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런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다.(p. 154)


이 책은 에둘러 비유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게 아니다 라고 말한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서 하늘을 바라보기를 부끄럽게 만든다. 잘 못 알고 있는 것, 감추어진 진실, 허위의식, 가면을 집어던지라고 한다. 이제까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한 것을 부끄럽게 만든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눈물 따위 쉽게 가볍게 흘리지 말라고 한다. 연민이라고 믿은 것이 혹여 쾌감이 아닌가를 묻는다.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섣불리 강한 척을 하거나 손가락 하나 내미는 것으로 동정의 의무를 다했노라 교만하지 말라 한다.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 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   (p. 167)


아프가니스탄 카불시의 한 화상병동을 취재한 방송을 보았다. 이제 막 열두 살이 된 소녀가 등유를 온몸에 들이부었다. 아버지에게 팔려 시집을 갔으나 남편과 시어머니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분신을 기도했단다. 이웃의 남자가 주변을 맴돌며 관심을 보였다는 이유로 분신을 기도하여 전신에 화상을 입고 아프다고 소리치는 소녀도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아버지나 남편이 아닌 남자로부터의 그러한 행위는 강간과도 같다. 그래서 소녀는 순결을 잃었다고 믿으며 등유를 들이부은 것이다. 며칠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텔레비전의 그 이미지를 통해서 나는 내가 거기에서 태어나지 않았음을 안도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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