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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선 ㅣ Oslo 1970 Series 2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4월
평점 :
이야기의 시작은 끝이었다. 노르웨이 북단, 북극해와 맞닿은 길의 끝, 선의 끝. 그리고 남자의, 끝일 것이 분명해보였던 끝.
마약중독자들에게 약을 팔면서 푼돈을 벌다가 마약상의 하수인으로 들어가서 해결사 노릇을 하던 남자는 막상 사람 얼굴을 보면 총을 제대로 쏘지
못 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결국 죽여야 할 사람을 죽이지 못 해 임무 수행에 실패하고, 시체를 처리했다는 거짓말이 들통나자 보스가
보낸 킬러로부터 가까스로 도망쳐 북쪽의 한 시골마을에 이른다.
북쪽의 끝에 다다르기 전 그의 삶은 블랙홀이었다. 빚이 많은 약쟁이들을 찾아가 돈을 받아오거나 총을 쏴야했던 이유는 딸아이의
치료비때문이었고, 제대로 먹지도 않아 깡마른 몸으로 돈을 모으고 모았지만 늘 부족했고, 팔에 주삿자국과 멍이 끊이지 않는 아이 엄마는 다른
남자와 살면서 양육비를 요구했고, 양육비를 받고도 양육하지 않았고, 약을 사는 엄마와 약을 파는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던 아이는 약을 제대로 쓰지
못 한 채 죽어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고 싶었던 아이의 푸른 눈빛까지 빨아들여버린 검은 구멍...
"이제 우린 완전히 비참해졌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토랄프와 난 그걸 검은 구멍이라고 불렀다. 핑켈슈타인이라고 하는 남자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면 무엇이든, 심지어 빛까지도 빨아들이는 우주의 구멍을 발견했다고 한다. 구멍은 너무 검어서 육안으로는 절대
볼 수 없었는데 우리 상태가 딱 그랬다.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그냥 그럭저럭 살아가다가 어느 날 중력장에 갇혔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면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절망과
끝없는 자포자기의 검은 구멍에 빨려 들어간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바깥세상의 거울상이고,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는지, 절망하지 말아야 할 그럴 듯한 이유가 있는지 계속 자문한다. (p.119)
울프라는 가명으로 낯선 땅에 정착 아닌 정착을 한 남자는 딸처럼 푸른 광채를 빛내는 눈동자를 가진 여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다시금 푸른 눈빛을 지키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 역시 검은 구멍이 아닌지, "희망을 가져야 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는지, 절망하지 말아야 할 그럴
듯한 이유가 있는지 계속 자문한다." 마음의 변화는 언제나 상황을 변화시키는 힘을 만들어내는 법. 위험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깨달았을 때, 검지
하나를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 해 늘상 총쏘기에 실패했던 울프는 죽어도 상관없던 제 몸을 지키기 위해 총을 쏘았다. 자신의 "바깥세상의
거울상"을 쐈고, 검은 구멍에 갇혀있던 자신을 죽였다. 방탕한 예지자의 말은 정확했다. 그는 자신이 반사된 상을 향해 여러 번 총을 겨눴고,
검지를 움직여 쏘았고, 검은 구멍의 중력장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
"당신 눈엔 죽음이 있어. 눈 돌리지 마. 당신이 반사된 상을 쏘는 게 보여. 그래, 당신은 반사된 상을 쏴." 내 머릿속에서 조그맣게
알람이 울렸다. (p.135)
마을까지 추적해 온 보스의 부하들이 그가 은거하고 있던 오두막에 이르렀을 때, 여자의 도움으로 그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한 울프는 그녀에게로 향한다. 그 곳에서 또 다른
검은 구멍을 맞닥뜨렸고, 자신의 거울상을 쏜 것처럼 여자의 거울상도 쏘아버렸다. 죽은 것으로 알고 장례까지 치렀던 여자의 남편이 살아 돌아왔고,
가정폭력의 원흉이었던 남편이 결국엔 칼로 여자의 목을 겨누던 순간이었다. 낭자하는 피를 깨끗이 닦아낸 후 남편의 시체를 오두막에 집어 넣고 불을
질렀다. 남편은 울프의 시체로 위장되었고 울프는 그녀, 레아의 남편이 되었다. 그의 끝과 그녀의 끝은 그와 그녀가 함께하는 시작이 되었다. 끝과
시작이 공존하고 어둠과 빛이 구별되지 않는 북단의 미드나잇 태양 아래 그들은 어둠을 끝냈고, 빛을 시작했다. 새로운 삶을 찾아 국경을 넘기로 한
그들이 울프의 신분을 보증하기 위해 급하게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은 더없이 유쾌했고, 스스로의 길을 시작한 운전석의 레아와 뒷좌석에서 잠든 그녀
아들 크누트와 이들의 곁에서 "또 다시 질 준비가 된" 울프는 단단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지면 더 나아져요, 울프 아저씨?"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레아도 우리 얘기에 관심을 보였다.
"더 잘-," 나는 팔에 앉은 모기를 찰싹 때려잡았다. "질 수 있지."
"더 잘 질 수 있다고요? 더 잘 져서 뭐해요?"
"우린 살면서 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려고 하거든. 그러니까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많아. 그러니까 앞으로 더 자주 하게 될 일을 잘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니?"
"그런 거 같네요." 크누트는 곰곰이 생각했다. "근데 잘 진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아이의 어깨 너머로 레아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기꺼이 또 질 용기를 갖는 거야." (p.167)
백야를 배경으로 한다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도망자에게는 추적자를 경계하기에 백야만큼 좋은 환경이 없고 눈부신 밤을 배경으로
액션씬이 벌어진다면 아주 환상적일 것 같았...지만. 백야는 그렇게 단순한 액션을 위해 설정된 것이 아니었다. 어둠이 빛을 머금고 있고 끝이
시작을 품고 있는 신비로운 곳이었다. 그런 시간이었고, 그런 공간이었다.
이제 이야기의 끝은 시작이었다. 노르웨이 북단에서 벗어나는 여정의 시작, 길의 시작, 선의 시작.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시작임이 분명한
시작. 어제인지 오늘인지 밤인지 낮인지 모를 혼돈의 한가운데서 분명하게 선을 그어 끝을 시작으로 바꾸어버린 이 운명의 개척자는 여전히 목적지로
가는 중이다. 시작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로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처럼, 끝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이야기를 끝냈다. 울프와 레아와 크누트가 긴
휴식을 취하며 편안하게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과 장소에 무사히 도착했기를 바란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가지고 언젠가 어디에선가 다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기를.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처음부터 시작하면 좋겠지만 난 어디가 처음인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 역시 내 삶의 인과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 하기 때문이다. (...) 정말이지 난 모르겠다. 우리는 날조된 논리로 이야기의 앞뒤를 만들어 인생에 뭔가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니 여기서부터 시작하겠다. 혼돈의 한가운데, 운명이 짧은 휴식을 취하며 숨을 돌리는 듯했던 시간과 장소에서. 목적지로 가는 중이지만 잠시나마 이미 도착했다고 생각했던 때. (p.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