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알랭 드 보통. 최근 나의 독서습관을 사로잡고 있는 이 사람.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 <키스하기 전에 하는 말들> 에 이어 접하게 된 보통씨의 세번째 이야기. 본래 이 책은 '생각의 나무' 출판사에서 2002년에 <드 보통의 삶의 철학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고 하는데, 별로 팔리지 않았나보다. 왜일까. 일단 제목이 좀 거시기 하네. 누군지 모르는 드 보통의 이름이 걸려있고 이것이 수식하는 단어가 '삶의 철학산책' 이 딱딱한 제목에 누가 현혹되겠으며 어느 누구의 눈길을 끌 수 있겠는가? 좋은 책이다만 일단 독자의 눈길을 끌어야 팔리고 읽힐 것이 아닌가. 아마도 이번에 새로 편집되어 출간된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은 이런 점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야 좀 팔리지 않는가. 좀 팔리는 정도가 아니지. 이 정도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이 책을 학교를 오가는 길에 들고 다니며 간간히 읽었는데, 학교에 도착해 책상위에 올려놓으면 옆에 있던 선생님이 그러신다.

"선생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슬픔이죠. 이건 다른 책이에요."

이 선생님과 같은 질문을 내게 던진 사람이 몇 있다. 모두들 한결같이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 - 젊은 베르테르는 슬프다라는 - 과는 다른 제목을 가지고 있기에 놀란 눈을 하고 자신의 기억과 지식을 의심하며 내게 확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에 대한 의문은 누구에게나 신선하다.

 나는 사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보지 않았다. 이 책의 제목때문에 관심이 가기는 하다만 언제쯤 그 책이 내 손에 들어올지는 모르겠다. 단지 괴테와 그의 친구의 경험담이 묻어있는 슬픈 사랑이야기라는 정도 밖에는 모른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다"라는 몽테뉴의 문구로 시작하는 이 책은, 소크라테스와 에피쿠로스, 세네카, 몽테뉴, 쇼펜하우어, 니체 라는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6가지 위안을 주려고 한다. 소크라테스를 통해서는 그가 아테네에서 외톨이- 심하게 말하면 왕따 - 였음을 일러주며 인기 없어도 괜찮다 라고 위안을 주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에피쿠로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런 놈도 있었다 라고 위안을 주고, 세네카의 좌절의 철학, 체념의 철학을 전파해주며 좌절의 위안을, 세네카와 비슷한 의미에서 몽테뉴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또다른 위안을, 쇼펜하우어의 사랑이야기과 삶의 이야기를 통해 상심한 마음에 위안을, 니체의 삶을 통해 곤경에 대한 위안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런데 정말 이 책을 다 보고 나면 그런 위안을 받을 수 있는거야? 라고 순진한 질문을 누군가 던진다면 꼭 그렇진 않다 라고 말해주고 싶다. 꼭 그런진 않아 라는 말 속에 담긴 일말의 가능성조차도 사실 이 책을 통해 위안을 받을 수 있을거라는 장담은 절대로 절대로 못한다. 여기에 담긴 각종 위안들이 모두 독자에게 먹힌다면 독자는 어쩜 비극적 현실에 처해있는 자신의 상황을 자기합리화 시키며 현실에 안주하려 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여기에 나온 위안들이 독자에게 먹히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각각의 철학자들의 삶의 이야기와 그들이 한 말들 하나하나 되새기며 자신의 삶을 음미하고 반추해보는 정도의 효과를 얻었다면 보통씨가 의도한 목적을 달성한 것은 아닌가 싶다. 철학에세이의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삶을 대상으로 사유하게 하는데 있다. 이 책은 일종의 철학에세이이고, 또 다른 의미에서 철학입문서라고 할 수도 있겠다. 철학에 이제 막 들어선 이들, 관심갖기 시작한 이들이, 딱딱하고 재미없고 지루하고 어려운 철학책을 접하기에 앞서 철학자들의 삶을 먼저 접하게 된다면 흥미를 유발 할 수 있지 않을까.  보통씨가 안내해주는대로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각각의 철학자들의 삶 속으로 들어와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족이지만, 나는 이 책에 담겨있는 몇몇 철학자들의 말 중에서 이 대목이 참 마음에 와닿았고 뜨끔했다.

 "몽테뉴는 학자들이 고전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쏟는 이유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을 지적인 존재로 비치고 싶은 허영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학자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지적욕구를 갈구하는 이들 중 한 사람인데, 특히나 남들이 잘 읽지 않는 인문사회과학 서적 혹은 고전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 흔히 어렵다고 알려져 있는 분야. 솔직히 나는 타인에게 내가 지적인 존재로 비춰졌으면 좋겠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름대로 지적으로 보이려고 이쪽 분야에 관심을 갖고 독서를 하는 것이다. 몽테뉴의 위와 같은 문구는 나를 뜨.끔. 하게 만들었다. 전혀 지적이지 않은 내가 남들에게 조금이라도 지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나의 허영심 때문이리라. 그리고 나의 그러한 허영심이 어느 정도 타인에게 먹혀 들어갔단 말씀. 지금 고백하지만 난 전혀 지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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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 책 2005-07-07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 명성이 자자해 서점에서 첫장만 들춰 읽어봤는데, 꽤 괜찮더라구요...보관함에 넣기는 했는데 언제쯤이나 ^^;;

하이드 2005-07-07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요. 사세요 사세요~ ^^
키스 앤 텔은 그나마 읽어본 중 별로였던 것 같아요.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의 연장선이긴 한데, 그나물에 그 밥이란 느낌이더라구요.

마늘빵 2005-07-07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리드리머님 / 알라딘에 보통씨 팬들이 꽤 많더라구요. 저도 알라딘 마을에서 소개받고 합류했습니다. ^^

하이드님 / 저 님 추천으로 보통씨 책 전부 다 샀어요. 지금 집에 모셔두고 있답니다. ^^ 이제 또 다른 작품을 봐야죠.
 

 나와 취향이 비슷한 한 샘이 이 영화를 재밌게 봤다길래 나 또한 그와 비슷한 취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영화가 재밌을거라 믿고 영화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혼자서. 혼자 영화 봤다.

 날이 더워 조금만 걸어도 등이 다 젖어버리는 바깥과는 달리 영화관 내부는 매우 추웠다. 아이 추워. 더워서 속을 시원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콜라를 사들고 갔지만 이놈의 차가운 콜라가 나의 내부를, 밖에서는 에어콘의 차가운 공기가 나를 떨게 만들었다.

 씬씨티. 영어로 Sin CIty. 이게 뭘 의미하는거야? 그냥 도시 이름인거야? 별 다른 의미가 있는거야? 아마도 제목에는 별 의미가 없는 듯 하다.

 미국의 80년대를 주름잡았던(?) 만화를 원작으로 했다는 이 영화는 그야말로 정말 만화를 영상으로 옮겨놓은 듯 했다. 대개 칼라판으로 출판되지 않는 만화와도 같이 영화는 흰색과 검은색의 대비를 강조한 무채색 일색이었고, 간혹 빨간색과 노란색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역시 주된 색채는 흰색에서 검정색까지의 무채색이었다.

 이미 다른 영화들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말이 필요 없는 배우 브루스 윌리스와 예전에 <21그램>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처음 접한 얼굴, 베네치오 델 토로가 주연이다. 그밖에도 제시카 알바라는 여인네와 미키 루크라는 남정네도 주연 명단에 오르고 있지만 그들이 누군지는 잘 모른다.

 주인공들의 이름과 배우를 짝지어 보면,
 
 *제시카 알바 - 낸시, 어린소녀에서 8년 뒤 부쩍 자란 아가씨
 *미키 루크 - 마브, 괴력의 사나이, 불멸의 사나이, 거대한 체구.
 *베네치오 델 토로 - 잭, 재밌는건 이 사람 <21그램>에서도 잭이었는데 여기서도 잭이다. 망나니(?) 경관.
 *브루스 윌리스 - 하티건, 퇴직을 앞둔 정의의 형사나리.

  영화는 전체적으로 병렬식 구성으로 되어있다. 몇개의 시나리오가 돌아가며 이야기를 진행하고 결말을 맞이한다.

 퇴직을 앞둔 정의의 형사나리는 어린꼬마아가씨 낸시를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심지어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괴력의 사나이 마브는 등치에 맞지 않게 자신과 하룻밤 사랑을 나누고 죽은 창녀의 복수를 위해 거리로 나선다. 사진작가 드와이트는 창녀를 괴롭히는 이들-아까 그 망나니 경관 잭과 그 일당를 비롯한 몇몇 놈들 - 징벌하기 위해 창녀대표 게일과 함께 거대권력에 맞선다.

 각각의 이야기는 아무런 연관관계 없이 알아서 진행되고, 이야기는 역시 예상했던대로 정의의 승리로 끝이난다.

 이 영화의 묘미는 줄거리가 아니다. 줄거리만 따지자면 사실 다른 액션 영화들과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이 영화의 매력은 만화가 영화로 변환되면서, 만화적 색채를 살리고자 한 흑백의 대비, 잔인하고 피튀기는, 아무런 마음의 동요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살인행위에 있다. 어쩜 그리도 살인을 자연스럽게 행동에 옮길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필요없다.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를 위해 앞으로 전진할 뿐이다. 내 앞을 가로막는자에겐 마땅한 응징이 따를 뿐이다.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 그것이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고, 삶의 철학이다. 정의는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나눠주는 것인데, 정의의 문제는 사람들이 적게 가지려하기보다는 더 많이 가지려고 함으로써 발생하게 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정의(dike)가 처음 등장하게 되는데, 이 때의 정의는 분쟁해결의 수단이고, 현대정의론에서의 절차적 정의를 의미한다.

 그 이전의 정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이 당한 만큼 돌려주는 '복수'의 개념이 정의를 의미했다.

 영화 <씬시티>에 있어서 마브의 정의는 아마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정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던, 사랑해주었던 창녀의 죽음. 이에 대한 복수. 그런데 다른 이들의 정의는 또 마브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하티건은 정말 순수하게 "정의의 이름으로 얏!" 이라고 외치는 세일러문의 나의 이익이나 손해와는 상관이 없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정의라고 볼 수 있을 듯 하고, 드와이트의 정의는 직접적으로 나와 상관은 없지만 약자의 편에 섬으로써 힘을 실어주는 정의라고 할 수 있겠다. 정말 이들은 각자 정의의 개념을 다르게 인식하고 있고 자신의 머리속에 박힌 정의관대로 삶을 살아간다. 나의 생명의 위태로움을 느끼면서까지.

 정의는 일종의 명예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정의관대로 나의 삶을 진행시킴으로써 나는 일종의 명예를 얻는다. 그것이 나의 이익과 손해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정말 나와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외견상 그렇게 보일뿐이지 나는 이를 통해 명예를 얻는다. arete. 덕. 탁월함. 명예. 그들은 각자의 명예를 위해, 우리의 명예를 위해 싸우고 투쟁하며 승리를 쟁취한다.

 사족
 내 평생 영화를 보다 이런 영화는 처음이다. 정말 만화책을 그대로 영상으로 옮겨놓은 듯 하다. 마치 움직이는 만화와 같다고 할까. 스크린 속에 모습을 드러낸 저들도 꼭 배우가 아닌것만 같다. 손으로 그린 만화를 빠르게 돌려놓음으로써 캐릭터의 동작을 움직이는 것만 같다. 정말 탁월한 솜씨다.

 영화의 잔인함은 뻘건피가 아닌 하얀피라는 점으로 우리의 눈으로 영상이 들어오기 전에 한 차례 걸러진다. 마치 <에일리언>에서 외계생명체가 흘리는 끈적끈적한 피와도 같은. 그래서 그 잔인함이 한층 꺾여 다가온다. 흑백영화가 아닌 올 칼라 영화였다면 아마도 몇차례 눈을 돌리거나 인상을 찌푸렸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이래저래  새로운 방식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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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7-07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성실한 감상을 올리다니 대단해요^^

마늘빵 2005-07-07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읽어보면 별 내용은 없어요. ^^ 귀찮아서... ㅋ
 


 

 

 

 

 

 충격적인 잔인한 장면들이 난무하는 영화.
 절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영화.
 마지막의 반전이 뒷통수 때리는 영화.

 대략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의 소감을 말하라면 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장면부터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해나 설명이 전혀 없이 - 하긴 그게 있으면 공포감이 떨어지긴 하지 - 난데 없이 침입한 살인마. 손에 면도날을 쥐고 벨을 누른다. 띵.똥.
 
 문 열러 나간 아저씨. 살인마에 의해 목이 잘려 죽는다. 피 엄청 튀긴다. 모자이크 처리를 했지만 목이 달아난 뒤의 몸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빛 소나기. 쩝. 눈쌀 찌푸리게 된다.

 다음 살해자. 아줌마. 아줌마 된통 당하고 나서 아직 숨이 붙어있는 채로 전화기를 집어들다 면도날에 목이 잘린다. 쩝. 역시나 하얀 장농에 뿌려지는 빨간 피. 흰색과 빨간색의 색채대비.

 다음 살해자. 아저씨와 아줌마의 꼬마아들. 이 꼬마 냅다 집을 뛰쳐나가 달리지만 살인마 천천히 쫓아가 총으로 쏴 죽인다.

 남아있는 것은 딸과 딸의 친구. 딸의 친구는 일찌감치 눈치채고 이미 숨었다. 딸은 자고 있다가 발각되어 손과 발에 쇠줄로 묶이고 입에도 재갈이 물려진다. 비명은 소용 없다. 이미 집엔 아무도 없는걸.

 살인마는 딸 알렉스만은 죽이지 않고 차에 데리고 어디론가 간다. 아직 살인마에게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딸의 친구, 마리아는 알렉스를 구하려다 차안에 같이 갇혀버리고. 주유소에서 급유를 하는 동안 도망치지만, 도움을 요청했던 주유소 점원도 살인마에게 도끼로 살해당했다. 차를 몰고 어디론가 질주하는 살인마와 알렉스를 구하기 위해 쫓아가는 마리아.

 영화의 줄거리는 아무것도 없는 듯이 보인다. 잔인한 이름모를, 말도 없는 살인마는 도끼질하고 칼질하고 총쏘고 하며 원인모를 살인을 저지르고, 마리아는 친구 알렉스를 구하기 위해 살인마를 쫓을 뿐.

 하지만 영화는 이게 다가 아니다. 살인마와 존재를 들켜버린 마리아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결국 마리아는 살인마를 죽이게 되지만, 영화 참 이상하다. 살인마가 죽은 뒤에 마리아는 당연히 알렉스를 구해주는데, 풀려난 알렉스는 정신이 이상해진걸까? 마리아를 죽이려든다. 결국 마리아는 알렉스의 손에 죽게되고. 이 어쩌 황당한 결말?

 영화를 다 본 뒤에도 어찌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다. 별로 흥행한거 같지도 않은 영화이기에 누군가가 남겨놓은 영화의 비밀풀이 같은 것도 없다. 하지만 대략 짐작으로 애초부터 살인마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의 모든 살인은 마리아의 단독소행으로 추정된다. 정신착란? 정신발작? 을 이르킨 마리아가 친구네 가족들을 참혹하게 죽여버리고 사랑하는 알렉스를 어디론가 끌고갔던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을 수는 없어" 라고 이야기하는 마리아. 어긋난 사랑의 전형적인 예를 보여주는 것인가? 겁에 질린 알렉스는 마지못해 "사랑해.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라고 외친다.

 프랑스 영화가 미국식 공포영화를 따라가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갑자기 떠오른 의문. 그런데 프랑스식 공포영화는 어떤걸까? 생각해보니 본 적이 없는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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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달 2005-07-06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미, 너무 잔인하거 아녜요 , +_+ ㄲ ㅑ
저는 저런 영화 보고 있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던데..

마늘빵 2005-07-06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잔인해요. 저 웬만한 잔인한 영화 다 그냥 보는데 이건 자꾸 눈쌀 찌푸리게 되더군요. 님두 알라딘 하루 종일 하시네요? ㅋㅋ 공부 하세욧!!
 

 언제부터인가, 아마도 추정컨대 수능시험에서의 집단 컨닝사태와 이후 계속 되는 내신시험에서의 컨닝 사건이 입에 오르내리면서 - 사실 어제 오늘 일도 아니지만 -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라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 와중에 내신시험에서의 컨닝대책으로 내세운 것이 아마도 '학부모 감독제'였나보다. 이게 언제부터 학교 현실에 적용되었는지는 난 모른다. 이번 시험이 첫 감독이니깐.

 시험감독 이틀째. 시험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답안지와 시험지를 나눠주고, 학부모 한분이 뒷문으로 들어오신다. 맨 뒤 정중앙에 서계시고, 난 맨 앞 정중앙에 서있고. 앞뒤로 감시를 당하는 아이들은 절대 컨닝할 엄두를 못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컨닝을 하는 이들은 꼭 있다. 교무실에 웬 학생 하나가 불려왔는데 된통 혼나는걸로 봐서 아마도 컨닝인가보다. 

 앞뒤로 감독을 세우니 학생들이 컨닝할 생각을 덜 하는건 사실인거 같다. 사실 할래야 할 수도 없다. 앞뒤로 보는데 어떻게 해. 학생들의 학부모를 모셔놓고 일일 감독을 시키는 것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아 보인다. 나의 아이들과 친구인 이들이 시험보는 장면을 눈으로 보기도 하시고, 어떻게 시험을 치르는지도 보면서 평소 공부해라 공부해라 만 외치시던 부모님이 정작 시험을 보는 학생의 입장에서 느껴보기도 하는 기회인 것도 같고. 아이들도 우리 엄마와 같은 분이 뒤에 계시니 마음이 뜨끔하기도 할테고 말야.

 그런데 학부모 감독제의 문제점도 있다. 물론 보완가능한 부분이다. 사실 시험장에서 첫 대면하는 학부모와 교사는 간단히 꾸벅 하고 머리 인사정도만 나누는데, 부동의 위치를 고수해야하는 교사 입장에서는 잘 모르고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 학부모에게 뭔가를 지시하기가 참 뭣하다.

  가령, 선풍기 바람에 한 아이의 답안지가 멀찌감치 날아갔다. 그런데 그 아이의 위치는 중간지점이다. 원칙대로라면 학부모가 와서 답안지를 주워서 아이에게 전달해야하는데, 학부모는 이를 보지 못했고, 못봤는데 내가 학부모를 시켜서 그걸 줍게 하기는 참 뭣하다. 그래서 결국 내가 움직여서 답안지를 얼른 주워 해당 학생의 책상에 놓았다. 결국 교사는 움직이지 말라고 했지만 이런 경우처럼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몇 차례 발생한다. 나는 보고 학부모는 보지 못한 상황. 컨닝으로 의심되는 학생의 옆에 다가감으로써 위기감을 조성해 컨닝을 사전에 방지하도록 해야하는데 그때에도 발견자가 다가가야지 내가 신호를 보낸다고 해서  학부모가 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식으로 학부모 감독의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사실 이는 충분히 보완 가능한 부분이다.  '교사는 부동, 학부모는 유동' 이라는 공식을 깨고, 발견자가 움직이고, 가까이에 있는 자가 움직이되, 둘 중 한 명은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전체를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단, 이때 학부모와 교사 둘 다 시험감독의 임무에 충실해야한다는 점이 전제된다. 기본적인 조건이지만... 학부모 감독의 경우 그냥 시험이 끝날 때까지 서있는 정도의 역할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두 사람의 감독체제가 아닌 한 사람은 감독, 한 사람은 존재 자체로서 학생들에게 긴장감을 조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 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부모 감독에게도 충분히 사전에 시험감독의 요령에 대해 숙지시키고 - 그 분들도 과거에 중, 고등학교 거치면서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세월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절차와 주의점을 알려드리면 금방 적응하실 것이다 - 현장에 투입시키는 것이다. 그럼 지금 내가 경험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을까 한다.

 

 

* 사족

시험에 있어서 학생들을 감독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지만, 난 내가 누군가를 감시하고 누군가에게 긴장을 조성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유쾌하지 않다. 두 눈 부릅뜨고 누가 딴짓거리 하나 누가 컨닝하나 주의깊게 시험에 열중하는 학생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명령한다는 것. 사실 별로 내키지 않는다. 감시받고 통제받는 상황에 대한 거부감 내지는 반감이 있다고나 할까. 시험 감독을 매일 들어가면서도 난 이점이 내내 걸린다. 물론 학생들은 자신들이 감시받고 억압받고 통제받는다는 상황을 실감하지 못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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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5-07-06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보여줄라고 가져왔어요 과목도 똑같구 ^^

마늘빵 2005-07-06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이런 문제 내도 뭐라 안하나...? ^^ 정답이 머에요. 다 이쁜 연옌들만 올려놨네? 설마 모두 정답?

코마개 2005-07-06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보니...갑자기 추억이..
대학에서도 부정행위 많이 하잖아요. 대학원 다닐때 시험 감독 들어가는데 부정행위 하는 학생을 그냥 내버려 두면 학생들이 다시 학교당국에 항의 하거든요. 그래서 잡아내야만 하죠. 그 얘기를 우리 교수님과 하면서...
"아니 왜 컨닝을 하는거지? 그냥 F받고 담에 다시 들으면 되지, 목숨을 거냐"그랬죠.
그랬더니 울 교수님 하시는 말씀..."너만 그래" OTL

마늘빵 2005-07-06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너만 그래" 재밌었어요~ ㅋㅋ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구판절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다" (몽테뉴)-1쪽

"타인과 대화할 때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일이다."-16쪽

"낯선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나는 돈 많은 손님을 맞는 호텔 수위처럼 노예 같은 ㅌ ㅐ도를 취하는데, 이는 호의를 얻으려는 무분별한 욕망에서 비롯된 행동이다."-16쪽

"정확한 진술이란 이성적으로 결코 모순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진술은 그릇됨이 증명될 수 없어야 진실이 될 수 있다. 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믿고, 그들이 제 아무리 저명한 인물이라 해도 그릇된 점이 증명되는 진술이라면 그것은 거짓임에 틀림없고, 그러면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40쪽

"하나의 관념이나 행동이 유효하냐 아니냐는 그것이 폭넓게 믿어지느냐 아니면 매도당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논리의 법칙을 지키느냐의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다."-70쪽

"한 인간이 일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혜가 제공하는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이다."(에피쿠로스)-93쪽

"무엇인가를 먹거나 마시기 전에, 무엇을 먹고 마실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구와 먹고 마실 것인가를 조심스레 고려해보라. 왜냐하면 친구없이 식사를 하는 것은 사자나 늑대의 삶이기 때문이다."(에피쿠로스)-93쪽

"우리 인간은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켜봐줄 누군가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내뱉는 말은 다른 누군가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94쪽

"현명한 사람은 가장 많은 양의 음식이 아니라 가장 맛있는 음식을 선택한다."(에피쿠로스)-96쪽

"불안을 다스리는 데는 사색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 문제를 글로 적거나 그것을 대화 속에 늘어놓으면서 우리는 그 문제가 지닌 근본적인 양상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제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문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부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인 것들, 말하자면 혼동, 문제의 악화, 준비없이 당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고통 등을 예방할 수 있다." -96쪽

"삶이 이어지지 않을 죽음 후에는 전혀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에게는 삶 또한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에피쿠로스)-98쪽

"결핍에서 오는 고통만 제거된다면 검소하기 짝이 없는 음식도 호화로운 식탁 못지 않은 쾌락을 제공한다."(에피쿠로스)-101쪽

"삶의 본연의 목적이라는 잣대로 측량하면, 빈곤은 커다란 부고 무한한 부는 커다란 빈곤이다."(에피쿠로스)-113쪽

"동물은 자신의 목을 매고 있는 밧줄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지만 그것은 오히려 밧줄을 더 단단히 조이는 결과가 된다. ...... 순응하지 않고 마구 몸부림친다고 해서 묶여 있는 동물의 고통이 덜해지도록 적당히 느슨하게 만든 멍에는 이 세상에는 절대로 없다. 저항할 수 없는 악에 맞서 고통을 경감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굴복하며 참는 것이다."(세네카)-118쪽

"가벼운 슬픔은 말이 많고 큰 슬픔은 말이 없다"(세네카)-120쪽

"가능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미래에 대한 낙관에는 위험스런 순진함이 들어있다.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사고는 어떤 것이든, 그게 제아무리 드물고 시간적으로 멀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것에 대비해 우리 자신을 준비해야 하는, 일어남직한 일들이다."-144쪽

"불공평은 정의의 규율들이 침해당했다는 느낌을 말하는데, 그 규율들이 약속하는 것은, 만약 명예로운 행위를 하면 보상을 받을 것이고 나쁜 짓을 하면 마땅히 그에 따르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원칙이다."(세네카)-148쪽

"근심이란 불확실한 상황에 처해 심리적 동요를 느끼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런 경우 당사자의 마음에는 어떤 일이 최선의 결과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과 최악의 결과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교차하게 된다."(세네카)-151쪽

"위안은 근심을 치유하는 대책 중에서 가장 잔인한 형태다. 장밋빛 예언들은 근심에 빠진 사람으로 하여금 최악의 결과를 무방비 상태로 맞게 할 뿐 아니라, 고의는 아닐지라도 그런 위안의 말에는 최악의 결과가 닥칠 경우 매우 비참할 수도 있다는 암시까지 담겨 있다."-152쪽

"철학자들은 돈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 누구도 지혜로운 자는 가난해야 한다고 운명짓지 않았다."(세네카)-155쪽

"바깥의 모든 것들이 미친 짓거리여도 좋으리. 집안에 불안의 요소만 없다면."(세네카)-167쪽

"저항할 수 없는 악에 맞서 고통을 경감시키는 한 가지 방법은 숙명에 굴복하며 참는 것이다."(세네카)-172쪽

"인간에게 어떤 사건들을 바꿀 만큼 힘이 없을지는 몰라도 그 사건들에 대한 태도를 선택할 자유는 주어진다"-178쪽

"은퇴 이후로 독서가 나를 위로한다. 독서는 괴롭기 짝이 없는 게으름의 짓누름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준다. 그리고 언제라도 지루한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켜준다. 고통이 엄습할 때도 그 정도가 매우 심하거나 극단적이지만 않다면 그 날카로운 예봉을 무디게 만든다. 침울한 생각으로부터 해방되려면 그냥 책에 기대기만 하면 된다."(몽테뉴)-186쪽

"우리가 어리석은 짓을 했다거나 어리석은 말을 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보다 넉넉하고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우리 인간이 한갓 멍청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몽테뉴)-193쪽

"책을 통해서 내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을 올바르게 활용하여 나 자신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책을 읽다가 어려운 문장을 만나기라도 하면 그 부분을 곰곰 생각하느라 손톱을 물어뜯는 일은 절대로 없다. 한두번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다 안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만약 어떤 책이 나를 피곤하게 만들면 나는 다른 책을 집어든다"(몽테뉴)-247쪽

"난해함이란, 말하자면 학식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학문의 공허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마법을 걸어 불러내는, 그리고 인간이 어리석음에 대한 보상으로 손에 쥐기를 갈구하는 한 닢의 동전과 같다"(몽테뉴)-249쪽

"나는 간혹 나 스스로 잘 정리할 수 없는 것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빌려 말하는데, 그 이유는 언어 구사력이 허약하기도 하고 가끔은 나의 지력이 허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종류의 글을, 특히 지금도 살아있는 사람에 의해 씌어진 최근의 글을 공격하는 성급한 비평의 무모함을 저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위대한 명성 아래로 나의 허약함을 숨겨야 한다."(몽테뉴)-258쪽

"이 세상에 태어난 데 따른 벌을 치르지 않아도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세네카)-259쪽

"몽테뉴는 학자들이 고전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쏟는 이유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름과의 연결을 통해 자신을 지적인 존재로 비치고 싶은 허영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262쪽

"다른 어떤 주제보다도 책들에 대해 쓴 책이 많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책들을 서로 설명하는 것이 전부다. 모든 책들은 부족한 면을 가진 저자들에 대한 해설로 가득 채워져 있다."(몽테뉴)-264쪽

"있지도 않은 모습을 받아들이려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냥 두는 것이 더 낫다"(샹포르)-275쪽

"결혼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혐오스런 존재가 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다 하는 것을 의미한다."(쇼펜하우어)-278쪽

"남녀가 서로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은 그 두 사람이 결합할 경우 신체구조가 매우 나빠 그 자체로 조화가 일그러진 불행한 존재를 낳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선언하는 것이다."(쇼펜하우어)-309쪽

"사랑이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 때, 사랑의 본래 계획에는 행복이란 절대로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겠는가"-312쪽

"가장 분별 있는 인간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으려고 애쓴다"(아리스토텔레스)-328쪽

"쾌락과 불쾌감은 서로 단단하게 묶여 있기 때문에 한 가지를 가능한 한 많이 누리려는 사람은 불가피하게 다른 한 가지도 그만큼 경험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 한다. 불쾌감을 가급적 적게 맛보면서 고통 없는 시절을 짧게 누리든지 아니면 이제까지 좀처럼 맛보기 힘들었던, 형언하기 어려운 쾌락과 환희를 누리고 그 대가로 불쾌감을 한껏 맛보든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만약 전자의 길을 결정하고 인간적인 고통의 정도를 줄이거나 낮추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또한 그 고통이 줄 수 있는 환희에 대한 기대치도 줄이고 낮춰야 한다."(니체)-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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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5-08-14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것두 한 방~

마늘빵 2005-08-14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