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9시경에 신촌에 갈 일이 있었다. 버스를 타고 신촌 현대 백화점 앞에서 내려 골목길을 들어서는데 아 머냐. 시끌벅적 시끌벅적 노래를 부른다. 단체로 수십명. 근 100명은 되어보였다. 그 많은 어린넘들이 모여가지고 하는 짓이라고는, 단체로 둥글게 둥글게 원을 만들고 손짓 발짓으로 뭔 춤을 추며 알아 들을 수 없는 이상한 노래들을 불러댄다. 그리고는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아 정말이지 이런 짓은 제발! 니들 집에 가서 해라. 아 왜 시끄럽게 길거리에서 그러고 있는거야.

  못마땅한 눈으로 힐끔 쳐다보며 지나갔지만 - 개들은 노래하느라 날 당연히 보지 못하지만 - 또 다른 골목에 커다란 깃발 두개를 들고 또 한 무리가 노래를 한다. 아 정말 짜증.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들을 또 불러제끼며 아주 신이 났다. 처음 100명의 무리는 어디애들인지 모르겠고, 나중 무리는 연대애들이었다. 깃발에 연세대라고 써있었으니깐. 제발이지 이런 짓 좀 하지마라.

  나 대학 때도 신입생이 되어 들어갔더니 술자리에서 이런 짓들을 하는거다. 자주통일 어쩌고 하면서 깃발을 높이들고 뭐라뭐라 소리친다. 뭐하는거니. 난 도대체가 이런 일련의 행위들 영 못마땅하다. 이건 내가 군대를 혐오하는 수준에 맞먹는 '못마땅함'이다.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구호들, 그리고 그 구호들에 굳이 의미를 갖다붙인다고 해도 그들이 길거리에서 시끌벅적 떠들며 고성방가 하는 짓과 아무리 생각해도 상관관계를 맺을 수 없고 - 나 내가 돌인가 연관관계를 찾지 못하는게 - 자기들끼리의 그 작태, 이게 다 나중에 파벌을 조성하는 거다. 내가 너무 많이 치고 올라갔나? 의도확대의 오류를 범했나. 그렇지 않다고 본다.

  난 대학 신입생 때도 이 따위의 행동들에 동참하지 않았고, 철학과로 전과를 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왕따 일 수 밖에 없는건 학생회를 주축으로 한 일련의 이 따위의 행동들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 따위의 행동이 내겐 너무나 혐오스러운걸 어쩌랴. 특히나 이게 더 심한 학교들이 있다. 연세대와 고려대(약칭으로 연대, 고대 라는 단어를 쓰지만 이것도 웃기는 거다. 그럼 연 이나 고 자로 시작하는 다른 대학들은 뭐가 되냐. 존재감이 없는거 아니냐. 그래서 나도 습관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대학명칭은 있는 그대로 사용하려고 의식하는 중이다)가 가장 심하다. 내가 본 바로는. 서울지역대학 같은 학번 모임에 나갔을 때도 그들은 얼굴도 모르는 넘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는 또 한바탕 노래를 하며 춤춘다. 제발 그러지 좀 마라 라고 가서 뜯어 말릴 순 없다. 싫으면 내가 그 모임 안나가면 되니깐.

  이런 행위들은 모두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과 선배들이 모여 우리는 같은 배를 탔다 라는 일종의 단결심을 위한 것이겠고, 또 그것이 전혀 이해가 안되는 바는 아니지만, 왜 단합을 위해 그 따위의 행동을 해야하느냔 말이다. 다른 걸 하면 안되나. 아니 또 좋아 해라. 그럼 니들 학교가서 보이지 않는데서 해라. 왜 길바닥에서 길막고서 깃발 흔들며 꿱꿱 노래부르고 춤추며 동네방네 다 여기 좀 쳐다보소 해야하느냔 말이다. 우리 연세대 생은 이렇게 단결심이 좋아요, 우리 고려대 생은 이렇게 단결심이 좋아요, 우리 기계공학과는 이렇게 단결심이 좋아요, 자랑하는거야 뭐야.

  내가 이 글에서 연세대와 고려대를 주로 언급했지만 - 어제 봤던 그 광경은 일부 연세대 학생들이었고 - 모든 대학생들이 다 마찬가지다. 연세대와 고려대에 대한 특별한 증오심이나 미움따위는 없다. 다만 그들이 더 심한건 사실이라는 것 뿐. 그리고 나 또한 그 대학 중 한 곳에 현재 적을 두고 있으니, 너 우리가 부러워서 그러지 따위의 시시껄렁한 딴지는 통하지 않는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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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2-16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도 철학과셨군요. 어쩐지 페이퍼가 심도있어서

이잘코군 2006-02-16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네 경제학 쪽에서 철학으로 옮겼습니다.

가넷 2006-02-16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것도 하나요?=_=;;;

비로그인 2006-02-1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히 찔리는군요. 술 마시고 춤 춘 적은 없지만;; 도로 점거(?)는 여러번 해봤었는지라... 학생회 하면서 신입생들 환영회 한다고 기 들고 학교서부터 신촌 독수리빌딩 쪽으로 이동했던 것도 일종의 도로 점거... 맞죠? (학교 앞엔 사회대 10개의 과가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장소를 제공하는 곳이 없는지라..) 아닌가... 으흠.. 아, 아주 얌전히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

생각해보니, 전 학생회였기 때문에 과에서 왕따였던 거 같군요. 사회복지학과는 성향상 기독교적 색채가 짙고, 심지어 구조조정으로 과가 폐쇄되어도 재학생은 물론이거니와 졸업생 하나 나서서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 정도로 학교에 대해 철저히 복종(?)하지요. 전 1학년 때부터 총학생회에 있었고, 게다가 복수전공도 사회학이었는지라, 제가 하는 이야기들을 과 동기들은 거의 과격함(!)으로 받아들였고, 과 전체적으로는 똘똘 잘 뭉쳤지만 단대 전체 행사가 있거나 그러면 얼떨결에 제가 과 대표가 되어버리는 묘한 현상을 자주 겪었지요. FM? 암튼 남녀공학의 대학들에서 자기 소개할 때 앞에 길게 구호 붙이고 학번에 자기 이름 목소리 터져라 외치는 거.. 확실히 여대다보니 할 일은 없었지만, 사회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색다르게(?) 한 번 해보자며 후배들은 안 시키고 재학생들 몇몇이 한 번 해봤었지요. 다들, 목만 아프다는 결론을 얻었던;;;;

아.. 쓰다보니 님의 글과 상관없는 내용까지 어마어마하게 길어졌군요. 놀고 즐기는 거야 물론 좋지만, 그게 남에게 피해가 되면 안 되는데.. 특히 두 학교간의 대회(1년에 한 번 하는 거 있죠. 연고전인지 고연전인지..)시엔 정말 심각해지죠. 본인이 졸업한 학교의 학생들도 종종 기차놀이하러 참여하곤 하다 못해 우리 학교에도 그런 게 있어야 발전한다는 묘한 목소리를 내는 이도 있고, 심지어 올해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했던 모 선본은 서강대와 함께 연고전 혹은 고연전에 버금가는 축제를 만들겠다며 학벌주의를 조장하려다가 당선에 실패하고 말았던-_-;;

이잘코군 2006-02-16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로님 / 네. 3월 되면 더 심해질거에요.
여대생님 / 아 제가 뭐라하는건 뭐 얌전하게 조용히 행렬지어 지나가는걸 뭐라는게 아니고, 꽥꽥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노래하고 춤추고 하며 주변을 어지럽히고 소란피우는 행위를 말하는거에요. 님한텐 해당사항 없어요. ^^ 그냥 학교가서 운동장에서 하든 잔디밭에서 하든 할 것이 말이에요. 꼭 밖에 나와서 그래요.
행복나침반님 / 그쵸. 3월 되면 더 심해질거 같아요. 그쪽에 또 나름 자부심있는 대학들이 좀 많아요? 저도 차라리 학교 강당에서 오티하며 바위처럼 노래부르고 거기서 술먹고 끝내는걸 권장해요. 아 저도 해병대 아찌들 더 싫어요. 항상 어느 집단이든 전부가 그런건 아니지만 유독 눈에 띄게 행동하는 이들이 있죠. 신촌에서 논 그들도 그렇고, 나 해병대 나왔어! 군인이야! 그래서 뭐 어쩌라는건지 아주 대놓고 과시(?)하는 이들이 있어요. 저도 해병대 벩이에요.

비로그인 2006-02-21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끄럽게해서 다른이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는지 반성중입니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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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번째 접한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이다. 일본 소설에 입문 한 뒤로 한 명 한 명 작가를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가네시로 가즈키, 무라카미 하루끼, 오쿠다 히데오, 야마다 에이미, 츠지 히토나리를 거쳐서 이번엔 요시모토 바나나다. 가장 최근작 <불륜과 남미>를 읽은 이후 기대했던 만큼의 만족감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이전작들이 너무나도 호평을 받고 있어서 그 한권만으로 그녀를 판단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 끝에 이번에 몇 권을 더 구입했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그녀의 많은 작품들 중에 언제쯤 내놓은 것인지 모른다. 기왕이면 집필 시기를 알 수 있어서 그 순서대로 읽어나가는 혹은 역순으로 읽어나가는 재미를 누리고 싶었지만 불친절하게도(?) 그녀의 책 어디에도 그 순차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읽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그녀가 거쳐왔던 세월의 흔적들, 생각의 흔적들을 느끼고 싶었다.

  그녀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이 책을 접했을 때 무슨 과학책인줄 알았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의학관련, 과학관련 대중서인줄 알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작가의 이름만 기재되어있지 않다면, 이 책을 소설책으로 분류할 사람은 없을 듯 하다. 일전에 어떤 책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학교 도서관에서 철학책을 찾는데 철학분야에 끼워져있지 않고 다른 엉뚱한 곳에 가 있는 경우가 있었다. 도서관 사서들이 제목만 보고서 다른 곳으로 분류해놓은 것이다. 그럴 때면 아 뭐 실수할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그런데 사서들은 이 많은 책들을 어떻게 제자리에 분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가졌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짧은 여러개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초록반지, 보트, 지는 해, 검정 호랑나비, 조그만 물고기, 적당함 등등의 여러 단편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지만,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담고 있다. 그 주제를 풀어놓은 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 다른 여자와 또 만나 데이트를 하며 그녀와 함께 걸었던 그 때 그 장소로 나의 발길이 향할 때, 나보다 내 몸이 먼저 자연스럽게 행동하는구나, 하는 걸 느낀다. 바로 어제 우리가 함께 했던 그 즐거웠던 시간들이 오늘, 그리고 내일, 혹은 한달 뒤 까맣게 잊혀지고 말지 모른다. 기억에서 자연스럽게 지워지고 흔적조차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또 알게 되기도 한다. 역자 김난주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런 말을 한다.

  "그런 때, 시간은 흘러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이렇게 한순간에 지금이 먼 옛날이 되고 또 먼 과거의 시간이 오늘에 되살아날 수도 있는 것을, 하고 말이죠."

  함께 했던 그 행복했던 시간은 기억을 통해 영원히 '행복'으로 남을 것만 같지만, 언젠가는 기억 저장고에서 날아가버린다. 하지만 그때 내가 했던 말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는 비록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내 몸에 습관으로 배어있다. 단지 그걸 인지하지 못할 뿐. 언젠가 비슷한 상황이 돌아왔을 때 나는 안다. 익숙한 나의 몸짓에, 한 마디 말에, 언젠가 내가 했던 말인거 같은데, 언젠가 내가 했던 행동인 거 같은데... 나는 잊었지만 내 몸은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요시모토 바나나는 이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옛 이야기를 내 몸은 기억하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좋은 친구는 그리 많지 않다. 일단 억지로 얘기하기를 그만두면, 몸이 오랜 세월에 길든 서로의 리듬을 마음대로 새겨준다. 그러면 대화는 느긋하고 매끄럽다." (p51, 검정호랑나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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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2-16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몸은 알고 있다~ 저도 읽어 보고 싶네요. 요시모토 바나나 참 미칠듯 질투나는작가같아요

이잘코군 2006-02-16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글을 잘 쓰더군요. 전 세계적으로 읽히는 이유도 그가 일본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공감과 동의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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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좋은 친구는 그리 많지 않다. 일단 억지로 얘기하기를 그만두면, 몸이 오랜 세월에 길든 서로의 리듬을 마음대로 새겨준다. 그러면 대화는 느긋하고 매끄럽다. - <검정호랑나비> 中 -51쪽

지금은 초췌하게 눈 밑에 기미까지 끼어 있지만, 언젠가는 새로운 사랑을 하고 다이어트다 뭐다 시끄러워 지리라. 내가 전에 여기 왔었다는 것을 잊게 한 똑같은 힘이 그녀를 또 웃게 한다.
멈추지 않는 시간은 아쉬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순간을 하염없이 품기 위해 흘러간다. - <검정호랑나비> 中 -52쪽

나는 그의 몸매도, 할 때의 표정도, 비디오를 보며 연구한 듯 집요한 섹스 스타일도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욕망은 삽입도 아니고 다른 무엇도 아니고 오로지 보는 것이 전부였고, 나를 즐겁게 해주려는 생각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너무 집요해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절정에 올랐지만, 그것은 그냥 보통 섹스에서의 평범한 기분 좋음이 아니라 어딘가 뒤틀린 환희였다. 그러나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그 유난히 가는 팔도, 울룩불룩 튀어나온 등뼈도, 부숭부숭한 털도, 안경을 벗으니까 유난히 긴 속눈썹도, 햇볕에 까맣게 탄 피부도 싫다고 외면할수록 좋았다. 아무말이 없는 것도 나를 매혹시켰다.
그것은 어린 시절 바다에 놀러 가서, 파도치는 해변에서 뒹굴 때의 감각과 비슷했다. 물을 머금은 부드러운 모래가 몸 아래서 흔들리는 느낌, 그 감촉이 황홀하도록 기분 좋아서, 수영복 속으로 모래가 찔끔찔끔 들어와 나중에 성가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이 뭐, 하고 물가에 누워 있었던 때의 그 기분. 몸을 담글 때까지는 혐오스럽지만, 한번 그 부드러운 모래의 힘에 사로잡히면 거기에 있고 싶어진다.
- <미라> 中-81-82쪽

아마도 전쟁이란 것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그리고 또 무엇을 '미워하자'고 정하고는,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증오란 증오를 전부 끌어내 거기에 쏟아 붓고 탓하는, 그런 중독 비슷한 이상한 상태에서 일어나는지도 모르겠다......
- <밝은 저녁> 中 -94쪽

그 냉정함을 듬직하다 여겼었다. 하지만 사실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무관심하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과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이어지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 <아빠의 맛> 中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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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6-02-16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과학서적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이잘코군 2006-02-16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그렇죠? ^^ 저도 첨에 제목만 보고 그런줄 알았어요.
 
사상의 자유의 역사
존 B. 베리 지음, 박홍규 옮김 / 바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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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자유의 역사>를 읽기 위한 메모 몇 가지

사상의 자유라는 것이 과거 서양사회에서 종교의 자유와 일치한다고 봐도 좋을 만큼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는 사상의 자유를 논함에 있어 뗄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책을 읽는 와중에 비기독교 신자인 나로선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으므로 꽤나 낯설었다. 기독교와 관련해서 또 철학과 관련해서 몇 가지 단어들의 의미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어렴풋이는 알고 있지만 도대체가 그 차이점이 정확히 뭔지,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몇몇 단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이 책을 읽는데 있어 많음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 변신론(辯神論)

영어로는 Theodicy  독일어로는 Theodizee

어원 : 신을 뜻하는 그리스어 Theos 와 정의를 뜻하는 그리스어 Dike

의미 : 악이라는 현상에 관련해 신을 변호하려는 입장

변신론은 세계 속에 창궐하는 악에 대한 책임을 신에게 전가할 수 없음을 보여 주려고 한다. 이 말은 <신의 선함, 인간의 자유, 세계의 기원에 관한 변신론>(1710)이라는 라이프니츠의 책 제목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둘. 무신론(無神論)

영어로는 Atheisme 독일어로는 Atheismus

어원 : 신을 뜻하는 그리스어 Theos 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어 a가 붙음

의미 : 신의 존재나 신이 세계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입장
           신에 대한 거부로부터 세계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것

  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무신론은 우주와 인간의 시원, 진화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의 결과로서 등장한다. 무신론은 불가지론과 구분된다. 불가지론은 신의 존재에 대한 언급을 거부하는 입장이다.

  실천적 유물론은 일종의 윤리학이며, 도덕적, 정치적 참여에 연관된다. 니체의 주장처럼 "신은 죽었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치를 거부함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무신론은 마르크스에서처럼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사르트르에서처럼 인간의 절대적 사유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상은 <철학사전>, 엘리자베스 클레망 외, 이정우 역, 동녘  참조)

 

셋. 이신론(理神論)

  이상주의적 입장에ㅓ 종교를 생각하거나 자연종교의 입장에서 역사적 종교를 설명하고자 하는 입장을 말한다. 신이 세계의 창조자라고 인정하긴 하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인격적 존재라고는 보지 않는다. 또 일단 창조된 세계는 신의 지배를 떠나 정해진 자기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면서, 기적이나 예언과 같은 불가사의한 요소는 배척한다.

(본 책 P 91 역주 참조)

 

넷. 설계논증

  설계논증이란, 세계는 목적에 적합하게끔 수단이 끝없이 조절된다는 명백한 설계의 흔적을 나타내 보이는데, 이는 강력한 지성의 의식적인 계획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밖에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흄은 단순한 지성적 존재는 그러한 결과를 설명하기에 충분한 원인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추론을 논박한다. 왜냐하면 설계논증에 따를 경우 물질세계의 체계는 그 원인으로서 그에 대응하는 관념들의 체계를 필요로 하는데, 그러나 그러한 정신적인 체계 역시 물질세계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우리는 결국 원인의 무한소급에 빠져들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본 책 P184 본문 참조)

 

다섯. 불가지론(不可知論)

  불가지론이라는 말은 특히 종교에 관한 태도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이 말이 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급진적 회의주의와 동의어이다. (<철학사전> 참조)

  불가지론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신학은 그 한계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과학이 취급하는 세계는 그 한계 안에 있다. 과학은 전적으로 현상만을 다룰 뿐, 현상의 배후에 놓여 있을지도 모를 궁극적인 실재의 본성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할 것이 없다. 이 궁극적인 실재에 대해서는 네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첫째. 궁극적인 실재가 존재할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알 수 있다고 확신하는 형이상학자와 신학자의 태도.

  둘째. 궁극적인 실재의 존재를 부정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부정이 오로지 형이상학적 논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형이상학자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태도.

  셋째, 궁극적인 실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해 뭔가 알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사람들.

  넷째. 궁극적인 실재의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이들이 엄밀한 의미에서 불가지론자.

  * 셋째도 넓은 의미에서 불가지론자로 분류된다.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의 차이는, 무신론자가 인격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반면 불가지론자는 그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 책 P2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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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자유의 역사
존 B. 베리 지음, 박홍규 옮김 / 바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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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말 최고 중의 최고의 책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원하던 책이다. 자기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자처하는 영남대 법학과 박홍규 교수의 수많은 번역서 중의 하나이다. 사상의 자유의 역사. '~의'가 두번이나 들어가 제목을 말할 때 어색하긴 하지만 그 정도 어색함 쯤은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본다면 위대함에 대한 찬양을 바뀐다.

  이 책이 처음 나온 것은 1914년.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의 일이다. 100전에 영국에서 나온 이 책은 이후 1952년에 제 2판이 나왔다고 하지만, 역자인 박홍규 교수는 초판을 번역 대본으로 삼고 자신의 역주와 해설을 붙였다. 번역은 하나의 학문으로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이 책의 매끄러운 번역과 역자의 적절한 역주와 해설이 이 책을 더욱 빛나게 했다고 자부한다.

  박홍규 교수는 양심의 문제, 자유의 문제, 사상의 문제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다. 나 역시 그러한 문제에 1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이전에 조국 교수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라는 책도, 김두식 교수의 <헌법의 풍경>도, 김상봉 교수의 <도덕 교육의 파시즘>이란 책도 그런 맥락에서 가장 우선해서 읽어야 할 도서 목록이었고, 읽은 후 이들을 최고의 도서로 뽑았다. 작년에 읽은 <도덕교육의 파시즘> 에 이어 이 책은 아직 채 두달도 지나지 않은 올해의 '최고의 책'으로 감히 미리 올려놓는다.

  오늘날 우리는 학문, 종교, 출판의 자유를 당연히 여기고 있고, 또한 '사상의 자유' 역시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적어도 이 땅에서 만큼은. 언론, 출판, 종교, 집회의 자유에 사상의 자유는 포함되지 않는다. 아니 지금이 무슨 과거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도 아니고,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들어서기까지 도대체 몇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래 아직도 그렇다. 우리나라엔 사상의 자유를 언급하고 있는 법조문이 없다한다. 사상의 자유란 곧 '정신의 자유'다. 박홍규 교수는 역자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험난한 과정을 거친 뒤에 사상의 자유라는 '원칙'이 일단 한 사회 속에서 받아들여지면, 그 원칙은 일반적인 편의의 영역을 지나 우리가 정의라고 부르는 보다 수준 높은, 사회적 효용을 갖는 편의의 영역으로 접어들게 된다. 즉 그 원칙은 모든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권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상의 자유가 보편적인 가치로서 시민의 기본권이 되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라고 할 수 있다." (p6)(역자 머리말 中)

  그는 사상의 자유가 시민의 기본권이 되는 근거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언급한다. 유럽과 미국사회의 험난한 역사 속에서 쟁취한 사상의 자유는 사회속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권리이며 기본권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아.니.다. 이 책은 매우 오래된 고전이지만 100년전의 그것은 100년후의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지금 이 땅에서,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져야 한다.

  저자 존 B. 베리는 크게 8장으로 나누고, 1장부터 '사상의 자유와 그 반대세력' '자유로운 이성 - 그리스와 로마' '구속된 이성 - 중세' '해방의 전망 -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종교적 관용' '합리주의의 성장 - 17세기와 18세기' '합리주의의 진보 - 19세기' '사상의 자유에 대한 정당화'. 이렇게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시대순으로 사상의 자유를 다루고 있다.

  사상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를 배제한 채 논의할 수는 없다. 사상의 자유가 종교의 자유는 아니지만, 종교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에 속한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봤을 때 - 그것은 전적으로 서양사이지만 - 사상의 자유라는 것은 종교의 자유였다. 기독교의 탄생과 기독교를 둘러싼 관용과 불관용, 세력다툼, 이런 것들이 종교의 자유를 구성했고, 그것은 곧 사상의 자유였다.

  저자는 1장 서론에서 사상의 자유는 자연적인 권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뭐라고?! 아니 어떻게 사상의 자유가 자연적인 권리가 아니라는 거야. 이 책은 내가 기대했던 바대로 서술하고 있지 않았다. 아니 왜. 도대체 왜 사상의 자유가 자연적 권리가 아니라는 거야. 베리는 말한다. 인간에게 자연적인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권리' 와 '자녀를 낳을 권리'라고. 사상의 자유는 여기서 제외된다. 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면서.

  "만일 우리가 의견의 표현을 이(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권리, 자녀를 낳을 권리)와 동일한 종류의 권리라고 인정할 경우, 이를 근거로 의견의 표현에 대한 무간섭을 요구한다거나 그에 대한 사회의 규제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인정은 지나치게 폭이 넓다. 왜냐하면 다른 두 권리의 제한은 모든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만, 의견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혁명적이거나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의견을 표현하고자 하는 비교적 소수에게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실 자연적인 권리라는 개념에 근거해서는 타당한 논의가 성립될 수 없다. 그러한 개념은 사회와 그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옹호할 수 없는 이론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p23)

  사회를, 국가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반사회적 행동과 마찬가지로 유해한 의견을 유포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말한다. 국가를 유지하고 지켜야 할 이유가 충분하므로. 어떤 의견이 도덕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다수를 위협한다면 그것을 막아야 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다. 좋아. 동의. 그럼 사상의 자유는 억압되어도 좋은 것인가? 아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다.

  루터는 사상의 자유에 불관용을 주장하며 "참된 교리를 강제하고 이단을 근절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고,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문제에서도 군주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것이 신민의 의무이며, 국가의 목적은 신앙의 수호에 있다"(p95)고 한다. 또 사상의 자유에 대해 관용을 주장하는 다른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개인의 종교적인 신념은 정부의 권위가 효력을 미칠 수 없는 영역이다. 권위에 대한 굴종은 위선적인 신앙고백을 초래할 뿐이다. 모든 신념은 허용되어야 하며, 세속 정부는 정교와 이단을 막론하고 공익을 위해 통치해야 한다. 신이 다양한 형태의 숭배를 원한다는 것은 그 스스로 명시하는 바이다. 신에게 다다를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다." (테미스티우스)(p68)

 "다른 그 어떤 자유보다도 양심에 따라 자유로이 알고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유를 내게 달라." (밀턴)(P120)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누군가의 행동의 자유에 대한 간섭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목적은 자기 방위"이며 압제는 오로지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경우에만 정당화된다. (밀)(p259)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비록 악법에 의한 죽음을 택했지만, 중세에 벌어질 사상의 자유에 대한 억압에 비해 그리스 사회는 매우 관용적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죽기 이전까지 국가에 반하는 그런 말씀과 행동을 하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그리스 사회의 관용을 말해준다. 만일, 그리스가 불관용적인 사회였다면 소크라테스는 즉각 처형되었을 것이다. 오래도록 그가 젊은이들을 가르치도록 놔두고, 나중에 붙잡아서도 바로 죽이지 않고, 법정에서 변론의 기회를 준 것 또한 그리스의 관용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후대의 역사가들을 비롯하여 우리들은, 소크라테스의 편에 선 나머지 그를 죽인 그리스 사회를 매우 악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중세엔 이성이 구속되었다. 기독교의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은 관용은커녕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는 사례들을 만들었고, 모두가 기독교에 미쳐있었다. 종교는 이성과 교집합을 이룰 수 없다. 종교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며, 그것은 이성을 넘어선 그 무엇,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이성의 한계치를 시험해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광신적 종교는 이성을 감옥에 처넣었고, 사람들은 모두 종교에 미쳤다. 하지만 기독교의 불관용은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끝난 지금 이 시대에도 계속 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나, 서양 유럽사회에서나 마찬가지다. 선거시즌이 되면 기독교는 더욱 세력을 과시한다. 어느 한 세계적인 규모의 교회의 목사는 보수정당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선거유세를 돕고 연설장에서 빨갱이 운운하기도 한다. 목사 혼자만 그러면 그냥 알아서 놀으려니 하겠건만 그 목사가 담당하고 있는 교회의 신도들은 성서의 가르침과 목사의 가르침을 혼동하며 그를 추종한다. 서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벌어진 덴마크 신문사의 마호메트 만평 파문은 독일, 영국, 프랑스로 이어졌고, 결국 유혈 폭력 사태를 낳았다. 미국의 부시는 하느님 운운하며 이라크를 친다. 이성은 아직 감옥에 있다.

   중세 이후의 인문주의라 불리우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지나가고, 합리주의가 등장하며 루소, 볼테르 등의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을 창고에서 꺼내왔다. 종교의 거센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이성이 종교를 대체했다. 볼테르는 <광신주의자의 무덤>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사형 집행자들에 의해 지탱되며 화형의 나무 다발에 둘러싸인 불합리하고도 잔인한 교의이자 그로부터 권력과 부를 얻는 무리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승인받을 수 있는 교의, 그리고 오로지 세계의 작은 일부분에서만 받아들여지는 특수한 교의를, 사람들은 무지몽매하게도 단순하고 보편적인 종교보다 더 선호한다." (p176)
 
  사상의 자유를 어떻게 정당화 할 것인가. 합리주의의 시대에 볼테르와 루소를 비롯한 계몽주의자들이 이성을 끄집어냈고 사상의 자유를 이루기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 이후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로이 의견을 낼 권리에 대해 "매번 논쟁을 해봐도 전혀 논박되지 않기 때문에 그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과, 논박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그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의 의견을 반박하고 반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야말로 행동을 위해 우리의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조건이다. 그 외의 다른 어떤 조건 위에서도 인간적 능력을 지닌 존재로서는 옳음에 대한 합리적인 확신을 가질 수 없다." (p263) 라고 말하며 의견의 자유, 사상의 자유에 대해 정당화를 시도했다.

  이 책은 이렇게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시대순으로 올라오며 중세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자유가 어떻게 억압되었고 또 신장되었는지에 대해 역사적 사례를 들어 설명해주고 있다. 결국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사상의 자유'이다. 그는 사상의 자유를 부여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기나긴 역사를 서술하며 지금까지 살펴봐왔던 것이다. 사상의 자유는 인간이 아이를 낳고, 내 생명을 지킬 만큼의 자연적인 권리는 아니다. 아이를 낳고, 생명을 지키는 권리는 동물들에게도 있다. 하지만 동물과 다른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있는데,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려야 할 권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상의 자유'이다. 내 생각, 내 의견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권리, 그것이 바로 사상의 자유이다. 그리고 사상의 자유는 관용이기도 하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소수의 사람들과 양심적 병역거부는 국가의 보존을 위해 절대로 안된다라고 주장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립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사상의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된다고 주장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허용하자고 주장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의견에 온갖 욕설과 비난과 인격모독 등의 테러를 하는 행위는 '불관용'적인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불관용적인 사회이다. 이것은 의견을 자유롭게 낼 수 있는 권리가 실현되는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의견을 자유롭게 낸다는 것, 나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한다는 것은, 나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받을 권리'와 연계되어 있다. 단순히 말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사상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중세에도 사상의 자유는 주어졌다. 하느님은 없다, 고 '말'하고 화형당하면 되니까. 그래서 사상의 자유는 존중과 관용을 포함해야 한다. 

  국가 보안법과 양심적 병역거부와 같이 종교와 정치가 뒤섞인 민감한 문제에 있어서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말 할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볼테르는 말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말 할 권리를 위해서는 함께 싸우겠다"라고. 비록 의견은 다르지만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귀기울일 줄 아는 자세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역자 박홍규는 친절하게도 '해설' 을 덧붙이며 우리나라의 억압된 사상의 자유의 현실을 꼬집어 주고 있다. 교육에서, 헌법에서, 국가보안법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서 그는 이성이 감옥에 갇혀있는 우울한 현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근 100년된  <사상의 자유의 역사>라는 책을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번역하고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양에서의 사상의 자유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의 문제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 땅에 사상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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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6-02-15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몹씨 땡기는데요 ?

이잘코군 2006-02-15 0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력추천입니다. <도덕교육의 파시즘> 역시. 이 책은 기독교와 연관해서, <도덕교육의 파시즘>은 우리나라의 반공교육과 연관해서 보면 참 좋아요. 둘다 사상의 자유를 억압한 경우를 살펴보고 있죠.

코마개 2006-02-15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있던 양병우 교수의 번역본도 있는데요, 가격이390원 입니다. 박영사에서 나온...알만하죠? 번역이 어떨지. 박홍규 교수 번역본도 있는데 아직 못 읽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탄력 받아서 읽어야지

이잘코군 2006-02-15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박홍규 교수도 머리말에 이야기했어요. 우리나라에서 50년대엔가 번역했다고. 그런데 그 번역본이 핵심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번역한게 많아서 다시 했다고요. 그걸 가지고 계시는군요. 박홍규 교수도 대학 학부 때 그 책을 읽고 감명받았다고 했어요.

타지마할 2006-04-14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를 읽고 주문했어요. 물론 Thanks to도 했지여.

이잘코군 2006-04-1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