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평점 :
습하고 묵직한 회색 대기 속에서 <남한산성>이 가져다준 약간의 실망을 채워보려고 집어들었다. 끈끈한 대기에서 끈끈한 슬픈 문장을 읽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역시 김훈!이란 말이 저절로 나온다.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그리고 지하철을 타서 내내 책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는 문장들. 이따금씩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그 무언가가 솟아오르기도 한다. <남한산성>에서 발견하지 못한 깊이를 이 단편집에서 발견하고 포만감에 젖는다. 김훈의 문장은 장편보다는 단편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그의 슬픔의 근원은 무얼까 궁금해졌다. 8편의 단편 모두 죽음의 그림자 혹은 저물어가는 생의 이면의 분위기가 깔려있다. 앞만보면서 달리던 젊은 시절은 생략되고 그 달렸던 시절의 후유증으로 잠시 멈추어 서는 이야기들이다. 병, 이혼, 죽음 등 희망과는 거리가 먼 소재들을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삶의 슬픔 또는 외로움이라는 단면을 담담하게 서술해서 마주보면서 그래, 그런게 삶일 수 있지, 누구에게나. 하고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나는 아직 달리는 시기에 있고, 많은 김훈의 독자들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유증이 고루하다거나 머나먼 미래의 일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나이듦이 가져다주는 쓸쓸함이 온전히 가슴으로 전해진다. 어쩌면 이 쓸쓸함은 근본적 도시적 고독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이든 자만의 것이 아니라 신나게 달리면서도 문득문득 찾아오는 혼자라는 감정.그때마다 낯설고 비틀거리게 하는 모호한 감정의 실체들. 박민규, 김영하, 이기호의 소설들이 그 감정의 실체를 경쾌하게 다룬다면 김훈은 끈끈하게 다룬다. 그러나 다른 분위기에서 느낄 수 있는 외로움의 정체는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듯하다.
이 단편들의 분위기 묘사는 거리감을 두면서도 감정적 밀착을 이뤄낸다. 때때로 작가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부분이 있는가하면 무심하게 이야기하는 데 그 무심함이 묘하게도 아리다. <언니의 폐경>에서 생리혈이 나오는 몸의 느낌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런 느낌은 생리를 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