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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 A Prophe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한 때 프랑스 영화에 빠져서 시간이 날 때마다 비디오를 빌려봤던 적이 있었다. 대학교 기숙사에 있을 때였는데, 비디오실 예약은 하루 1회, 1명당 2시간이 최대치였다. 물론 룸메이트들의 이름을 빌려서 예약을 할 수도 있었고, 그래서 주말같은 땐 4시간 6시간씩 잡아서 밤새 영화를 보기도 했다.
프랑스 영화가 좋은 이유는 간단했다. 요란하지 않고, 뻔하지 않고, 가식적이지 않다는 거. 소위 예술영화라고 불리는 기준은 솔직히 잘 모르겠고.. 그냥 표현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인 거 같다. 그들이 보여주는 현실은 헐리우드 영화의 그것과 다르고, 그들이 보여주는 환상도 헐리우드 영화의 그것과 다르다. 그들이 보여주는 현실이 더 현실감있고 그들이 보여주는 환상도 더 현실감있다. 보기 좋은 것들을 골라 기분 좋게 부풀려서 예쁘게 포장까지 하는 헐리우드와 달리, 보기 불편한 것들도 끄집어내고 있는 그대로를 사실적으로 혹은 더 깊고 세밀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지루하기도 하고 별로 멋있지도 않다. 우리 현실처럼... 가슴에 더 크게 와닿고, 더 오래 남는 이유다.
[예언자]도 그렇다. 글도 못 깨친 채 그저 이런저런 잡범으로 청소년기를 보낸 19살 청년(말리크)이 교도소에 들어와 비로소 공부를 시작하고 잔머리 굴려가며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은 전혀 '재미'있지 않다. 면도날을 입안에 숨겼다가 순식간에 꺼내서 상대방의 목을 긋는 연습을 그렇게 해놓고도 실제로는 제 겁에 제가 질려 겨우겨우 성공하고, 당장의 목숨의 위협 앞에서는 더할 수 없이 비굴하며, 대담한 계획을 세우면서도 눈빛은 흔들리고 몸짓도 초조하다. 혼자있을 때의 표정조차 소심하고 불안해서 쟤 저러다 들켜서 맞아 죽는 거 아닌가 싶다. 아 좀 한 번쯤은 멋지게 씩 웃기라도 해보라고 속으로 외치다가, 나중에 결국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했을 때조차, 날카로운 표정 속에 어딘지 불안한 그의 얼굴을 보고 절감하고 만다. 저런 게 진짜라고.
식스팩 복근도 거침없는 액션도 없다. 나를 위협하는 교도소 내의 권력자(세자르)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생존본능, 생애 최초로 죽인 남자의 환영을 항상 등 뒤에 두고 있을만큼의 죄책감, 때로는 적과의 동침도 선택할 줄 아는 담력, 적절하게 계산된 용인술로 치고 빠지며 결국 나를 위협했던 권력자에게 복수하고야 마는 하나의 '현실'이 있을 뿐. 구석으로 몰려 주저앉아 있다가도 번뜩 고개를 들고 일어서서 한 걸음씩 걷고 힘을 내어 뛴다. 네가 가는 길이 바로 너의 길이라는 메시아적 환상까지 눈앞에 펼쳐진다. 그가 두 번째, 세 번째 살인을 단번에 해치우던 순간 세상이 정지한 듯 희열에 가득한 표정은 정말 압권이었는데, 그 후에 귀가 들리지 않는다며 예 아니오로만 대답하라고 소리치는 모습에선 좀 소름이 돋았다. 멋지게 사람을 죽이고 농담 한 마디씩 시크하게 날려대는 영화들에선 느끼지 못한 실감이었다. 일부러 외출시간을 어겨 독방에 갇힘으로써 스스로 신변을 보호하고 있는 동안에 그가 이간질시킨 두 조직이 교도소 내에서 혈투를 벌이던 장면은, 단연 이 영화의 백미가 아닌가 싶다. [대부]와 같은 반열에 올려도 손색이 없다는 평이 나올만하다.
꽤 긴 러닝타임이었지만, 무겁고 어두운 화면속에서 내내 깊게 흔들리는 눈빛을 좇다보니 어느 새 그 눈빛에 동화되어 위태위태한 성공담이 마치 나의 이야기인양 몰입하고 있었다. 말리크가 양쪽 주머니에 총을 찔러넣고 길거리를 툭툭 걸어갈 땐 내 가슴이 턱턱 내려앉았고 독방에 갇힐 때 간수들이 잠그는 이중철문은 어찌나 든든하던지 내가 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영화를 보고난 후 여기저기 리뷰를 읽어보니 악평도 있고 또 나름 '해석'해서 볼 부분이 있는 거 같은데, 어쨌든 재미있게 봤고 범죄영화를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오랜만이라 나로썬 매우 흡족한 시간이었다. 옛날옛날부터 프랑스어를 배우려고 벼르고만-_- 있는데, 이제 좀 달려들어볼까 생각도.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