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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부인 ㅣ 버지니아 울프 전집 2
버지니어 울프 지음, 정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거의 지난 2주간 카프카의 <성>을 읽어내려고 노력했다. 욕심부리지 않고 천천히 몇 페이지만이라도 읽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패함으로써 세 번째 실패를 달성(?)했다. 이건 내 탓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다. 카프카의 문체도 난해하겠지만 난해한 문체를 매끄럽지 못한 번역서로 읽는 것은 정말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번역자는 카프카 학회 부회장이라지만...번역 문장은 전혀 우리말이 아니어서 동사를 행하는 주체가 주어가 아니라 알 수 없는 긴 미로같은 긴 문장으로 이어진다. 중반에서는 문체가 확 바뀌어서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줄거리만을 좇아가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는 다시 비슷한 류의 소설에 도전해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만만치않은 버지니아 울프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영미문학을 원서로 읽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어공부를 위해서 주로 구어체에 가까운 소설들만 읽었다. 그 중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헤밍웨이의 책도 아마 번역서로 읽어도 그닥 차이가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강하게 느낀 것은 울프의 언어가 아니라 다른 언어의 한계를 다시 한번 절실하게 깨달았다.
사실, 플로베르가 심혈을 기울여 그려낸 문체의 집대성인 <마담 보바리>, <감정교육> 등을 번역서로 읽으면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지루한 이야기 일뿐일 수 있다. 서사가 중심인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제가 발달한 불어에서 반과거와 복합과거의 차이, 전미래와 단순미래의 차이, 자유간접화법이 주는 뉘앙스를 안다면 풍부한 심리 텍스트로 다가온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바로 이런 류의 소설이다. 원서로 읽지 않으면 어떤 부분이 머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어느 부분이 현실인지 구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느낄 수 없다. 자주 우리말로 등장하는 말이 '하리라'다. '하리라'로 끝나는 우리말이 영어로 will인지 또는 would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아니면 전혀 다른 단어를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두 단어는 어조가 많이 틀린 말이다. 나중에 한번 원서로 읽어보고 싶단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소설이다. 고전은 그 이유가 있기 때문에 고전이다.
아쉽게도 번역서로는 고전의 힘을 맛볼 수가 없다. 물론 울프의 난해함은 이 책을 번역한 역자 후기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역자는 울프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뭘 번역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물었다고 하니 그 난해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왜 울프냐고 질문받았을 때 역자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는데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모든 책을 원서로 읽을 필요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근본적 뉘앙스가 작가의 정신세계에 다가가는 데 필요한 책들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다. 가령, 이문구, 조정래, 한승원 작가의 토속적 문체를 영어 번역서로 읽는다면 절대 그 구수한 맛을 알 수 없을 것이고, 이분들의 글을 좋아한다고 선뜻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덧. 알라딘 리뷰는 별점을 필수로 하는 게 싫다. 독서 감상문은 객관성이 필요하기보다는 주관성이 더 중요하다. 각자 같은 책을 읽고 다른 생각을 갖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또 한 사람이 같은 책을 각기 다른 시기에 읽을 때마다의 느낌도 변하기 마련이다. 대체 이 별점은 무엇을, 누구를 위한 지표일까. 이 책의 별점을 체크해야 리뷰가 등록되는 데..난감하다. 쩝. 결국 세 개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