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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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영화 비평이 아니다, 담론의 놀이다." 씨네21과의 한 인터뷰에서 진중권이 김혜리 기자에게 했던 말이라고 한다. 별 생각없이 무심코 던진 말이었는데, 그 말이 씨가 되어 씨네21의 연재칼럼이 되었고, 그것이 묶여 책으로 나왔다. 진중권의 말처럼 이 책은 "그림의 밖에 있으면서 그림의 안에 영향을 끼치는 액자처럼, 영화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안쪽으로 간섭을 하는 파레르곤 같은 글쓰기"를 지향한다. 칼럼식으로 쓰여졌던 원고라 각각의 글이 하나의 완결성은 가지지만, 글과 글이 모인 자리에서 (자연스러운) 연관성을 찾기는 힘들다. 그래서 글과 글을 모아 목차를 짜면서 '주제'에 따라 인위를 부여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영화 비평과는 다르다. 영화의 내용과 주제 중심의 비평이 아닌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면서 영화 제작에 도입된 기술과 기법들이 영화 내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구체적으로는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변화시켰는가에 촛점이 맞춰진다. "스크린에 비치는 이미지, 내러티브의 구성, 다루어지는 제재와 소재가 달라지고, 제작의 방식과 수용의 모델이 달라지고, 나아가 해석과 비평의 준거까지 달라지고 있다. 그 변화의 다양한 양상을 드러내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 소재로 쓰인 영화들이 아니다. 이 영화 목록은 이 책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진중권이 '기술합성시대의 예술작품'을 좀더 수월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끌어온 재료에 불과하다. 정작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해당 영화가 아니라, 해당 영화에 들어있는 디지털 기법과 장치, 그리고 이로부터 인문학적 메세지나 상상력을 도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자체의 무게감이나 완성도 등을 떠나 <다이하드 4.0>, <슈렉>, <스파이더맨>, <트랜스포머>와 같은 오락 영화들부터 <필로우북>, <시계태엽 오렌지>, <라쇼몽>, <베를린 천사의 시>등의 덜 대중적인 영화들까지 가리지 않고 소재로 삼는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 발터 벤야민을 자주 언급한다. "예술에서 혁신은 내용도 아니고 형식도 아니고, 기술에서 나온다." 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진중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중권은 발터 벤야민이 이미 말한 바를 자기식으로 소화해, 몇몇 영화를 대상으로 재해석하는건지도 모르겠다. 벤야민을 접하지 않아서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다. 디지털 기법과 기술에 관한 알 수 없는 생소한 용어들이 아무렇지 않게 등장해서 빠르게 읽히진 않는다. 이 부분이 씨네21에 연재할 때 독자들이 이건 영화 비평도 아닌데다 또 왜 이렇게 어려운게냐, 라는 투덜거림으로 나타난 것 같다.

  영화 <300>에 관한 글을 읽는 동안엔 지난 디워 논쟁이 떠올랐다. 진중권이 <디워>를 까던 때, 네티즌들은 그럼 영화 같지도 않은 <300>은 왜 까지 않느냐고 힐난했는데, 거기에 대한 대답이 나와있기 때문이다. 나는 진중권이 <디워>를 까기 전에 그 영화를 봤는데 매우 지루했다. 뭐 이런 영화가 다 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마치 오래전에 아무 생각 없이 고른 <여고생 시집가기>를 봤을 때의 느낌이랄까. 중간중간 건너뛰는 듯한 느낌은 '스토리의 부재' 때문이었다. 왜 진중권이 토론에서 언급해 국민 상식이 되어버린 용어가 있지 않은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 

  "<300>이 가진 '서사의 빈곤'은 어쩌면 비난할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며, "어차피 시각적 측면과 서사적 측면은 서로 충돌하는 경향이 있"고, "문학성과 조형성을 어설프게 배합려다가는 자칫 둘 다 산만해질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으면서, <300>이 서사의 복잡성을 포기하고 시각적 과잉으로 대신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원작이 본래 만화이니 소설과 달리 플롯의 전개가 단순할 수밖에 없고, 소설의 서사를 만화로 재현하기는 힘들다는 말도 덧붙인다. 대사가 많으면 서사가 복잡해고 치밀해질 수는 있지만, 우리가 만화를 볼 때 대사가 많으면 짜증을 내고 지루하는 것과 같달까. "이미지를 설득하지 않는다. 그저 도취시킬 뿐이다. 이성은 마비되고, 그래서 정신은 황홀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읽기 편한 건 아니지만, 읽다보면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새롭게 드러내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든다. 우리가 웃고 즐겼던 <슈렉>에서는 하이퍼리얼 효과를, 머리 아프게 봤던 <나비효과>와 <메멘토>를 통해서는 공간적으로 평행한 여섯 개의 가능태들과 기억의 조작과 사건의 연속성에 관해,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통해서는 영화의 촉각성을, <다이하드 4.0>을 통해서는 '보기'와 '보여짐'의 권력관계를 읽는다.

  여기 언급된 영화들을 다 봤다면 책을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모르는 영화를 말할 땐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다. 아직 보지 못한 영화는 챙겨보고, 이미 봤던 영화는 '다시보기'하면서 그 내용을 확인해보면 되겠다. 이 글은 진중권 개인이 자신이 가진 지식과 식견으로 영화와 기술과 인문학을 버무린 결과물이고, 각각의 개개인은 또 제 자신의 지식과 상상력으로 다른 '버무림'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관객에 따라 참 다양하고 많은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는 다른 문화 매체에 비해 훨씬 열려있는 텍스트다. 그래서 어떤 하나의 해석이 정답이라고 단정지을 필요도 없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이 책은 진중권의 담론 놀이의 결과물이고, 나머지는 독자, 아니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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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9-01-28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 책 보다가 필받아서 여기 나온 영화들 다시 봤지 뭐예요 ㅋㅋ

이잘코군 2009-01-28 09:07   좋아요 0 | URL
어헛, 어떤걸 봤길래? ^^ 꼭지별로 읽고서 영화 하나씩 찾아 봐도 좋을듯.

프레이야 2009-01-28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가요^^

이잘코군 2009-01-28 09:07   좋아요 0 | URL
헙! ^^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의 서평을 써주세요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 - 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대필 작가의 독백
배홍진 지음 / 멘토프레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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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을 위안부 할머니들. 그들은 모두 꾸미지 않아도 이쁜 소녀에서 주름을 감출 수 없는 할머니가 되었고, 일부는 세상을 떴다. 이 책의 주인공인 강덕경 할머니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분이다. 그러나, 그녀의 육신은 떠났을지 모르지만 그녀의 마음은 아직도 수요일이면 일본 대사관 앞을 지키고 있다. 마음 편히 가셨으면 좋으련만 일본의 제대로된 사과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한스럽고, 외로운 세월을 보내다 가셨다. 일본 정부뿐 아니라 한국 정부도, 그리고 그 분들의 아픔에 공감해주지는 않고 외면하는 사람들도 많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몰랐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와 그 분들의 이야기는 뉴스나 기사를 통해서 들어왔지만, 내가 아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신문이나 티비 뉴스 등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단편적인 사실, 딱 그만큼만 알고 있었다. 그 분들 개개인이 수십년 걸어온 삶길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었다. 어쩌면 티비 다큐멘터리나 인생극장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공개됐을지도 모르겠다. 연이 없었던지, 아니,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게 솔직할게다, 그 분들의 삶을 들여다 볼 기회는 없었다.

  몇 해 전 일본계 미국인(?) 하원 의원의 노력으로 위안부 사건이 크게 보도된 적이 있었다. 미국의 행정부가 압박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보도는 일본에게 상당한 부담감을 주었을 것이다. 일본군이 위안부를 운용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곳에 갇힌 여자들은 한국과 동남아 등의 여러 국가에서 강제로 차출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후에도 일본은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故 강덕경 할머니. 할머니가 아닌 소녀다. 이제 막 세상을 배울 나이에, 일본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만 믿고 배를 탔고, 그곳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탈출을 시도, 알 수 없는 산길에서 한 일본 헌병대 군인에게 잡혀가 강간을 당했다. 그리고 우리가 '위안소'라고 부르는 그곳으로 끌려갔다. 그녀는 매일밤 문앞에 길게 줄을 선 일본군인들을 제 몸으로 열 명 이상씩 받아내야 했다. 수치심이나 모멸감 등의 감정은 당장 중요하지 않았다. 몸이 너무 아팠다고 한다. 몸이 느끼는 고통은 마음이 느끼는 고통에 앞섰다. 당장 한 명이라도 덜 왔으면 하고 바랐다.  

  이 책은 강덕경 할머니 개인의 삶을 들여다본다.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떻게 위안부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 자신을 드러내야 했는지, 그리고 왜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정확히는 강덕경 할머니를 포함한 위안부 할머니들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랐는지, 글을 읽을 줄 모르고, 글을 쓸 줄 모르는, 안다해도 더 이상 말할 수도, 쓸 수도 없는 할머니를 대신해, 한 대필 작가의 손을 빌려, 말한다. 대필 작가의 손으로 쓰여진 이 글을 통해 할머니의 삶은 당신의 바람대로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었다. 

  얼마 전,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 논란 때 뉴라이트 진영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향해 자발적 매춘을 한 창녀라는 망언을 한 적이 있다. 어디 이런 발언이 한두번 있었던 것도 아니라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소위 이름있는 학자라는 사람들이 이따위 막말이나 하고 다니니 할머니들 마음이 어땠을까. 국회의원들과 학자, 정부가 힘을 합쳐 일본에게 사죄를 요청해도 일본이 들어줄까 말까한 마당에 내부에서 이런 말이 나오니, 일본이 어찌 한국 정부를, 위안부 할머니들을 우습게 보지 않을 수 있으랴. 소녀에서 할머니가 된 분들이 점점 나이를 먹고 늙어,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고 있는 시점에서, 이 분들의 작은 목소리는 너무나 외롭다. 현 정부에서는 더더욱.  

  에세이도 소설도 아닌 이 책의 형식은 처음엔 불편했다. 강덕경 할머니가 된 1인칭 시점에서 글을 써내려가다가도 어느 순간 작가 자신으로 돌아와 할머니가 경험한 것들에 대해 작가의 말을 늘어놓는다. 각각의 꼭지들이 각각의 다른 서술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읽어야 그 불편함으로부터 조금 벗어날 수 있을 듯 하다. 또, 할머니가 경험한 상황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오히려 작가의 감정과 마음이 반영된 어떤 수식어들로 인해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전달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할머니가 경험한 것들을 작가의 시각에서 한번 걸러내 전달해주는 듯 했달까.

  작가 배홍진의 첫 책이다. 이 책의 맨 뒤에는 무경계 문화 펄프 연구소 '츄리닝바람'의 또다른 구성원인 김경주 시인의 글이 실려있다. 배홍진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글이다. 주인공은 강덕경 할머니이지만, '유령 대필 작가'가 아닌 '실명 대필 작가'로 '배홍진'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첫 책이라는 점에서, 배홍진 또한 이 책의 또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지금껏 누군가를 대신해 글을 써왔고, 다른 대필 작가들처럼 제 이름을 밝힐 수 없었다. 대필 작가가 끊임없이 일거리를 받아내기 위해선 '대필'했다는 사실을 드러내선 안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한 사람의 인생을 '대필'했다. 그러나 이전과 차이점은 자신을 드러내고 공개적으로 대필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는 때로 유령 작가로 제 이름을 숨긴채 누군가를 대신해 글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으로 그는 작가로서 세상에 신고를 마친 셈이며, 앞으로 나올 그의 온전한 작품 <내 슬픈 상대성 이론 저편의 방콕>을 통해 '실명 대필 작가' 딱지 또한 뗄 것이다. 10년간 글을 써왔다고 한다. 글만을 위해서 삶을 살아온 사람 같다. 글이 안써지면 훌쩍 어디론가 떠났다고 한다. 그의 예정작을 읽겠다고 약속할 순 없지만, 작가로서의 첫 작품 괜찮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 숙제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한 위안부 할머니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메세지를 전달한 점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
<봉선화가 필 무렵>(윤정모) - 위안부 할머니들의 그림과 함께 쓴 역사 동화
<위안부 리포트1>(정경아) - 위안부 할머니들의 체험을 비롯 피해 사실을 종합적으로 전달한다.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이명박 이하 행정부, 한나라당 모두, 뉴라이트, 경찰, 검찰, 조중동 기자들+조갑제

마음에 남는 '책속에서' 한 구절 : 
"연민이란 타인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슬픔에 대한 우리들의 상상력이다. 동정이 계급적 의식을 전제한, 타인의 불행에 대한 제도적이고 고양된 슬픔의 베풂이라면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이란 사실에 대한 슬픔이다. 그러므로 동정엔 실천이 따르지만 연민엔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연민은 사람을 주저앉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까닭에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는 비극적 이야기에 끊임없이 경도되고 싶어하는 자아의 상상력이다. 나는 지금 강덕경 할머니를 연민하고 있다."(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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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포 벤데타 - (정식 한국어판) 시공그래픽노블
앨런 무어 지음, 정지욱 옮김 / 시공사(만화)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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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괴롭힘, 당신의 절망, 당신의 두려움, 그리고 당신의 애정을 담아 가꿔 온 편협한 사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횡령자, 사기꾼, 거짓말쟁이들이 끊임없이 등장하여 재앙과 같은 판단을 내리는 상황이 이어져 왔죠. 이것은 단순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누가 그들을 선택했습니까? 바로 당신들이었습니다! 당신이 이 사람들을 뽑았습니다. 당신이 그들에게 당신을 대신해 판단할 권한을 준 것입니다. 물론 누구든지 한번쯤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치명적인 실수들을 수백 년 동안 되풀이한다는 것은 저로서는 의도적인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이 사악한 무능력자들을 장려했으며, 이들은 당신의 일과 인생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계속)-116-117쪽

(이어서) 당신은 그들의 지각없는 주문들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고, 그들이 당신의 일터에 위험하고 증명되지 않은 기계들로 가득 채우는 걸 허락했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그저 "안 돼"라는 말만 하면 됐습니다. 당신에게 기개란 없습니다. 당신은 자존심도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관용을 베풀 것입니다. 난 앞으로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발전한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당신에게 2년이란 시간을 줄 것입니다. 만약 2년 후, 당신이 여전히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해고될 것입니다. -117-118쪽

침묵하는 대다수에 의존하는 걸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이비. 고요함은 부서지기 쉬운 법이니까... 한번만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그 고요함은 사라지지. 하지만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있고 지리멸렬해. 이 기회를 틈타 몇몇은 항의할지 모르지만 그건 그저 누군가가 황야에서 소리를 지르는 꼴과 같은 거야. 소음은 그 앞에 오는 고요함과 연관돼 있어. 그 고요함이 절대적일수록 뇌성은 더욱 충격적으로 들리지. 우리의 주인은 민중의 소리를 몇 세대 동안이나 듣지 못했어, 이비...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기억하고 시은 것보다 훨씬 더 큰 소리지. -193-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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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 - 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대필 작가의 독백
배홍진 지음 / 멘토프레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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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이란 타인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슬픔에 대한 우리들의 상상력이다. 동정이 계급적 의식을 전제한, 타인의 불행에 대한 제도적이고 고양된 슬픔의 베풂이라면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이란 사실에 대한 슬픔이다. 그러므로 동정엔 실천이 따르지만 연민엔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연민은 사람을 주저앉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까닭에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는 비극적 이야기에 끊임없이 경도되고 싶어하는 자아의 상상력이다. -218쪽

타인을 연민하는 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 연민은 가장 서글픈 상상력이다. 내가 아닌 것들을 이해하는 동안 나는 따뜻해져 간다. 그리고 나는 이 따뜻함을, 내가 이해한 모든 것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내가 이해한 타인의 슬픔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그건 자기 연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연민하고, 타인의 있을지도 모르는 슬픔을 연민하며, 나와 연민과 타인에 대한 나의 연민 사이에 있는 어떤 벽을 슬퍼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같은 슬픔으로 괴로워하지만, 우리가 서로 똑같은 어떤 슬픔을 가지고 있다 해도 서로에게 보여줄 순 없다. 우린 우리의 슬픔으로 타인의 슬픔을 상상한다. 같은 것이지만, 우린 같다고 상상해야 타인의 슬픔을 겨우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슬픔은 모두 다르다. 난 이렇게 슬픈데, 넌 왜 저렇게 슬픈가? 내 안에 너의 존재에 대한 슬픔이 있어도 넌 왜 모르고 어깨를 스쳐가는가? 내가 상상한 슬픔이 너의 슬픔도, 나의 슬픔도 아니라면 그건 어디에서 온 슬픔인가? 나는 지금 너를 연민하고 있다. -218-219쪽

70년을 살아온 사람이 하나의 행동을 이해받기 위해 70년의 삶을 단 1초 단위의 세밀함까지 모두 설명할 수 있다면 그는 절대 오해받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이해란 결코 단순히 성격에 대한 인정이거나 직관, 분석에 의지하는 판단, 같은 슬픔을 통해 유추된 슬픔에 대한 연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해, 그 사람이 왜 그 행동을 했고 고통을 받았는가에 대한 정확한 사실적 앎(상상적 사실이 아니라)으로부터 생기는 슬픔에 대한 공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살아온 70년의 삶을 모두 설명하는 동안 또다시 70년이 흐른다. 그는 무엇을 이해받았는가? -219쪽

시간이란 누명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몸을 빌리고 나와 우리가 인식의 탈을 쓰고 견뎌야 하는 누명 같은 것이다. 그 시간으로부터 자신의 생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 인간은 순간의 밀도를 가지고 발버둥을 치면서 자신의 검진록을 만들고 살아간다. 시간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 어쩌면 오해는 조금 더 우리 곁에 살아야 할지 모른다.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물음, 왜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왜 우리는 헤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아련한 질문, 너는 왜 아직도 거기서 가혹한 생태계고 나는 왜 여기서 아직도 참혹한 자연인가에 대한 술회, 너의 눈 속에 담긴 연서들, 너의 종에 살림을 차렸던 수많은 풍경들, 가혹한 삶이여, 너에게 시간이란 누명에 다름 아니다. (김경주 시인 발문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中)-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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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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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약간 들어있습니다. 내용을 전혀 모른 채 책을 읽으실 예정이라면 여기 밑줄긋기를 읽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책을 읽을 계획이 없다면, 그러나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읽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0쪽

그들의 삶이란 항상 똑같아요, 왜죠, 생각해 보세요, 그들의 삶이란 항상 똑같아요, 다른 게 없죠, 나타났다가, 얘기하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사진사들에게 미소를 짓고, 항상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죠, 우리 모두가 다 그렇죠,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선생님이나 저나, 모든 사람들은, 이곳 저곳에 나타나, 얘기를 하기도 하고, 집을 나섰다간 그곳으로 돌아가죠, 가끔씩 웃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달라질 뿐이죠, 우리 모두가 유명인이 될 수는 없죠, 다행한 일이네요, 선생님의 수집이 등기소만한 크기가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더 클 수도 있죠, 등기소는 단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고, 그런 것에만 관심이 있으니까요, 우리가 결혼을 하든, 이혼을 하든, 홀몸이 되든, 등기소에선 그런 것엔 관심도 없어요, 그런 일들 가운데서 우리가 행복하든 그렇지 않든, 행복과 불행은 마치 유명인들과 같은 거예요, 인기가 왔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그보다 더 끔찍한 사실은, 등기소에선 우리가 누군지조차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들에게 우리는 몇 개의 글자로 된 이름과 날짜 외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206-207쪽

완전한 죽음은 망각의 마지막 열매이고, 삶이란 기억 속에서 영원할 것입니다. -221쪽

공동묘지란 아무 작은 공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도시가 형성되면서 그 주위의 자그마한 공간을 차지하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행히도 그 공간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고, 오늘날에 와서는 엄청난 면적을 차지하게 되었다. 예전엔 그 주위를 빙 돌아가며 담을 쌓았지만,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담 안쪽의 한정된 공간 속에 죽은 자들의 치열한 자리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마치 등기소의 경우처럼, 어쩔 수 없이 담을 허물고 조금 더 넓게 새로운 담을 쌓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사백 년 전, 묘지를 담당했던 한 관리인의 머릿속에, 거리로 향하는 담을 제외하고 다른 방향의 담들은 모두 제거해버리자는 생각이 떠올랐었다, 그것이 담 안쪽과 바깥쪽의 감성적 관계를 새롭게 환기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는 변론했던 것이었다. 담이 가지는 의미가, 비록 위생적인 면이나 장식적인 면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저 빨리,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잊혀지게 하는 효과 외엔 그다지 쓸모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225쪽

생사에 관해 신고를 해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 애절한 망각으로 인해 제때에 사실을 알리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공동묘지는 등기소보다 더 빨리 죽은 자들의 이름을 알고 있게 되었으므로, 이 중앙 공동묘지의 또 다른 명칭은 모든 이름들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그렇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지만, 등기소에서 그 두 단어란 마치 보자기 같은 것으로, 그 속에서 모든 이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산 자든 죽은 자든, 공동묘지의 경우엔, 종착지라는 그 본질적 의미로 언제나 사망자의 이름이 적혀 있어야만 했다.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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