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의 글 곳곳에는 장애로 인한 시린 기억들이 묻혀있다. 그것은 그녀의 진솔한 삶과 책읽기에서 배어 나오는 향기처럼 자연스럽다. 문학의 숲을 거니는, 한가로운 산책처럼 친근하지만 심심하기도 해서 이 책에는 일찌감치 재미없음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기대한 것은 아마도 권태로운 일상을 뒤흔드는 치열한 글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혹은 알아도 간과한 무엇을 발견하기를 바랐는지도. 그건 사사로운 욕심이다. 읽는 책들 중에서 정말로, 정말로 맘에 쏙 들어 열광하는 건, 열에 하나 있을까 말까다. 다 읽은 책을 차마 놓기 싫어 머리맡에 모셔두거나, 그 책의 여운으로 잠 못 이루는 밤 같은........ 이건 단지 순전히 투정이다. 엄한 책을 붙들고 하는 엄한 투정이다. 왜 감동할 수 없는가. 서글프지만 말라버린 감성 때문이다. 책읽기는 점점 음식과 닮아간다. 편식이다. 어려서도 하지 않던, 스스로 차려 먹는 밥이니 고칠 길은 멀지 않을까. 책읽기에 타이밍이 있다면 이 책은 훨씬 오래 전, 이십 대나 십 대의 뜨겁고 팔팔한 청춘에나 어울리려나. 아니다. 사람마다 기호가 있으니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건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내게는 늦은 감이 있다.
그녀는 장 영희라는 이름 앞에 붙는 장애인이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타인은 그녀와 그녀의 장애를 따로 분리해서 바라볼 수가 없다. 그건 가령 특이한 머리모양이나 눈의 쌍꺼풀처럼 그녀를 결정짓는 인상 같은 거다. 어려운 문제다. 보면서 보지 않는 척,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 하는 것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오지'는 영화에 대한 내 기억과 사뭇 다르다. 꽤나 좋아라 했던 영화..... 다시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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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현지에 도착하니 상황은 말로우가 상상했던 것과 판이했다. 커르츠는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이었다. 문명의 계율을 벗어난 '암흑의 오지'에서 그는 온갖 무자비한 수단을 다하여 상아를 긁어모으고, 총으로 제압한 원주민들로부터 살아 있는 신으로 숭배 받고, 불복종하는 원주민들을 죽여서 목을 잘라 장대에 꽂아 울타리를 치는 등 악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커르츠는 여전히 자신의 위대한 명분을 웅변으로 떠들며 "야만인들의 씨를 말려라"라고 적혀 있는 문서를 말로우에게 준다. 그러나 커르츠는 콩고 강 귀항선상에서 "정말 끔찍하다. 끔찍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열병으로 죽는다. 문명의 가면을 벗은 인간의 악마성과 19세기 제국주의, 인종차별의 광기를 상징하는 인물 커르츠는 죽음의 순간에서야 자신의 삶에 대한 통렬한 자기 반성에 다다른 것이다.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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