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 왔다 - 2000년 제31회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이문구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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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사투리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정겨운 느낌이 들때도 있고 때로는 듣기에 따라서 서운함을 먼저 느끼기도 한다.  팔도 사투리 중에 가장 단순하고 또 가장 쉬운면서도 막상 직접 따라해 보거나 음미해 보면 충청도 사투리만큼 어려운 게 없다고 한다. 이러한 특징을 사전에 조금이라도 알지 못하고 무작정 책읽기에 나섰다가는 낭패보기 쉽상이다. 우선 낱말 자체 부터가 보기에, 듣기에 낯선 데다가 충청도 사람 특유의 미묘한 감정이 실리는 억양이나 말하는  이의 심리를 제대로 간파하지 않고서는 일단 작품은 고사하고 언어조차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충청도 사투리다


이문구는 어렵다. 그리고 그가 구사하는 충청도 사투리와 그 사투리로 표현되는 그의 작품도 완주에 많은 인내를 요구한다. 속독파는 십중팔구 이문구에게서 실패하리라. 그 속독파가 만일 자신은 이문구에게서도 쉽게 성공하였다고 자평한다면 나는 곧이 곧대로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책읽기 환경속에서도 이문구를 찾게 되고 그를 잊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그가 줄기차게 추구하고 있는  옛 추억으로의 서정과 그 추억속에서 살아 숨쉬는 정감어린 인간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삼촌, 어머니들이자 우리 친구요 그대로 나 자신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풍경과 상황은 사투리가 아니면 제대로 표현할 수 없으리라고 이문구는 판단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가지 아쉽다. 작가가 문학활동을 벌여 상을 받는 것을 추호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그 상을 주관한 신문사를 향하여 수상소감으로써 찬사를 보내는 모습은 바라보기에 민망하다. 작가는 작가로서 자유로이 활동하면 되는 것이지 특정 신문사가 수상자를 결정하기 위하여 벌였던 선정주의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외면하면서 수상이 자기에게로 귀결되자 문학을 생각하는 언론 운운하는 것은 그냥 형식적인 인사치레로 봐주기에는 너무 속이 들여다 보일뿐 아니라 다른 부문에서 행해온 그 신문사의 과오를 이문구가 나서서 은폐할려는 의도로 비치지 않을까 하여 심히 우려스럽다. 부디 내가 오해하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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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촌수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6
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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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촌수필에는 지금의 내 나이또래 입장에서는 할아버지,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시대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해방이 되고 6.25사변을 겪는 그들이 어렵고 불우한 환경속에서 어떻게 모진 풍파를 부대끼며 헤쳐나갔던가를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인간적이라고 할때는 소위 해피하게 살아가는 경우를 두고 말하지 않는다. 죽도록 고생하고 처절하게 좌절하며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가면서 가슴속에 한을 품고 있는 자의 삶을 인간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본질 속에는 이미 비극 또는 시련이 태생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지도 모를 일이며 나는 이러한 인간적인 이야기속에 당연히 나 스스로가 인간임을 확인하곤 하는 것이다

옹점이, 대복이, 복산이, 석공 등은 그대로 우리 시대의 할아버지, 아버지들이다. 관촌수필에서 그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힘겨운 한때를 살다가 죽는다는 점에서 근원적으로 같다. 신분의 고하, 부의 차이가 그들을 표시나게 구분하고 있었지만 나약한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환경속에서 결국은 같은 종류의 삶을 살고 간 것이다. 몰락해서 과거의 부귀영화가 헛된 추억이 되어버린 주인공, 부잣집 큰며느리 같이 일 잘하고 붙임성 있고 싹싹해서 시집가면 누구보다 잘 살거라고 기대받았으나 끝내 약장수 패거리에 섞여 딴따라 가수로 추락한 옹점이, 마을 대소사를 불문하며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제일처럼 해치웠으며 그 자신 살림살이 조금 나아지려던 순간에 백혈병으로 세상 등지고 마는 석공, 재주를 과신하다가 절도범으로 몰리어 콩밥 먹게되고 결국은 징용으로 끌려가게 되는 대복이 등 인물 하나하나가 앞서 간 세대의 슬프고도 고달픈 상처고 눈물이다. 내가 살지 못한 시대상황을 이처럼 절절하게 묘사하고 생생하게 풀어감으로써 한시대의 삶에 몰입하도록 만든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

덧붙여 약간의 아쉬움이라 할까? 저자의 태생이 충청도이므로 그리고 관촌수필의 내용또한 저자의 것이므로 충청도 사투리가 모든 지면을 장식하고 있는데 나는 새삼 놀라웠다. 충청도 사투리는 조선8도 사투리 중에 가장 단순한 것이라는 내 편견이 여지없이 깨졌기 때문이다. 너무 어렵다. 그저 그 시대의 사물이라서 오늘날에 남아있지 않아 이해가 곤란했다는 차원을 넘어 오늘날에도 버젓이 쓰이고 있는 말인데도 충청도 사투리로 변환되니 알아듣기가 벅차다. 지방의 토속성을 살리려 사투리를 동원한 것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겠지만 독자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지금 시대의 말로 바꾸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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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 나남창작선 29 나남신서 10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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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약국은 태생부터가 비극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원초적인 비극성때문에 일생을 비극적으로 살다가 마감하였다. 또한 그의 딸들 역시 하나같이 비극적이다. 세상을 간단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비극과 희극만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비극이 아니라면 희극이고 조금이라도 희극적이지 않으면 그냥 비극적이라고 쉽게 나눌수 있기에 그래서 김약국 딸들의 삶도 조금이라도 비극적인 구석이 있기에 한마디로 비극적이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의 삶의 결정과정이나 그 결정으로 인해 떠안게 되는 삶의 억눌림이 그대로 비극적이기 때문에 나는 단연코 그녀들은 비극적이라 칭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딸들의 삶은 많이 나아지기도 했지만 김약국의 딸들이 살아갔던 시대의 딸들은 자신의 삶조차도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부모의 결정에 그대로 수동적으로 순응하는 삶이었다. 그래놓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과 피해는 순전히 딸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억눌린 시대속에서 인생의 중대사를 운명에 맡겨야 하는 것이 하나의 비극이요, 스스로 관여하지 않은 결정이 초래하는 온갖 불행을 또 그대로 감수하여야 하는 삶이 또 하나의 비극성이다. 그리고 김약국 딸들에게는 죽음, 정신이상, 불륜, 방황 등 최악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박경리 소설에 불만이 있다. 대하소설 토지도 읽었고 이번 장편소설도 읽었지만 나는 단언하건대 박경리는 사건에는 강할지언정 묘사는 약하다. 사건을 일으키고 그 시작과 끝을 서술하는 솜씨는 뛰어나나 사건을 움직여가는 인물과 상황에 대한 묘사에는 그 뛰어남을 인정할 수 없다. 어쩌면 전혀 성의가 없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일방적이다. 작가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설명하고 난 뒤 독자들은 그냥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한다. 소설에는 독자가 스스로 판단해야 할 몫이 있고 그 판단의 자료로서 저자는 세부적인 상황묘사를 제공해야 할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경리는 이를 소홀히하며 어쩌면 이런 점에서 대단히 불친절하다. 김약국 딸들의 삶이 비극적인 것은 저자가 그렇게 몰고 가니 알아차리겠는데, 그 딸들이 왜 그렇게 내몰리는지 그녀들은 왜 그런 삶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는 지에 대하여는 저자는 너무나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한다. 저자와 독자간 교감이 없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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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그림일기
오세영 지음 / 글논그림밭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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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가는 솔직히 아는 사람이 뻔하다. 어릴 때는 독고탁을 창조해 낸 이상무가 최고였고 길창덕, 박수동, 신문수 등을 잡지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청소년기에는 허영만과 이두호 그리고 이현세를 통하여 정말이지 만화를 통해서도 예술같은 작품 창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성인으로서 더 이상 만화에 탐닉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강박관념 속에 만화는 내손에서 버려졌다. 물론 지금 후회되고 부끄러운 것은 나의 천박함이다

이제 30 중반에 만화가 다시 눈에 들어왔고 그러던 중 본 작픔을 알게 되었다. 바깥 세상에서의 평판은 전혀 아는 것은 없고 사이버 공간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그것도 꽤나 작품성을 인정받는다는 평가에 나는 구입하였다. 만화든 무엇이든 거의 다 그렇지 않은가. 문외한이 결국에 의존하는 것이란 서평에 녹아있는 행간을 들여다 보며 마음을 정하지 않는가 말이다. 더욱이 바깥세상에서처럼 몇번 뒤적이다가 구입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 사이버 세상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랴.


오세영의 관심은 아무래도 사회에서 소외된 불우하고 약하고 뒤쳐진 소수, 약자, 비주류 들의 삶에 있다. 그리고 단순히 그들의 삶만을 외피적으로 스케치 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감추어진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삶의 아픔을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인간적이다. 아파하며 슬퍼하며 분노하는 인간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당연히 인간적이라고 평가받아야 한다. 그런데 왜 나는 오세영의 인간미가 절실히 느껴지지 않을까?


그의 작품이 만화라서? 아니면 중년을 향해 치닫는 내 영혼이 어느새 무디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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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 전21권 세트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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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는 문단에서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대한민국의 대표소설 중 하나이다. 나 역시 익히 그러한 명성을 가진 토지를 읽어보지 못한 것에 일종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빚을 해결하고자 작심하던 중 비로소 근래에 그 부채를 해결할 수 있었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독서쟁이가 될려면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그 자격을 얻을 수 없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터였는데 드디어 나는 스스로 독서쟁이로서의 자격을 획득하였다고 자부해본다


하지만 토지를 다 읽고 난 다음에 밀려드는 감정은 역시나가 아닌 소설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먼저다. 우선 왜 제목이 토지인지 솔직히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고 난 뒤 토지란 도대체 무슨 장르에 속하는 소설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독립운동 이야기도 있고 이념적 갈등에속에서 방황하는 지식인의 이야기 그리고 밑바닥 민초들의 적나라한 삶이 소개되기도 하며 그 시대 젊은이들의 애정이야기도 나온다. 그런데 왜 하필 소설 제목이 토지인가? 나의 의문은 소설 토지의 모든 내용을 담기에는 제목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소설의 내용과 제목과는 어떤 일치성 또는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잇는 곳이 땅이니 그래서 토지라고 명명하더라도 너그러이 이해될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면 우리는 또한 자주 하늘도 쳐다보니 소설 제목을 하늘이라고 하면 될 것 아닌가.


그 다음으로 토지를 얘기할 때 항상 화두의 선두에 위치하는 것이 최서희라는 인물이다. 유년기부터 장노년까지 우리민족 질곡의 근대사와 궤를 같이하는 인물 최서희는 영상매체나 문단의 평론속에서도 대단히 매력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게 사실이어서 나 또한 최서희의 진면목을 접하게 되리라는 기대감과 설레임에 적지 않은 조바심을 가지고 있었다 . 하지만 사실 이러한 세간의 평가가 구축해 놓은 이미지서의 최서희를 만나기가 좀처럼 어려웠다. 그 이유는 최서희가 명실공히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소설의 50% 정도의 이야기는 그녀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여지나 어림짐작으로 볼 때 토지에서의 최서희는 30% 정도의 비중밖에 없다. 게다가 분량적인 면보다 더더욱 심각한 것은 이 사람이 최서희다 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장면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설가는 그냥 최서희는 이런 인물이라고 설명, 묘사, 소개하는 데 그치고 있을 뿐 독자로 하여금 소설가의 생각과 동일시하도록 하는 주인공 최서희 의 인생역정을 정밀하게 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단언하건데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최서희는 토지속에 없다. 한번 확인해 보시라.


3분중 0분께서 이 리뷰를 추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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