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 영화를 아주 안 보는 건 아닌데 어쩌구 저쩌구 감상을 남기는 게 좀 힘들다. 모든 게 습관인데. 기억력은 하루하루 희미해져 간다. 수요일에는 <트립 투 이탈리아>를 예매했는데 예매한 사실조차 잊었다. 갑자기 처리할 일이 생겨서 보러갈 시간이 안 났고, 예매한 사실 조차 잊어서 예매 취소도 못했다. 이런 내 기억력이 화요일에 본 영화에 대해 뭘 기억할까, 싶지만-.-; 내 기억 속에 이 영화는 모든 감정은 진실이라는 명제를 믿는 남자와 모든 감정은 허구며 놀이라는 남자의 맞짱 뜨기로 남아있다. 상당히 흥미롭다.
2. 먼저 사람과 사람은 어떻게 만나는가? 영화가 시작하면 우리는 불안한 카메라의 움직임이 누군가가 힘겹게 짐을 옮기는 뒷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한쪽 어깨에 짐이 있어서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채 걷는 이의 뒷모습을 따라가면 정돈 어수선한 거리를 본다. 건물 정면에서는 가게 오픈 행사에서 흔히 보는 행사 모델들이 마이크를 들고, 거리 풍경에서 도르라진 액센트를 만든다. 관객은 짐 나르는 이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행사 모델은 그의 주머니에 쪽지를 넣는다. 궁금증이 증폭되는데 곧 밝혀진다. 두 사람은 종수와 해미, 초등학교 동창이다. 해미는 종수를 한번에 알아봤고,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을 떠났다가 만난 벤을 종수에게 소개한다. 언뜻보면 줄거리는 러브 트라이앵글처럼 보이지만 그러기에는 벤이 종수에게 갖는 관심과 종수가 벤에게 갖는 호기심의 뿌리가 깊다. 우리는 그 뿌리를 추적하게 되고, 두 사람의 심리전이 스릴러란 장르를 만들어낸다.
3. 해미는 팬토마임을 배운다. 귤을 먹는 걸 표한할 때 귤이 있다고 상상하는 게 아니라 귤이 없다는 걸 잊는 거라고 말한다. 그러면 진짜 입에서 침이 고이고 맛있다고. 벤은 종수와 해미를 집에 식사초대를 하고, 파스타를 만들면서 요리는 요리하는 사람 마음대로 만들 수 있고, 자신이 먹으니 요리는 곧 자신의 제물이 된다는 말을 한다. 세 사람은 무척 다른 환경과 성격을 지닌 거 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무척 닮아있기도 하다. 해미가 하는 말을 종수는 모두 믿고, 해미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벤은 타인의 감정만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도 잘 느끼지 못하고, 모든 감정은 놀이일 뿐이라고 말한다. 대마초를 피우고 웃는 건 진짜 웃음이 아닌 것처럼.
4. 종수는 자신과 너무 다른 사회적 계급의 벤에게 끌리면서도 경계를 품는다. 경계심은 처음에는 해미를 향해 솟아나는 사랑 때문이었지만 나중에 해미는 벤과 종수를 이어주는 메타포일 뿐이었다. 사회, 경제적 계급 분류에서 다른 사다리에 있는 벤과 종수는 심리적, 무의식 계급 분류에서는 소시오패스라는 칸을 차지할 수도 있겠다. 내가 이런 결론을 내린데는 사실 아무런 근거가 없다.
아무런 근거가 없게 연출한 이창동 감독의 연출 덕분이다. 모든 미장센은 단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단서란 게 심증과 결합되어서 확증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나는 어느새 종수를 따라가고 있었다. 종수가 벤을 소시오패스라고 내심 단정하고 정황을 파악하고 물증을 찾아내려고 하고 미행을 한다. 종수가 이리저리 뛰어다는 걸 보면서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벤에게 들킬까봐. 사실 벤이 뭘 하고 있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그러면서 종수가 왜 벤에게 집착하는지, 종수의 정신적 균열이 서서히, 그리고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고집세고 폭력적인 아버지는 폭행으로 재판을 받는 중이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아버지의 폭행에 집을 나간 어머니, 그리고는 이십 여년 만에 만난 어머니가 돈이 필요하다는 말. 종수는 소설을 쓰는데 해미가 팬토마임을 배우고, 벤이 요리를 하고 이따금 같은 부류의 친구들과 지루한 파티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 수 있다. 모두 현실부정을 위한 자신만의 도피법이다.
5. 영화 내내 사건은 사건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고, 인물들의 행동과 그 행동을 보여주는 카메라의 시선이 있는데 마지막 하나의 큰 사건을 위해 모두 수렴된다. 종수의 계획은 반은 계획적이고 반은 무의식적이다. 무의식이 수면으로 올라와 의식 속에 있는 계획과 만나면서 영화 내내 만들었던 긴장이 한꺼번에 폭발한다. 쾅! 올해 가장 강력한 인상을 남기는 영화가 될 거 같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