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en Brothers: Interviews (Paperback)
Coen, Joel / Univ Pr of Mississippi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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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외서 확충에 신나서 질렀다.-.- 대충 살펴봤는데 제목 그대로 인터뷰 모음이다. <Positif>, <Vogue> <Premiere> 등 각종 영화 잡지에 실렸던 짧막한 인터뷰들을 한 곳에 모은 책이다. 나처럼 게으른 이를 위한 종합선물 세트다. 뉴욕 유니언 스퀘어에 있는 헌책방에서 코엔 형제 책을 두 권 찾아서 내 서가에 고이 모셔만 두었다.

The Coen Brothers: The Life of the MindThe Coen Brothers

이 두 권인데 코엔 형제가 만든 영화들에 대한 글 모음집이다. 간략한 생애가 있지만 주로 작품 분석이어서 일독할 의욕이 희미하다. 그런 와중에 신간인 인터뷰집이 알라딘에 있다니 어찌 품에 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읽지도 않으면서 코엔 형제의 책에 욕심을 내는 이유가 그들의 영화를 몹시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화를 이번에 보면서 몇 편만 좋아하는 걸 발견했다! 그들과 그들의 영화에 관한 글을 써볼까 작정했었는데..흠..

코엔 형제는 개인적 인터뷰를 안하기로 유명해서 개인적 삶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 것도 이 인터뷰집을 냉큼 사들인 이유다. 워낙 짧은 분량의 글들이라 겹치는 내용도 많은 것같다. 같은 영화에 대해 인터뷰어만 바뀌니 피할 수 없는 반복일 수도 있겠다.

이런 점을 이해하고 가볍게 읽는다면 생각보다 건질 게 많을지도 모르겠다. 독자입장에서 인터뷰이만큼 중요한 게 인터뷰어이다. 인터뷰어의 관점과 태도에 따라 인터뷰의 내용이 달라지니까. 재미있는 건 98년 3월, Doug Stone이 한 인터뷰. 제목이 The Coen Speak (Reluctantly)이다. 세 페이지가 채 안되는 분량인데 마지못해 하는 인터뷰 시작이 이렇다.

"인터뷰어-프린스턴에서 철학을 전공했는데 영화를 만드는 철학은 뭐야?  이단 코엔-우-없어.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도 모르겠어. 지금까지 깨달은 건 하나도 없어. 이건 헛다리 집는 건데."

사실 이런 질문은 의례적이지만 관객이나 비평가의 입장에서 무척 궁금하다. 도대체 감독의 두뇌구조는 어떨까, 저 장면은 왜 들어간 걸까. 무슨 특별한 의도가 있겠지..하는 등등의 잡다한 생각을 감독들에게 물어보면 대체로 이단 코엔처럼 대답하기 일쑤다. 맥 빠지는 일이지만 감독들은 그래서 더 신비해 보인다. 철학이 없다는데 철학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를 만든다. 내가 그들의 영화를 좋아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이유는 이 점도 상당히 영향을 끼쳤다. (그들이 아니라는데도)

작업 스타일을 읽다보면 두 사람은 두 몸을 지닌 한 사람의 머리처럼 보인다. 우리가 흔히 하듯이 몸이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실 없는 소리가 이들에게는 전혀 허무맹랑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몸 하나로 할 수 없는 잡다한 일을 두 개의 몸이 하고 있다니 불가사의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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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적인 삶 - 제100회 페미나 문학상 수상작
장폴 뒤부아 지음, 함유선 옮김 / 밝은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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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베스트 셀러 소설책들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3분의 2쯤 읽었을 때 후회했다. 사서 읽을걸 하고. 지금이라도 주문할까 했지만 한 번 읽은 소설들은 두 번 읽게 되질 않으니 소유욕을 자제하는 게 의젓해 보인다. 장폴 뒤부아의 이름은 익히 들어왔지만 제목 때문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소녀적 감수성을 판매전략으로, 일주일 간의 휴가 내지는 체류를 경험한 이들의 감상적 환상에 봉사하는 '프랑스적인' 어쩌구 저쩌구하는 허섭한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책들이 나오면 서점에서 기웃거리며 내가 알고 있는 세계와 얼마나 일치하는지 대조해보는 취미를 갖고 있지만-.-) 이 책도 그런 책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는데 다 제목 때문이다. Une vie francaise=a French life지만 소설의 내용대로라면, 한 프랑스인의 삶이라고 해야 작가의 의도에 더 가까이 간걸거다. 번역자가 이를 모를리 없을 것이고, 프랑스 더 정확히 말하면, 파리의 화려함에 대한 환상을 부추길 수 있는 제목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제목 때문에 이 책을 외면해왔으니 약간 억울한 마음에 제목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놨다.

한 프랑스인이란 바로 폴 블릭이다. 간혹 블록이라고 오해를 받기로 하는 사람. 그는 "남아도는 정자로 인해 태어난 신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일어난 배란의 실수" 였다. 이렇게 태어난 그는 소설의 화자로 54세이고 "삶에 대한 두 가지 전망 사이에서, 모순되는 두 세계 사이에서 망설이는 거북한 나이다. 하루가 다르게 얼굴에는 세월에 따라 주름이 늘어가며 규칙적으로 칼슘과 협심증 치료제를 복용하고, 담배를 끊고 혼자 살며 혼자 저녁을 먹고 혼자 늙어가고" 있다. 54년을 살면서 겪은 여러가지 일상적 일들 속에 유독 죽음을 목도하는 빈도가 높다. 첫 챕터 드골 시대에 형 뱅상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장 시라크의 장에서는 숨 쉬고 있지만 죽어있는 딸의 모습으로 끝이난다. 아버지, 어머니의 죽음, 아내 안나의 사고사 등. 프랑스라는 한 국가가 여러 대통령을 맞이하면서도 진보이라는 말과는 별개일지라도 계속 존재하는 것처럼, 소심하고 현실세계 밖에 위치했던 폴 블릭에게 가족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죽었지만 아들과 딸이 살아 있고, 아들의 아들이 태어나서 블릭家는 지속된다.  

지난날 위풍당당했던 드골이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지고 68혁명이 일어나고 교활한 미테령도 사라졌듯이, 좌파 운동을 하던 팔딱거리던 심장을 지녔던 20대의 폴 블릭은 희미해지고 어쩌면 자신의 문제 밖에는 관심이 없는, 느리게 유영하는 50대의 폴 블릭이 되었다. 더 나이가 들면 앞서 사라진 정권자들처럼 그도 아들에게, 손자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그들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있게 될 것이다.

전반적으로 염세적이지만 비관적이진 않는 게 폴 블릭의 매력이라고나 할까. 한 사람의 삶을 글로 적는 능력이 누구에게나 있다면 폴 블릭의 세상살이보다 결코 무게가 적지 않을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서술할 능력이 불행히도 없다. 대신 뒤부아의 폴 블릭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뿐이다.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삶, 요것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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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와 혁명 - 혁명적 예술가 3
존 몰리뉴 지음, 정병선 옮김 / 책갈피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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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렘브란트의 그림에 관한 미학적 분석이 아니라 렘브란트가 살았던 17세기 네덜란드 역사책이다. 이 책을 집어들면서 본래 의도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알려고 했지만 17세기 자본주의가 번창했던 네덜란드 역사 이야기도 나쁘지 않았다. 단 도판이 생뚱맞다. (내 생각에) 출판사에서 글 속에 나오는 그림들을 무작위로 실은 것 같다. 저자가 생뚱맞게 도판을 실었을 것 같지는 않다.

역사를 통해 서구인들이 강하게 보여주는 연대감의 뿌리가 늘 궁금했었는데 요한 호이징가의 말에서 작은 뿌리 하나를 건졌다. "네덜란드 민중의 단결은 그들의 부르주아적 성격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우리 네덜란드인은 모두 부르주아이다....삶에 대한 부르주아적 관념을 모든 계급, 모든 사회집단이 공유하고 있다....자신의 일이 방해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부르주아적 기질이 우리의 선조들로 하여금 에스파냐에 대항해 봉기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호이징가가 지칭하고 있는 부르주아는, 자본의 유뮤에 기초한 게 아니라 집단적 이익에 기초한다. 이 책의 저자 존 몰로뉴는 네덜란드 민족주의는 혁명의 결과고 혁명은 계급에 기초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주제가 혁명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17세기 네덜란드는 참으로 역동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계급의 문제가 어제 오늘의 문제는 물론 아니지만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 이전에 자본주의 형태가 어땠는지 스케치해 볼 수 있다.

렘브란트의 생애에 관해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러니까 추측된 것이라는 것. 재능있고 야심있던 한 젊은이가 사치스러워서 파산했다는 줄거리인데 개인적 생활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단다. 정황으로 파악해 일대기를 구성한 글이 실제처럼 돌아다니는 우리시대는 조금 무섭기도 하다.

저자는 렘브란트의 작품을 두고 이데올로기에 갇히거나 보편적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렘브란트의 양면성 즉, 부르주아로서의 측면과 반부르주아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지만 지면의 한계 때문인지 설득적이기 보다는 '보편적' 시각처럼 여겨진다. 그림에 대한 주관적 견해가 지나치게 두드러지는 것도 약간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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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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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온건 2000년이고 지금은 2008년. 제레미 리프킨은, 그러니까 이미 2000년 후반의 상황을 예측할 수 있는 통찰력이 있었다. 할 말이 무지 많은데 일단 제목부터 적어보자. The Age of Access. 우리 말로는 접속이라고 번역했는데 '접근성'이라고 말하는 게 더 좋을 거 같다. 네이버 영영사전 정의를 정리해 보면 이렇다.

access  1.  being able or allowed to go into building ar other places

             2. having the opportunity or right to see or use something such as information or

                equipment

엑세스는 소유의 시대가 끝나고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엑세스이다. 엑세스는 또 다른 소유의 형태로 생각된다. 이미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한 소유권을 보유하고 있을 때 눈을 돌리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리프킨은 이런 의도로 개념을 전개하고 있진 않지만 그럴만한 예를 들 수 있다. 가령, 이미지를 판다는 대형 식음료 체인의 경우를 보자.

모친과 친구를 포함해서 하나 가지고 있으면 놀고 먹기에 좋을 뿐 아니라 깨끗할 것 처럼 보였던 게 도너스 체인이나 아이스크림 체인점이다. 그러나 이건 아무 것도 몰랐을 때다. 리프킨이 썼듯이 지명도 있는 브랜드의 체인점은 개인소유가 될 수 없고, 브랜드 이미지를 돈을 지불하고 사용하는 이용자에 불과하다. 사용자의 입장에서 편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지 사용료가 턱없이 비싸서 4억 정도를 투자했을 때 얻는 수익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계산된다. 게다가 유동인구가 많은 대박지역은 임대 사용자의 접근은 원천봉쇄되고 직영체제란다. 그러니까 이미지를 파는 모기업은 영세 임대 사용자들의 소유주가 될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돌아가고 있다. 엑세스의 장점인 유동성과 자유 또한 보장되지 않는다. 모기업은 브랜드 이미지를 균질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임대 사용자들을 감시하고 조종한다. 그렇담 사용자 쪽에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인가? 모르겠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엑세스의 속성은, 사용자가 일정한 수준을 갖추는 것을 선호한다. 21세기에 기회나 권리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엑세스는 소유권의 변주가 아닌가. 결론에서 참여의 수준 뿐 아니라 참여 유형의 가치가  사회의 성격을 만들어갈 것이라고는 하고 있지만 썩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엑세스가 자유로운 사람들일수록 더 많은 정보력을 바탕으로 차별화된 엑세스와 서비스, 체험을 갈망할 것이다. 지난날, 대량생산의 시기를 거쳐 풍부한 물자공급이 충족된 후에 차별화가 필요했듯이 말이다. 엑세스에 취약한 사람들은 계속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고착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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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자유다 - 수전 손택의 작가적 양심을 담은 유고 평론집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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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의 감수성은 나와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 손택이 좋아하는 작가군을 들여다보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군과 많이 일치한다. 그리하여 손택의 책을 주문하곤 하지만 두 번은 보게 되질 않는다. 그그들에 관해 손택이 글을 쓰는 방법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유려한 문장력이 찬사를 받는다고 하는데 난 잘모르겠다. 번역본이어서 그렇다기 보다는 글을 전개해 가는 방식이 사뭇 건조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이 책의 서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손택이 아들, 데이비드 리프David Rieff가 썼는데 이런 말이 있다. "어머니는 찬미에 뛰어났다....숭배는 어머니의 제2의 천성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가 쓴 찬미의 글은 전부 이런 맥락이다. 그랬기 때문에 어머니는 다른 어떤 일보다도 소설 쓰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으면서도 찬미하는 글도 계속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이 마지막으로, 또 다시 그 사실을 입증해 보인다."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숭배와 찬미의 글을 읽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다. 단 논리적이고 이론적 근거에 바탕을 둔 찬미일 경우에 즐거움이 내 몫이 된다. 이 책은 레오니드 치프킨에 대한 글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주문했다. 음...에세이라기 보다는 잡지 아티클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마지막 챕터에 실린 연설문들 역시, 기본적 입장에 크게 공감하지만 큰 울림을 주진 못한다.

그나저나 손택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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