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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꿈처럼...


생판 남의 입장에서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숨이 막혀버리는 일들을 직접 온 몸으로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서른 초반 여성의, 그러나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을 내면의 단단한 이야기. 어린 시절 친구의 팔을 고쳐주고 싶다며 의사를 꿈꿨고 하루하루를 그 꿈으로 채워왔던 시간들이 정말 꿈처럼 말도 안 되게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내팽개쳐진 지금, 이미 벌어진 일은 그저 받아들일 뿐 그 일들이 앞으로의 시간까지 잠식해버리지 못하도록 차곡차곡 일상을 꾸려가는 모습이 담담하게 빛나는 책이다.


시시콜콜 복작복작


진짜는 강하다. 지저분하게 뒤틀린 언어들이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가짜 모습들은 진짜가 나오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진짜 모습, 진짜 목소리를 자꾸 보여줘서 좋다. 지금처럼 맛집도 찾아다니고 전시회도 보러 다니고 제주도도 가고 좋아하는 태국도 가고, 자꾸 자꾸 갔으면 좋겠다. 어디든,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그렇게 "시시콜콜 복작복작" 잘 살았으면 좋겠다. 어느 날 문득 지금 내가 선 곳이 너무 낯설어 슬픔이 차오를 때도 있을 지 모르겠다. 이 책은, 그렇더라도 지금처럼,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과 무엇보다 자신의 힘으로 너끈히 일어설 것임을 믿게 하는 씩씩한 책이기도 하다.


건승!


오늘 아침 뉴스공장에서 조국 전 장관이 "법률적 결과를 존중하나 비법률적 방식으로라도 명예를 회복할" 길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줌 권력의 일시적인 패악질이 앞으로의 조국과 앞으로의 조민의 시간까지 침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여정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짧은 리뷰라도 쓴다(세상에 몇 년만의 글이람). 이제 <디케의 눈물>을 읽을 거다. 아주 옛날 조국의 시민강연 때 받았던 사인 속 한 단어처럼, 두 분의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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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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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아주 못나지 않아서 잘하는 것을 잘하고, 아주 잘나지는 않아서 못하는 것은 여전히 못한다는 그녀. 그런 그녀의 이야기.

 

학창시절 정말 공부를 못했다는 그녀는 작가가 된 이후 명문대 출신이 많은 편집자들과 만날 때 조금 신경이 쓰인다. 대화 중에 무슨 뜻인지 모르는 단어들이 나와서 나중에 집에 돌아와 사전을 찾아보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직접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한다. 어휘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넌지시 고백(?)하면 편집자는 담담하게 대꾸한다. "그렇지만 저는 이야기를 만들지 못 하잖습니까."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에 대한 담담한 이야기가 좋다. 그녀도 누구나처럼 잘하는 것이 있고 못하는 것도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녀에게 잘하는 것은 더 잘하는 싶은 것이고 못하는 것은 이제라도 좀 잘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못하는 것을 남이 잘하는 건 솔직히 부러운데 부끄러운 건 아니다. 잘하고 싶어서 노력을 하지만 실패했다고 절망하는 일도 없다.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절망하지 않는 것.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고, 잘하다가 못할 수도 있고, 못하다가 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잘하는 것이 있다고 그것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고, 못하는 것이 있다고 그것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그냥 그 모든 게 나 자신이고, 앞으로의 나 자신으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토록 당연한 말들이 그녀의 무심한 그림과 만나면 묘하게 빛이 난다. 그녀에게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다고 한 어느 편집자의 말처럼, 그녀에게는 이상하게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것들이 그녀를 통하면 참 어처구니없게도 가슴을 파고 든다. 몇 개의 선과 몇 마디의 이야기가 전하는 울림이 크다.

 

 

 

 

득만 보는 인생도 좀 그렇잖아, 라고 말하며 훗 웃는 그녀. 어쩌면 이렇게 간결한지. 모오든 취약점을 노오력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스스로를 가두고 사는 사람들을 보다가, 그리다 만 것 같은 그림을 느긋하게 그리고 쓰다 만 일기같은 문장들을 띄엄띄엄 늘어 놓으며 뭐 좀 사람이 질 수도 있다고,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사는 것도 좋다고 간단하게 결론 내버리는 그녀의 세상에 들어오니 숨쉬는 게 다 편해지는 것이다. 그녀에게 삶은 이토록 간명하다.

 

매사에 적당할 줄 아는 그녀를 보는 것이 행복하다. 대충 적당히 하는 적당함이 아니라 잘하는 것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못하는 것은 부족한 만큼의 한계를 인정하고 어느 선에서 멈출 줄 아는 적당함. 그녀에게 있다는 반짝이는 무언가는 바로 이 적당함에서 나오는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녀가 눈으로 보는 것, 입으로 말하는 것, 머리로 생각하는 것, 몸으로 살아가는 것, 그 모든 것이 모자라거나 넘침이 없이 딱 그만큼 적당하다. 너무 먼 곳에 머무르지도 않지만 너무 가까이 가서 다치지 않는 그녀는 더없이 현명하고, 너무 평범해 보이지 않기 위해 소소한 시도를 하지만 또 너무 특이해 보이지 않기 위해 자제하는 그녀는 얼마나 귀여운지! 스스로를 괴롭히며 극뽁!하려 하지 않고 자족하는 그녀는 아름답다. 그녀가 그런 것처럼, 사람들이 '득만 보려고 하는 마음'을 먹지 않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훨씬 살기가 좋아질텐데. 그녀의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조차도 간단하다.

 

그녀는 실제로 어떤 사람일까? 이 이야기가 아무리 자전적이라고 해도 백 퍼센트 솔직한 모습이라고 믿는 것은 아니다. 굳이 진실이 아닐 거라 의구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느 정도의 여지를 둔다고 할까. 이런 모습은 이런 모습대로 받아들이되 다른 어디에선가 내 생각과 다른 모습을 보게 되더라도 그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조금쯤의 여백. 내가 아는 만큼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아는 만큼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비워 두는 것.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 이 또한 그녀의 적당한 세상을 바라보는 한 독자의 '그녀스러운' 적당한 방식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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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기후 2016-07-12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진 갖고 싶었는데 ㅜ 리뷰 심사한 오지은님 미오..

다락방 2016-07-12 17:12   좋아요 0 | URL
아 이거 무슨 이벤트 했었어요? ㅠㅠ 히잉 ㅠㅠ 오지은님 나도 미워 ㅜㅜ

건조기후 2016-07-12 18:53   좋아요 0 | URL
ㅎㅎ 마스다 미리 캐릭터 들어간 넘나 예쁜 문진이랑 상금 주는 리뷰 이벤트였어요. 돈은 그냥 돈인데 문진은 이거 어디 가서 살 수도 없공 ㅜ 자질구레한 물건에 얼마나 집착하는 성격인데.. 슬퍼요. ㅋㅋㅋ

단발머리 2016-07-17 22:34   좋아요 0 | URL
일단 저도 오지은님 밉구요..... ㅎㅎ
그런데 저는 문진 말고 상금에.... ㅎㅎㅎ

건조기후 2016-07-17 23:0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상금도 좋지만 저는 문진이 정말 탐났어요 ㅜ 넘넘 예쁘던데 어흑..
 
미드나잇 선 Oslo 1970 Series 2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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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시작은 끝이었다. 노르웨이 북단, 북극해와 맞닿은 길의 끝, 선의 끝. 그리고 남자의, 끝일 것이 분명해보였던 끝.

 

마약중독자들에게 약을 팔면서 푼돈을 벌다가 마약상의 하수인으로 들어가서 해결사 노릇을 하던 남자는 막상 사람 얼굴을 보면 총을 제대로 쏘지 못 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결국 죽여야 할 사람을 죽이지 못 해 임무 수행에 실패하고, 시체를 처리했다는 거짓말이 들통나자 보스가 보낸 킬러로부터 가까스로 도망쳐 북쪽의 한 시골마을에 이른다. 

 

북쪽의 끝에 다다르기 전 그의 삶은 블랙홀이었다. 빚이 많은 약쟁이들을 찾아가 돈을 받아오거나 총을 쏴야했던 이유는 딸아이의 치료비때문이었고, 제대로 먹지도 않아 깡마른 몸으로 돈을 모으고 모았지만 늘 부족했고, 팔에 주삿자국과 멍이 끊이지 않는 아이 엄마는 다른 남자와 살면서 양육비를 요구했고, 양육비를 받고도 양육하지 않았고, 약을 사는 엄마와 약을 파는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던 아이는 약을 제대로 쓰지 못 한 채 죽어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싶었던 아이의 푸른 눈빛까지 빨아들여버린 검은 구멍...

 

"이제 우린 완전히 비참해졌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토랄프와 난 그걸 검은 구멍이라고 불렀다. 핑켈슈타인이라고 하는 남자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면 무엇이든, 심지어 빛까지도 빨아들이는 우주의 구멍을 발견했다고 한다. 구멍은 너무 검어서 육안으로는 절대 볼 수 없었는데 우리 상태가 딱 그랬다.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그냥 그럭저럭 살아가다가 어느 날 중력장에 갇혔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면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절망과 끝없는 자포자기의 검은 구멍에 빨려 들어간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바깥세상의 거울상이고,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는지, 절망하지 말아야 할 그럴 듯한 이유가 있는지 계속 자문한다. (p.119)

 

울프라는 가명으로 낯선 땅에 정착 아닌 정착을 한 남자는 딸처럼 푸른 광채를 빛내는 눈동자를 가진 여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다시금 푸른 눈빛을 지키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역시 검은 구멍이 아닌지, "희망을 가져야 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는지, 절망하지 말아야 할 그럴 듯한 이유가 있는지 계속 자문한다." 마음의 변화는 언제나 상황을 변화시키는 힘을 만들어내는 법. 위험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깨달았을 때, 검지 하나를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 해 늘상 총쏘기에 실패했던 울프는 죽어도 상관없던 제 몸을 지키기 위해 총을 쏘았다. 자신의 "바깥세상의 거울상"을 쐈고, 검은 구멍에 갇혀있던 자신을 죽였다. 방탕한 예지자의 말은 정확했다. 그는 자신이 반사된 상을 향해 여러 번 총을 겨눴고, 검지를 움직여 쏘았고, 검은 구멍의 중력장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

 

"당신 눈엔 죽음이 있어. 눈 돌리지 마. 당신이 반사된 상을 쏘는 게 보여. 그래, 당신은 반사된 상을 쏴." 내 머릿속에서 조그맣게 알람이 울렸다. (p.135)

 

마을까지 추적해 온 보스의 부하들이 그가 은거하고 있던 오두막에 이르렀을 때, 여자의 도움으로 그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한 울프는 그녀에게로 향한다. 그 곳에서 또 다른 검은 구멍을 맞닥뜨렸고, 자신의 거울상을 쏜 것처럼 여자의 거울상도 쏘아버렸다. 죽은 것으로 알고 장례까지 치렀던 여자의 남편이 살아 돌아왔고, 가정폭력의 원흉이었던 남편이 결국엔 칼로 여자의 목을 겨누던 순간이었다. 낭자하는 피를 깨끗이 닦아낸 후 남편의 시체를 오두막에 집어 넣고 불을 질렀다. 남편은 울프의 시체로 위장되었고 울프는 그녀, 레아의 남편이 되었다. 그의 끝과 그녀의 끝은 그와 그녀가 함께하는 시작이 되었다. 끝과 시작이 공존하고 어둠과 빛이 구별되지 않는 북단의 미드나잇 태양 아래 그들은 어둠을 끝냈고, 빛을 시작했다. 새로운 삶을 찾아 국경을 넘기로 한 그들이 울프의 신분을 보증하기 위해 급하게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은 더없이 유쾌했고, 스스로의 길을 시작한 운전석의 레아와 뒷좌석에서 잠든 그녀 아들 크누트와 이들의 곁에서 "또 다시 질 준비가 된" 울프는 단단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지면 더 나아져요, 울프 아저씨?"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레아도 우리 얘기에 관심을 보였다.

"더 잘-," 나는 팔에 앉은 모기를 찰싹 때려잡았다. "질 수 있지."

"더 잘 질 수 있다고요? 더 잘 져서 뭐해요?"

"우린 살면서 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려고 하거든. 그러니까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많아. 그러니까 앞으로 더 자주 하게 될 일을 잘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니?"

"그런 거 같네요." 크누트는 곰곰이 생각했다. "근데 잘 진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아이의 어깨 너머로 레아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기꺼이 또 질 용기를 갖는 거야." (p.167)

 

백야를 배경으로 한다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도망자에게는 추적자를 경계하기에 백야만큼 좋은 환경이 없고 눈부신 밤을 배경으로 액션씬이 벌어진다면 아주 환상적일 것 같았...지만. 백야는 그렇게 단순한 액션을 위해 설정된 것이 아니었다. 어둠이 빛을 머금고 있고 끝이 시작을 품고 있는 신비로운 곳이었다. 그런 시간이었고, 그런 공간이었다.

 

이제 이야기의 끝은 시작이었다. 노르웨이 북단에서 벗어나는 여정의 시작, 길의 시작, 선의 시작.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시작임이 분명한 시작. 어제인지 오늘인지 밤인지 낮인지 모를 혼돈의 한가운데서 분명하게 선을 그어 끝을 시작으로 바꾸어버린 이 운명의 개척자는 여전히 목적지로 가는 중이다. 시작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로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처럼, 끝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이야기를 끝냈다. 울프와 레아와 크누트가 긴 휴식을 취하며 편안하게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과 장소에 무사히 도착했기를 바란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가지고 언젠가 어디에선가 다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기를.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처음부터 시작하면 좋겠지만 난 어디가 처음인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 역시 내 삶의 인과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 하기 때문이다. (...) 정말이지 난 모르겠다. 우리는 날조된 논리로 이야기의 앞뒤를 만들어 인생에 뭔가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니 여기서부터 시작하겠다. 혼돈의 한가운데, 운명이 짧은 휴식을 취하며 숨을 돌리는 듯했던 시간과 장소에서. 목적지로 가는 중이지만 잠시나마 이미 도착했다고 생각했던 때.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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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 칸 그리고 나머지들
    from Oasis 2016-05-21 20:57 
    요 네스뵈 신간 리뷰에 같이 올리려고 찍었는데, 김영사 비채 이벤트가 있길래 나머지들도 같이 올려본다. 요 네스뵈로 가득한 요 한 칸. 요 칸. ㅎ 그리고 나머지들. 신간도 별로 없구만 읽은 책보다 안 읽은 책이 더 많다. 얼른얼른 부지런히 읽자. 안철수의 책이 새삼 눈에 띄네. 저 책이 출간되었을 때 물량 빠지는 속도가 거의 광속이었다고 하는데 꽃시절도 그 때로 끝이었나보다. 나는 아직도-_- 안철수와 다른 국민의당 소속들을 구분해서 보긴 하는데, '
 
 
 
블러드 온 스노우 Oslo 1970 Series 1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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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의 신간 <블러드 온 스노우>가 나왔다. 지금까지 나온 그의 소설답지 않게 200페이지밖에 안 돼서 의아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미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12시간만에 쓴 거라고 한다. 하... 12시간...; 주인공 올라브에 완전 빙의된 상태에서 자기 안에 있는 올라브의 성격이 사라질까봐 미친듯이 썼다고.

 

1970년대의 오슬로가 배경인데 재미있는 것이, 이 책은 원래 요 네스뵈의 다른 소설 <납치>의 주인공인 소설가 톰 요한센의 작품으로 설정된 가상의 소설이었다고 한다. 톰 요한센은 1970년대 <블러드 온 스노우>와 <미드나잇 선>이라는 두 작품으로 반짝 인기있었다가 한물 간 작가로 설정이 되었는데, 요 네스뵈가 <납치>를 계속 쓰다보니 이 가상의 작품들에 관심이 깊어져서 실제로 써보기로 했던 것. 나아가 마치 톰 요한센이 실존인물이었던 것처럼 <블러드 온 스노우>를 그의 이름으로 해서 <납치>와 함께 출간하려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고. ㅎㅎ 결국엔 법적인 문제때문에 이 흥미로운 '사기'는 실패했지만 요 네스뵈의 장난꾸러기같은 웃음만큼이나 아이디어가 재기발랄하다.

 

정말 톰 요한센의 이름으로 나왔다면 이것이 요 네스뵈의 작품인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전의 작품들과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다양한 캐릭터를 구축하거나 복잡한 플롯을 구성하는 과정없이 시종일관 독백처럼 써내려간 이 짧은 이야기가 그의 소설일 줄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 네스뵈인 걸 알고 봐서 그런지 정말 요 네스뵈가 올라브를 뒤집어 쓴 듯, 혹은 요 네스뵈의 잠재된 어떤 모습들이 뒤섞여 올라브로 분출되는 듯, 소설 주인공과 작가 사이를 수없이 왔다갔다 하게 된다. 종종 책 이야기를 한다던가 다큐멘터리 장면을 떠올리며 중얼거린다던가 할 때 요 네스뵈가 좋아하는 책이구나, 그가 다큐멘터리를 잘 보는구나, 하게 되는 거. 짧은 시간 쓴 소설이니 요 네스뵈 자신 본연의 모습이 어쩔 수 없이 투영됐을 거라는 생각도 한다.

 

스토리라고는 살인청부업자인 주인공이 보스의 아내를 죽이려다 사랑에 빠지고, 보스의 아내를 위해 보스를 죽이고, 결국엔 보스의 아내 때문에 본인이 죽게 되는 시시껄렁한 줄기가 전부다. 그런데 그 줄기 사이사이가 더할 수 없이 매혹적으로 빛난다. 요 네스뵈가 만들어낸 주인공의 스토리와 캐릭터 때문이다. 가정사로 인한 트라우마, 유전의 굴레, 난독증과 정신분열, 엉뚱한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기질, 더욱더 엉뚱한 측은지심... 금전적인 셈법에도 약하고 인간적인 셈법에는 더 약한 바보, 그러나 킬러로서의 자질은 누구에게도 지지않는 살인전문가. 이 차갑고도 따뜻한 남자의 의식이 흐르는대로 써내려간 몽롱하고 긴박하며 애처로운 문장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소설로 완결되었다. 그가 좋아했던 책 [레 미제라블]의 모습으로.

 

12시간 동안 어떻게 이렇게 완성도 높은 스릴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예의 그 스케일 크고 복잡했던 플롯은 허전할 정도로 간결해졌지만 구석구석이 교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그럴 수밖에 없는' 반전까지 만들어내는 능력에는 절로 찬탄이 흘러나왔다. 1970년대 오슬로의 모습 중에서도 특유의 음울함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래서 이렇게 플롯이 아닌 하나의 이미지로 떠오르게끔 이야기를 만든 것도 같다. 후속작으로 나온다는 <미드나잇 선>도 벌써 두근두근한다. 그러게, 어째서 북유럽의 스릴러 대가가 아직 한번도 백야를 다루지 않았던 거지. 새삼스러움을 느끼며 다시 또 오매불망 기다림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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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 칸 그리고 나머지들
    from Oasis 2016-05-21 20:57 
    요 네스뵈 신간 리뷰에 같이 올리려고 찍었는데, 김영사 비채 이벤트가 있길래 나머지들도 같이 올려본다. 요 네스뵈로 가득한 요 한 칸. 요 칸. ㅎ 그리고 나머지들. 신간도 별로 없구만 읽은 책보다 안 읽은 책이 더 많다. 얼른얼른 부지런히 읽자. 안철수의 책이 새삼 눈에 띄네. 저 책이 출간되었을 때 물량 빠지는 속도가 거의 광속이었다고 하는데 꽃시절도 그 때로 끝이었나보다. 나는 아직도-_- 안철수와 다른 국민의당 소속들을 구분해서 보긴 하는데, '
 
 
다락방 2016-04-14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나다를까, 나오기가 무섭게 읽으셨군요. 저는 아직 준비도 못해놨는데 말입니다. 아하하하하.
이 책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제가 대놓고 유치한 걸 좀 좋아하기도 해서, 보스의 아내를 죽이려다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 ㅋㅋㅋ 시시껄렁하지만 궁금해요. 그나저나 열두시간 안에 휘리릭 쓰는 소설이라니, 요 네스뵈도 대단하네요 진짜 ㅠㅠ 부럽 ㅠㅠ

건조기후 2016-04-14 10:06   좋아요 0 | URL
저도 시시껄렁한 걸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대놓고 유치해도 재밌는 건 또 재밌으니깐 ㅎㅎ 근데 이 책은 스토리는 분명히 그런데 읽고 나면 전혀 시시껄렁하지 않아요. 정말 약이라도 빨고 썼나 싶어요 ^^:
 
네메시스 - 복수의 여신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4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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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복수의 여신>은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열 권 중에서 네 번째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이번에 동시 출간된 <박쥐>가 그의 처녀작이고 세 번째인 <레드브레스트>, 일곱 번째 <스노우맨>, 여덟 번째 <레오파드>까지가 국내에 출간된 해리 시리즈의 전부. 열 권 중 네 번째 책이니 신작이라고 할 수도 없는, 12년 전인 2002년에 나온 책이다. 때가 때였던지라 당시 전 세계에 충격을 줬던 911사태와 인간의 복수심을 그린 이 책을 연관지어 그 시의성을 평가하기도 하던데, 읽어 보면 알겠지만 굳이 그런 식으로 엮지 않더라도 소설 자체로 얼마든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노르웨이판 원제는 소르겐프리(Sorgenfri, 슬픔의 자유)이다. 요 네스뵈가 소설 집필 당시 주로 거주했던 오슬로 거리의 이름이자, 해리의 전 여자친구 안나의 집이 있는 곳. 마치 안나의 운명을 대변하는 듯한 이름의 이 거리를 그녀의 공간으로 설정한 것도 우연은 아닐 터다.

 

얼핏 영화인지 실제 상황인지 구별하기 쉽지 않은 첫 장면부터가 범상치 않다. 역자후기에서 노진선 번역가가 말하고 있듯이 나도 읽던 도중에 다시 맨 앞장으로 갔다가 돌아와야 했다. 책장을 앞으로 넘기는 손이 기분 좋게 떨렸다. 이어서 전개될 이야기가 얼마나 탄탄하고 치밀할 것인지 기대에 부풀어 심장박동이 빨라졌고, 이내 휘몰아치는 활자의 폭풍에 휩쓸려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다.

 

이야기는 전혀 별개인 두 개의 사건, 백주대낮의 은행강도살인사건과 안나의 자살사건이 동시에 진행된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서로 연관도 없는 사건을 동시에 묶었는지 의아하고 다소 복잡해 보일 수도 있지만, 차근차근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그 두 사건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인간이라는 감정동물이 선택하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결국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중첩에 중첩을 거듭하는 스토리, 구석구석 장치해둔 복선과 암시와 속임수는 추리소설의 스릴 넘치는 재미를, 사건의 저변을 뜨겁게 휘감아 도는 혈육 간의 갈등과 애증은 인간의 내면을 통찰하는 고전문학같은 미학마저 선사해준다.

 

요 네스뵈의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과 매력에 마음껏 취하는 즐거움은 물론, 곳곳에 무심한 듯 그러나 치밀한 계산에 의해 좌표를 지정해놓았을 것이 분명한 단어들을 찾아 그 의미를 곱씹어보는 재미도 만만찮다. 내게는 그런 숨은단어찾기 중의 하나가 ‘아모로마’였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나는 불현 듯 떠오른 이 단어가 <네메시스>의 모든 것을 담아 깊이 찔러놓은 요 네스뵈의 신의 한 수인 것처럼 느껴졌다. 해리 홀레와 베아테 뢴이 자동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다가 해리가 뜬금없이 애너그램을 아느냐고 묻는다. 앞으로 읽어도 뒤로 읽어도 똑같은 단어가 되는 애너그램. 운전하느라 정신이 없는 베아테 뢴의 옆에서 혼자 중얼대는 해리의 눈은 사이드미러를 보고 있고, 거울에는 트럭의 옆면에 적힌 글자가 비치고 있다. 아모로마(AMOROMA)ㅡ영원히 당신의 것.

 

이야기 중간에 별 의미 없이 툭 튀어나오는 단어 같지만 당연히 요 네스뵈의 소설에 별 의미 없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단어로 인해 해리는 안나를 죽인 범인을 잡는 결정적인 영감을 얻고, 독자는 소설이 끝난 후 이 단어를 떠올리며 별개였던 두 사건이 이미 하나의 모양을 이루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트론과 레브와 스티네, 스테판과 라스콜과 그의 피를 이어받은 안나. 마치 두 개의 자석 주변으로 자기장이 형성되면서 흐트러져있던 철가루들이 일사불란하게 하나의 그림을 그려내듯, 두 사건 주변을 맴돌던 모든 이야기와 감정들이 가지런히 정렬되면서 하나의 단어를 만들어내는 결말...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라는 이름 아래 아모로마, 영원히 당신의 것. 소름 돋는 장관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 한참을 중얼거렸다. 영원히 당신의 것.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면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다. 내 것이 아닌 당신은 오로지 당신 스스로의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될 수 없다. 그것을 거부하는 당신에게 나의 사랑도 슬픔도 이제 모두 당신의 것으로 돌려주리. “영원히”...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가져봤을 법한 보통의 감정이자 실제로 누군가는 현실에서 실행하기도 하는 지독한 감정. 범인에게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져버렸으므로 누군가를 혹은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요 네스뵈는 살인자에게 국가와 역사에 대한 “정당방위”의 범행동기를 부여해주기도 하고(<박쥐>, <레드브레스트>), 연쇄살인범에게 자기존재를 결코 긍정하지 못 할 운명을 지움으로써 살인동기에 납득 가능한 논리를 구축해주기도 한다(<스노우맨>). 그리고 이 책에서는 인간의 심연에서 오랜 기간 퇴적과 풍화를 반복해온 감정들을 풀어냄으로써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 인간 본연의 감정속으로 깊숙하게 들어가 있다. 사랑, 증오, 갈등, 시기, 질투, 소유욕, 경쟁심, 콤플렉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뒤얽혀서 격렬한 화학반응을 통해 만들어내는 결합물, 복수. 인간이 갖는 감정들 중에서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이 복수심을, 두 사건을 통해 각각 다른 방향으로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의 지점에 이르러 일치하도록 애너그램을 그려내는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요 네스뵈의 스릴러가 우아하다는 평을 듣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내년에는 해리 홀레 시리즈 두 번째 이야기 <Cockroaches>가 번역 출간된다고 한다. 또 어떤 스토리로 독자들을 매혹시킬 것인지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책은 그 동안 해결하지 못한 채로 끌어왔던 엘렌 사건이 마무리되면서 ‘나쁜 경찰’ 톰 볼레로의 최후가 그려지는 <Devil's star>인데, 시리즈 순서대로라면 이 책을 볼 수 있는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박쥐>부터 <레오파드>까지 걸어온 요 네스뵈의 길에 더할 수 없는 찬사와 애정을 보내며, 기다림마저도 행복한 그의 다음 소설을 기대하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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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 칸 그리고 나머지들
    from Oasis 2016-05-21 20:57 
    요 네스뵈 신간 리뷰에 같이 올리려고 찍었는데, 김영사 비채 이벤트가 있길래 나머지들도 같이 올려본다. 요 네스뵈로 가득한 요 한 칸. 요 칸. ㅎ 그리고 나머지들. 신간도 별로 없구만 읽은 책보다 안 읽은 책이 더 많다. 얼른얼른 부지런히 읽자. 안철수의 책이 새삼 눈에 띄네. 저 책이 출간되었을 때 물량 빠지는 속도가 거의 광속이었다고 하는데 꽃시절도 그 때로 끝이었나보다. 나는 아직도-_- 안철수와 다른 국민의당 소속들을 구분해서 보긴 하는데, '
 
 
다락방 2014-03-31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조기후님 요 네스뵈에게 아주 푹 빠졌네요. 제가 리 차일드에게 빠진 것처럼요.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를, 리 차일드는 잭 리처를 만들었고 두 작가 다 모두 시리즈로 써냈죠.
둘 다 남자고..
우리 서로 각자 푹 빠진 남자의 책을 부지런히 읽고(저는 그래봤자 겨우 두 권 읽었다능..) 누구의 남자가 더 잘났는지 앞으로 계속 경쟁해봅시다. 건조기후님은 요 네스뵈 리뷰로 저는 리 차일드 페이퍼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조기후 2014-03-31 12:04   좋아요 0 | URL
한 번 빠지니 헤어나올 수가 없는 요 네스뵈 ㅜㅜ 오슬로 넘넘 가고 싶어서 비행기표까지 검색해봤네요. 당장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말입니다 흑흑..
요 네스뵈 책 한 권 한 권 다 리뷰를 쓰고 싶을 정도예요. 네메시스는 때마침 김영사에서 리뷰 이벤트 하길래 먼저 쓴 거고요 ㅎ 나머지는 게을러서 언제 다 쓸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마음만은 그렇습니다 ㅎㅎㅎ
해리 홀레는 알면 알수록 진짜 정말 멋져요! 군인 출신 몸짱과 경쟁해도 이길 자신 있다고요.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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