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6월 1주
콜린 퍼스 주연의 영화 두 편이 같은 날 개봉해서 상영중이다. <싱글맨>과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입니까?>.
<싱글맨>은 포스터 속의 남자가 콜린 퍼스인 줄 몰랐다가 다른 영화를 예매하면서 알았다. 오. 봐야지.
딱히 젊고 파릇파릇한 그를 봤던 기억이 없긴 하지만, 왠지 저렇게 뺀질한 중년신사의 모습은 어색하다.
전통적이고 고지식하면서도 뭔가 아직 때가 덜 묻은 것 같은 분위기가 멋진 그인데.
<싱글맨>은 연인을 교통사고로 잃은 후 남은 자의 삶을 삼켜버린 상실감을 잔잔하게 그린 영화다.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 조지(콜린 퍼스)는 꽉 막히고 빈틈없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슴에 난 구멍속에서 외롭게 허우적대고 있다. 16년을 함께 지낸 연인을 잃은 쓸쓸하고 허무한 심정이 눈빛과 표정 하나하나마다 싸하게 배어난다.
하얀 눈길 위에 죽어있는 짐을 매일 밤 꿈 속에서 만나면서 그의 삶은 점점 죽음의 빛으로 탈색되어간다. 실제로 화면의 톤이 주인공 심리에 따라 조금씩 바뀌는데, 화면의 색감이 어둡고 낮게 가라앉았다가 어느 순간 선명한 빛을 낸다. 그의 삶에 다시 생기가 돌아오는 순간이다. 화려한 장치는 아니지만 몹시 감각적이고 예뻤다.
눈동자가 클로즈업 되는 장면이라든가 입술이 붉게 도드라지는 장면들까지, 게이의 감성을 건드리는 것들이 이런 거구나 엿보는 기분도. 그저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라고 생각해왔던 것과 약간 달랐던 것이, 땀에 젖어 햇빛에 반들거리는 남자의 가슴을 매혹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술을 마시는 입술을 탐하는 듯한 눈빛, 그런 눈빛과 눈빛이 부딪히는 순간 얼굴에 피어나는 야릇한 미소같은 것들은 그들을 좀 더 섬세하게 바라보게 했다. 서로를 알아보는 징표라도 있는 듯 이끌리는 동물적인 감각은 남녀관계와 전혀 다를 것이 없구나, 뭐 그런 새삼스러운 것까지.
(결코 완전히 지워내진 못할 것 같은) 특유의 까칠한 얼굴은 여전하지만, 그것이 공허한 표정과 섞여 자아내는 날선 슬픔은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온다. 결말이 반전이라면 반전이고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입니까?>
영화 제목을 착각했다. <아버지를 처음으로 본 것은 언제입니까?>로. 기억은 종종 눈의 물리적인 기능을 지배하곤 한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아버지와는 이제 마지막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본 것처럼 낯설었던 느낌이 지금까지 강하게 남아있다. 영정도 낯설었고 입관을 기다리며 누워있던 아버지도 낯설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기도 했지만, 단 한 번의 따뜻한 정도 느껴보지 못한 이 분, 나를 낳아준 아버지라는 이 분, 마치 처음 본 것 같은 낯설음이 곧 마지막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감당하기 힘든 괴리감으로 나를 덮쳤던 그 때.
이런 기억들을 생각나게 하는 건, 영화가 뻔하게 노리는 것이기도 하다. 관객들 가슴 속에 존재하는 저마다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저마다의 감상에 젖게 만드는 것. 영화 속 아버지와 성격이 비슷하다거나 암으로 돌아가셨다거나하는 특정한 부분들이 개인사와 겹친다면 조금쯤 눈물이 나기도 할 것이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아들이 마음을 풀어가는 과정에서는 나의 경우와 맞물리는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 자체에 관한 소감이라면 딱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어쩌라고?;
어린 시절의 블레이크는 좋았고, 성격차이와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부자지간의 묘한 신경전에도 공감이 갔다. 그러나 어른이 된 블레이크(콜린 퍼스)의 '과거여행'을 통한 아버지와의 '화해'는 좀 생뚱맞고 허술했다. 도대체 블레이크는 그 여행의 어떤 지점에 이르러 마음을 완전히 열 수 있었던 걸까?...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들도 많았고 콜린 퍼스 역시 특별히 나쁘진 않았지만 특별히 좋지도 않았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였다. (페이퍼 제목이 매력속으로 인데;;)
사랑해 마지않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도 콜린 퍼스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런, 예술가다운 성격이라고 해야하나. 몹시 까칠하고 고집스러우면서도 순수했던 화가 베르메르 역으로 콜린 퍼스는 정말 적격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트 역의 스칼렛 요한슨도 물론.
그리트가 베르메르의 화실 청소를 시작한 날, 그녀는 뭔가 마음에 걸려 베르메르의 부인과 장모가 있는 거실로 간다. "마님, 화실의 창문을 닦아도 될까요?" "그런 건 묻지 않고 해도 돼." "하지만 빛이 바뀔지도 몰라서요."
그녀의 남다른 직관과 재능을 지켜보며 까다로운 자신만의 세계로 맞아들인 베르메르는 그녀를 거의 예술적 동반자로 여기게 된다. 그녀가 청소하러 들어가서 정물 구도를 바꾸어놓고, 그가 그 구도대로 그림을 그리는 엇박의 교감도 사뭇 가슴이 떨렸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물감을 만들던 장면이었다. 화실 위에 붙은 작은 다락방 안에서 그녀와 그는 말도 없이 달그락달그락 재료를 갈고 섞는다. 가끔은 베르메르의 조곤조곤한 설명이 팽팽한 침묵을 갈랐고, 가끔은 그와 그녀의 손이 스치듯 닿으며 서로에 대한 동경과 애정이 튀어올랐다. 그녀가 마지막 순결처럼 감춰왔던 머리칼을 그에게 들키던 순간의 뜨거웠던 긴장까지... 모든 것이 예술이었다. 책을 먼저 본 터라 실망하지 않을까 했는데, 책이 더 좋긴 하지만 영화도 몹시 사랑스러웠다.
<러브 액츄얼리> 이건 뭐 너무 유명한 영화니까. 역시 까탈스러워 보이면서도 로맨틱한 구석이 있는 역할로는 그가 최고인 거 같다. 여기서 캐릭터 자체는 성격이 그닥 드럽지도 않았지만, (조용하고 예민한 인상을 주는) 작가라는 직업 자체만으로 그의 매력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특유의 무뚝뚝한 이미지 덕분에 막판 레스토랑에서의 프로포즈가 더 감격적이었던. 은근한 매력이라면 휴 그랜트도 만만치 않은데, 역시 분위기는 콜린 퍼스 쪽이 더 좋았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여기도 휴 그랜트과 함께구나. 포스터 사진.ㅋㅋㅋㅋㅋ 공부만 열심히 한 순진쟁이의, 브리짓에 대한 풋풋한 사랑과 바람둥이 말종 상사로부터 그녀를 지키려는 정의감이 고스란히 드러난 표정. 귀엽고 멋지다. 그러고보니 이 영화에서 그의 이름이 마크 다아시였다.
보너스로 <오만과 편견>. 이건 아직 못 봤는데 그의 출연작을 검색하다가 발견했다. 제인 오스틴의 그 오만과 편견을 드라마로 제작한 거라고 한다. 당연히 다아시 역엔 그다. 세상에, 그렇게 냉정과 열정을 동시에 지닌 에고덩어리 다아시로 콜린 퍼스 이외에는 생각나는 사람이 없다. 아래는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하는 다아시.
발버둥치며 자신과 싸워봤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도무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당신을 사모하고 사랑하는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언하건데, 제가 제 가족들과 친구들의 소망과 제 자신의 판단에 명백히 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일가친척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결혼은 어떤 것이든 매우 비난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질 겁니다
사실 분별있는 사람으로서 제 자신이 그렇게 비난받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주위의 모든 반대를 물리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가 만났던 매순간마다 전 열렬한 동경과 관심으로 당신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제 고통을 상기하고 저의 청혼을 받아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뭐래.ㅋㅋㅋㅋㅋ 아. 이 드라마도 보고 싶고 책도 다시 읽고 싶다. 이래서 고전은 고전인가보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표정이 그처럼 어울릴 수 없는 까칠한 얼굴도 얼굴이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순박한 눈짓과 미소가 있어서 더 매력적인 배우다. 능글능글한 유머보다는 신경질적인 무표정 혹은 아주 진솔한 눈빛이 참 멋진 영국 남자. 그의 영화를 모두 본 건 아니지만 <싱글맨>에서 그의 연기는 아주 깊어서, 그의 진면목을 보여줄 영화가 조만간 한 번 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갖게 한다. 다른 배우들에게는 없는 그만의 매력이 남김없이 발산될 작품을 '제대로' 만나길 고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