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이란 타인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슬픔에 대한 우리들의 상상력이다. 동정이 계급적 의식을 전제한, 타인의 불행에 대한 제도적이고 고양된 슬픔의 베풂이라면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인간이란 사실에 대한 슬픔이다. 그러므로 동정엔 실천이 따르지만 연민엔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연민은 사람을 주저앉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혐오를 낳기도 한다. 까닭에 연민은 너와 내가 같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는 비극적 이야기에 끊임없이 경도되고 싶어하는 자아의 상상력이다. -218쪽
타인을 연민하는 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자기 연민은 가장 서글픈 상상력이다. 내가 아닌 것들을 이해하는 동안 나는 따뜻해져 간다. 그리고 나는 이 따뜻함을, 내가 이해한 모든 것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한다. 내가 이해한 타인의 슬픔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그건 자기 연민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연민하고, 타인의 있을지도 모르는 슬픔을 연민하며, 나와 연민과 타인에 대한 나의 연민 사이에 있는 어떤 벽을 슬퍼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같은 슬픔으로 괴로워하지만, 우리가 서로 똑같은 어떤 슬픔을 가지고 있다 해도 서로에게 보여줄 순 없다. 우린 우리의 슬픔으로 타인의 슬픔을 상상한다. 같은 것이지만, 우린 같다고 상상해야 타인의 슬픔을 겨우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슬픔은 모두 다르다. 난 이렇게 슬픈데, 넌 왜 저렇게 슬픈가? 내 안에 너의 존재에 대한 슬픔이 있어도 넌 왜 모르고 어깨를 스쳐가는가? 내가 상상한 슬픔이 너의 슬픔도, 나의 슬픔도 아니라면 그건 어디에서 온 슬픔인가? 나는 지금 너를 연민하고 있다. -218-219쪽
70년을 살아온 사람이 하나의 행동을 이해받기 위해 70년의 삶을 단 1초 단위의 세밀함까지 모두 설명할 수 있다면 그는 절대 오해받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이해란 결코 단순히 성격에 대한 인정이거나 직관, 분석에 의지하는 판단, 같은 슬픔을 통해 유추된 슬픔에 대한 연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이해, 그 사람이 왜 그 행동을 했고 고통을 받았는가에 대한 정확한 사실적 앎(상상적 사실이 아니라)으로부터 생기는 슬픔에 대한 공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살아온 70년의 삶을 모두 설명하는 동안 또다시 70년이 흐른다. 그는 무엇을 이해받았는가? -219쪽
시간이란 누명에 다름 아니다. 인간의 몸을 빌리고 나와 우리가 인식의 탈을 쓰고 견뎌야 하는 누명 같은 것이다. 그 시간으로부터 자신의 생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 인간은 순간의 밀도를 가지고 발버둥을 치면서 자신의 검진록을 만들고 살아간다. 시간을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 어쩌면 오해는 조금 더 우리 곁에 살아야 할지 모른다.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물음, 왜 우리는 사랑해야 하고 왜 우리는 헤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아련한 질문, 너는 왜 아직도 거기서 가혹한 생태계고 나는 왜 여기서 아직도 참혹한 자연인가에 대한 술회, 너의 눈 속에 담긴 연서들, 너의 종에 살림을 차렸던 수많은 풍경들, 가혹한 삶이여, 너에게 시간이란 누명에 다름 아니다. (김경주 시인 발문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中)-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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