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눈 좀 보고 싶다.부산에 살면서 눈 보기 너무 힘들다.폭설 피해로 힘든 분들도 계시지만 말이다.

어디 눈 속에 갖혀 있고 싶어...이 노래 들으며

 

그리고 눈 속에 묻혀서 앙헬로풀로스의 영화들도 보고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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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8-01-24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부산은 눈이 내리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역시 그렇군요.
이라크로 기억하는 데 그곳에도 100년만에 눈이 왔다고 하는 데 부산에서도 곧 눈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드팀전 2008-01-24 13:19   좋아요 0 | URL
처가집이나 본가에 가면 눈을 보곤 합니다.
작년에는 처갓집에서 아기 눈사람을 만들었는데..^^

웽스북스 2008-01-24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7년쯤 전이었나? 부산에 사상 유례없는 눈이 많이 내렸던 적이 있었어요-
저는 하필 그 때 부산엘 갔었는데, 길은 미끄럽고 교통 체증이 심각했는데도
부산 시민들은 마냥 싱글벙글 엄청 좋아했던 모습들이 아직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어요

그 때도 부산에 계셨나요? ^_^

어, 그러고보니 메인 사진,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진이네요~ 얼마 전에 전시회 다녀왔었는데, 저 사진 속 아이들의 눈빛이 참 뇌리에 박히더라고요.

드팀전 2008-01-24 13:21   좋아요 0 | URL
네.몇 번 있었어요.새벽에 와이프랑 눈길 걷고 ...혼자서 착한 일 해보겠다고 꼭두새벽에 아파트 앞 쓸다가 무리해서 몸살나고 그랬어요.지하 주차장에서 못빠져 나오는 차도 기사랑 둘이서 모래 넣어가면서 올렸는데....사흘동안 몸살에 시달렸다는...그래도 눈이 좋아.

2008-01-24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5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rr 2008-01-25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얼마전 들은 이야긴데, 부산에 눈이 내리지 않는 건 기후가 점점 따듯해지기 때문이랍니다. 이것도 일종의 이상기후에 해당한다더군요.
음.... 하나마나한 소리였나요?
 

아기가 새벽에 깻다.토닥여서 재웠는데...내가 잠이 오질 않는다.5시 30분 부터 눈이 말똥 말똥하다.조금 있으면 출근 준비도 해야되고...오늘은 일주일 중 가장 바쁜 날인데 회사에서 졸지나 않을런지...

아침에 알라딘 산책을 나왔다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신간을 만났다.책 제목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음악은 사회적이다>(Musical Elaborations ) 이다.

내가 가방끈을 좀 늘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을 때 몇 가지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떠올려 본 적이 있다.유치원 아이들 장래의 꿈처럼 요리조리 왔다 갔다하는 꿈들이었다.대략....문화연구,미학,음악사회학,비판사회학...뭐 이런 정도였다.공식적으로 가방끈을 늘리지는 못하고 있긴 하지만 이런 분야는 지금도 관심이 많고 그냥 교양 삼아 책을 읽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어차피 박사과정까지 공부할 것 아니라면 달려들고 싶지도 않다.(먹고 살기,아기 키우기 정말 팍팍하다.)

어디가나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고 또 대충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나는 "석사쯤 되면 다들 뭔가 다르겠거니 했다." 물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좀 다르다.길게 보고 공부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그런데 '대략 석사'들은 '대략 난감' 이다.가방끈 짧은 내가 이해하는 개념들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물론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고 그들이 내 나이가 되면 더 앞서가리라는 생각은 있다만...아...아닌 경우도 있다.내 나이 또래의 늦깍이 학생 한명을 안다.

부산에 있는 한 대학 사회학과 대학원에 다니는 사람이 있어서 한번 호기심에 물어본적이 있다."대학원 다닐만해요? 수업은 어떻게 해요? 나도 한 번 다녀볼까 해서"

 그 사람 왈.."나 일반 대학원 인데.." 그 말에는 자기는 일반대학원을 어렵게 다니고 있는..즉 저녁때 직장인들을 상대로 하는 가방끈 늘려주는 야간대학원과는 좀 다르다는 뉘앙스를 품겼다.

일단 그 프라이드가 좀 웃겼지만 그 대학원에서는 뭘 배우는지 궁금해서 교수진들의 성향을 물어봤다.

대략 구조기능주의자들이 좀 많아보였다.그러다가...000 교수는 ...음 '일상성'이라고..(약간 뜸들였다.한 번 흘깃 보더니..'너가 이 사람 알까'하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였겠지) 앙리 르페브르라고 그런 '일상성' 쪽에서 유명하지요. 라고 했다.^^

그래서 속칭 비판사회학이라든지 푸코나 하버마스 부류들은 없냐고 물었더니.그녀가 한 말은

"음...푸코...그 동성연애자....뭐 현대사회학 시간도 한 강좌 있어요.곧 배우겠지요."했다.

내가 보기엔 아무것도 몰랐다.

어떤 어린 동료 책상에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가 있었다.내가 보기엔 아마 그 친구가 추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그 사무실에서 그 책을 추천해줄 사람은 그 사람 밖에 없어보이니까...

알라딘의 어떤 님의 서평에 '대학생 300만의 역사 인식 수준을 초등학생 수준을 만들어 놓은 책'이라고 한 걸 본 적이 있다.나는 그 의미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나도 물론 대학교때 그 책을 가지고 공부했다.하지만 그건 분명히 그 당시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국정교과서의 우편향 속에서 다른 공간으로서 숨통을 틔여준 것이다.이것은 뉴라이트의 역사관과도 상관이 없다.실제 훨씬 균형잡히고,다양한 역사 인식의 방법론으로 서술된 책들도 많다.민중없는 민중사관보다 미시사 역사서도 나오지 않는가...하긴 그 친구가 대학다닐때 열혈 NL이라고 했던가..

어쨋거나 호기심 충족을 위해 이 책 저 책 뒤적이고 있는 나에게 에드워드 사이드의 이 책은 군대에서 애인에게 받은 편지처럼 반갑다.(나는 방위 출신인데도 신병 훈련소에서도 편지를 받았다.물론 뒤에 가면 그녀가 등에 대고 칼질을 여러번 한다..뿡뿡...잘 사나 모르겠네..이젠 행복해야돼 ^^)

이런 빠샤 같으니라구....책 이미지 넣기를 해야지..

제목이 멋있다.

그런데 이런 상식적인 말이 멋있어 보인다는 것은 이런 상식으로 부터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통속적이고-또 경제 환원주의로 곧 잘 왜곡되는- 마르크스 미학의 편협성(?)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는 말은 보수주의자들의 대표적인 레테르이다.그런데 그 말은 어떤 의미에서 맞다.이렇게 한 겹 들어가서 뒤틀어보면 말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모든 것이 다 사회적이니까.."그런데 불행한 것은 현실에서 만나는 보수주의적 미학관은 '예술 순수주의'이다.

 

나는 극단적인 예술 순수주의자들을 만나곤 한다.그들은 종종 '예술'안에 모든게 다 있다고 떠벌인다.인생도 세계도 사회도 우주도...한켠로 들으면 그렇기도 하다.그런데 이런 태도는 너무 나이브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마치 바이칼호 속에 물고기들은 결국 호수안에서 육지들로부터 둘러 쌓여 있으니 전부 잡힌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라는 태도다.그 순수지향의 철딱서니 없는 순수함에 박수를 보낸다.물론 이런 생각을 옹호하는 사람은 '당신이 깊은 예술의 속살과 접신'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신비주의전략을 내세우기도 한다.내가 접신의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접신이 과연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인지,또는 어느 정도의 접신의 강도가 예술을 이해하는 스파크를 일으키는지 등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어쨋거나 종교적 느낌이 들정도로 예술과 접신한 분들과는 거리를 둔다.불행히도 종교가 세속적으로 종교답지 못한 것처럼 그런 순수지향 예술가들 역시-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예술의 순수지향과 자신의 세속성을 곧잘 화해시키곤 한다.(물론 이런 접근은 다분히 그런 예술가들에게 비비꼬인 나의 편견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음악은 사회적이다>를 들어가보니 미리보기가 있다.박횽규 교수의 옮긴이의 글 중 일부다.

"원제목 <Musical Elaborations >은 음악을 과도하거나 무리하게 애써서 변화시킨 이라는 뉘앙스가 있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작곡가나 연주가에 의해 탄생한 음악이 사회와 역사 속에서 세련되어 진다는 긍정적인 것이다.즉 음악과 사회의 상호작용이 핵심인 셈이다.우리나라는 음악을 사회적이라고 보지 않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음악은 사회적이다'라고 보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견해는 훨씬 복작하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쓴 책 서론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책에서 음악을 통한 개인적인 경험의 이상적인 순수성을 가능한 한 의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음악이 가장 내면적이고 가장 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에도 어김없이 작동하게 되는 공적인 맥락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의식하고자 했다."

"반복하여 말허건대,나는 이 글을 통해 음악학에 대항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나의 주된 관심은 서양의 클래식 음악을 문학 비평가이자 음악가인 나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 영역으로서 관찰하는 동시에  특히 현대 문화연구 분야에서 최상의 연구 성과를 얻고자 하는 연구자들이 주목해 볼만한 여러 관점과 사례를 그 속에서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서양 클래식에 관심이 없는 분들께는 아마 지루할지도 모르겠다.내가 '원더걸스'의 안소희라는 아이가 얼마나 유명한 애인지 최근에 알게되고 지루해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작년에 이효리보다 유명했다고 하데..."TELL ME ..Te Te...TELL ME"

근데 지금 몇 시야...나 출근 준비해야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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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1-23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ㅍㅍ...책 안보고 리뷰 쓴 것 같다.이걸 그냥 리뷰로 올려도 뭐라 할 사람 없겠는걸..페이퍼나 리뷰나 요즘 유행하는 말로 탈영토화 되어버려서..

mong 2008-01-2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제목이 심하게 끌리자나요!
제목은 이러구선 등에 칼을 꽂는건 아닐지 흐흐
읽다보니 페이퍼가 더 재미있어지는건 뭐져 음냐

드팀전 2008-01-24 13:01   좋아요 0 | URL
몽은 내게 칼질하지마요...등껍질이 천년 묵은 거북껍질이어서 이제 죽이려면 아킬레스와 동일한 방법 외엔 힘들어요^^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 - 한 젊은 역사가의 사색 노트
이영남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어렸을 때는 모두 가루약을 먹는다.칼칼한 분말을 입 안에 털어넣가 쉽지 않다.때로는 씁쓸한 가루 한 줌이 입 천장에 붙어서 목구멍을 화공약품 처리장 처럼 만든다.어른이 되니 달라진 점이 약 봉투에서 가루약이 사라졌다는 것이다.언제부터인가 알약을 꼴깍 꼴깍 잘도 넘기게 되었다.약 먹는게 그나마 쉬워졌다.

역사학자 이영남이 쓴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는 당의정을 씌운 푸코 개론서이다.이 책은 '푸코'에 대해 언제나 알고 싶었지만 차마 '푸코'에 대해 물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이라면 환영할 만한 책이다.저자는 개인적 공부와 집단 학습을 통해서 자체적으로 소화한 푸코를 비교적 평이하게 서술하고 있다.먼저 번역투의 문장을 앞뒤 읽어가면서 맞추어 보지 않아서 좋다.전문적인 푸코 연구자들처럼 철학적 용어들의 남발 속에서 퍼즐 맞추듯 읽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좋다.그런 의미에서 '푸코'의 '푸'자에 대해 관심만 있었던 사람에게는 엔돌핀을 돋게 할 책인 것 만은 사실이다.

책 제목을 잘 살펴보자.책 표지의 디자인에 제법 이중적이다.보시다시피 책 제목은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이다.색깔로 구분해서 보면 앞과 뒤는 흰 글자이고 <...역사의 문법을..>은 검은 글자이다.따로 따로 떼어 보면 제목이 두 개 처럼 보인다.흰 글자 부붐만 보면 <푸코에게 배우다>.주어와 서술어만 갖는 제목이다.책 제목의 디자인에서 사실 이 책의 기회과 구성이 들어있다.재미있게 그러면서도 효과적으로 잘 뽑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은 제목처럼 <푸코에게... 배우다>와 <...역사의 문법을...>이라는 2막으로 구성되어 있다.(실제로 책이 그렇게 1,2부로 나누어져 있다는 말은 아니다.) 저자는 푸코의 삶의 궤적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일종의 평전 하이라이트라고 보면 된다.디디에 에리봉의 저작 <미셀 푸코>가 중심적인 롤을 맡고 있다.또한 푸코의 콜레드 주 프랑스 강의와 미국에서의 인터뷰 내용들이 푸코라는 인물에 대한 조감도를 그리게 해준다.디디에 에리봉의 <미셀 푸코>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1분 30초짜리 극장판 예고를 보는 느낌을 줄 것이다.저자는 푸코의 삶을 따라가면서 개인적 삶의 역사가 어떻게 그의 작품과 관련이 있는지를 쫓는다.잘 알려져 있다시피 푸코는 '소수자들의 아더왕'이었다.푸코 자신이 총명함에도 불구하고 모난 성격으로 어렸을 때부터 광인 취급을 받아왔다.또한 청년기부터 그는 은밀하게 욕망할 수 밖에 없는 동성연애자였다.사회에서 이런 개인적 포지션이 <광기의 역사>라든가 <감시와 처벌>,<성의 역사>같은 저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당연히 저자가 강조하고 감탄하는 것은 개인의 특수성을 내면 속의 분노나 분출로 끝내지 않고 사회적 보편성으로 확장해낸 푸코의 역량이다.저자는 푸코의 삶에 영향을 준 사건으로 앞의 두가지 외에도 정신병원에서의 근무,스웨덴 웁살라와 튀니스로의 외유,68혁명 등을 언급하고 있다.

저자가 푸코의 평전 압축에 할당된 종이를 모두 소진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푸코를 이해하기 위해,또는 푸코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위해, '호구조사' 부터 시작해준 것쯤으로 이해하면 된다.저자는 '침묵하는 역사'를 부활 시켜 '현재를 낯설게 보게 반든' , '현재의 역사가' 푸코에게 시선을 모은다.그래서 주로 언급되는 책이-푸코 저작 중 가장 많이 읽히고 또 쉽게 읽히는 -<광기의 역사>,<감시와 처벌>이다.역사-철학자로서 푸코를 상정하기에 이 두 책만큼 용이한 것도 없을 법하다.푸코가 이 두 책에서 말하고자 한 바를 따로 정리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푸코는 '계몽주의'와 '근대성' 이란 것에 시비를 좀 걸었다.그는 근대의 합리적 세계가 어떻게 배제를 통해 구축되었는지를 설명한다.푸코가 관심을 갖게 된것은 '권력-지식-담론' 이란 것들이 어떻게 신체에 작동하여 규율을 만들어내는지에 있었다.결과적으로 말하면 '권력은 모든 곳에 내재한다'는 것이었다.또한 마르크스식의 거대담론으로서의 권력이 아니라 세계의 곳곳에 나름의 정부를 세운 미시권력들이 다층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상정했다.그래서 푸코의 저항은 그런 미시적 지점에서 가능성을 본 것이다.그의 감옥정보모음GIP에서 활약과 실천적 지성인으로서의 모습은 이런 도상에서 이해되고 있다.

저자는 역사학자답게 2막으로 넘어가면서 역사가로서의 푸코를 이야기한다.<...역사의 문법을..>의 차원이다.저자는 푸코가 추구한 연구의 엄밀성과 열정을 상찬하고 실증주의적 접근에 큰 박수를 보낸다.또한 정치적 사유를 통해 임상 역사가로서 전문 역사가들에게 거대한 자극이 된 푸코의 업적을 칭찬하다.푸코의 사유를 동원하여 한국의 역사를 빗대어 보는 장도 따로 마련한다.저자는 박정희 정권의 근대적 '효율 우선주의' 프로젝트가 사회적으로 민주주의적 가치를-정치적 민주화만을 뜻하지는 않는다-부정하고 진화해 나갔다고 지적한다.우리 사회에 그동안 저류에 깔려있다가 이제 표면에 극적으로 등장할 '기업사회'가 대표적인 예가 될 터이다.이제는 더이상 숨어서 말할 필요가 없고,머뭇 거리거나,두려워 할 필요없이,극단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효율성'과 '경쟁력'의 시대 말이다.

저자는 책 말미에 가서 우리의 역사학과 역사 인식이 참고해야할 방향으로 미시사를 예로 들고 있다.저자가 부정하고 있지만 얼필 보면 푸코의 역사철학을 미시사로 끌고 오기 위해 앞에서 길게 푸코를 인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법도 하다.(저자는 분명히 푸코가 미시사가는 아니라고 말했다.) 미시사를 통해 거대담론 속에 사라진 개인들을 복원하는 것.그리고 이를 통해 '개인의 삶'과 '사회적 삶'을 네트워킹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문역사가 뿐망이 아니라 누구나 해봄직한 이런 미시사류의 임상 역사가가 되기 위해 인문학적 자기 수양을 강조하고 있다.(저자는 미시사와 인문학적 소양의 강조를 위해 지금 서재 왼쪽 상단에 있는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을 예로 들고 있다.마침 이 책을 작년에 감명깊게 읽었으니 이런 재수가...)

물론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운다>에도 기획의 특성상 약점이 없을 수는 없다.역사학자가 감동한 푸코가 되다 보니 푸코를 역사학으로 소급시켜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저자는 푸코의 책들이 도서관에서 사회과학코너에 어떤 것은 철학 코너에 어떤 것은 역사 코너에 있다고 말했다.그만큼 푸코는 멀티 플레이어다.물론 역사가의 입장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긴 했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FA 시장에 나온 푸코라는 선수를 '그는우리 쪽 사람이야'라고 외치는 섭외 에이전트의 인상이 든다.(물론 개인적 편견임을 밝힌다.내 거의 모든 글이 다 그렇듯이) 이정우 교수가 푸코가 사회과학자로 환원된 것에 대해 비판했듯이 또한 이 글 역시 역사학자로 환원되는 푸코라는 지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가 다루고 있는 푸코의 저작이란 것이 <광기의 역사>,<감시와 처벌>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도 지적할 만하다.물론 간간히 <지식의 고고학>,<성의 역사2,3>,<말과 사물> 등이 등장한다.그렇지만 상대적으로 앞의 저작에 비해 확실히 빈약하다.푸코의 중기 사상에 해당한다는 권력과 지식의 문제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푸코 용비어천가'에서 '푸코 비판'을 요구하기란 사실 어려울 수 있다.하지만 독자들을 위해 푸코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짧게 나마 언급하면서 넘어갔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욕심 아닌 욕심이 생기기도 한다.예를 들어 헤이든 화이트나 폴 베느 그리고 저자가 역사학자로서 그렇게 칭찬한 푸코의 역사적 사료 분석에 대해 엉터리라고 반대하는 학자들도 많았다.<임상의학의 역사>에 대해서는 정신분학학자들이 푸코의 지엽적인 자료 채택에 대해 비판 했다.그외에도<광기의 역사><감시와 처벌>등에서 푸코의 역사적 증거가 지나치게 선별적이고 왜곡적이고 또한 포괄적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았다.<푸코>의 저자 메르키오르는 상당히 삐딱한 시선으로 '푸코 역사의 객관성은 역사의 여신 클리오에게 일급의 칭찬을 퍼부었던 세기에 이루어졌던 일급의 역사 연구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라고 악담을 퍼붓는다.또한 저자가 푸코 사상의 특징으로 말하는 '불연속성' 즉 에페스테메의 단절에 대해서도 그 만큼의 비판이 존재한다.심지어 푸코 자신도 후기에 오면서 '불연속성'에 대해 어떤 보완적 태도를 취했다고 알고 있다.장 피아제는 푸코의 사상을 '근대성에 대한 객관적이고 타당한 혐오라기 보다는 그저 근대성에 대한 막연한 혐오'라고 평가했다. 이와 연계하여 유명한 푸코와 하버마스의 논쟁 처럼 푸코의 '반계몽주의','반이성주의'와 그것이 갖는 철학적 문제의식 등에 대해서도 저자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그저 '역사적 실증에 바탕을 둔 근대성의 반성'으로서만 푸코를 말하고 만다.

한 가지 기획에서 푸코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한다.존중해줘야 할것은기획 의도다..이러 저런 이유로 사실 나는 이 책에 별 셋을 주고 싶었다.그렇지만 푸코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이 책을 볼 필요도 볼 일도 없다는데 생각이 머물렀다.대신 있어 보이는 레스토랑 앞에서 머뭇거린 경험이 있는 -나를 비롯한-사람들을 떠올렸다.

 '푸코' 식당이 있다.정통 프랑스식 레스토랑이라고 한다.인테리어도 그럴싸하고 값도 비싸보인다.레스토랑의 협력업체 또는 경쟁업체로는 '바슐라르', '캉길렘','레비 스트로스','데리다','들뢰즈','하머마스' 등 그럴싸 해보이는 식당들이 있다고 한다.메뉴도 대충 어딘가에서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다.그렇지만 또 낯선 요리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식당에 들어가보고 환상적인 맛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한다.또 어떤 사람들은 먹기 너무 힘들다고,입맛에 안든다고 다신 안가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는 지나가면서 '푸코' 간판만 보고 '언제 한번 맛이나 볼까 '하는 사람에게 좋은 책이다.별로 비싸지도 않다.주방장이 대충 한국 입맛에 맞게 만들었다.가격은?.. 실제 프랑스 요리값이야 비싸겠지만 책으로 만나는 푸코야 '그래 봤자'  종이 값이다.이제 이 리뷰도 끝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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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01-21 15:32   좋아요 0 | URL
근사한 제목에 걸맞는 근사한 리뷰입니다.
 

지난 토요일,영화 <색계>를 볼 뻔했다.사실 그 영화의 대략적 내용은 알고 있었다.만약 영화를 봤다면 '욕망과 타자'의 관계에 대해 한 번 글을 써보고 싶었다.

지난 한 해 나는 영화관을 가지 못했다.아기가 자는 사이에 나누어서 본 DVD가 사실 전부다.우연히 영화 <색계>의 CD를 구했다.아는 후배가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싶어했다는 것을 알고 다운로드 받은 것이다. 그 친구는 득의만만하게 "이 영화가 상당히 오래 업로드되지 않았는데 최근에 풀렸어요."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영화<색계>를 보지 못했다.집에서 보려는데 자막이 없었다.자막 파일은 따로 있었는데 어떻게 풀어야하는지 몰랐다.

사실 나는 컴퓨터에 무지 약한관계로 다운로드니 업로드니 하는 것에 젬병이다.솔직히 MP3 다운도 아직 못받아 봤다.아...딱 한번. 고클래식에서 몇 천원 주고 조지 셀이 연주한 베토벤 9번 교향곡을 받은 적이 있다.

2007년 말 영진위 보고서에 의하면 국민의 47.3%가 불법다운로드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영화쪽에서 불법다운로드 피해액을 연간 3천 3000여 억원으로 추정하고 있다.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배우 안성기나 박찬욱 같은 감독들이 불법다운로드 방지 캠페인을 하지만 그것을 막지는 못한다.불법다운로드에 대한 통제는 몇 가지 방식이 있는 듯 하다.우선 개인의 도덕문제로 치부하는 방식이다.즉 타인의 지적 재산을 훔치는 것은 나쁘다라는 윤리적 접근방법이다.그런데 이런 도덕적 각성을 요구하기에는 사람들이 그렇게 클리어하지 못하다.또 다른 측에서는 불법다운로드 자체를 없애기는 힘들다는 현실 토대하에서 다운로드를 합법화하는 방안을 주장한다.일종의 온라인 플랫폼 방식이 그런 예이다.예를 들면 다운로드를 대행하는 합법적인 업체를 선정하고 일정정도 사용자에게 비용을 지불하게 하는 방식이다.그 대신 그 외의 다운로드에 대해서는 엄벌주의를 채택하겠다는 것이다.

지적 재산권은 사실 논쟁적인 주제이다.재산권의 성격 자체도 그렇고 역사적 맥락에서도 그렇다.지적 재산권이라는 담론에는 선진국의 이해가 대거 반영되어 있다.장하준식으로 말하자면 '사디리걷어차기'가 예가 될 듯하다.가장 저열하면서 치졸한 재산권 논리가 인류의 보편적 건강을 위한 약품에 대한 소유권같은 것들이다.어쟀거나 제조물에 대한 재사권보다 복잡한 것이 문화적 창작물에 대한 것이다.에 영화나 음반같이 문화 상품인 경우는 제조물과 또 다른 잣대가 적용되기도 한다.나는 개인적으로 지적 재산권에 대한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지지하지 않는다.이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일부 정치적 다운로더 중에는 그들이 말하는 '불법적' 다운로드가 '저항'의 한 양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기때문이다.그들은 자본과 동일시해도 상관없는 메이저 영화사나 투자사들에 대한 일탈적 공격의 하나로 '다운로드'를 말한다.이는 '헤커'들의 논리와 유사하다.나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 '무정부주의적 정보공유' 태도에 공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개의 다운로더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지적 재산권에 대한 '아나키즘'적인 접근이 아니다.오히려 가장 대척점에 있는 논리이다.가장 저렴하게-또는 공짜로-타인이 만든 상품을 거저 얻는 경제적으로 가장 이기적이며 합리적인 것이다.물론 영화관에서 보는 사운드의 웅장함과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매력등은 기회비용으로 생각할 수 있다.이런 비용은 언제나 꺼내 볼 수 있고 급하면 나누어 볼 수 있는 비용 등에 의해 충분히 상쇄된다.

문제는 이 '자본주의적 합리성'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낳는가이다.더 큰 것은 이런 사소한 '합리성'이 모여서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가하는 문제이다.그리고 이런 '합리성'에 대해 서로 씩익하며 웃을 수 있는 '침묵의 카르텔'이 또 다른 영역까지 확장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문제이다.이건 개인의 도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알라딘의 중복 논쟁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산업적이며 문화적인 문제이다.물론 어떤 논의가 이루어진다하더라도 불법적 다운로드가 근절되진 않는다.그걸 기대하지도 않지만 한번 클릭을 하면서 그런 '사회적 연결망'들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것도 다운로드만큼 해가 되진 않을게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운로드에 참가하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다운로드가 옳바른 것은 아니다.또한 <꼬뮨주의>저자들이 그랬다는 말처럼 '세상이 변하지 않으니까라는 논리가 내가 변하지 않을 변명'이 되어서도 곤란하다.

물론 답은 없다.다운로드를 플랫폼화 하더라도 불법다운로드를 전부 포용할 수는 없을것이다.더싸고 저렴하게 받는 방법에 불법이니 뭐니 하는 것은 중요치 않을 수도 있다.

나의 윤리를 타인에게 강제하지는 못하겠다만 .... 자제할 수 있다면...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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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바스코 포파 지음, 오민석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늑대가 심장을 한 웅큼 물어 뜯었다.황금빛 누런 이빨 사이로 너덜 너덜해진 심장의 살점이 보인다.더러운 입 주변으로 선홍빛 붉은 피가 그대로다.

후텁지근한 야생동물의 콧김. 100년 동안 닫혀있던 창고의 쾌쾌함을 일시에 쫓는다...번뜩인다.그 야생 동물의 회색 빛 털이...번뜩인다... 화살촉보다 날카로운 눈빛.

우아하다....모욕당한 절름발이 늑대는....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앞에 잠시 움찔하며 한 두걸음 뒷걸음질 친다.

1.모욕당한 절름발이 늑대여/그대의 굴로 돌어가라/가서 잠들라 /짖는 소리가 얼음으로 변하고/저주의 말이 녹슬고/횃불들이 흔한 사냥 때문에 죽을 때까지/모두가 빈손으로/자신 속으로 떨어져/절망 속에 자기 혀를 깨물 때까지.............(중략).....나는 네발로 기어 그대 앞으로 간다/그리고 그대의 은총 속에서 울부짖는다/마치 그대의 위대한 초록 시대 속으로 들어가듯이/

그리고 나는 내 오래된 절름발이 신,그대에게 기도한다/그대의 굴로 돌아가라고

번역된 시를 본다는 것은 낯선 이국 땅에서 처음 보는 문자로 된 도로 표지명을 보는 기분을 준다.시가 바닥을 구르며 울부짖는 소리가 외국시를 볼 때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시들은 그렇게 외친다. "네가 알고 있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고...그런 정서가 아니라구.." 모든 번역이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시의 번역은 정말로.

요즘 같은 겨울에 어울리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의 마지막 구절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어떻게 '내리고'가 아닌 '나리고'의 미묘함을 번역할 것인가..'어디서'가 아닌 '어데서'의 그 소박함을 잡아낼 것인가...어떻게 눈 덮인 오늘 밤을 '엉엉'이 아니라 '응앙응앙' 울릴 것인가..

절대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불가능하다.바스코 포파의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을 읽고 감탄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을 쿡쿡 찌르는 것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런 연유에서이다.이 책은 영역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그것이 영어로 씌여졌던 세르비아어로 씌여졌던 둘 다 모르는 내게는 마찬가지 감정을 준다.

바스코 포파.그의 시는 친절하지 않다.초현실적인 상상력과 상징주의적 표현들이 늑대 부러진 이빨처럼 불편하다.첫번째 연작 시로 등장하는 <작은상자>다.

작은 상자는 젖니를 갖고 있다/그리고 짧은 길이와/좁은 넓이와 작은 공허/그 밖의 모든 것을 갖고 있다/작은 상자는 계속 자란다/한때 상자가 들어있던 벽장이/이제 상자 안에 들어와 있다...(중략)....이제 그 작은 상자 안에/축소된 전 세계가 있다/당신은 그것을 쉽게 주머니 안에 넣을 수도 있고/쉽게 훔칠 수도 쉽게 읽어버릴 수도 있다/

작은 상자를 조심하라...

이어지는 <작은상자의 죄수들>들 중 한 구절이다.

작은 상자를 열어라/우리는 상자의 바닥과 뚜껑과/열쇠 구멍과 열쇠에 키스한다/온 세상이 그대 안에 짓밣힌 채 누워 있다/세상은 자기 자신을 제외한/모든 것을 닮아 있다/그대의 맑은-하늘 어머니조차/이 사실을 더는 모르리.....

도대체 '작은 상자'란 무엇인가?  몇 가지 단어들이 차창 밖 사람들처럼 휙 스치고 지나간다.추천의 글에서 정현종 시인은 영국 시인 테드 휴즈의 <시란 무엇인가?>를 인용한다.그 책 앞머리에 <작은상자>를 '시'에 대한 메타포로 인용하고 있다고 한다.그렇다면 휴즈나 정현종 시인처럼 '작은 상자'는 정말 '시'의 비유이기만 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시인들처럼 '작은 상자' 대신 '시'라는 말을 넣고 보면 그럴 듯 하게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만...그런데 그것만이 아닐게다...

바스코 포파의 시선집에는 7편의 연작시가 실려있다.그 중에서 <흰조약돌>은 강한 시각적 인상을 남긴다.

그것은 머리도 팔다리도 없이/나타난다./호시탐탐 미친 맥박으로/시간의 뻔뻔스러 발걸음과 더불어/움직인다./정열적으로 모든 것을 껴안아/움켜쥔다.

달의 눈썹으로 미소 짓고 있는 하얗게 반들거리는 처녀시체.

이어지는 <조약돌의 심장>이라는 시다.앞의 시가 마지막 연에서 충격적인 수축의 강렬함을 남겼다면 이 시는 초현실주의적 영화기법을 이용한 이완과도 같다.수축과 이완이라는 다른 리듬을 갖고 있지만 서로 다른 색깔의 강렬함은 같다.이 두 시는 앞 뒷장 사이에 바로 붙어 있다.

그들은 돌의 심장을 열어보았다/심장 속에 뱀이 한마리/꿈도 없이 실타래처럼 잠들어 있었다/....(중략).....그들은 멀리서 쳐다보았다.뱀은 지평선을 돌아 제 몸을 감더니 계란처럼 지평선을 먹어버렸다.....(중략).....그들은 서로 쳐다보며 씩 웃었다/그들은 서로에게 윙크를 했다.

바스코 포파의 시선집은 낯선 경험과 낯선 시각으로 생각을 이끈다.이것은 일종의 환기다.환상을 통해 환상 너머와 대면하게 하는 방식이다.우리의 현존재 너머에 있는 그 무엇,또는 우리가 두고 온 오래된 기억 너머의 무엇이다.그것들을 환기 시키기 위해 자기증식을 넘어 자기를 포괄해버리는 작은 상자가 나온다.영원을 들여다 보는 조약돌이 등장한다.더러운 이빨을 드러내는 회색빛 늑대의 야생성도 그런 차원에서 경의의 대상이 된다.

포파의 시는 쉽지 않다.하지만 1월의 어느날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바람처럼 영혼의 통점들을 자극한다.자코메티의 조각품들과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떠올리게 하는 시들 몇 줄 적으며 끝낸다.

이제 우리 무엇을 하리/좋았어 .이제 우리는 저녁으로 골수를 먹으리/우린 점심으로 골수를 먹었지/텅 빈 느낌이 나의 내장을 괴롭히네/그러니 음악을 만들자고/우리는 음악을 좋아하잖아/개들이 오면 우린 무엇을 해야하지/개들은 뼈다귀를 좋아하잖아/우리는 개들의 목구멍에 걸려 음악을 사랑하리. ..... <태초 이후>

무슨 일인가/살이 눈 같은 살이/나에게 달라 붙는 것 같았어/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마치 골수가 내 속을 흘러 지나가는 것 같았어/뼛 속까지 시린 어떤 골수가/ 나도 모르겠어/모든 것이 다시 출발하는 것 같았어/어떤 무서운 시작과 함께

당신은 무엇인지 알까/당신이 짖을 수 있을까 ......   <달빛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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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1-18 23:38   좋아요 0 | URL
궁금증....
보통때처럼 알라딘 리뷰쓰기를 했는데...
첫 화면에는 분명 작성당시의 작은 글자로 보입니다.그런데 잠시 로딩이 끝나고 나서 완료화면 뜨면 한글문서 작업한 것처럼 12포인트 정도의 큰 글자로 보입니다.왜일까요? 예전에 한글로 작업하고 붙여넣기를 하면 그렇게 큰 포인트로 나오던데...
오늘은 그렇게 한 것도 아니거든요.
또한 해결방법은?

프레이야 2008-01-19 09:39   좋아요 0 | URL
'암스테르담'에 이어 이 책도 보관함으로 실어갑니다. 꾸벅^^
이 글자 크기가 읽기엔 좋으네요.

드팀전 2008-01-19 12:32   좋아요 0 | URL
^^...
오늘은 괜찮은데요..이상한것이 컴퓨터 세상이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