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1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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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책을 또 읽었다. 이 책은 단편소설집이라고 하지만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작가의 목소리가 너무 선명하다. 이야기를 전개하다 불쑥 작가가 등장해서 소설이 형편없다는 둥, 어떻게 끝낼지 모르겠다는 둥, 자신이 쓰고있는 이야기의 완성도에 대한 불안과 좌절을 특유의 어조로 늘어놓는다. 소설이 주는 형식미, 소설이란 서사구조에 대한 감동이나 아름다움을 기대하는 사람은 다자이의 책을 읽다 분명히 던져버릴 것이고 그를 영원히 형편없는 작가라고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늘 다자이 오사무에게 관대한가? 내 인생이란,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남의 삶을 기웃거리도록 운명지워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요즘은 강하게 든다. 자신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많은 이들의 인터뷰며 급조된 책이나 넘쳐나는 정보들을 읽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또한 나의 운명이니 말이다. 한때는 그런 인터뷰에서 감동을 받은 적도 있긴하다.

그러나 인터뷰란 것이, 그리고 대중매체라는 것이 그들의 고뇌나 단점보다는 장점과 일반인과 다른 점을 부각시키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에 그들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작은 습관 하나조차도 유별나게 다른 사람들이 되버리고 만다.즉 떡잎이 다른 것처럼 묘사한다. 이런 천편 일률적 접근 방법은 금방 싫증나기 마련이고 내 습관은 몹쓸 것이라고 자학하고 있기도 한다. 우리 사회가 어떤 식으로 영웅을 만드는지 알면 이런 접근방법은 더더욱 염증이 날 수 밖에 없다. 영웅, 그들이 하찮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실체를 알지못한 채 만들어진 이미지, 즉 매체가 조작한 이미지만을 믿게 된다. 물론 책은 대중매체와는 조금 다르긴하지만 평전이나 전기가 대체로 이런 범주에 든다.

다자이 오사무는 이런 일반적 영웅의 이미지와 정반대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글을 쓰면서도 확신이 없고, 젠체하지 않으며 불안으로 가득차있다. 그렇다고 자신감이 없진 않다. 어조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교만하다. 그 교만을 지탱하는 것이 불안과 조울증이라는 걸 아는 것이 아니라 느낄 때 그의 작품과 그는 일치한다.(뭐, 많은 작가들이 자신과 작품을 별개로 생각하길 바랬지만 난 아직도 일치점을 찾고 있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을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의 작품들이 소설이란 범주에서 벗어나있지만 한 사람을 이해하는데 형식에서 벗어난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글들을 읽으면서, 난생 처음으로, 일본어를 배우고 싶었다. 그의 문체가 어떠한 것인지, 그는 불안을 어떤 단어와 문장조합으로 구성했는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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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의 앵무새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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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쏙 드는 책을 읽고 난 후 대체로 두 가지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한 가지는, 하고 싶은 말이 머리 속에 가득차지만 실제로 마음은 흥분해서 그 말을 제대로 끄집어 낼 수 없다.  또 하나는 문장 속에 숨어있는 작가의 울림에 경건해져서 선뜻 느낀 점을 말할 수가 없다. 두 가지 경우의 공통점은 말문을 막는 다는 것. 이 책은 전자에 해당한다. 읽고 난후 흥분으로 가득차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시 1장을 천천히 읽었다.  

이웃 블로그에서 보기 전까지는 플로베르와는 관련없는 소설인줄로만 알았다. 이웃의 포스트를 읽고는 플로베르의 평전인줄 알았다. 읽고 난 지금, 이 책은 소설도 평전도 아닌 삶과 예술의 관계를 고찰하는 유머있고, 발랄할 에세이라고 말하고 싶다. 플로베르의 <순박한 마음>의 마지막 장면으로 시작해서 곳곳에서 플로베르의 작품들을 인용하지만 플로베르의 작품을 모른다고 해도 읽는 재미가 있는 책일 것 같다.

화자 내지 작가는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예술과 삶의 태도에 대해, 그리고 비평가들의 멀미나는 발언들에 대해, 독자는 왜 책을 읽는지에 대해,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가치 있는지에 관해. 가령, "책이란 아무리 우리가 그것이 곧 삶이기를 바란다하더라도 삶 그 자체는 아니다....삶의 연관 정도는 작가가 선택한다. 작가는 바다에 걸어 들어가듯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물이 배꼽에 다다르는 데까지만 들어가야 한다....만약 작가가 독자와 좀 더 비슷하다면 그는 작가가 아니고 독자가 되었을 것이다."

또 이렇게도 말한다. "삶은 사람이 한 행동만 말한다. 책은 일어난 일을 설명해주는 곳이고, 삶은 설명이 없는 곳이다. 삶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는다. 책은 삶을 의미있게 한다. 유일한 문제는 책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은 당신 자신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이라는 점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두 주먹 불끈(!)쥐고 삶을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앵무새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화자는 <순박한 마음>에서 플로베르가 묘사한 앵무새를 찾아나선다. 마지막 장에서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세 마리가 되버린다. 어느 것이 플로베르가 순박한 마음을 창착할 때 썼던 진짜 앵무새인지 알 수 없다. 진짜 앵무새는 보는 사람의 마음과 해석에 달려있다고 암시하는 것같다. 삶에 정답이 있을 수 없듯이 말이다. 실현되지 멋한 것 또한 삶이나니 가장 확실한 쾌락은 성취가 아니라 기대의 쾌락이라고 반스는 플로베르의 기질을 해석한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기대의 쾌락으로 영원히 남겨져야 한다고. 나의 기대의 쾌락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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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티의 역사들 - 유산과 프로젝트로서의 과거
아리프 딜릭 지음, 황동연 옮김 / 창비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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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의 화두가 포스트모더니티였다면, 21세기 초의 화두는 탈식민이었을 것이다. 탈식민을 제외하고는 문화담론은 물론이고 역사담론를 말할 수 없었다. 더불어 탈식민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왔고, 모더니티와 탈근대성의 대안으로 여겨져온 것도 사실이다. 사실, '탈post'이란 말만큼 모호하고 광범위한 말도 없을 것이다. 단순히 시간적으로 이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 딜릭이 언급했듯이, 전체성과 토대적 범주를 포함한다. "'탈'의 번성은 현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지점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상상된 미래기 단지 잔여residuality로만 계속되기 때문에 파괴적 유토피아를 나타내기도한다."(10쪽)

이런 탈식민의 권력을 저자는 날카롭게 바라본다. 포스트모더니티나 탈식민의 업적을 인정하는 동시에 비판한다. 가령, 탈식민주의가 본질주의를 반대하면서도 '잡종성' '제3의 공간' 등의 개념에 한정된 본질화된 정체성의 전제들에 기초한다고 한다. 또 탈식민주의는 문화라는 명목하에 정치 경제학의 구조를 거부함으로써 저치 경제학에 대한 초기의 관심을 근대화 담론의 문화주의로 되돌아간다는 점에서 근대화 담론과 같다고 본다.

그간 접해온 탈식민 비평서들이 문화이론가들이 쓴 책들이어서 아프리 딜릭의 관점은 다소 혼란스러우면서도 신선하다. 저자는 역사가의 관점에서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차이가 발생하는 것도 같다. 현재를 탐구하는 최선의 방법은 역사 인식을 통해서이고, 이 역사 인식은 기억과 망강의 변주에 기초한다. 따라서 기억이 재현되는 방식이 중요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과거는 기억의 파편들이 아니라 새로운 망각의 방식이라는! ! 기억은 단순한 역사의 원재료일 뿐 아니라 역사의 경쟁자로 등장한다고 한다.

그 예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예로 들고 있다. 혁명을 겪은 이들의 기억의 편차와 혁명을 바라보는 이들의 편차로 이어진 간극에서 인식의 중심점을 잡는 방향을 서술한다. 이 책의 부제는 유산과 프로젝트로서의 과거이다. 포스트모더니티는 과거를 전제로 하며 과거에 대한 패스티쉬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문제는 패스티쉬 이면에 감춰진 원인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할 터인데 이건 내 능력 밖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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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혁명과 애국의 길에서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61
다니엘 에므리 지음, 성기완 옮김 / 시공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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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베트남 전쟁사>를 읽고 호치민에 대한 호감이 급상승해서 사두었던 책이다. 이번 주에 출발하는 호치민행 항공권을 사놓고 작정하고 읽었다.  여름에는 서울에 영락없이 눌러앉아 있어야 하므로 미리 떠나는 여행지를 물색하다 호치민이 걸렸다. 왜 호치민인가? 하노이도 있는데. 이 책을 미리 읽어보고 정할걸 그랬는걸, 하나마나한 후회가 살짝. 호치민에 대한 애정을 갖고 읽으면서 호치민의 묘가 있는 하노이가 궁금해졌다.

애정과 목적을 갖고 책을 읽을 때와 단지 지식을 넓히기 위해 책을 읽을 때, 책을 보는 관점은 많이 다르다. 베트남, 나아가 인도차이나에 관한 영화 몇 편을 본 적이 있다. <시클로>, <그린 파파야 향기>는 트란 안 홍이 만든 것이고 <연인>과 <인도차이나>는 그들을 지배했던 프랑스가 만든 영화이다. 이 영화들 모두 공통점이 있다. 비오는 날 창문에 서린 뿌연 안개처럼 우수가 지배하는 영화라는 것. 이런 막연한 느낌으로 베트남을 떠올렸고, <지옥의 묵시록>, <디어 헌터> 등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는 습하고 축축하면서도 폭폭풍 전야처럼 뜨거운 공기가 감도는 곳으로 베트남은 내게 다가온다.

막연한 이런 주관적 느낌이 여행지를 선택하는 내 기준이 되곤 한다. 조금씩 베트남 정보를 모으면서 일주일로 베트남을 볼 수 없을만큼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나라라는 것. 헐레벌떡 도시만 다녀오는 식의 여행보다는 메콩강 삼각주를 선택했다. 이 책이 메콩강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주기를 바랐지만 호치민의 간략한 평전이란 걸 난 잊었다.

호치민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지극히 평범한 감상 -.- 그의 원래 이름은 응웬 땃 탕이다. 파리로 건너가 공산주의 모임에 참가하고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를 공부하면서 정체성을 찾아가기 시작하고, 이름도 응웬 아이 꾸옥(애국이란 뜻)으로 바꾼다. 나중에 월맹을 이끌면서 호치민(큰아버지란 뜻)으로 다시 한번 이름을 바꾼다. 그의 개명 과정에서 정체성을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가 신념대로 산 사람이라는 것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가 베트남의 운명에 끼친 영향이라는 뭐 이런 거시적 관점보다는 한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연소할 수 있는 끈기와 용기에 고개를 숙인다.

나는 무엇을 위해 호치민의 자취를 잡으러 떠나려하는걸까.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 언제나 그렇듯, 약간의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떨림. 항공권 외에는 아무것도 준비한 바 없고 호텔도 예약안한 상태. 영어가 통할지 어떨지도 모르는 막연한 상태에서 발생하는 스릴. 바로 이런 것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낯선 곳으로 걸어들어가 시한부로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보는 느낌. 처음에는 다소 거청한 이유로 호치민을 선택했지만 결국 사소한 내 감정적 자극을 위해 떠난다.

p.s. 책의 규모에 비해서 통사고 내용도 허술하진 않다. 그러나 편집이 가독성 절대 고려하지 않은 산만 그 자체. 뒷부분은 완전 스크랩북. 맥락없이 아무거나 마구 배치. 그러나 호치민 묘에 직접 가도 이렇게 자세히  알지 못할 것이다.  별 5개 주고 싶지만 산만함에 별 하나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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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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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의 책을 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찾아보니 <마이너리그>는 없었다. 고로 안 읽었을 가능성이 높고, 마침 새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를 사면 덤으로 주었다.  <마이너리그>를 읽었던 1박2일, 너무 행복했다. 어제 미장원에서 머리말고 있으면서 혼자 낄낄거리고 밤에 졸음으로 내려오는 눈꺼풀을 홉뜨면서 키득거렸다. 오늘 사무실에 나와 노트북만 켜 둔 채 어젯밤 남긴 부분을 마저 읽으며 또 키득거렸다. 남아있는 책장이 줄어들수록 웃을 수 있는 시간도 소멸해가는 것에 안타까워하면서도 계속 키득거렸다.

줄거리인 즉, 고등학생이었던 그 유명한 58년 개띠 만수산 4인방이 마흔이 되기까지의 여정이다.  몸으로 사는 인물형(다리를 떤다!)이지만 어딘지 신비한 두환, 대표적인 떠벌이형이면서 대한민국 남자들의 대표격인 조국, 여자를 제외하곤 마음 쓰지 않는 어설픈 바람둥이 승주, 이 세 친구와 만수산 4인방이라는 것에 늘 거부감을 갖고, 나름 자의식이 강한 본인은 수재라고 생각하지만 일종의 잔머리형이라고 할 수 있는 형준의 이야기이다.  이 네 사람 중 사랑스럽지 않은 인물이 없다.

근 이십여년에 걸친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아주 친근한 이야기들이다. 십대 때 자신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십세, 삼십세가 되면 알 수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십대 때의 나는 서른 이후의 사람에게서 어떤 비장미를 넘어 슬픔을 느끼기 조차했다. 서른이 넘어서 자기 인생에 한 획을 긋지도 못하고 가늘게 살아가는 인생을 버릇없이 가엽게 느꼈었다. 내가 막상 서른이 넘어보니 이 얼마나 무례한 발상이었는지 깨달았다.  사십, 오십이 넘은 삶에는 연민이 없다. 나도 사십이 되고 오십이 될 것이므로  연민이 있다면 내 삶 자체에 연민이 있다고 할까. 그렇다고 두 손 놓고 목 놓아 슬퍼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단지 그렇단 말이고 사십, 오십이 되어서도 생각지 못한 곳에 내가 있을 수 있고, 이제 그런게 인생이지 하는 배짱이 생겼다. 형준이 생각했듯이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한순간 멈추고 돌아보니 그렇게 의식없이 보내버린 시간이 쌓여서 바로 자기 인생이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뭐라고? 나는 좋은 인생이 오기를 바라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아직 인생다운 인생을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내가 무턱대도 살아왔던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이었다고?"

이 소설 속의 4인방은 나와 같은 보통사람이다. 자기 멋에 살아가고 가끔 고뇌하지만 대체로 헤벌쭉대는 보통사람말이다. 마지막 부분에 있는 두 페이지에 걸친 승주와 조국의 맥락없는, 그러나 모든 우주적 주제에 관한 대화를 읽으면서  박장대소했다. 나와 내 친구들이 나누는 맥락없는 대화같기 때문이다. 통념상 마이너와 메이저란 단어를 사용한다면, 대부분은 마이너에 속하고 마이너들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 지배는 메이저가 하지만. -.- 산을 우거지게 보이게 하는 건 나무가 아니라 이끼나 칡같은 "착생 식물"이라고 말했듯이.

 또한 개인사를 통해 드러나는 군부독재를 관통하는 여러가지 사회배경에 대한 유머와 조롱은 은희경만의 색채이다. 이래서 은희경의 소설은 내게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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