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미 오래전에 힛트치고 이제는 좀 거품이 빠져버린 베스트셀러다. 물론 여전히 잘 팔리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역시 어느 한 작가의 작품이 힛트를 치고나면 그 작가의 다른 작품도 더불어 동반상승하는 효과를 얻게 된다. 이는 출판사와 작가의 명예와 돈방석으로 연결된다. 물론 '돈방석'까지 연결되려면 적어도 이문열이나 최인호, 김훈 정도의 인기는 누려야 할 것이다. 인문/사회과학 류의 서적들은 쓰기도 어렵고 내기도 어렵고 인기를 누리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또한 인기를 누려도 그다지 많이 팔리지 않는다는 점에서(기껏해야 인문사회과학은 3천부 정도 팔리면 만족한다고 한다) '돈방석'과는 거리가 멀다.

  파울로 코엘료는 <연금술사>이라는 책으로 인기를 얻었고, 그의 다른 저서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11분>까지도 더불어 동반상승해서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는 결과를 얻어냈다. 아마도 그의 전작들이 더 있었다면 그것도 함께 팔려 돈을 더 벌 수 있었을텐데 그로서는 아쉽겠다.

  내가 파울로 코엘료를 접한 것은 어느 한 일간지의 서평란을 통해서였고 당시 그다지 유심히 읽지는 않았다. 이후 그의 저서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내리는 것은 봤지만 역시 관심 밖이었다. 인문/사회과학에 비해 소설류는 나의 관심밖이다. 물론 소설도 관심있긴 하지만 집에 켜켜히 쌓아둔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을 읽으려면 다른 분야는 일단 뒤로 미루어야한다. 버스에서 전철에서 서점에서 그의 이름과 책 제목을 무수히 많이 접했다.

 그.럼.에.도. 나는 얼마전까지 그를 경영/실용서적의 저자로 알고 있었다. 왜냐면 <11분> <연금술사>라는 제목이 어쩐히 11분안에 또 뭐 끝내기, 기존의 것으로 새로운 것 창조해내기 정도로 치부해버려 아예 무시했기 때문이다. 난 실용서적에 대해서는 약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그 책들이 책의 내용에 비해서 지나치게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 이내 못마땅하고 XX열풍에 따라 우후죽순으로 뽑아져나오는 책들은 책으로도 생각지 않았다. 출판사 입장에서야 출판사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냈다고 하겠지만 책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 좀 힘들더라도 아무 책이나 내지는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기 때문이다.

 서론이 길었다. 어쨌든 나는 코엘료를 코엘류 감독 동생쯤으로-헉 이건 아니다- 생각하거나 실용서 저자로 알고 있었고, 그가 소설가라는 것을 안 것은 얼마전이다. 동생 방에-동생은 책을 잘 안읽는 나보다 더 안읽는데 요즘 얘가 책을 좀 사고 있다- 있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출생의 나이 지긋한 수염잘 뽑아진 아저씨(그의 사진에서 풍기는 그 고풍스러움이 마음에 든다. 수염도 한몫했을 것이다. 난 이런 수염을 좋아한다.)가 쓴 소설로 죽음을 다루고 있다. 아마도 그의 생의 경험. 세 차례나 정신 병원에 입원하고 록밴드를 결성하고 극단에서도 활동했던 그런 경험을 토대로 씌여진 소설이라 생각한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평범한 일상을 살던 베로니카라는 이름의 한 여성이 열정이 없는 일상에 비관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니 이런 여기는 정신병원. 그녀는 곧 죽게된다는 의사의 말에 올히려 조금씩 생의 의지가 생겨나는데...

 그녀가 죽은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젊음이 가고 나면 너무 뻔한 내리막길 인생이 눈에 선했고, 남는 것은 노쇠와 질병들 뿐. 살수록 오히려 고통만 더해질 뿐이었다. 두번째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나쁜 일들을 그녀라는 개인이 막을 도리가 없었다.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뿐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그녀를 따라 자살해야한다. 어느 인간에게나 남은 것은 노쇠와 질병뿐이요, 한 개인은 곳곳에서 벌어지는 악한 일들을 막을 힘이 없다. 무기려한 인간. 하지만 모두가 다 똑같이 느끼지만 모두가 다 똑같은 결과를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본인의 모습을 느끼지만 다른 곳에서 생의 의지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이는 베로니카와 같이 자살을 결심한다.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나와도 취업하기 어렵다. 고시에 매달리다 입사시험준비하다 나이먹고 나이제한에 걸려 그나마도 하던 짓 못하고, 다른 직업을 알아봐야한다. 또 다른 직업 알아보자니 그 방면엔 내가 아는 바가 없고 능력도 없다. 장사를 하자니 장사는 아무나 하나. 너나 할 것 없이 공무원 시험 준비하다가 세월보내고 어느 덧 나이는 40. 아 내가 뭐하는건가. 이 나이먹도록 뭐했나. 곧 지천명이라는 50살인데, 그러다 60, 70 죽음을 맞이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내 주관이 없이 남들 사는대로 따라서 살려고 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자기 주관이 있는 사람은 내가 뭘 할지는 몰라도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는 알고 있다. 베로니카는 이와 같은 무기력한 남의 인생을 따라가려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같은 나이를 먹어도 인생을 활기차게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무기력하다. 그저 하루하루 세끼 밥먹고 시간보내며 밤이되면 자고 아침부터 다시 반복되는 생활을 할 뿐이다. 그러다 일년, 이년 시간 보내고 아 나이먹다 늙어 죽는 거다. 차라리 병에 걸려 죽을지언정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며 죽기를 기다리며 살기는 싫다. 그런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아 내가 너무 인생을 낭비하며 인생을 재미없게 살았구나 하고 깨우치겠지. 죽을 때 생에 대한 의지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서 생이 연장되는 것은 아니다.

 의자는 베로니카에게 뻥쳤다. 베로니카는 수면제를 과다복용하긴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깨어나 있던 곳의 정신병원 의사는 그녀에게 당신은 4-5일안에 죽습니다 라고 말한다. 어이쿠. 그럼 날 왜 깨운거야? 그냥 죽게 하지? 의사로서 도리있나? 죽겠다는 사람도 살려야 의사지. 난 아무 잘못 없소. 의사는 잘못없다. 그가 잘못이 있다면 베로니카가 멀쩡한데도 4-5일 안에 죽는다고 말한 것일 뿐. 하지만 오히려 베로니카는 그 때문에 4-5일 안에 생에 대한 의지를 살려냈다. 멋지다 의사양반.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는 것을 아는 것과 자신의 죽음을 실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언젠가 자신도 죽으리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막연한 미래의 일일 뿐 우리는 죽음을, 달리 말하면 삶의 진가를 잊고 산다.

 역자 이상해씨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그래 차이는 이것이다. 누구나 죽는다는 건 알지만 죽음을 실감하진 못한다. 그래서 죽을 때가 되어서야 죽음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을 이때 써먹어도 되는건가? 철학을 헛공부한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사르트르의 이 말을 이 책의 부제로 달고 싶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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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구판절판


"그녀는 자신이 지극히 정상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죽겠다는 그녀의 결정은 아주 단순한 두 가지 이유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쪽지를 남긴다면, 많은 사람들이 동감할 거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이유가 명확했으므로.
첫번째 이유, 그녀의 삶은 이제 모든 것이 너무 뻔했다. 젊음이 가고 나면 그 다음엔 내리막길이다. 어김없이 찾아와서는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노쇠와 질병들, 그리고 사라져가는 친구들. 이 이상 산다고 해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고통의 위험만 커질 뿐이었다.
두번째 이유는 보다 철학적인 것이었다. 신문과 텔레비젼을 통해 그녀는 세상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그러한 상황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자신이 세상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17-18쪽

" '솔직히 난 믿지 않지만,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인간의 이해력에 한계가 있다는 걸 이해해야만 해. 불의, 탐욕, 비참함, 고독일 뿐인 이러한 혼돈을 창조한 건 바로 신 자신이잖아. 신의 의도는 훌륭한 것이었겠지만 결과는 형편없어.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보다 일찍 이 세상을 떠나기를 갈망한 피조물들에게 관대함을 보여야 해. 아니, 오히려 우리가 이 땅을 거쳐가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할지도 몰라' "-19쪽

"누군가 말한 것처럼, '통제된 광기'만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저 위에서 자신의 정신이 그 모든 어려움을 비웃고 있다는 걸 잊어버리지만 않는다면, 그녀는 세상의 모든 정상적인 인간들처럼 울 수도, 근심에 빠질 수도, 화를 낼 수도 있었다."-82쪽

각주
원어는 Amertume. 일차적인 의미로는 '쓴맛'을, 은유적으로는 '회한, 쓰라림, 슬픔' 등을 뜻한다. 여기에서 이 단어는 독의 한 종류로, 그 형용사형인 아메르 Amer는 그독에 중독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130쪽

각주
Lunatique. 달의 영향으로 정신이상이 된 사람, 달이 뜨면 몽환에 빠지는 사람. -187쪽

각주
coprophagie. 배설물에서 성적 쾌락을 얻는 병적 성향.
coprolalie. 배설물에 관한 말을 함으로써 성적 쾌락을 얻는 병적 성향.-204쪽

"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는 것을 아는 것과 자신의 죽음을 실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언젠가 자신도 죽으리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막연한 미래의 일일뿐 우리는 죽음을, 달리 말하면 삶의 진가를 잊고 산다."
(옮긴이의 말)-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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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곧 SF영화를 보게 된다.

 미국 의회가 2010년까지 지상전투차량과 적진침투용 군용기의 3분의 1가량을 로봇으로 대체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우리가 영화로만 보던 그 화려한 미래전쟁 장면들이 고스란히 우리의 눈 앞에서 펼쳐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조차도 로봇은 홀로 싸우지는 않았다. 적을 향해 맞서싸우는 시온의 남은 사람들은 로봇에 올라타거나 안에 들어가 조정을 했지 로봇이 스스로 싸우지는 않았다. 지금 미국이 계획하고 있는 것은 영화 속 미래보다도 훨씬 더 진화한 단계인 것이다.

 1920년 러시아 출생으로 미국에 이주해 칼럼비아대학에서 화학박사를 수료하고 보스턴대 교수로 재직중이던 아이작 아시모프는 51년 파운데이션을 출간하고, 57년 그의 로봇 시리즈의 첫작품 <벌거벗은 태양>을 출간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그의 소설에서 로봇의 3대 수칙을 정했다.

 첫째,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둘째, 수칙 1을 위반하지 않는 한도에서 인간에게 복종한다.
 셋째, 수칙 1과 2를 위반하지 않는 한도에서 자신을 지킨다.

 그런데 미국이 구상하고 있는 전쟁로봇은 적을 살상하는, 다시말해 인간을 살상하는 로봇이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첫번째 수칙을 위반한 것이다. 첫번째 수칙이 무너진다면 두번째 수칙 또한 온전히 먹혀들지 의문이다.
 
 기술이 얼마나 발달해 로봇이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며 살상을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구분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로봇이 인간을 살상한다는 윤리적인 문제가 부각된다. 그리고 구분이 불가능하다면 이제 로봇은 인간이라면 닥치는 대로 죽이는 살인기계가 되어버릴 뿐이다. 인간이 만든 기계에 인간이 죽어가는 장면을 우리는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 오래된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처럼 말이다.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죄악이다. 단지 정치적 이유로 적군과 아군이 되어버린 두 인간이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닌 다른 인간을 살상하려고 눈에 불을 켜는 모습은 끔찍하다. 내가 소중하면 남도 소중한 법인데 이들은 결국 자신을 죽이려고 안달하고 있다. 사형이라는 형벌이 문제시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점이다.

 그런데 이제 로봇이 인간을 죽인다. 이건 어떤 발상인가?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이 죄악이므로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상황을 차단하기 위해 인간과 다른 로봇을 내세운다는 것인가? 그건 아닌 듯 싶다. 미국이 로봇을 개발하는 이유는 전쟁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약하기 위함이다. 아군 병사 한명이 죽으면 죽은 병사의 가족에게 위로금을 전달해야한다. 죽지 않더라도 퇴역한 군인에게는 퇴역 위로 지원금이 지급된다. 6530억 달러 규모라고 한다. 당연히 미국으로서는 로봇을 개발함으로써 그 많은 돈을 쏟아부을 필요가 없고, 아군 병사가 전장에서 죽어나감으로써 자국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우리 국민이 죽을까봐 전쟁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는 일은 없을 거란 말이다.

 이제 우리는 로봇이 우리를 언제쯤 죽이게될까를 고민해봐야하는 시기를 맞이하는 것인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생명은 나날이 늘어가고 있고 심지어 신약의 개발로 영생을 누릴 수도 있다는 기사도 가끔 신문에 등장하고 있다. 영생까지는 아니더라도 과학기술이 인간의 생명을 현격히 늘려줄 거란 말은 믿어도 될 듯 싶다. 하지만 인간은 조심해야 한다. 이제 또다른 과학기술의 발달로 로봇이 인간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늙어죽느냐 살해당하느냐의 기로에서 우리는 살해를 택하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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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5-02-17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K. 딕의 <두번째 변종>이란 단편소설을 보면 살상무기로 제작되어 인류를 멸망시키는 로봇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인간과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을 가졌던 아시모프 할아버지는 지나치게 희망을 품었던 듯. 그래서 디스토피아를 그린 SF들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잘코군 2005-02-17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는 이쪽 소설들은 잘 몰라서 접해본게 없어요. 이제라도 관심을 좀 가져봐야지. 괜찮은 소설 있음 추천해주세요.

하얀마녀 2005-02-17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래는 점점 암울한 쪽으로만 치닫는다는 느낌이 드네요. 이런 망할...

이잘코군 2005-02-17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기술이 우리네 생활을 풍요롭게 해줄지는 몰라요 정신을 풍요롭게 하기는 커녕 더욱 황폐화시킨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학에 치중한 정신을 살찌우는 인문/사회과학이나 문학에는 신경을 덜 쓰잖아요. 두가지 다 만족시키기는 어렵겠죠. 요즘은 어느 하나만 하기도 힘든 세상에. 하지만 각각 두 분야에 치중하는 사람들이 양적으로 반반만 되더라도 어느 정도 질적인 동등함을 유지할 수 있을텐데 말이죠.

깍두기 2005-02-17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니아를 위한 세계 SF 걸작선>을 권합니다. 제가 말한 <두번째 변종>도 들어 있구요. 읽어보시면 위의 기사가 걱정하고 있는 이야기를 극대화시켜서 소설로 표현한 절묘함에 놀라시게 될 거예요.

제 서재의 마이리스트를 보면 <SF의 바다에 빠졌지>란 허접한 리스트가 있으니 한 번 보세요^^

신화나 종교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젤라즈니의 작품을, 철학도이신 것 같은데 르귄의 작품도 생각할 거리가 많으니 권합니다. SF란 것이 읽다보면 예상 외로 철학적인 의문을 던지고 있답니다. 재미있으면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저는 좋아해요^^


깍두기 2005-02-17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는 어디서 퍼온 글인줄 알았는데 직접 쓰신 페이퍼네요. 훌륭합니다. 추천!
로봇의 3원칙을 아시는 분이 어인 겸손의 말씀을. 괜히 잘난 척 했네요^^;;;

LAYLA 2005-02-17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지요 깍두기님? 아프락사스이 글을 참 잘쓰셔요 *^^*

이잘코군 2005-02-17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컥.. 저 잠시 짜파게티 먹고 오는 동안 이런 부담스런 칭찬을 해주시면 ㅡㅡ; 숨을 데가 없는데. 깍두기님이 이 글 퍼가셨더라구요. 24시간 브리핑에 보니깐 갑자기 깍두기님 이름으로 제 글 제목이 떠서 놀랐습니다.

라일라님 / 그런 칭찬은 알라딘동네에 있는 다른 분들에께서 보시면 저 욕먹어요. 그것도 글이라고 쓰냐? 라고요. 컥...

이잘코군 2005-02-17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깍두기님 님의 서재에서 그 리스트 참조할게요~ ^^; 아휴 근데 관심분야는 자꾸만 많아지는데 게을러터져서 어디 읽어야지말이죠.

릴케 현상 2005-03-09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이나 합죠
 
노인과 바다 - 풍림명작신서 17
헤밍웨이 / 풍림 / 199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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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주위를 둘러보고 비로소 자기의 고독을 통감했다. 그러나 그는 거무스레한 깊은 물 속에 일곱 가지 색의 프리즘을 들여다볼 수가 있었다. 게다가 눈 앞에는 줄이 곧바로 뻗어 있고, 조용한 해양의 기분 나쁜 꿈틀거림이 보인다.
무역풍을 따라 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문득 앞쪽을 보니 들오리 한 떼가 하늘에 그 모양을 새겨넣은 것 같은 그림자를 뚜렷이 보이며 물 위를 건너간다. 한 순간 그림자가 엷어진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다시금 뚜렷한 모양을 취한다.
바다 위에 고독은 없다. 이렇게 노인은 새삼스레 생각했다"-65쪽

"노인은 이제는 병신이 되어 버린 고기를 차마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는 흡사 자기의 몸이 도려내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그렇지만 나는 내 소중한 고기의 원수를 갚아, 상어를 때려죽인 것이다. 제기랄,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덴쯔소였다. 큰 놈을 어지간히 많이 보아온 나지만서도."-108-109쪽

"좋은 일이란 오래 가지를 않는 법이지,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게 꿈이었다면 좋았을 터인데, 이제와서는 그렇게 생각된다. 고기 따위 잡지 못하는 편이 좋았을걸. 그리고 혼자 침대에서 신문지 위에 누워 있는 편이 훨씬 낫다.
그렇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져 있진 않아.
그는 소리내어 말했다."-109쪽

"노인은 노를 바꾸어 쥐고는 상어 아가리에 칼을 꽂아 주둥이를 찢어내듯 후볐다. 상어는 털썩 미끄러져 내렸다. 노인은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잘가라 가라노, 바다 밑까지 일마일의 여행이야. 친구에게 안부 전하게. 아니면 그건 네 엄마였냐?"-116쪽

"소년은 노인의 숨결에 귀를 기울이고 그 두 손을 보고는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커피를 가지러 살며시 밖으로 나왔다. 도중에도 그는 연거푸 눈물을 흘렸다."-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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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 풍림명작신서 17
헤밍웨이 / 풍림 / 199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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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의 소설가. 자연주의적인, 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로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하드보일드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1953년 퓰리처상을 받고 195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헤밍웨이의 집 /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에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하드보일드 문학가 헤밍웨이의 집.

 

 <노인과 바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고전 중의 고전으로 분류되어 각종 추천도서에 오르내리는 작품이며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많지 않더라도 이 책의 이름이나 헤밍웨이를 모르는 이는 없다.

 내가 이 책을 구입한 것이 중학교 시절로 추정된다. 나는 책을 구입하면 구입한 날짜를 적어두는 습관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본격적으로 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였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책을 읽지 않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가끔 구입한다고 하더라도 날짜나 이름을 적지는 않았다. 이 책엔 아무런 기록이 없는 걸로 봐서 내가 중고등학생이었을 때 구입한 것이고, 책의 출판년도가 1992년 판본인 것으로 추정, 중학교 시절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1992년은 내가 초등학생일 때지만 초등학교 땐 책을 사질 않았다. 따라서 그 후 몇년후인 중학교로 추정하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이 책은 내가 구입한지 10년이 넘은 지금에야 나의 손에 다시 들어왔다. 집에 켜켜히 쌓아둔 보지 않은 여러 책들 중에 한권으로 묻혀 지내다 이제야 나의 손길을 받게 된 것이다.
 
 읽었던 기억은 난다. 하지만 읽다 만 것으로 생각된다. 꼬마아이가 등장하는 앞의 몇 장면들이 눈에 선하지만 바다위의 전투는 내 기억에 없기 때문이다. 다소 지루한 면이 있고 생동감이 떨어지는 이 책이 어린 학생의 눈에 쉽게 들어올리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수면제쯤으로 생각되었겠지.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듯이.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로 인해 1953년에 퓰리처상을, 1954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1899년 7월 21일에 태어나 1961년 7월 2일에 생을 마감하다. 62세의 삶을 살았으니 당시로는 살만큼 산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는 자살로서 목숨을 끊었다. 늙어 죽은 것이 아니라 엽총으로 자신을 쏨으로써 죽었다.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엽총으로 자살한 것으로 그것도 '추정'될 뿐이다.

 낚시와 스포츠를 좋아하는 의사인 아버지와 음악을 좋아하고 종교심이 있는 어머니를 두었던 그는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사회의 존경을 받으며 부유한 삶 또한 누릴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을 둔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지 않았을까 싶다.

 경제적 풍요로움은 항상 문화적 풍요로 직결되지는 않지만 문화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다. 헤밍웨이가 대학을 가지 않고도 기자로  활동한 것이나 소설가로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런 여유로움이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물론 노벨문학상을 받기까지는 그의 타고난 혹은 끊임없는 노력에 의한 글발이 주요 요소였겠지만 말이다.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한 경험을 바탕으로 <노인과 바다>는 탄생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소설 속에서 나이든 어부는 그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낚시를 취미로 삼는 그의 아버지의 이미지와 소설 속의 힘겨운 할아비의 이미지는 선뜻 일치하지 않지만 말이다.

 <노인과 바다>에는 등장인물이 몇 없다. 노인, 아이가 주인공이고, 곁가지로 동네 어부와 마지막에 어떤 여인네만이 등장한다. 아이의 아버지는 실제 등장하진 않고 대화 속에서 언급될 뿐이다. 그러니 영화로 찍자면 아이의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초저예산 영화가 될 법하다. 다른 배경도 필요없다. 그냥 허름한 바닷가 근처의 집과 바다, 허름한 배만이 필요할 뿐.

 노인이 배를 이끌로 사흘 밤낮으로 사투를 벌이며 커다란 고기를 잡고 돌아오는 길, 상어떼의 습격(?)을 받아 어렵게 잡은 고기를 빼앗기고 만다. 사흘 밤낮의 수고가 허물어지는 순간이고 맥빠지는 순간이다. 잠도 자지 않고 오로지 이 고기를 잡기 위해 사투를 벌였건만 노인은 실패했다. 내가 죽을지언정 이 고기를 빼앗길 수는 없다는 신념으로 상어떼들을 하나 둘 물리치지만 떼로 몰려드는 이들을 힘없는 노인이 홀로 막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해보인다.

 이 소설은 다소 따분하다. 하지만 그 따분함은 어쩌면 삶에 있어서의 고독과 삶에 내던져진 단독자로서의 마주함이다. 앞서 이 따분함을 또다른 바다 건너편의 나라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장 폴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 비교했지만 이들은 정말 비슷한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소설을 그려내고 있다.

 그 고독함과 쓸쓸함, 힘겨움은 한낮 바다 위의 노인과 고기의 싸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삶에서 마주해야 할 고난을 표현한다. 우리는 그 노인이고 고난은 고기와 상어떼다. 하나의 고난을 겨우 이겨냈다 할지라도 뒤이어 닥치는 또다른 시련은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그렇다고 나 죽었소 하고 무기력하게 있으면 정말 죽는다. 연속되는 시련을 이겨내고 돌아오는 길. 비록 이득없는 헛된 승리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소중한 경험이고 삶의 자산이다. 우리는 다음에는 그러지 않을테니까. 다음에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테니까.

 나는 헤밍웨이의 다른 소설들을 읽지 않았다. 아직은. 하지만 <노인과 바다>로 인해 다른 소설들에도 눈길이 가는 것은 사실이고, 아마도 또 기약없이 '언젠간'이라는 말로 대신해야겠지만 그의 소설을 접해볼 것이다. 그때 다시 만나자.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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