이다. 루브르에서 따로 홀을 갖고 있지만 대작들로 지루한 연작이라고 생각했다. 들라크르와 책을 읽으면서 루벤스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 지루한 연작은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걸 새삼 알게되었다. 더불어 내 기억 속에 있는 루벤스의 그림은 모두 루브르에 전시된 것들인데 이 책 도판을 보면 뮌헨의 알테 피나코텍에 흥미로운 그림들이 많이 있다. 루벤스의 특징인 근육질로 이루어진 인물들과는 달리 풍경과 인물이 조화를 이루는 작품들이 있나보다.

그는 다작을 한 작가였다. 앤트워프에서 작업을 한 그림이 유럽 전역으로 실려나가는, 요즘식으로 표현하자면 베스트 셀러 작가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림의 규모가 큰 것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다. 지금은 주로 미술관에 걸려 있어 공간과 그림의 크기가 불균형해서 사실 아름다움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의 저자는 루벤스의 안정된 구도를 칭찬하는데 실제로 그림이 너무 커서 구도를 한 눈에 보기가 쉽지않다. 그림 속에서 금방이라도 살아서 움직일듯한 근육들이 시야를 압도해서 약간 숨이 막히기도 한다. 이렇게 그림이 커다란 이유는 주로 제단화로 주문되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주로 천장이 높은 고딕성당에 걸기 위한 그림들이었고 당연히 커야만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실용적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루벤스의 그림을 보면 무중력 상태의 우주같다. 화폭 전체가 사람들로 그득하다. 허공에서 떠다니는 근육질의 건장한 인물들, 그 아래는 땅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인물들의 포즈는 위에 있는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발이 땅을 딛고 있다기 보다는 허공을 통해 땅이 살짝 보이는 느낌이다. 여백의 미라는 것과는 반대로 가득함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인물들의 리듬감 있는 역동성이야 잘 알려진 루벤스의 엠블렘이고.

이 책의 미덕은 도판이 생생하게 실려있다는 점이다. 알라딘에서는 품절이어서 예스24에서 구입했는데 도판만 쭉 다시 봐도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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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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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하고 묵직한 회색 대기 속에서 <남한산성>이 가져다준 약간의 실망을 채워보려고 집어들었다. 끈끈한 대기에서 끈끈한 슬픈 문장을 읽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역시 김훈!이란 말이 저절로 나온다.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그리고 지하철을 타서 내내 책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는 문장들. 이따금씩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그 무언가가 솟아오르기도 한다. <남한산성>에서 발견하지 못한 깊이를 이 단편집에서 발견하고 포만감에 젖는다. 김훈의 문장은 장편보다는 단편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그의 슬픔의 근원은 무얼까 궁금해졌다. 8편의 단편 모두 죽음의 그림자 혹은 저물어가는 생의 이면의 분위기가 깔려있다. 앞만보면서 달리던 젊은 시절은 생략되고 그 달렸던 시절의 후유증으로 잠시 멈추어 서는 이야기들이다. 병, 이혼, 죽음 등 희망과는 거리가 먼 소재들을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삶의 슬픔 또는 외로움이라는 단면을 담담하게 서술해서 마주보면서 그래, 그런게 삶일 수 있지, 누구에게나. 하고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나는 아직 달리는 시기에 있고, 많은 김훈의 독자들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유증이 고루하다거나 머나먼 미래의 일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나이듦이 가져다주는 쓸쓸함이 온전히 가슴으로 전해진다. 어쩌면 이 쓸쓸함은 근본적 도시적 고독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이든 자만의 것이 아니라 신나게 달리면서도 문득문득 찾아오는 혼자라는 감정.그때마다 낯설고 비틀거리게 하는 모호한 감정의 실체들. 박민규, 김영하, 이기호의 소설들이 그 감정의 실체를 경쾌하게 다룬다면 김훈은 끈끈하게 다룬다. 그러나 다른 분위기에서 느낄 수 있는 외로움의 정체는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듯하다.

이 단편들의 분위기 묘사는 거리감을 두면서도 감정적 밀착을 이뤄낸다. 때때로 작가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부분이 있는가하면 무심하게 이야기하는 데 그 무심함이 묘하게도 아리다.  <언니의 폐경>에서 생리혈이 나오는 몸의 느낌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런 느낌은 생리를 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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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08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한산성의 실망감이 많이 채워진 듯 합니다. 님, 언니의 폐경(오타에요^^)에서
그 묘사는 정말 전율적이지요.

넙치 2007-07-09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런 느낌을 남한산성에서 기대했던 거 같아요.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전집 2
버지니어 울프 지음, 정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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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지난 2주간 카프카의 <성>을 읽어내려고 노력했다. 욕심부리지 않고 천천히 몇 페이지만이라도 읽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함으로써 세 번째 실패를 달성(?)했다. 이건 내 탓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다. 카프카의 문체도 난해하겠지만 난해한 문체를 매끄럽지 못한 번역서로 읽는 것은 정말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번역자는 카프카 학회 부회장이라지만...번역 문장은 전혀 우리말이 아니어서 동사를 행하는 주체가 주어가 아니라 알 수 없는 긴 미로같은 긴 문장으로 이어진다. 중반에서는 문체가 확 바뀌어서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줄거리만을 좇아가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는 다시 비슷한 류의 소설에 도전해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만만치않은 버지니아 울프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영미문학을 원서로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어공부를 위해서 주로 구어체에 가까운 소설들만 읽었다. 그 중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헤밍웨이의 책도 아마 번역서로 읽어도 그닥 차이가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강하게 느낀 것은 울프의 언어가 아니라 다른 언어의 한계를 다시 한번 절실하게 깨달았다.

사실, 플로베르가 심혈을 기울여 그려낸 문체의 집대성인 <마담 보바리>, <감정교육> 등을 번역서로 읽으면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지루한 이야기 일뿐일 수 있다. 서사가 중심인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제가 발달한 불어에서 반과거와 복합과거의 차이, 전미래와 단순미래의 차이, 자유간접화법이 주는 뉘앙스를 안다면 풍부한 심리 텍스트로 다가온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바로 이런 류의 소설이다. 원서로 읽지 않으면 어떤 부분이 머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어느 부분이 현실인지 구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느낄 수 없다. 자주 우리말로 등장하는 말이 '하리라'다. '하리라'로 끝나는 우리말이 영어로 will인지 또는 would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아니면 전혀 다른 단어를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두 단어는 어조가 많이 틀린 말이다. 나중에 한번 원서로 읽어보고 싶단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소설이다. 고전은 그 이유가 있기 때문에 고전이다.

아쉽게도 번역서로는 고전의 힘을 맛볼 수가 없다. 물론 울프의 난해함은 이 책을 번역한 역자 후기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역자는 울프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뭘 번역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물었다고 하니 그 난해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왜 울프냐고 질문받았을 때 역자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는데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모든 책을 원서로 읽을 필요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근본적 뉘앙스가 작가의 정신세계에 다가가는 데 필요한 책들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 가령, 이문구, 조정래, 한승원 작가의 토속적 문체를 영어 번역서로 읽는다면 절대 그 구수한 맛을 알 수 없을 것이고, 이분들의 글을 좋아한다고 선뜻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덧. 알라딘 리뷰는 별점을 필수로 하는 게 싫다. 독서 감상문은 객관성이 필요하기보다는 주관성이 더 중요하다. 각자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생각을 갖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또 한 사람이 같은 책을 각기 다른 시기에 읽을 때마다의 느낌도 변하기 마련이다. 대체 이 별점은 무엇을, 누구를 위한 지표일까. 이 책의 별점을 체크해야 리뷰가 등록되는 데..난감하다. 쩝. 결국 세 개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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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7-04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넙치님, 저도 별점 주기 참 난감할 때 있어요. 꼭 그래야하나 싶구요.
번역으로 원작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엔 역부족인 책이군요. 전 다른 출판사의
댈러웨이부인을 갖고 있는데요.. 번역의 묘미, 어려움, 님에 동감입니다.

넙치 2007-07-05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별점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마음만 앞서고 실제로는 감춰져있는 즐거움을 찾는데 막상 게을러서 언제나 그 묘미를 맛볼 수 있을지 미지수에요.

비로그인 2010-02-13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그래요.이 책 번역 읽기가 너무 힘들게되어있어서 반품해야하나하고...살펴보다가 동감하고 갑니다ㅜㅜ 역자입장에선 문체를 살리고 싶겠지만 그러다보면 난해해지고 우리말로 쉽게 읽게해놓으면 딴책이 되어버리니 원서로 읽는게 제일 좋은듯 싶네요.

넙치 2010-02-15 13:59   좋아요 0 | URL
몇 년 전, 역자가 다른 댈러웨이 부인을 산 걸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또 이 책을 샀고 또 좌절했어요. 본의아니게 댈러웨이 부인 팬이 돼버렸어요. 한국어 번역본 두 권, 원서 한 권.-.ㅜ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 현대예술에 대한 거침없는 풍자
에프라임 키숀 지음, 반성완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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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재미있었지만 읽고 나서는 책 값이 아까운 책이다. 부제에 쓰여있듯이 "현대예술에 대한 거침없는 풍자" 이외에는 내 시각을 기르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진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현대미술의 의도들은 알겠지만 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그렇다고해서 저자가 말했듯이, 현대예술은 유머에 있다는 데 나는 현대미술을 보고는 웃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현대미술에 무관심하게 되고 오히려 고전미술로 무게중심을 두게된다.

키숀의 말 중 가장 마음에 든 말은 바로 요것.

"자신의 작품이나 자신의 예술을 감상하는 관객에 대한 사랑 없이 진정한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을 위하는 배려나 애정이 빠지게 되면 이기주의나 오만, 허영심, 아니면 효과만을 노리는 마음만이 중요하게 된다. 예술은 관객이 작품에 접근할 수 있고,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호소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예술은 그림을 보는 관객에 의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현대예술이 저지르고 있는 최대의 죄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관객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경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아름다움은 예술로부터 추방다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사랑 역시 사라져 버릴 운명에 처해 있다. "

그러니까 키숀의 말에 따르면, 현대미술에 대한 내 무관심은 무죄인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전적으로 보는 사람의 비위를 맞추라는 말은 아니다. 작가가 느끼는 것을 관객이 함께 느끼도록 하는 것, 이것은 미술 뿐아니라 문학을 비롯한 모른 예술 범주에 해당하는 불변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겠다.

키숀은 비평가를 백해무익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듯한데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키숀도 예로 들고있듯이 미디어를 통한 비평가의 힘은 세다. 대중은 미디어를 믿고 비평가의 명성을 믿기 때문이다. 묻혀진 작가를 재조명해서 작품과 작가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도 비평가일 수 있다. 문제는 작가가 지닌 예술적 지능이나 작품의 완성도에 관계없이 선동해서 대중을 부화뇌동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런 대중심리를 이용한 상업 환경이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도미노 현상이다. 예술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예술의 이름으로 상업적 성공만 추구하는 거짓 예술은 장기적으로 보면 예술의 토대를 척박하게 만들 것이다.

어쨌거나 양적으로 풍부한 예술활동이 선행되어야 질적으로도 발전이 있다. 우리나라의 현재 상황, 양적 풍요로움이 이끌 결과는 조금 있으면 윤곽이 잡힐 것이다. 나야 취미삼아 이것저것 기웃거리는 정도니 내 바람은 딱 한가지다. 질적으로 풍요로와져서 전시다운 전시를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것 뿐이다. 

요즘 경향대로라면 초등학생들이 숙제든 엄마의 교육열에 이끌려서든 각종 전시회 주고객이다. 이들이 대학을 들어갈 때쯤이면  비록 강제적으로 학습되었지만 안목이 높아져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지금같은 졸렬한 전시기획은 없어지지 않을까나. 더불어 미술전문 서적의 풍요로움도 기대해본다. 우리나라의 미술서적은 참으로 민망하다. 수필같은 책이 많아서 작가에 대해 구체적 정보를 얻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미술학자의 책이 없다는 것도 참 아쉬운 점이다. (아님 내가 못찾았나) 일단 한국작가가 쓴 책보다는 번역서를 먼저 택하게 된다. 적어도 미술서에서만은. 이건 번역세계의 문제일수도 있겠고나.

얘기가 삼천포로 빠지니 고만 적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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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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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 책에 대해 화두가 되고 있는 진정성 내지 실재성으로 꼬투리를 잡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김훈의 소설이란 것이 역사성과는 별개로 시학 또는 시인으로서의 역할이 더 크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호라티우스의 <시학>을 각각 다시 살펴보았다. 먼저 김훈 문장의 광팬으로서 옹호할 말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말을 했다. "역사가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시인이란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 한다.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김훈의 소설은 역사적 관점이 아니라 미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모든 소설이 다 역사소설은 아니다. 또 모든 역사소재소설이 역사적일 필요는 없다. 역사소재소설을 읽는 이들이 다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내가 이 소설을 읽기 전에 기대했던 것은 이런 역사적 진성성의 유무도 아니었고 소설이란 완벽한 틀을 갖춘 서사구조도 아니었다. 내가 유일하게 책장을 펼치며 기대했던 건 <칼의 노래>에서 맛보았던 정서적 호소였다. 물론 문장은 단정하면서도 날카롭고 비장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남한산성의 정경을 그림 그리듯이 문장으로 묘사한다. 처참함, 곤궁함, 말의 누린내를 간혹 맡기는 했지만 문장 간에 숨겨진 마음을 읽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서도 객관적일 수 있다는 건 작가가 마음을 담아 쓰지 않고 거리를 두고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의 고독을 그토록 가슴저미게 다가오는 것은 김훈의 고독이 녹아있는 탓이다.

역사서가 아닌 감정에 기대야할 이런 장르의 소설에 감정이 빠져 있다면 다음 소설에 대한 기대치는 현저하게 낮아질 것이다. 나란 독자란, 작가의 마음이 쓰여진대로 읽을 수 있도록 길들여진 독자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독자가 아름다운 문체에만 감탄하기에는 공허하다. 문체란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는 것인데 김훈이 정말 중요한 마음을 문체에 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이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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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6-30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넙치님, 동감입니다...
읽고나서, 읽으면서 상당히 공허했어요. 바로 그런 이유겠지요..

넙치 2007-07-02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제가 서재 열고 첫 댓글입니다. 감격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