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것은 영화 비평이 아니다, 담론의 놀이다." 씨네21과의 한 인터뷰에서 진중권이 김혜리 기자에게 했던 말이라고 한다. 별 생각없이 무심코 던진 말이었는데, 그 말이 씨가 되어 씨네21의 연재칼럼이 되었고, 그것이 묶여 책으로 나왔다. 진중권의 말처럼 이 책은 "그림의 밖에 있으면서 그림의 안에 영향을 끼치는 액자처럼, 영화의 바깥에 있으면서도 안쪽으로 간섭을 하는 파레르곤 같은 글쓰기"를 지향한다. 칼럼식으로 쓰여졌던 원고라 각각의 글이 하나의 완결성은 가지지만, 글과 글이 모인 자리에서 (자연스러운) 연관성을 찾기는 힘들다. 그래서 글과 글을 모아 목차를 짜면서 '주제'에 따라 인위를 부여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영화 비평과는 다르다. 영화의 내용과 주제 중심의 비평이 아닌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면서 영화 제작에 도입된 기술과 기법들이 영화 내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구체적으로는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변화시켰는가에 촛점이 맞춰진다. "스크린에 비치는 이미지, 내러티브의 구성, 다루어지는 제재와 소재가 달라지고, 제작의 방식과 수용의 모델이 달라지고, 나아가 해석과 비평의 준거까지 달라지고 있다. 그 변화의 다양한 양상을 드러내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 소재로 쓰인 영화들이 아니다. 이 영화 목록은 이 책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진중권이 '기술합성시대의 예술작품'을 좀더 수월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끌어온 재료에 불과하다. 정작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해당 영화가 아니라, 해당 영화에 들어있는 디지털 기법과 장치, 그리고 이로부터 인문학적 메세지나 상상력을 도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자체의 무게감이나 완성도 등을 떠나 <다이하드 4.0>, <슈렉>, <스파이더맨>, <트랜스포머>와 같은 오락 영화들부터 <필로우북>, <시계태엽 오렌지>, <라쇼몽>, <베를린 천사의 시>등의 덜 대중적인 영화들까지 가리지 않고 소재로 삼는다.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 발터 벤야민을 자주 언급한다. "예술에서 혁신은 내용도 아니고 형식도 아니고, 기술에서 나온다." 라는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진중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중권은 발터 벤야민이 이미 말한 바를 자기식으로 소화해, 몇몇 영화를 대상으로 재해석하는건지도 모르겠다. 벤야민을 접하지 않아서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다. 디지털 기법과 기술에 관한 알 수 없는 생소한 용어들이 아무렇지 않게 등장해서 빠르게 읽히진 않는다. 이 부분이 씨네21에 연재할 때 독자들이 이건 영화 비평도 아닌데다 또 왜 이렇게 어려운게냐, 라는 투덜거림으로 나타난 것 같다.

  영화 <300>에 관한 글을 읽는 동안엔 지난 디워 논쟁이 떠올랐다. 진중권이 <디워>를 까던 때, 네티즌들은 그럼 영화 같지도 않은 <300>은 왜 까지 않느냐고 힐난했는데, 거기에 대한 대답이 나와있기 때문이다. 나는 진중권이 <디워>를 까기 전에 그 영화를 봤는데 매우 지루했다. 뭐 이런 영화가 다 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마치 오래전에 아무 생각 없이 고른 <여고생 시집가기>를 봤을 때의 느낌이랄까. 중간중간 건너뛰는 듯한 느낌은 '스토리의 부재' 때문이었다. 왜 진중권이 토론에서 언급해 국민 상식이 되어버린 용어가 있지 않은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 

  "<300>이 가진 '서사의 빈곤'은 어쩌면 비난할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라고  말하며, "어차피 시각적 측면과 서사적 측면은 서로 충돌하는 경향이 있"고, "문학성과 조형성을 어설프게 배합려다가는 자칫 둘 다 산만해질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으면서, <300>이 서사의 복잡성을 포기하고 시각적 과잉으로 대신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원작이 본래 만화이니 소설과 달리 플롯의 전개가 단순할 수밖에 없고, 소설의 서사를 만화로 재현하기는 힘들다는 말도 덧붙인다. 대사가 많으면 서사가 복잡해고 치밀해질 수는 있지만, 우리가 만화를 볼 때 대사가 많으면 짜증을 내고 지루하는 것과 같달까. "이미지를 설득하지 않는다. 그저 도취시킬 뿐이다. 이성은 마비되고, 그래서 정신은 황홀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읽기 편한 건 아니지만, 읽다보면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새롭게 드러내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든다. 우리가 웃고 즐겼던 <슈렉>에서는 하이퍼리얼 효과를, 머리 아프게 봤던 <나비효과>와 <메멘토>를 통해서는 공간적으로 평행한 여섯 개의 가능태들과 기억의 조작과 사건의 연속성에 관해,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통해서는 영화의 촉각성을, <다이하드 4.0>을 통해서는 '보기'와 '보여짐'의 권력관계를 읽는다.

  여기 언급된 영화들을 다 봤다면 책을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모르는 영화를 말할 땐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다. 아직 보지 못한 영화는 챙겨보고, 이미 봤던 영화는 '다시보기'하면서 그 내용을 확인해보면 되겠다. 이 글은 진중권 개인이 자신이 가진 지식과 식견으로 영화와 기술과 인문학을 버무린 결과물이고, 각각의 개개인은 또 제 자신의 지식과 상상력으로 다른 '버무림'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관객에 따라 참 다양하고 많은 해석이 가능하다. 영화는 다른 문화 매체에 비해 훨씬 열려있는 텍스트다. 그래서 어떤 하나의 해석이 정답이라고 단정지을 필요도 없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이 책은 진중권의 담론 놀이의 결과물이고, 나머지는 독자, 아니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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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9-01-28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이 책 보다가 필받아서 여기 나온 영화들 다시 봤지 뭐예요 ㅋㅋ

마늘빵 2009-01-28 09:07   좋아요 0 | URL
어헛, 어떤걸 봤길래? ^^ 꼭지별로 읽고서 영화 하나씩 찾아 봐도 좋을듯.

프레이야 2009-01-28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가요^^

마늘빵 2009-01-28 09:07   좋아요 0 | URL
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