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전설의 고향에서 나는 너무나 충격적인 영상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구미호였다
나는 처음부터 지켜보다가 구미호를 본 것이 아니라 중간에 체널을 바꾸었는데 한에 사무친 눈을 가진
구미호가 갑자기 화면 가득 나타났었다. 사람은 분명 아니고 그렇다고 온전한 여우의 모습도 아니었다
여름철이면 세계에 잠들어 있던 수많은 납량물이 등장해서 공포의 서늘함으로 더위를 식혀주고자 하는데
나에게는 구미호를 대적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드라큐라, 늑대인간, 뱀파이어, 처녀귀신, 각종 괴기물 ....
구미호는 등장부터가 맹목적이지 않다. 구미호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인 나를 조금은 슬프게 만든다. 구미호를 만든 것은 인간이고 결국 자업자득인 셈이다
무자비한 폭력, 반성없는 비인간성, 억울한 죽음, 치미는 분노, 치열한 복수심, 존재의 회의, 영원한 안식.
구미호는 결코 세상에 나와서는 안되는 존재이지만 사람이 만들어 가는 세상에서는 결국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에도 구미호는 여전히 떠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요즘 구미호를 열심히 보고 있다. 전설이라는 게 본래 원안에서 출발해 끊임없이 각색되고 꾸며지고
발전을 거듭하여 새로운 이야기가 덧붙여지는 것처럼 나의 어릴 적 구미호도 마찬가지로 버젼 업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흉가와 공동묘지에 있는 구미호도 무섭지만 사람속에 숨어있는 구미호도 너무 썸뜩하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여전하다. 억울함과 분노, 그리고 복수라는 기본 토대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가지 구미호는 한결같이 이름답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토록 슬픈 것일까? 구미호는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