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
다락방님 뽐뿌질로 주문한 치즈치즈들 ♡
어제 집에 늦게 들어왔는데 확인하자마자 당장 먹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 시간은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있고 내일 먹을 것이냐 지금 깔 것이냐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까기로 ㅋ 주방 소리에 민감한 엄마 깰까봐 방으로 다 짊어지고 옴.
도마가 생각보다 작아서 약간 당황했는데, 진정하고 다시 보니ㅋ 칼이 생각보다 컸던 거지 도마는 적당량의 치즈를 썰어 먹기에 딱 알맞은 크기다. 처음에 식물성 오일로 한 번 닦고, 사용 후 세척은 레몬주스랑 소금으로 해야하고, 앞으로 6개월간은 월 1회 정도 규칙적으로 오일을 발라 관리를 해줘야한다고 한다. 나무니까 잘 말리는 것도 필수겠지. 아... 그냥 보기만 해도 귀엽고 치즈를 썰어 놓으면 정말 예쁘긴 하지만 관리하기 까다로운 니가 참 밉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어차피 사용하고 나면 씻고 말리는 거 다른 식기랑 똑같고 한 달에 한 번 기름만 발라주면 되는데 뭐가 그렇게 힘들고 밉나, 급 반성.
딱딱한 고다치즈 자르기 전. 책상이 밥상역할을 한 지 오래되긴 했지만 한밤중에 도마에 칼이라니 이건 또 무슨 짓인지 ㅎ
근데 이 매트가 본래 금색실이 섞여서 되게 예쁜데 불빛에 반사되니까 꼭 만들다 만 거 같이 숭숭숭해 보이네.
치즈가 한두 종류일 땐 도마에서 자르고 바로 먹는 게 간편하고 좋다. 기왕이면 예쁘게 담아 먹는 게 맛있으니 데코용으로도 더 낫고. 하지만 나는 주문한 치즈들을 다 맛보고 싶으니까 ㅋㅋㅋ 자른 건 일단 접시에 두고 나중에 다시 도마로 옮길 것임.
칼은 하드치즈용이라고 했는데 용도별로 나온 이유가 다 있을 테지만 그걸 다 구비해 놓을 게 아니라면 구멍이 난 걸로 사는 게 좋을 듯.. 구멍 없는 칼은 어차피 집에도 쌔고 쌨으니깐.
이라고 썼지만 이 칼이 하드치즈가 아니라 소프트치즈용이네 ㅋㅋㅋㅋㅋ 다른 데서 칼 검색했을 때는 저런 식으로 구멍난 게 하드용이어서 이것도 하드용이려니 하고 설명을 제대로 안 봤는 갑다. 사실 소프트치즈용이라고 하지만 이 칼도 잘 들러붙기때문에 구멍이 더 큰 걸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사진 찍는 사이 까망베르가 좀 녹아서 약간 지저분해졌다.
완성. 잘라놓고 보니 한가득이네. 까망베르, 스모크치즈, 크림치즈, 고다치즈 순서이고 맨 위에는 말린 무화과. 크림치즈도 까망베르처럼 좀 녹아서 저 꼴.. 나는 일단 생으로 먹어 보려고 자른 거지만 그냥 버터 나이프로 떠서 빵이나 크래커에 발라 먹는게 제일 낫지 싶다.
치즈가 하나하나 다 너무 맛있다. 뭐 특이한 거 산 게 아니라서 맛도 특별할 게 없긴 한데 기본적으로 모든 치즈가 굉장히 진하고 첫맛과 뒷맛이 다르며 뒤로 갈수록 깊어지는 맛이 예술.. 까망베르는 고소한 풍미 짱이고 스모크도 원래 훈제를 좋아하는데 쫄깃쫄깃 식감도 좋고 담백하고 정말 맛있다 ㅜㅜ 바게트 위에 올려서 살짝 녹여 먹으면 환상일 거 같다. 크림치즈는 누구나 아는 그런 크림치즈로 저건 갈릭과 허브가 들어간 거. 흔하게 먹는 크림치즈보다 진하고 고소하다.
다락방님이 강추하신 고다치즈는 평소에 짠 거 안 좋아라하는 내 입에 정말정말 짠데, 짠맛 이외에 고소하고 깊고 진한 맛이 우러나오는 데 반하고 나니 왜 추천하셨는지 알겠다. 소금알갱이가 씹히면서 짠맛이 습격하듯 쳐들어올 때는 아 짜도 짜도 너무 짜다 막 이러다가 금세 입 안을 휘감는 향이며 맛을 즐기고 있다. 치즈들이 정말 하나같이 입에 착착 감기는데 어후 ㅜㅜ 속절없이 말린다 말려. 와인이랑 같이 먹으니 그냥 천국이고. 세상에 이보다 더 맛있는 치즈가 얼마나 많을 거며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니 너무 설레고 좋다. ㅎㅎㅎㅎㅎ
고다도 짠 데다 그린올리브도 너무너무 짰는데, 근데 이것도 짠데도 맛있더라. 치즈든 열매든 숙성되면서 안으로 품고 품고 품는 고유한 풍미라는 게 얼마나 신비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깊다 깊어. 깊어... 그린은 짰지만 블랙올리브는 안 짜고 맛있어서 푹푹 퍼서 담고, 담으면서도 하나 둘 막 주워 먹었다. 문득 생각드는 게 난 뭐가 이렇게 다 맛있지. 어떻게 사람이 맛없는 걸 모르니.
생으로 맛은 다 봤으니 스파게티나 뭘 한 번 만들어 봐야겠다. 까나페 하려고 "의미없는 과자"도 사왔는데 치즈 썰다가 어느 새 내팽개치고 ㅋㅋㅋㅋㅋ 의미없는 과자를 더 의미없게 만들었네...
캐롤
정리를 하고, 다운받아두었던 영화 캐롤을 봤다. 어딘가에서 본 캐롤 책 역자후기가 병맛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보니 요즘 참 병맛 번역가들 풍년이네... 언제나 중요한 것은 결국 기술적인 재능이 아니라 그 사람 내면의 가치관, 철학을 이루는 인문학적 소양과 약간의 시대정신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본인의 가치관에 맞지 않는다면 번역을 하지 않는 최소한의 예의 내지 성의, 자기 주관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그런 것도.
LGBT 운동이 시작된 지 벌써 50년쯤 됐으면 이제 세상에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도 되지 않았나. 굳이 "인간적으로 끌려서" 라는 둥 "정이 들어서" 같은 말도 구차하게 붙일 필요는 없다. 그 사람들은 그래서 사랑을 하는 게 아니고, 그 사람들의 사랑이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첫 눈에 반하고, 저절로 눈길이 가고, 잘 모르면서도 어쩐지 신경이 쓰이고, 자꾸 생각나고, 손길이 닿으면 온몸이 곤두서고, 무언가를 계속 해주고 싶고, 어두운 표정에 걱정이 되고, 사소한 말과 행동에 상처를 받고, 그러면서도 함께 하고 싶고, 보고 싶고, 어느 새 빠져 나갈 수 없음을 깨닫고, 꿈을 꾸고. 꿈을 꾸고... 꿈을 꾸고.
사랑을 느끼는 대상이 다른 걸 어쩌라는 것인지. 이성애자이길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 것처럼 동성애자이길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간단한 논리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어째서 그렇게 온 힘을 쏟아 남의 소중한 사랑을 부정하고 혐오하는지 나는 아무리 봐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왜 그러지? 열성적으로 지지하고 축복해줄 수 없다면 적어도 생긴 대로 살게 그냥 좀 냅둬요...
근데 갑자기 딴 얘기인데, 캐롤은 테레즈에게 줄 카메라를 선물로 내밀면서 왜 가방을 발로 미는 거니. 성격하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고하게 흐르는 우아함에 몹시 어울리는 행동이었지만, 사랑을 느끼는 상대에게 그럴 수 있나? 사소한 발길질 하나를 자꾸 떠올리며 곱씹고 있다.
테레즈와 그녀의 남자친구, 캐롤과 그녀의 남편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나라면 내 애인이, 내 남편이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떠나려고 할 때 순순히 보내줄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봤다. 과연 그 때도 '그런가보다'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태어난 사람인데 어쩌라고' 할 수 있을까? 드디어 정체성을 찾았다는 사실을 축하해줄 수 있을까? 그런 상황이 닥치지 않아서 그런 건지 몰라도 지금 생각으로는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람을 피워도 굳이 잡을 생각이 없는데(의미없다..) 자기 성 정체성 찾아간다는 걸 어떻게 잡아(이건 더 의미없지).
나는 좋은 여자사람들이 좋고 좋은 남자사람들도 좋지만 사랑을 느끼는 것은 좋은 남자사람들이고, 여자가 여자를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그저 그들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동성과 자는 것이 이성과 자는 것보다 어떻게 더 좋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고, 남녀가 음양이 화합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고리타분한 법칙"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존재했던 "또 하나의 법칙"도 부정하지 않는다. 진보냐 보수냐의 정치적 문제따위도 아닌 것 같다.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으니까,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존재하는 것을 부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저 받아들여야할 문제일 뿐이다. 자기 자신의 모습대로. 타고난 대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대도.
캐롤이 결국 그토록 소중한 딸 앞에서도 자기 존재를 잃지 않아서 좋다. 중년 남자들 앞에서 더 이상 나를 부정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해서 좋다. 테레즈가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걷다 택시를 타고, 호텔직원의 제지에도 아랑곳없이 캐롤을 찾아 들어가서 좋다. 넓은 홀의 복잡한 사람들 사이로 보였다가, 가려졌다가, 보였다가 하는 캐롤의 얼굴과 오로지 한 곳만 응시하는 테레즈의 시선이 눈물나게 아름다웠다. 한껏 물기를 머금어 오래도록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엔딩이었다.
싸고 맛있는 와인과 더 맛있는 치즈와 아름다운 영화 한 편이 채워 주었던 어제의 여름 밤.
내 인생은 딱 이만큼.. 더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