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생거 사원 - 발췌 지만지 고전선집 392
제인 오스틴 지음, 이미애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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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여주인공들>에서는 다양한 소설 속의 여주인공들이 잠시 쉬고 가는 민박집이 등장한다. 하지만 소설 속의 여주인공들은 대개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터라 그 곳에 살고 있는 소녀에게는 짜증거리 그 이상은 되지 못했다. 묘하게도 어떤 소설이든 여주인공이 방에 들어서면 여러 명의 남자들이 경탄의 눈으로 돌아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현실 같지 않은 외모에 무지가 사랑스러움으로 변환되는 여주인공들은 좋을 때도 있지만 너무 비슷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인 <오만과 편견>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은 예외인 셈이다.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와의 첫 만남에서 '봐 줄만 하다'라는 무례한 소리를 들었고 외모가 아닌 총명한 두뇌로 감탄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제인 오스틴의 다른 소설 <노생거 사원>은 그런 면에서 아주 큰 예외인 셈이다. 오스틴의 재치와 풍자는 이번 소설에서 아주 빛을 발한다. 오스틴은 <노생거 사원>의 여주인공 캐서린 몰랜드를 묘사하면서 아예 캐서린이 여주인공답지 않은 평범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후에 가꿔서 가장 예쁜 시기에도 '이제 거의 예쁘다'라는 소리를 듣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면 두뇌 쪽은 어떨까. 말솜씨로 고집불통 다아시를 압도하던 엘리자베스 베넷 수준을 떠올렸다면 기대를 꺾는 것이 나은 수준이었다. 보통의 여주인공들이 추종자를 줄줄 달고 다녀야 했다면 캐서린 몰랜드 양의 일상은 고요 그 자체였다.

한적한 시골 생활을 하고 있었고 특별한 가난도 특별한 풍요도 없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그녀를 낳으면서 돌아가셨다는 비극적인 출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위로 오빠가 셋, 아래로도 동생들이 여섯인 10 남매였다. 전부 사이도 좋았고 몰랜드 가족은 건강했다. 이 여주인공답지 않은 평범한 숙녀가 굳이 독특한 점이 있다면 '망상'이었다. 고딕 소설을 많이 읽어서 낡은 성이나 사원에 대한 환상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평범한 외모, 잘 속는 머리 어느 것 하나 여주인공답지 않은 캐서린이었지만 그녀가 특별한 것이 하나 있다면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씨였다. 우둔한데가 있었지만 옳고 그름을 분간할 줄은 알았다.

그런 캐서린에게 달콤한 봄날이 찾아온다. 옆집의 지주 앨런 부부가 젊은 숙녀인 캐서린을 데리고 휴양지인 바스로 간 것이다. 앨런 부인은 지나치게 치장에 신경 쓰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좋은 사람이었고 즐겁게 말벗이 되어주는 젊은 숙녀에게 사교계의 즐거움을 선사하기로 결심한다. 그렇다고 캐서린이 파티장에 나타났을 때 모든 신사들이 주목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캐서린은 따분한 시간을 보낸다. 다만 춤이 끝나자 두 명 정도의 신사가 그녀를 예쁜 소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녀의 마음은 다소 우쭐해졌다.

그녀의 일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틸니씨가 등장하고 이사벨라 소프라는 젊은 숙녀를 만나면서 부터였다. 그 때부터 그녀의 일상은 움직인다. 그렇다고 해서 소용돌이 정도는 아니고 배 위에서 멀미하는 정도 수준의 흔들림이었다. 오스틴의 작품은 거의 읽어보았지만 노생거 사원은 미처 읽어보지 못했던 소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읽고 나니 좀 더 빨리 읽어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오스틴의 재기발랄함도 그렇지만 주인공 캐서린 몰랜드의 우둔함까지 사랑스러웠던 것이다. 무엇 하나 감상 소설의 여주인공답지 않다는 묘사가 더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 노생거 사원에 품는 그녀의 비정상적인 상상도 즐거웠다. 고딕 소설이었다면 방 어딘가에 비밀의 방으로 가는 통로가 있었겠지만 그녀가 묶게 된 노생거 사원의 실상은 하인들도 잔뜩 있는 활기찬 곳이며 현대적으로 잘 꾸민 곳이었던 것이다. 많은 편견들이 부서지는 순간을 보는 것도 오스틴이 소설을 하찮게 여기는 시각들을 비난하는 순간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로 절묘하게 재구성된 <제인 오스틴의 미로>에서는 오스틴의 다른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이 엘리자베스 베넷을 비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의 후광에 밀려 자신들이 빛을 잃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스틴의 재치로 인해서 이번 <노생거 사원>의 캐서린 몰랜드도 엘리자베스 베넷 못지않았다. 설사 그녀의 외모나 교양 수준이 여주인공답지 않았다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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