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보는 케이트 윈슬렛이 주연인 영화고 주변인의 고통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중산층 주부들이 낮에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며 잡담하는 데서 시작한다. 주부의 일상적 모습은 문화를 초월해서 대동소이하다. 양육이란 이름 아래 집단이기주의로 뭉친 계급 속에 자아의 상실을 혼란스러워하는 새라(케이트 윈슬렛)가 있다. 새라의 혼란과 권태, 그리고 놀이터에 아이를 데리고 등장하는 남자, 브래드(패트릭 윌슨). 두 사람의 만남은 아이들을 통해서이다. 그네를 밀어주는 엄마와 아빠. 통념데로라면, 아빠라면 직장에 있어야 할 시간에 아들의 그네를 밀어주는 남자라니. 엄마들 무리에서 심한 권태를 느끼는 새라는 이 '아빠'의 등장에 가장 민첩하고 극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 그랬듯이.
두 사람은 예상대로 불륜 관계에 빠진다. 영화가 두 사람의 불륜만을 묘사했다면 언급할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불륜에 빠지는 이유를 몹시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짐작하겠지만 배우자가 성공 지향적이라 자신의 삶에 그닥 관심이 없다. 객관적으로는 훌륭한(?) 배우자이지만 훌륭하다는 기준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이다. 훌륭한 배우자를 둔 사람들은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깊은 우울의 샘에 빠진다. 그 우울의 샘에서 걸어나올 수 있는 원천은 같은 처지의 사람이고. 나는 나와 달라도 좀 어울려야 한다는 입장인데 내가 몹시 애정하는 후배는 나와 달리 아주 단호히 유유상종을 신봉한다. 사람은 나이들어서 맟추는 게 아니라 맞는 사람끼리 어울리는 게 맞다고 늘 말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 후배의 말은 꽤 유효하다.
이 영화에서도 새라와 브래드는 같은 처지고, 같은 육체적 욕망을 지니고(배우자와 섹스를 안 해서 성적 불만족이 절정이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가정을 깰 수 없다는 도덕관을 지녔다. 바람을 피우는데 한 사람이 사생결단으로 덤비면 호러가 되는데 두 사람은 아주 찰떡 궁합이다.
이 커플 이외에 주변인이 등장한다. 전직 경찰이지만 아마도 사람이 죽는 폭력 사건에 연루되서 트라우마를 간직한 남자, 그리고 소아성욕자인 변태가 등장한다. 두 사람의 결핍은 서로에 대한 분노와 그 다음에 이루어지는 폭력으로 표현이 된다. 새라와 브래드가 결핍에 대한 해결책으로 불륜을 선택한 반면에 변태와 전직 경찰은 폭력으로만 나타난다.
인간에게 결핍은 행동을 추진하는 힘인 동시에 이상 심리를 만드는 동력이기도 하다. 새라와 브래드가 서로 바람을 필 수 있는 이유도 결핍이고, 변태성욕자가 변태성을 드러내고, 전직 경찰이 변태성욕자에 대한 증오를 드러내는 이유도 결핍이다. 결핍이 박탈로 작용해서 부정적 결과를 생산할 때와 라깡의 이론대로 생산적으로 작용할 때의 경계는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