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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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살면서 흑인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다.해외 업무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따로 영어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니 기회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물론 대학 때 영어 학원을 다닌 적도 있다.하지만 흑인 선생은 0%였다.그 상황은 영어 조기 교육의 광풍이 불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왜 영어학원에는 흑인이 없을까?  학원장들은 학부모들의 핑계를 대면서 이렇게 말한다.학부모들이 흑인 선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그렇다면 학부모와 학원장들이 좋아하는 영어 선생은 어떤 사람일까? 대개가 미국출신 금발의 백인 미혼 여선생이다.외국인 학원 선생 중에는 특A급이 바로 이들이다.영어 선생을 뽑는 것인지 헐리우드 영화배우를 뽑는 기준인지 알 수가 없다.

한국인은 백인들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히 유색인종이다.하지만 우리의 내면 세계는 유색인종임을 거부한다.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백인의 것에 가깝다.근대화 과정에서 백인은 문명의 상징이었다.또한 자유와 해방의 상징이었다.백인들의 이 이미지는 미국이 한국에 대해 가진 정치,경제,사회의 독보적 영향력으로 인해 세대를 걸쳐 내면화되어왔다.미국 자본주의의 풍요로움과 미국에 대한 열등감은 그들에 대해 동일시하는 감정으로 이어진다.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는 미국의 중심이라는 WASP에 대한 우호적 감정을 구축했다.이에 반해 흑인은 그 대척점에 있었다.지금 당장이라도 흑인에 대해 떠오르는 단어들을 생각해보면 대개 부정적인 용어들임을 알 수 있다.그나마 몇 몇 운동선수들과 뮤지션 덕에 조금 단어의 수준이 격상되었을 뿐이다.

프란츠 파농은 흑인을 비존재의 영역에 있다고 말한다.그들에게는 단 하나만의 운명이 존재한다.그것은 백인이 되는 것이다.파농은 흑인들이 흑인존재를 인식하지 조차 못하는 상황을 심리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하지만 그는 먼저 이것이 이중적 과정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먼저 경제적 절차의 소산이고 다음은 열등감의 육화 때문이다.흑인들의 열등감은 우선 언어적 태도의 변화에서 감지된다.언어는 한 문화의 총체를 나타내는 상징이다.식민지에서 프랑스로 건너간 흑인들은 우선 프랑스어 발음에 대해 열등감을 갖는다. 'R자를 들어마시는 앙띨레스 촌닭'이라는 말은 흑인들이 갖고 있는 발음 컴플렉스를 고스란히 보여준다.불행하게도 영어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발음상의 컴플렉스도 이와 유사하다. "L 과 R의 불분명한 구분,P와 F의 혼재,th발음의 곤란함"  영어발음에 대한 한국인의 컴플렉스는 항상 일본인의 발음을 걸고 넘어진다."일본놈들의 '마꾸도나루도 (맥도널드)'" 이를 통해 영어 발음의 컴플렉스를 위장한다.하지만 영어민이 보기엔 '맥도날드'나 '마꾸도나루도' 나 오십보 백보일 터이다. 파농은 웨스터만의 글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흑인들의 열등컴플렉스는 그것에 맞서 싸워야 할 흑인 지식인 계층 내부에서 오히려 보다 심각한 형태로 현상되고 있다......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 자신을 유럽인 혹은 유럽인들이 이룩해낸 성과물들과 거의 맞먹는 존재로 상승시키는 착각을 감행한다."

파농은 언어문제에 있어서 백인들의 태도에 대해 언급한다. 흑인들에게 말을 건내는 백인들은 하나 같이 흑인들을 아이 대하듯 한다.이죽거리고,속삭이고,달래고,어르고,속이고.어떤 특정 백인만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이런 방식으로 흑인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스스로의 수준을 하향조종해 가면서 백인들은 안도감을 느낀다.이것이 그들이 흑인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서 현실을 재확인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우리보다 더 피부색이 짙은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백인들의 태도를 취한다.현재도 백인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 역시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파농의 이야기는 결혼과 성의 문제로 넘어간다.파농은 <나는 마르티니크의 여자입니다>라는 책의 몰자아적 태도를 비난하며 흑인들이 가진 맹목적 백인화의 욕구를 비판한다.파농은 결론적으로 흑인에게 탈출구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백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흑인의 집착,백인의 힘에 대한 동경,보호막을 확보하기 위한 흑인의 집념,이것이 흑인의 자아 그 존재와 소유를 결정하는 구성성분이라고 결론짓는다.백인이 된다는 것은 흑인에게 진,선,미를 소유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파농의 탈식민화 논의의 칼날은 정체성을 상실한 흑인만을 겨누지는 않는다.열등감의 노예가 된 흑인이나 우월감의 노예가 된 백인이나 모두 신경증의 증후를 드러내고 있는 존재이다.<흑인과 정신병리>의 장에서 파농은 백인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흑인공포증에 대해 설명한다.그 근원에는 흑인들의 자기보다 우월한 성적능력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고 파농은 주장한다.외국에서 만든 포르노가 쉬운 예가 되겠다.이것 저것 다양한 판타지가 나오지만 꼭 빠지지 않는 것이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매저키스트적 관계이다.또는 거대한 흑인남성과 왜소한 아시아 여성의 관계....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은 본 적이 거의 없다.많이 안봐서 그런지 몰라도....백인에게 흑인의 중심은 성이다.특히 생식기이다.사실 이것은 허위의식일 뿐이다.하지만 백인들은 흑인을 동물=자연의 단계로 파악한다.그 자유분방함과 신체적 강건함등은 백인들에게 흑인들에 대한 성적 열등감을 불러일으킨다.흑인의 성적 잠재력에 대한 상상이 공포로 치환되는 것이다.이 공포는 흑인을 더럽고 사악한 존재라는 이미지로 투사된다.백인들은 이제 흑인이라는 좋은 투사 대상을 찾게 되었다.그들은 그들의 문명화 과정 속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욕망들을 흑인에게로 전부 투사해버린다.음험함,어둠,죄,사악함,그림자,깊은 심연....사실 그 안에는 가장 비도덕적인 충동과 부끄러운 백인들의 욕망이 들어있음에도 말이다.흑인 공포증에서 시작된 백인들의 신경증은 결국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흑인들의 대상으로 배출함으로서 해소되고 있는 것이다.

프란츠 파농은 책 서두에서 흑백간의 악순환을 풀 고리를 찾고자 한다고 밝혔다.그 고리는 백인의 우월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흑인정체성과 흑인 역사의 위대성을 밝혀내는 것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파농은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항담론으로 과거의 역사,문화를 강조하는 것은 결국 흑백의 악순환을 지속시키는 담론의 반복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파농이 정치적으로 흑백이 조화롭게 사는 방법에 대해 제시하지는 않는다.그건 그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그는 백인의 머리로 세상을 사는 흑인들에게 소박하지만 의미있는 말을 던진다.

"내가 아는 한가지는 이것이다.타자에게 인간의 행동을 요구할 권리가 내게는 있다는 것말이다.그것 뿐이다.한가지 의무도 있다.나의 자유를 포기하는 선택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말이다.....

...나 유색인으로서 바라는 것은 이것 하나뿐이다.도구가 인간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인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는 영원히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한 인종에 의한 다른 인종의 노예화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인간,그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내가 그를 찾아내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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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2006-05-30 11:51   좋아요 0 | URL
프란츠 파농 꼭 한번 읽어두어야 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기회에 접해봐야 겠습니다. 드팀전님 요즘 건강하시죠? ^^

드팀전 2006-05-30 12:58   좋아요 0 | URL
아..예.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기엔 뭔가 좀 그러하네요.어쨋거나 건강은 합니다.ㅎㅎ 약간은 의무감 같은 걸 가지고 읽었습니다.책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문체가 좀 왔다 갔다합니다.논리적 서술이다가 또 흥분된 주장이다가...거기에 잘 모르는 흑인 문학가와 사상가들이 등장합니다.번역도 예쁘다는 생각은 안들더군요.어떤 님들 처럼 원문과의 비교를 해본 건 아니지만 읽다보면 걸리곤 합니다.'네그리튀드'나 '문투' 같은 낯선 단어들도 나오는데 네이버에 검색해서 알아보기도 했습니다.이 책은 다른 번역본이 언젠가 나오주면 더 좋을 듯해요.

보르헤스 2006-05-30 17:5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언제나 번역이 문제군요 ^^

코코몽 2007-05-09 00:11   좋아요 0 | URL
정말로 저도 읽는 데 고생 좀 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체가 전형적인 번역투여서요...ㅎ
 
바보 만들기 -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
존 테일러 개토 지음, 김기협 옮김 / 민들레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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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교육의 아방궁이다.아이들의 교육과 관련된 것이라면 없는게 없을 정도다.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포항 제철소 화덕의 불꽃 처럼 활활 타오르는게 교육시장이다. 불황을 모른다.얼마나 활활 타오르는지 늦은 밤에도 각종 학원의 불은 70년대 섬유공장처럼 전등을 밝히고 있다.밤 10시쯤 학원가가 몰려있는 곳을 가본 적이 있으신가? 대로변은 주차장이다.학원의 승합차들이  뱀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다.학원가 주변의 네거리는 밤 10시나 11시에 도로 정체가 생긴다.우스개 소리가 아니다.학원에서 몰려나오는 파김치 같은 아이들을 봉고차는 하나 둘 검은 입 속으로 빨아들인다.신호쯤은 미래의 동량을 위해 비웃어 버리는 학원 봉고차... 봉고차는 반쯤 감긴 눈을 한 아이들을 아파트 앞에 하나씩 퇘퇘거리며 뱉어놓는다.그리고는 다음 목에 걸린 공부 못하는 돌을 뱉어낼 심산으로 휭하니 달려간다.

이 책 은 제목을 잘 뽑았다. <왜 우리는 교육을 받을수록 멍청해지는가...바보만들기>.저자 존 테일러 개토는 뉴욕에서 30년 가까이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교육제도가 아이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는 주적이라고 선언한다.한나 아렌트는 말을 인용하면 조금 더 일반화 시킬 수 있다..."전체주의 교육의 목적은 신념을 키워 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념이라도 만들어 낼 능력을 박멸하는 데 있다"  존 테일러 개토 역시 의무교육제도에 바탕을 둔 현재의 공교육이 자유로운 생각과 판단을 처음부터 근절시키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아이들의 창의력을 앗아 가서 그 자리에 채우는 것은 무었일까? 여러가지 다른 말로 설명가능 하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정부의 생각','국가의 생각'이다.표준화된 교과 과정,표준화된 교과서,표준화된 교사 자격,표준화 된 시험제도...이러한 온갖 종류의 표준화는 기존 사회가 원하는 규격화된 인간형을 만들어 낸다.이렇게 규격화된 인간이 나오면 끌고 다니기 쉽다.하고픈 대로 해도 다 그런가 보다 한다.의문을 갖지 않는 인간형을 제조하기 때문에 현 사회 체제는 균열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그냥 가는 거다..쭈욱.

 저자는 미국적 공교유의 근원이 프러시아 교육제도에 있다고 밝힌다.(미국,일본이 악질적으로 이종교배된 대-한민국 교육은 울트라 슈퍼 프러시아적 교육이다).프러시아는 부국강병의 일환으로 중앙집권화된 교육제도를 추진한다.아이들을 명령에 순응하는 민족의 기계로 만들어야 열강의 쟁패에서 나아가 싸울수 있는 자원이 되는 것이다.이것이 의무교육이란 형태로 등장한다. 1819년 프러시아의 중앙집권화 학교가 만들어 내고자 했던 인간형은 아래와 같다.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고분고분한 광산 노동자,정부의 지침에 순종하는 공무원,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일하는 사무원,중요한 문제에 대해 비슷하게 생각하는 시민들..이렇게 시작된 중앙집권화된 의무교육은 결국 스스로 생각하는 이성의 능력을 마비시켜 버렸다.

중앙집중화된 의무교육의 폐해에 대해서 아주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다.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어렵다.왜냐고? 가장 큰 제약은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국가가 학교처럼 이용하기 좋은 기관을 내놓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둘째로 교육이 '국가독점 사업'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미국의 교육부는 국방부 다음으로 가장 큰 계약체결 기관이다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더 쉽게 말하면 국가의 교육독점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이미 이 체제 속에 너무 많아서 손을 댈 수도 없다는 말이다.교육공무원,학교 선생,학교 교재상,급식업체,교과서 제작자...등등 만약 교육에 대해서 국가의 권력을 조금만 분산시켜도 이들의 이익은 처참하게 훼손된다.이들의 존재는 교육이 절대 국가독점에서 무너질 수 없는 경제적 필요조건이 된다.

저자가 말하는 교육변화는 가히 혁명적이다.가장 큰 핵심은 교육을 학교중심에서 가정중심으로 옮기자는 것이다.물론 가정이라는 것이 각 개인의 가정만을 뜻하지는 않는다.학교 이외의 모든 것이 가정으로 상징된다.학교를 제외한 다른 대안적 교육의 길은 너무나 다양하다는 말이다.이는 '교육의 자유시장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그러나 한가지 오해하지 말기를.여기서 말하는 '자유시장화'가 학원장들이 말하는 사교육의 자유시장화는 절대 아니다.그는 현재의 학교 교육이 진정한 교육과는 거리가 멀다는 전제를 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진정한 교육과도 먼 학교 공교육이 교육을 독점하고 거기서 배운 부모세대와 그리고 자녀세대의 의식까지 점령해버렸다는 것이 그의 현실인식이다.공교육의 교육독점말고도 다른 다양한 교육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교육의 경쟁을 주장하는 것이다.그는 학교가 축소되어야 하지 확대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방과 후 학교 같은 것은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아이들을 밤새도록 학교의 감시아래 두는 몹쓸 짓일 뿐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지역사회와 공동체적 연대 속에서의 교육이다.역사적으로 이러한 아이디어는 미국 건국 초기의 조합교회주의에서 출발한다.마을 주민들이 자율적 연대감에 바탕을 두고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이다.여기에는 마을의 모든 사람이 주체가 될 수 있다.아이들은 이 속에서 자신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바를 지향해 나아갈 수 있으며 지역사회의 다양한 삶의 층위에서 얻어진 지식과 노동의 경험 속에서 생긴 앎을 삶속에 투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교사자격제도' 폐지론자 임을 알아야한다.그는 자격증을 가진 교육전문가만이 교육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은 가장 큰 사기라는 것이다.진정한 교육은 학교라는 건물 안에서 정부가 정해준 교과서를 가지고 정부의 시험을 통과한 교사자격증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존 테일러 개토가 주장하는 '교육권을 학교에서 가정으로..'의 주장에.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대안교육 모델중  홈스쿨링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약 5000가구의 홈스쿨러가 있다.이들이 받는 가장 큰 오해는 '돈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다.물론 경제적 토대를 무시할 수 없다.하지만 하나씩 따져 보면 그것도 일종의 신화다. 일단 홈스쿨러들은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야겠다는 욕심이 없다.물론 홈스쿨러들도 종류가 있다.아이가 영재라 믿고 빨리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홈스쿨링하는 부류,아이가 제도권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학교폭력에 의해 어쩔수 없이 홈스쿨러가 되는 경우,마지막으로 아이와 부모의 신념에 의해서인 경우....처음 경우는 목적을 달성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대안교육으로서의 모습은 아니다.두번째 경우는 1-2년후 홈스쿨링에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고 결국 대안학교를 찾는다고 한다.마지막이 그나마 성공가능성이 높은 경우다.이들의 부모들은 일단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치 않는다.' (나는 이 말 저 말 다 빼고 이게 가장 핵심이라고 생각한다.)대신 이 부모들은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다. 좋은 대학에 가길 원하지 않으니 무리하게 학원 대여섯개 보내는 사교육을 시킬 필요가 없다.그러니 돈이 무지하게 많이들거라는 생각도 조금은 왜곡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떤 이들은 '그거 다 부모 욕심 아니야'라고 한다. 딱 등가려운대 파리 앉아주는 질문이다. 대안교육이나 홈스쿨링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이들의 선택과 합의 이다.내가 개인적으로 학교교육이 질려서 대안학교나 홈스쿨링을 하고 싶어도 아이의 자발적 선택이 없으면 결국 실패한다.대부분 성공하는 대안 교육은 아이의 자발적 동의와 아이의 구체적 계획이 전제된다. 결국 부모의 욕심때문에 대안교육 한다는 주장은 대안교육의 주장은 맞지만 나는 좀 걱정되고 자신없어서 못 한다고 하는게 오히려 솔직하다...내지는 내 아들은 좋은 대학 나와서 이 땅에서 성공해야 한다..고 말하든가... 

TV나 신문에서 그런 대안교육 기사를 보다 옆에서 '그거 다 부모욕심 아니야'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해라.

 "네가 아이들 학원 서너개 씩 보내는 것은 네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니 아니면 다른 비슷한 부모들도 그러니까 그러니?  내가 보기엔 다른 사람이 안하면 너도 그렇게 아이들 혹사시키면서 안할거 같은데..  그렇지? (그럼 대개 그렇다고 한다.)  ..결국 너는 다른 사람의 욕심에 맞추어서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구나. 그것보다는 저렇게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의 욕심에 맞추는게 훨씬 나은 거 아니니. 내 아이를 다른 부모 욕심에 맞춰서 키우다니..."

<바보만들기>가 주장하는 교육 변화는 기존 교육의 틀을 전면 부정한다.제목에서 말하듯이 '교육이 바보나 만드는데 그곳에 왜 보내야 하는가...' 존 테일러 개토의 주장은 분명히 역사적,사회적으로 공교육이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하지만 그의 주장의 과격함 만큼이나 현실적합성에서 우려되는 부분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의무교육제도의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접근은 존 테일러 개토의 주장이 맞다.그 반면에 의무교육 실시가 상당히 빠른 시일 내에 국가의 문맹률을 비롯해서 국민의 교육수준을 높여준 공도 있다.(물론 교육수준이 높아졌다고 삶이 질이 좋아졌냐의 문제는 다르지만) 또한 그가 제시하는 공동체적 교육에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근대의 시스템은 마치 공기와도 같다.내가 살아 있는 곳은 근대 시스템이 미치치 않는 곳이 없다.그만큼 촘촘하고 강고하겨 얾혀있다는 것이다.이에 대한 대안의 모색이 이상하게 전근대적 출발을 두고 있는 것은 -이해는 가지만- '좋았던 옛날' 이란 신화에 기대는 듯하다.중국인들이 삶의 이상향을 미래가 아니라 과거 요순시대에서 찾듯 존 테일러 개토의 대안 역시 시민 자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미국 건국 초기에서 찾고 있다.아이디어의 설명을 위해서라면 이해가 가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그러나 이는 현저하게 사회적 문제에 있어서 역사적 현재성을 무시하고 접근하는 처사이다.물론 개인적 대안으로서의 자율공동체 교육이나 홈스쿨링 등에는 동의한다.나 역시 아주 심각하게 홈스쿨링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내가 홈스쿨링을 지지하는 것과 사회적 교육 시스템의 변화를 기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것이다.나 혼자 아이 잘 키우기 위해 홈스쿨링 할 수 있다.'나는 좀 달라.나의 모습을 보고 좀 변화들 하라구' 이것도 교육 변혁의 한 길이라고 믿으며 그만이다.그러나 내 생각은 좀 다르다.내가 대안학교를 찾고 홈스쿨링을 하는 것은 개인적 실천의 영역일 뿐이다.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훨씬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현재의 왜곡된 교육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가에 생각이 이어져야 진정한 교육변혁의 출발이 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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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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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 선생은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공부의 덕목을  "쇄소응대"라고 했다". 비들고 청소하며 손님맞을 비천한 일을 하는 것이다.즉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공부보다 일상에서 부터 자신의 마음을 닦아 밝은 덕을 찾는 것이 으뜸이라는 뜻이다."쇄소응대의 도'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면서 어떻게 바른 정치를 이야기하고 하늘의 도를 이야기하느냐는 것이다.남명 선생은 그래서 조선 철학사의 가장 큰 논쟁이라고하는 '이기논쟁'을 쓸데없는 관념논쟁이라는 식으로 비판했다.또한 이 논쟁에 뛰어든 최고의 유학자 퇴계를 은근히 질책하기도 했다.남명의 시각으로 보자면 부질없는  논쟁에 퇴계가 뛰어듦으로서 논쟁에 불길을 확 지펴버린 것이다.이러한 남명은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 가르침을 구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다만 이제 실천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평생을 의와 실천궁행에 힘쓴 노학자의 마지막 가르침치고 너무 단순해보인다.하지만 그 안에 그가 가르친 모든 철학이 들어 있기도 하다.

<대학>은 남명 조식의 공부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했던 책이다.영남 우도 최고의 유학자라는 남명 역시 평생 <대학>공부를 하면서도 그 뜻을 전부 알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책했다.그런데 사서삼경을 이제야 겨우 다 읽어 본 내가 어찌 <대학><중용>의 깊음을 이해하겠는가...더듬 더듬 한자 따라가다 한글을 따라가다 하면서 어찌 어찌 읽기는 했다.하지만 알 수 없다.그나마 이 책의 저자가 얄팍한 한마디 응원을 해주어서 기죽지는 않는다. "반드시 대청봉을 밟아야 설악산에 들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중용>이 설악산이라면 아마 나의 이번 일독은 설악산 매표소에서 표 끊은 정도일게다.표 끊으니 멀리 산봉우리는 보인다.

<대학>의 첫구절은 대학이 말하는 도를 이야기한다. '대학의 길은 맑은 마음을 맑히고 사람들과 하나 되고 지극한 선에 머무는데 있다'  흔히 말하는 대학의 삼덕목이라는 명명덕,친민,지어선 이다.마음은 원래 맑은 것이다.하지만 마음에는 때가 끼어서 그 맑음을 유지하지 못한다.명명덕은 맑고 맑은 그 마음을 얻으라는 것이다.친민은 그렇게 맑은 마음이 나 혼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그렇게 하여 아무런 사욕이 없는 선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대략 책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더 깊은 뜻이 있겠지만 <대학>의 내용을 전부 정리하기에는 내 능력이 부족한 고로 이쯤에서 말자.<대학>에는 유명한 말이 또 하나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 신문칼럼에서 정치인들이 집안 단속못하고 일가친적 비리가 터져나오면 기자들과 칼럼 교수님들이 많이 예를 드는 문장이다. 집 단속도 못하면서 무슨 국정운영이냐는 식의 감정에 호소하는 기사들로 끝을 맺기마련이다.하지만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일의 순서를 굳이 밝혀서 그런 것이지 반드시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신영복 교수 역시 <강의>에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신영복 교수는 관계론 차원에서 고전을 파악했기때문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역시 각 관계의 연쇄로 보고 있다.단계론적 완성으로 파악하는 것보다는 훨씬 옳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물론 대학은 일의 순서를 강조한다.본과 말이 전도되어서는 지극한 하늘의 도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본과 말은 일머리 순서로 볼 수도 있지만 핵심과 주변으로 볼 수도 있다.주변이라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나무에 비유하여 본이되는 것은 뿌리이고 가지와 과일은 말이된다. <대학>은 이 순서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뿐 어디에 무조건 본이 더 큰 비중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치우친 나는그래도 본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싶다. 실제 삶의 양상에서 나타나는 일들은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이 섞여있다.그래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기가 어렵게 만들어져 있다.<대학>에서도 강조하는 '격물치지'가 필요하다.'격물'은 사물을 깊이 연구하여 그것에 가서 닿는 다는 말이다.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깊은 관찰과 응시가 필요하다.그러면 사물의 본에 닿게 된다는 것이다.삶의 구체적인 모습으로써 본은 의외로 간단할 때가 많다.핵심은 심플하다는 것이다.평택 대추리... 보상이 얼마고 누가 누구를 때렸고 한미관계의 역할이 어떻고....다 말에 해당한다.사람 사는 땅에서 그 고향 사람이 농사 짓고 싶다는 것이 본이다.그 사람들에게 돈 몇 억 주고 나간다고 그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음이 본이다.미국이 한반도에서 언젠가는 나가야 하는게 본이다. 거기서 시작해야 된다.하지만 이 땅은 본을 잃은지 오래.... 이민가고 싶게 만든다.

<중용>은 사실 <대학>보다 훨씬 이해가 안된다.중용을 중간가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진 않았지만 그런 치우치지 않는 법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다.이현주 목사의 말을 빌자면 <중용>의 중은 속에 있어서 보이지 않지만 겉에 있어서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경험되는 용과 두루 융통되는 것이라고 한다.무슨 말인지 문맥도 어색한게 아리송하다.그나마 뒤에 설명은 조금 낫다.중은 천이요 용은 인이다.즉 중용은 하늘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대한 철학이다.중용 일기 첫장부터 만만치가 않다.이 목사는 계속 말한다. 중과 용의 도를 이어주는 것이 성이다.'성을 모르고는 중용을 안다고 할 수 없다' ......

문제는 <중용>을 덕지 덕지 겨우 읽었는데....'성'에 대해 감이 안온다는 것이다.여기서 말하는 성은 고등학교 윤리시간에 배운 그 '성'과 '경' 할 때 그 '성'이다.그 때나 지금이나 '성'은 참으로 어려운 개념이고 중언부언하는 개념이다.유학에 여기 저기서 '성'은 무엇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걸로 안다.개 중에는 그런가 보다 하는 것도 있고 또 어떤 건 이게 뭐야 하는 것도 있다...... 아....쓰면서도 <중용>에서 말한 바를 채 10%도 이해하고 있지 못한 듯 하다.이 <중용>이 중간 간다는 중용은 아니란 것 하나는 확실하게 안다..그 중간가는 중용에 대해 이현주 목사의 명쾌한 답은 인상적이어서 자주 써먹을 수 있을 듯하다.'집기양단'이란 말을 설명하면서 든 예이다. '집기양단'은 양쪽 끝을 잡는다는 말이다.즉 어디에 치우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이현주 목사의 중간-중용과 다른-즉 평등에 대한 빛나는 예가 시작된다. 대략 이런이야기다.

여기 1미터짜리 막대기 자가 있다.0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눈금에서 100까지 있다.양 쪽 끝을 동시에 들어올리는 길은 50에을 잡아서 끌어올리는 것이다.무게중심이니까....만일 그 막대기가 한 쪽이 굵고 한 쪽이 가늘다면 굵은 쪽으로 치우쳐야 중심을 잡을 수 있다...(야구 방망이 생각하면 되겠다) 따라서 겉보기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실제로 중심을 바로 잡는 것일 수도 있다.

어디가서 사회적 문제에 기계적 중립의 예를 들면서 어줍지 않은 객관 객관,중립 중립...이런 이야기 할 때 이 예를 써먹을 수 있다.보수언론들은 늘 한겨레나 민중언론들이 한쪽에 치우치고 자신들이 중립,객관이라고 이야기한다.또한 이에 쇄뇌된 인간들 역시 그게 중립이고 객관이라고 믿는다.야구방망이 무게중심론이 나의 중립이요 나의 객관이다.

공자 역시 중용의 가르침을 한달 이상 이어가기 힘들다고 했다.나 같은 범인은 그 뜻을 이해하기도 어렵다.그래도 이제 첫 술이니까 과욕 부리지 않기로 했다.

이현주 목사 이야기도 마지막으로 잠깐해야겠다.일단 범종교적으로 고전을 접근하는 방법이 마음에 든다.내가 비록 일부 한국 기독교인들로 인해 기독교에 대해 좀 부정적이긴 하지만 그 가르침이야 아름답지 않았겠는가. 이 목사는 대학중용의 도를 이야기하면서 성경 구절을 예로 들어 그 가르침이 서로 소통함을 말한다.딱딱한 의고투적인 본문보다 어떨 때는 성경 내용이  의미를 명쾌하게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하지만 비기독교의 눈에 너무 자주 등장하는 성경 이야기가 원래의 의미를 간섭할 수 도 있다는 의혹이 생기기도 한다.다음 번에 <대학><중용>을 읽을 때는 다른 책을 고를 생각이다.이번은 처음이니까 이 정도로도 훌륭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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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5-18 23:33   좋아요 0 | URL
대학의 명명덕, 친민, 지어지선과 중용과 격물치지는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마음의 증득으로 알아야 합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도덕경의 '무위' 하나를 이해하는데 일생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좁쌀 하나 이해하는데 일생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조식 선생님이 퇴계 선생님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섣부른 비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님의 치밀한 독서력으로 보건대...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논리로서는 아무리해도 닿을 수 없는 개념들이 그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이기론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에 대한 평가는 한토막의 평가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삶을 만들었던 그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보지 않고서는 우리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히 사서삼경을 비롯한 동양고전을 접할 때 우리는 역사적으로 이론적으로 백번 천번 읽어도 그 뜻에는 천리 만리 떨어진 결론밖에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공자는 중용의 가르침을 한달 이상 이어가기 힘들다고 했을까?
과연 공자가 마음으로 검증하는 중용은 무엇인가?
범인이라서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범인의 마음으로 미리 기죽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도 하지 않으므로 길은 우리 앞에서 사라져버립니다.
님께서 인생의 경험으로든 마음 속의 공부로든 언젠가 이 말들을 마음에서 체득할 날이 오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분명히 새롭게 보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청객이 말이 길었습니다.

드팀전 2006-05-19 08:45   좋아요 0 | URL
불청객이라니요.^^ 사사삼경과 불경,내지는 성경이 논리로 접근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은 대학은 졸업해서 압니다.그 책들이 가진 경지를 알기에 단 한줄 이해하고도 이해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거지요.그리고 현실에서의 관철에 대해 부끄러운바가 있기때문에 안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구요.마음공부에 대해 백안시한다고 생각치는 마십시오.저 역시 전인격적 인간을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어떤 불평등이 해소되면 -또 해소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그 일을 꾸리고 누리는 사람들의 순정한 마음임을 모르지도 않습니다.하지만 마음공부는 내면의 덕을 이루고 현실의 다양함에 적용해나가야 한다고 믿습니다.그게 아니라면 마음공부는 자칫 개인적 안분지족의 도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장일순 선생은 제가 정말 따르고 싶은 분인데요.그분이 노자를 읽고 도를 깨우쳐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그 도를 바탕으로 함께 사는 일에 골몰하셨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선택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남명의 공부도 퇴계의 공부도 모자랐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듯이...무엇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하는 가에 대해 생각이 달랐겠지요....님의 길과 저의 길이 꼭 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함께 사는 세상에 더 못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면 언젠가 만나지겠지요.
 
파시즘의 대중심리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3
빌헬름 라이히 지음, 황선길 옮김 / 그린비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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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메이데이'-노동절이다.매일 일하는 노동자는 푹 쉬어야 되는데 회사에 나왔다.그닥 억울한 생각은 들지 않는다.공휴일에 일해 본 회사원은 알 것이다.조용한 회사는 일하기 꽤 괜찮다.위에서 지랄 거리는 아저씨들도 없고 ,지랄 거리지 않아도 있는 것 자체로 부담되는 또 다른 아저씨들도 없고...즐거운 메이데이!!

빌헬름 라이히의<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읽는데 보름이 걸렸다.'공사'가 '다망'하다 보니.(그렇다면 건축주는 쪽박차는 건가? 에이 썰렁) 서울 출장가는 KTX에서도 보고 피케팅 한다고 죽치고 앉아 있던 스티로폼 위에서도 보고(그 피케팅은 대개 버티기였으므로)....그나마 반쯤 넘기고 나니까 끝이 보여서 탄력 받았다.먼저 이 책은 나같은 일반인에게 약간 두려움을 준다.이거 또 개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해대지 않을까 하는..내지는 이 책 다 보고 나서도 기억남는 것은 단 한줄의 문장 정도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같은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본 이유는 '파시즘'에 대한 개인적 호기심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역사적 파시즘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고 또 일상적 파시즘에서 말하는 '대중동의'라는 부분도 늘 연구해보고 싶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또한 공부는 석박사만 하는게 아니라는 생각에 나같은 회사원도 책을 볼 수 있다는 쥐뿔 자존심에 읽었다...언젠가 이야기 했던 적도 있는 경험인데 .어떤 박사님이랑 이야기하다가 내가 문득 뭣도 모르고 '푸코'...'부르디외' 뭐 이런 이야길 꺼냈더니 이거 완전 사람보는 눈이 달라졌다.그런 용어들은 자기들의 전문영역인데 하찮은 일반인이 그런 단어를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쓰니까 놀랐겠지.그런데 그깟 단어 몇 개에 사람보는 눈이 달라지다니...광고에서 그렌져 타고 다니는 오래전 애인을 보고 '당신 잘사셨네요' 라고 카피 날리는 것과 똑같은 수준에서 유치했다.많이 배우신 박사님들도 유치하다.(휴..알라딘의 박사님들 계실테니 저의 편견을 용서해주삼.) 어쨋거나 평민의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가끔은 졸면서 가끔은 넘어가면서 라이히의 책을 다 읽었다.라이히의  개념과 용어가 낯선 부분은 있었다.성경제학이니 오르곤이니 하는 것들은 대충 무슨 개념인 듯 하다라고 그려지긴 하지만 내 판단이 옳은지는 모르겠다.그러나 평민의 자긍심(무식에 힙입은)으로 이런것들은 대충 또 무시할 수도 있다.그렇게 '그냥 이런 거겠지'라고 생각하고 읽다보면 그다지 어렵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거참 내가 쓰고도 너무 말어렵게 한다...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평민의 도망갈 구멍 만드는 어법이라니)

라이히의 이 책에서 파시즘을 '대중의 비합리적 성격구조'의 표현이라고 밝힌다.아마 일상적 파시즘 논의에서 라이히가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부분이 이 문장에 담겨있을 것이다.라이히는 본인이 직접 서문에서 프로이트와 맑스의 변증법적 변화를 도모한다라고 밝힌다.특히 맑스의 경우 대중심리학의 지식이 없었으므로-이것은 일반 사회학 전체에 통용된다-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립만을 제시할 분 그들이 성격차원에서 계급구분이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라이히는 우선 파시즘의 이해를 위해 이러한 통속적인 맑스주의 개념을 종식시킬 것을 권한다.즉 경제 결정론과 계급론적으로 파시즘에 접근하면 파시즘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쉽게 말하면 노동자들이 억압받다보면 이거 한번 뒤집어 없자 하고 불끈 일어나야 돼는데...파시즘의 도래를 보니까 그게 영 아니었다는 것이다.이거 불끈하고 일어서기는 커녕 '하이 히틀러' 하면서 손을 번쩍 드는데 이 상황을 맑스의 계급투쟁론가지고는 설명이 안된다는 것이다.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80년대 우리상황과 대치시켜도 비슷해진다.변혁세력 중 일부는 '민중'에 대한 거의 종교적인 믿음을 가졌다.즉 '민중'은 위대하고 '민중'은 무오류적이라는 식의 발상이다.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그렇지 못한 경험들이 발생한다.이때 그 일부..감상적 민중주의자들은 쉽게 도망갔다."그게 다..지배권력의 이데올로기 조작으로 인해 민중이 각성하지 못했기 때문이야..끝." ...라이히는 당시 사회민주주의 세력들 역시 이와 비슷하게 너무 쉽게 대중의 권위주의적이고 비합리적인 속성을 간과했다고 말한다.그 틈새를 가장 잘 파악하고 정치적 선전을 통해 대중의 속성을 활용한 것이 바로 파시즘이라는 것이다.

결국 라이히는 대중에 대한 -물론 이것이 변혁세력이 말하는 민중과는 다른 개념일지라도-객관적인 응시를 주장한다.대중은 결코 선이 아니라는 것이다.비합리적이며 책임감이없다.또한 신비주의에 자신을 의탁시켜며 권위주의에 호응한다.물론 라이히가 대중을 이렇게만 파악하면 더이상 인류역사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을게다.그는 대중이 원래 자유를 본원적으로 생각하며 또한 억압을 걷어내고 긍정적 변혁 주체가 될 수 있음도 밝히고 있다.라이히의 대중에 대한 시각은 그러므로 부정적이라는 것보다는 입체적인 객관화에 중심을 두었다고 할 것이다.

파시즘의 발호에 가장 중심에는 당시 독일 소시민계층이있었다.파시스트세력 역시 노동자계층보다 소시민계층에 우선적인 정치작업을 펼친다.계몽된 이성의 승리 표상이던 이 시민계층이 도대체 왜 얼토당토않은 파시스트의 중심축이 되었는가? 또한 소시민층에 이어 역사발전의 중심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왜 한줌 파시스트 정치꾼들의 손을 들어주었는가? 라이히는 파시즘에 손을 들어준 동시대인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악마가 숨어있었는지 탐구한다.이 부분이 <파시즘의 대중심리>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내용이며 라이히의 파시즘에 대한 접근법의 핵심이다.책에서도 가장 많은 부분이 할애돼어 있다.상세하게 설명할 능력도 없고 이해도도 떨어지기에 그저 평민수준의 이해로 설명할 수 밖에 없다.파시즘의 대중심리의 가장 핵심에는 가족이데올로기,그리고 유아기때부터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의 억압,기독교 원리에서 나오는 신비주의적 가치 등이 있다.

권위주의적 사회는 권위주의적 가족의 도움을 받게된다.이것은 개개인의 성격구조 형성에 지대하다.이를 통해 가족-국가-문명이 형성된다.라이히는 이렇게 말한다.

권위주의적 국가는 자신의 대리인인 아버지를 모든 가족에 두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가족이 국가의 가장 가치있는 권력도구가 된다.소시민적 영향력 아래에서 여성은 성적 반항 위에 체념하는 태도를 발전시킨다.아들은 권위에 복종하는 태도와 병행하여 이후 모든 권위에 대해-아버지를 통해 습득된- 동일시,내면화 한다.

가족 내의 아버지에 대한 동일시는 결국 지도자에 대한 동일시로 발전하게 된다.사회문제에 있어서 지도자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 대중은 정치적 결정에 있어서 내적인 모순에서 오는 갈등을 해소한다.그리고 책임감의 부채로 부터 탈출할 수 있다.

또한 라이히가 강조하고 있는 성적 억압 역시 가족 내에서 이루어진다.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알 수 있듯이 가부장제와 이에 바탕이 되는 가부장 권위주의는 가모장제가 사적 축적을 통해 붕괴되면서 발생한 것이다.정착을 통한 사적 축적은 일부다처의 형식을 띠게 되고 그전에 있던모계 사회의 '성적 자유'는 억압된다.'성적 자유'는 권위에 의해 박탈되고 상품화되어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토대가 된다.요즘도  볼 수 있는 공익 캠페인을 생각해보면 아주 쉽다. '가족보호=성적 순수성=안전한 사회'로 이어진다.이러한 도식은 이런 반대로도 적용된다.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보호=성적 억압=도덕주의의 강화.' 파시즘 역시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기대고 있기때문에 도덕주의적인 태도를 취한다.이것은 파시스트들의 볼세비즘의 성적 해방에 대한 왜곡된 선전을 소시민들의 도덕적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성의 억압을 위해 파시스트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연령층은 역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다.성의 억압을 위해 또 함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기독교의 도덕주의'이다.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성에 대한 죄의식에 바탕을 두고 존립하는 종교이다.(기독교인들은 싫어하시겠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죄책감 없는 긴장완화를 추구한다.가부장적 종교는 이의 완화를 위해 종교적 제의를 이용하여-파시스트들 역시 유사하게 종교적 감흥을 일으키는 대형집회를 조직한다-무력감에 빠진 인간을 조종하게된다.성의 억압은 종교적으로는 마조히즘적인 무력감으로 탈출하고 또 반대로 인종주의,순혈주의,민족의 우수성등의 조작에 의해 사디즘적 공격성으로 표출된다.

이 책에서 라이히가 다루고 있는 파시시트 정체는 히틀러로 대표되는 '독일파시즘과 스탈린의 소비에트 파시즘'이다.책의 후반부는 소비에트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라이히는 소비이트 문제를 다루면서 자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를 제시한다.소비에트가 파시즘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은 레닌이 주장한 국가없는 사회 자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국가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는 점에 문제를 삼는다.라이히는 일종의 코뮨을 주장한다.하지만 그는 이것이 정치 체계나 이데올로기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노동민주주의라는 것이 그것이.일종의 일하는 사람들간의 공동체 같은 형태,직능간 합리적 교류와 상호발전이 가능한 코뮨이다.라이히는 노동자의 개념을 맑스 시대보다 확장한다.요즘 말로 하면 화이트칼라들도 포함하는 노동자층의 자치가 노동민주주의의 형태가 된다.

라이히는 대중들의 성적인 경직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가능하지만 실제적 민주주의는 힘들다고 말한다.이 성적 억압의 문제는 당 시대에 부여된 문제가 아니라 수 천년을 걸쳐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내재화되온 것이기 때문에 혁명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라이히는 현 시대 사람들은 이미 성적 억압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은 있으나 근본적 변화는 어렵다고 본다.성에 대한 긍정과 성에 대한 사회적 보호가 바탕이 된 상태에서 자란 새로운 세대만이 진정한 파시즘의 위협과 결별하고 사회 자치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라이히가 말한 '대중의 비합리적 성격구조'는 파시즘의 이해에 중요한 요소이다.또한 독일의 전형적 파시즘이 없어지고 난 이후에도 유사한 권위주의 정권과 이에 대한 대중 동의를 이해하는데 이 점은 여러가지 시각을 제시해준다. 유럽은 파시즘이라는 아픈 기억을 통해 파시즘을 역사의 반동으로 파악하는 광범위 대중들의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본 제국 주의의 피해자로서의 위치에만 익숙할뿐 우리사회에서 유사 파시즘의 발호와 이데올로그에 대해서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다.지금도 군사정권이 가진 유사파시즘적 성격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대중들이 존재한다.그리고 그들이 남겨 놓은 유사파시즘적 속성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이것들을 이해하는데 라이히의 이 책은 여러모로 유의미하다.

하지만 몇 몇 궁금한 점들도 남아있다.(아는게 별로 없어서 학문적 질문이 되긴 어렵지만..)라이히의 논지는 기본적으로 '프로이트의 성억압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즉 유아기적 성의 억압이 무의식속에서 인간의 이후 모든 삶에 지속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이다.라이히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프로이트의 성학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비판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과연 '성의 억압'이라는 것이 그렇게 절대적인 것인가?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밝혀내고 유아기의 성을 찾아낸 것은 중요한 발견이지만 유아기 성의 억압 문제를 너무 과대해석한 것은 아닌가? 프로이트의 오른팔인 칼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을 선언한 것도 프로이트의 성결정론에 대한 반대때문이었다.비록 칼융이 신비주의에 빠져 나치에 이용된 감은 없지 않지만..또한 들뢰즈와 가타리 역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론에 대해 '괴테 시대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둥 '의식 과잉의 백치의 상상'이라는 둥 프로이트를 꼬집고 있다.프로이트 이론에 가장 1차적 비판인 '과잉성결정론'을 라이히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성 싶다.또한 학문적으로 프로이트 이론이 가진 가장 난맥상인 '검증가능성'의 원죄 혐의 역시 라이히가 떠안을 수 밖에 없다.무의식의 성억압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며 또한 이것이 파시즘으로 연결되는 고리는 또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로버트 팩스턴은 <파시즘>이란 책에서 조금 유치하고 일차원적이기는 하지만 라이히의 주장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 파시즘의 지도자 및 그 추종자들이 성년으로 활동하던 시기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영국 등 다른나라에 비해 독일,이탈리아에서 특별히 성적 억압이 심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즉 성적 억압이라는 것은 한 국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통시적이며 공시적인 성격을 갖는 것인데 왜 다른 나라에서는 파시즘의 발호가 없거나 미약했으며 독일과 이탈리아만 국가 전체적으로 발호했는가? 독일과 이탈리아 사람들이 더 억압받아서?  성적으로 억압된 대중들의 전향적인 파시즘 지지에 대해서도 좀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다.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기본적으로 라이히가 말한 파시즘 내에서 대중들의 기계론적이고 신비주의적 생활태도에 대해서는 동의를 했다.하지만 라이히가 성의 억압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간 것에 비해 문화산업이라는 쪽에 혐의를 두었다.문화산업을 통해 관리되는 세계 속에서 대중들이 수동적으로 인간으로 전락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물론 대중문화의 혁명성과 대중들의 자발성에 대해 부정적인 아도르노의 입장을 고려하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성의 억압'보다는 현실성이 있어보인다.

라이히가 말하는 '노동민주주의'라는 것도 난망하다.'노동민주주의'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라이히가 실험실에서 흰 가운입고 있는 의사라는게 명백히 드러난다.도대체 '노동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자치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막연하고 또 이상적이다.라이히의 말에 따르면 기존 정치체계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이 신개념이 낯설게 보이는 것일 것이다.라이히가 말하는 노동민주주의의 자치 개념은 1차적으로 성적 억압이 없는 -아니 최소한 어느정도는 사라진-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다.또한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자치개념이다.내게는 이것이 일종의 기독교의 천국 개념처럼 보인다.라이히의 실험실에서는 이러한 코뮨이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하지만 소규모의 대안적 코뮨이 아니라면 과연 이것이 현실 속에서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고 믿는 다면 인류 역사가 구현해 놓은-설령 빌어먹을 것이라도- 현실의 정치,경제,사회의 촘촘한 구조를 너무 쉽게 해체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가 위대하게 거론된 것은 그의 논지가 무오류이기때문은 아니다.그가 밝혀낸 것이 이후 수많은 학문적 연구와 사회 분석에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1940년대 파시즘이 한창 발호중일 때 이런 위대한 책을 써낸 것은 참으로 놀랍다.또한 그가 가진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이후 그의 사회,심리학적 접근이 후속 연구를 이끌어낸 것을 생각하면 역시 이 책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만하다.

모를 때는 넘어가고 지겨울만 하면 쉬어가는 평민의 '까잇거' 근성만 있으면 <파시즘의 대중심리>을 책장 한 켠에 꽂아두고 두고 두고 펼쳐볼 수 있다.이런 책들을 학자들의 전유물에서 끄집어 내는 것이 또 평민의 역할이고 '까잇거'정신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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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2006-05-01 14:11   좋아요 0 | URL
훌륭한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언젠가 읽어야 겠다 마음먹고 보관함에서 나올줄 모르고 있던 <파시즘의 대중심리> 어서 읽어봐라 하는 좋은 리뷰이네요.
<빌헬름 라이히>도 꼭 읽고 싶은데 계속 품절로 나오네요.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드팀전 2006-05-01 18:49   좋아요 0 | URL
훌륭한 리뷰인지는 잘 모르겠구요....ㄳ 평민이 잘 알아야 뭘 얼마나 잘알겠습니까..
파시즘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면 좋으실 듯 해요.까잇거 읽으면 되는 거죠.뭐 ㅎㅎ

글샘 2006-05-01 21:06   좋아요 0 | URL
저도 읽어보고 싶은 책이군요. 요즘 한국 정치 상황을 보면, 파시즘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휑하게 보이는 것 같지 않나요? 진정한 코뮨은 극한 상황에서나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합니다. 리뷰를 읽는 동안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는데, 뭐라고 코멘트를 달긴 달아야겠는데... 횡설수설이군요. 잘 읽고 갑니당.

드팀전 2006-05-01 23:53   좋아요 0 | URL
저도 횡설수설인데요..피차무마 .. 파시즘을 어떻게 규정하냐에 따라 다르지만..전 파시즘이란 용어를 너무 광범위 하게 쓰는데는 좀 반대합니다.그렇기때문에 파시즘의 도래같은 것은 별로...하지만 파시즘적인 속성들에 대한 각성은 있어야 겠지요.황우석같은 사건들은 전형적인 파시즘적 대중심리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또한 개인적으로 코뮌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이게 근대 국가가 현실 자체인 상황에서 가능할까..에는 무지 의심이갑니다.자칫 코뮌이 배운자들의 상상의 공동체가 될 가능성이 있어서 조심스럽습니다.뭐 소수자 운동을 통한 코뮌의 실험이야 각종 공동체를 통해 어느정도 가능하다고 봅니다만..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요..코뮌이 뭔지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은 결국 근대성의 완성 내지는 근대의 재구성을 통해서 어떻게든 살기 나아지게 해야하지 않을까요.... 댓글로 또한 횡설수설이네요.에궁!! 안녕히 주무세요.

드팀전 2006-05-01 23:56   좋아요 0 | URL
구두님>오호라..제가 거의 몇년만에 처음 밤에 알라딘하는데..다들 이 시간에 주로 활동들 하시는구만요.밤에 보니 반갑습니다.우하하...

돌바람 2006-05-02 10:57   좋아요 0 | URL
까잇거 정신으로 조만간 책을 펼쳐야겠어요. 저도 사다만 놓고 언젠가 보겠지 그러고 있었답니다. 까잇거! (이거 비밀인데요) 저는 저 책 두부 물 뺄 때 눌러놓을 때 쓰고 있답니다. 출판사 관계자들이 보면 무식한 아주마니라고 할라나요. 까잇거 읽지요 뭐. 까잇거! 리뷰는 나중에 읽을래요^^

딸기 2006-06-08 09:45   좋아요 0 | URL
흙흙 이것도 사야하는 것인가... 유혹이로군요. 일단 땡스투 해놓고~~
 
위기의 노동 -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
최장집 편집 / 후마니타스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전두환 때가 훨씬 나았어.그땐 먹고 살만은 했잖아.'

반대편에서 목소리가 커진다.'야야..무식한 소리 좀 하지마.무고한 사람 잡아다 병신 만들고..민간인에게 총질 해대는게 잘 한거냐'  술자리에서 한번 커진 목소리를 줄어들지 않는다. '야...정치는 그렇다쳐도.경제만 두고 보자고.경제만 보면 두환이가 훨씬 잘한거 아니야.지금처럼 실업자가 많았어 노숙자가 많았어.'

누구나 한번쯤 겪어 봤을 경험들이다.IMF이후 한국 경제의 불안은 일반인들로 하여금 퇴행적인 사고를 갖게 만든다.역사적이고 구조적인 담론들의 인과는 술자리에서 끼어들 자리가 없다.오직 눈에 보였던 살림살이의 면만이 부각될 뿐이다.한국 경제의 몰락은 우연치 않게도 민주정부의 출범과 궤를 같이 한다.사람들은 권위주의 군부정권만 몰락 시키면 더 나은 삶이 보장 될 것이라 믿었다.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IMF 외환위기를 꼭짓점으로 한국 경제는 단군 이래 최악의 상황을 치달았다.대규모의 구조조정과 실업난,노숙자와 신용불량자,비정규직문제와 빈곤층의 확산...

왜 민주주의 정부 하에서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을까?  <위기의 노동>은 그에 대한 답을 정치의 부재,민주주의의 부재라고 답을 내린다.이 책은 IMF 이후 한국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노동'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 대략 16개의 논문이 노동과 관련된 현 시대의 단면들을 분석하고 있다.주로 다루어지는 대상들은 경제 위기 이후의 사회적 약자로 부각된 층에 대한 연구이다.예를 들면 신용불량자,비정규직 노동자,파견 노동자,하도급 중소기업 노동자,빈곤 여성,노동 조합의 불평등 같은 것들이다. 최장집 교수는 첫문을 여는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과 책의 마지막 논문인 <사회적 시민권이 없는 한국 민주주의>를 통해 <위기의 노동>에서 증명된 노동과 사회 안전망의 문제를 총제적으로 짚어 낸다.

먼저 <위기의 노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 지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를 보자.현재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숫자를 넘는다. 시간당 임금을 비교하면 정규직을 100으로 할 때 비정규직은 49에 해당한다.임금소득의 불평등 정도가 OECD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잘살지만 불평등한 나라라고 여기는 미국보다 우리의 임금소득 불평등율이 높다.김영삼 정부 이후 역대 정권은 '노동 시장의 유연화'를 노동 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다.물론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의 압력이 크게 작용했다.2003년 미국의 포브스지는 한국의 노동시장 유연성이 OECD국가중 3위라고 밝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들과 보수언론은 한국의 노동시장이 아직도 경직돼어 있으며 거기에 가장 큰 악역을 맡고 있는 것이 노조라고 몰아세우고 있다.<노동시장의 구조변화와 비정규직>이란 논문에서는 비정규직의 증가가 단순히 경제환경 또는 노동시장 요인에 기인하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정부의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기업의 인사관리전략변화,노조의 조직률 하락 등 행위주체의 요인에 기인한다고 밝힌다.좀 더 쉽게 말하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 처럼 현재 비정규직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  무한경쟁의 세계화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최장집 교수의 개인적 경험에서 나온 일본 고용시장의 상황은 좋은 예가 되고 있다.일본 역시 평생직장의 개념이 신자유주의와 장기 경제불황으로 무너졌다.하지만 여전히 일본은 고용의 가치를 다른 어떤 것보다도 경제적 생산체제의 중심에 둔다는 것이다.즉 단기적 경제성장 지표를 높이기 보다는 10년을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고용을 유지하는 저성장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비정규직이 노동시장에서 주변화는 여러가지 문제를 낳는다.고용의 불안정은 가족 임금에 의존하는 노동자 가족의 삶에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사회적 안전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이들은 조그마한 외부 영향에도 추락하고 만다.생활보호 대상자가 되거나 국가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인 차상위 계층이 돼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일부에서는 개인의 능력 부재를 문제시 삼는다.하지만 통계는 비정규직 일자리로 부터 벗어난 노동자 중 1%만 정규직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말한다.즉 한번 비정규직은 영원히 비정규직의 덫에 빠진다는 것이다.

<위기의 노동>에서 다루어진 많은 이야기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여성 노동자 문제와 노동조합의 문제이다.여성 노동자 문제는 또한 여성의 빈곤과도 연관돼어 있다.여성 노동자들의 다수가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현재 노동시장을 설명하는 것 중에 하나는 '이중 노동시장 이론'이다.즉 분명한 경력단계와 직업의 안정성이 있는 구조화된 일차 노동시장과 불안정한 이차 노동시장이다.일차 부문에는 주로 남성 노동력이 이차 노동시장에는 주로 여성 노동력이 거래된다고 설명한다.남자 정규직 노동자를 100으로 했을 때 그 대척점에 있는 여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비율은 39 밖에 되지 않는다.여성 단독 세대주거나 가장인 경우 그 세대의 빈곤은 예상되는 일이다.그러한 면에서 국제연합개발기구는 "빈곤이 여성의 얼굴을 가졌다"라고 말한다. 세계 빈민의 70%이상이 여성이기 때문이다.여성 빈곤 문제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임금 문제만 가지고는 해결되지 않는다.<이중의 빈곤,빈곤의 여성화>의 저자는 성차별과 사회적 불평등의 배제를 위한 패러다임 전환,예방적 생애주이적 접근,여성빈곤집단의 차별화된 욕구 반영한 정책개발,빈곤정챙의 성주류화와 빈곤퇴치를 위한 종합적인 시스템 구축을 주장한다.

노동 조합내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 역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다.<노동 양극화와 운동의 연대성 위기>에서는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방조하고 있다고 말한다.특히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소속 조합원들의 협애한 이해관계에 치중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밝힌다.이는 대공장의 노조들이 하청 기업과 비정규 인력의 수탈을 추구하는 소속 대기업의 수익독식 경영을 묵인한 채 그 수익의 공유를 위한 담합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한다.<노동조합의 불평등 구조와 여성노동자>라는 논문에서는 00타이어의 촉탁직 여성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이중차별을 취재하여 비정규직 여성들이 회사는 물론이고 정규직 남성 중심 노조에 의해 배제되는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남성 중심의 정규직 노조는 촉탁직 여성을 고용할때는 회사측의 노조약화를 위한 노동통제 전략과 비정규직화의도를 비판하면서도 그 해결방법으로 촉탁직 여성노동자들을 남성조합원의 방패막이로 삼아 이들을 쫓아내고자 인식했다.한 노동조합 간부의 인터뷰는 정규직 남성 노조원들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한다.

'비정규 여성노동자들이 정규직이 되면 이들이 임시직으로 있을 때는 이 사람들이 먼저 나갈 수 있는데 조합원들이랑 똑같은 고용형태에서 일자리를 차지하게 되니까..조합원이 아니라면 여성노동자들이 먼저 해고될 수 있는데 이들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남성조합원들이 먼저 나갈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

노동조합의 분절화와 비정규직 배재 문제에 대해 저자들은 노조 조직의 탈 관료주의화,기업별 노조에서 산별노조로의 전환,연대 의식의 복원을 위한 교욱과 노동연대적 담론의 확산,전투성에서의 탈피를 통한 국민지지등의 전략적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글인 <사회적 시민권이 없는 한국 민주주의>는 영국의 사회학자 마샬의 사회적 시민권 개념을 도입하여 한국의 사회안전망 부재를 지적한다.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물질적 지지기반으로서의 복지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 사회적 시민권의 개념이다.사회적 시민권이란 사회통합이론으로서 개인의 기본권,정치참여권,사회의 경제 성장과 성과를 분배 받을 권리를 말하는 시민권이다.이는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으로 배제되는 시민들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는 개념이며 또한 경제적 성취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이다.최장집 교수는 우리 사회의 복지 수준을 끌어 올린 것을 김대중 정부의 공을 돌린다.그에 반해 현 노무현 정부는 노동-복지정책이라고 부를 만한 정책이 없어 언급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노무현 정부는 정서적 급진주의와 보수적 경제 정책 집행이라는 기묘한 결합을 통해 무능함 만을 보여주고 있다고 최장집 교수는 일갈한다.

현재 한국은 세계에서 유래없을 정도로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고 있는 나라이다.경제 지표와 자본의 수익률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압도하고 있다.정권은 철학의 부재로 인해 지켜야 할 것 마저 내주면서 무리한 신자유주의 받아들이기에 앞장 섰다.또한 보수언론은 신자유주의 만이 이 시대의 방향이며 뒤떨어지면 개인 뿐만이 아니라 국가가 낙오한다고 선전한다.이때문에 많은 일반인-거기에는 배웠다는 사람들도 포함하여-들이 신자유주의의는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고 믿고 뒤쳐지지 말자고 효율성을 높이자고 뛰어다닌다. 그 자본의 수익률과 효율성 뒤에 낙오하는 사회 구성원들은 그저 능력 부재의 낙오자로 취급할 뿐이다.그들이 죽던 살던 그것은 그들의 문제이며 나는 가끔 사회복지 공동모금에 전화 한두번 눌러주며 스스로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위안하고 만다.칸트가 말했다는 자유주의의 안티테제가 '가부장적 온정주의'임을 알지 못한다.관료주의 복지 시스템의 근본정서이기도 한 '온정주의'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개인적으로 온정주의는 철학의 부재가 가장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지속적일 수 없으며 파편적이기 때문이다.최장집 교수는 한국의 노동 및 복지 정책이 사후 약방문이라고 비판한다.즉 시장경재의 결과에 대해 사후적으로 열패자들을 물질적으로 보상하는 정책에 한정되고,시장경쟁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경쟁력을 갖도록 하는 복지정책은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사회적 시민권의 부여를 위해서는 사후 물질적 보상이라는 권위주의적 복지모델에서 탈피하여 대상자들이 시민권 부역/획득을 위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신자유주의를 전면 부정하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그렇다고 신자유주의가 가진 문제를 모른척 하거나 이론적인 한계에 대한 탐구를 도외시하겠다는 뜻은 아니다.또 반세계화 운동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마음 역시 추호도 없다.앞으로도 멕시코의 마르코스 부사령관을 지지할 것이며 또한 프랑스 젊은이들과 노조의 최초고용계약법 철회 쟁취에 약간은 흥분된 목소리로 기뻐할 것이다.최장집 교수 역시 이렇게 말한다.'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것은 신자유주의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의 각 부문,계층,수준이 치등적으로 영향받고 있는 분화된 현실이다.즉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국 사회의 현실로 부터 발생한 문제인 것이다.' ...담론은 담론의 영역에서 고민할 문제이고 변화는 실천의 영역 몫이다.진실은 늘 구체적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시장'에 목숨을 걸었던, 목숨은 모르겠고 별 고민도 안해보고 그냥 '어쩔 수 없다'주의에 빠진 이들에게 칼 폴라니의 말이라도 기억하게끔 하고 싶다.

'시장이란 분산적 결정을 특징으로 하는 교환 및 자원배분 메커니즘의 한 형태라는 점과 그 때문에 이를 제도화하는 국가의 개입 없는 시장이란 존재하기도 작동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또한 중요한 것은 시장은 그보다 큰 사회영역,전체 사회 공동테의 한 하위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사족)이 책은 논문을 모았다.그래서 글쓰기 방식도 딱딱하다.도표과 수치,그래프도 중간 중간 나온다.내용이 중복되는 부분도 있다.하지만 반복을 통한 강화 효과가 있다.또한 이 시대를 살면서 눈감아서는 안돼는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들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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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6-04-16 18:30   좋아요 0 | URL

'큰 꿈을 가져라'라는 교육 모토가 현실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곁들여 주목할 만 합니다. 홍세화씨가 '귀족 사회'란 글에서 적나라하게 지적했듯, '개천에서 용 났다'는 이슈가 저런 구조의 안정화 기제로 작용하니까요. 가끔 출신 계급은 보잘것없어도 타고난 재능으로 몇백 대 일의 바늘구멍을 뚫고 성공한 케이스가 대대적으로 홍보되는 건, 그러한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에게 "너의 노력과 정성이 부족해서다."라는 압박으로 연결됩니다. 100명 중 한명만이 이를 극복하고 귀족의 성채로 진입할 수 있는 사회가 유지되는 기술 중 하나가 아닐까요. 서로 타고난 재능과 능력이 다른 100명에게 '모두의 기회는 평등하다'라는 말로 100명 모두가 '내가 그 1명이겠지'라는 환상을 끊임없이 주입시키는 것, 그 핵심 기제가 '큰 꿈을 가져 성공해라'라는 성공지향의 교육 이념이니까요.

매너네 조직에서 무료로 왠만한 학술논문은 다 긁어볼 수 있어서 저 책은 사지 않고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논문으로 찾아서 읽었는데, 저 성공지향의 교육 이념이 현 노동시장 체제의 안정화 기제로 작용하는 데 대한 글을 찾지 못한 게 조금 아쉽더군요.


글샘 2006-04-17 14:33   좋아요 0 | URL
엊그제 집회 마치고 바닥에 노무현 개%%라고 적힌 낙서가 인터넷에 올랐더군요.
그냥 욕하고 말기엔, 현실이 너무도 냉혹합니다.
철학 없는 정치에 민초는 휘둘릴 뿐이란 것이, 앞날이 더욱 어둡기만 합니다.
왜 우린 생각있는, 철학을 가진, 비전을 보여 주는 정치를 갖지 못하는 걸까요.

후마니타스 2007-06-14 19:4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입니다.
도서에 관한 리뷰를 출판사 홈페이지로 담아갑니다.
미리 허락을 얻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언짢으시다면 홈페이지에 글을 남겨주세요.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humanitasbook.co.kr
입니다.
건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