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삼아 지방에서 올라오신 아빠는 샤갈전을 보고 싶다고 하셨다. 내년이면 환갑이시고 특별히 예술적 취향이 높으신 것도 아니고 문화적으로는 오지 중의 오지인 곳에서 사시는 아빠가 서울에 오셔서 하고 싶으신 일이 샤갈전을 관람하시는 것이라니, 평소 문화 예술을 사랑하고 즐기고자 하시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우리 아빠도 참, 대단한 분이구나 싶었다.
마침 나도 선선해지는 가을이면 보러 가야겠다 하고 벼르고 있던 전시라 더위야 미술관 안에서는 힘쓰지 못하겠거니 생각하며 먼 여행길을 떠나듯 지하철을 탔다. 흔히 샤갈을 '색채의 마술사'라고 표현하지만 그가 색을 쓰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는 못하겠고 그저 그의 작품만이 지닌 색감과 동심, 천진난만한 기운 등을 참 좋아했던 터였다.
그러나 100여점이 넘는 작품을 가져온 사상 최대의 전시라고 선전한 것에 비해서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감동은 기대보다는 덜한 편이었다. 니스의 성서박물관에서 느꼈던 그의 작품과의 환상적인 조우의 순간들을 다시 한 번 이 땅에서 맛보길 바랬던 욕심은 지나쳤던 것일까. 유대인 극장 패널화인 <문학> <음악> <연극> <무용> 네 작품에서 오직 약간의 떨림을 느꼈을 뿐이다.
참 우스운 일인 듯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나를 자극한 것은 샤갈의 그림이 아닌 관람객이었다. 아무리 방학이라고 해도 아이들 숙제로 엄마들과 손잡고 나왔다고 해도 평일 낮시간에 미술관에 그렇게 사람이 많은 것은 처음보는 광경이었다. 입구에서 2층, 3층 전시실까지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 줄을 만들 정도였다. 우리나라 문화 양태라는게 한 곳에만 쏠리는 걸 십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의외였던 것은 관람객의 진지한 태도였다.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작품을 뛰엄뛰엄 보는 사람도 없었고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든 작품들을 몇 분여에 걸쳐 하나씩 진지하게 감상했다. 5-6학년 정도로 되어보이는 여자아이와 엄마의 대화 역시 잊혀지지 않는다.
아이 : 엄마, 나 르네상스로 쓸거야.(감상문을 말하는 것이겠지)
엄마 : 르네상스는 16세기야.(오옷, 교양있는 어머니로군)
아이 : 아니, 그게 아니라 샤갈하고 16세기 르네상스하고 비교할 거라고...(헉, 초등학생이 '비교'라는 관점에서 감상문을 쓸 생각을 하다니...16세기 르네상스보다는 당대의 추상화가들과 비교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충고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외에 드문드문 엿들을 수 있던 말들도 모두들, 나름대로 자신의 관점과 역량 하에서 작품을 이해하려는 대화가 대부분이었다. 학력이 높은 어머니들이 집안에만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이렇듯 아이들 교육 수준의 향상에 일조하는 식으로라도 뒷받침하는 형태로라도 기능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물론 중산층 이하 계층 아이들의 문화 소외 문제도 생각해볼 수 있겠고 엄마들의 지나치거나 유행만 좇는 교육열을 문제삼을 수도 있겠지마는... 지난번 현대미술관에서 어떤 엄마는 많아야 네 살밖에 안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에게 "너는 그림 보기가 싫으니. 이렇게 그림 볼 줄도 몰라서 앞으로 어떻게 할래"하고 나무라기도 하더라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