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17일이 되면 어김없이 월급은 꼬박꼬박 통장에 들어와있다.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받는 느낌보다야 덜하지만 그렇더라도 어제까지 백원단위로 남아있던 통장잔액이 백만원 단위로 찍혀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돈이 들어오긴 들어왔나보다 싶다. 내가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일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받고 있는가 하는건 몸으로 부닥치지 않으니 실감이 덜 할뿐. 자릿수가 늘어난 숫자를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내 노동의 댓가가 맞기는 맞나보다 한다.

  월급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아침 9시 인터넷에 일제히 네 개 은행의 인터넷뱅킹 화면을 띄워놓고 하얀 종이와 펜을 앞에 놓고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기 시작한다. 아 이번 달에 내 핸드폰 요금과 어머니 핸드폰 요금을 더하면 이만큼이 나오겠거니 이건 이달 며칠에 빠져나가더라, 어느 통장에서 나가지(얼마전 내 요금과 어머니 요금을 둘다 이메일 고지서 받기를 신청했는데, 그제 조회한 그것이 내 요금만인지 어머니것과의 합산 요금인지를 알 수가 없어 SK e-스테이션에 가서 확인했다. 아 합한 요금이 맞구나, 하고 확인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뱉어낸다. 합한 것 치고는 그리고 내 단말기 할부금까지 포함된 것 치고는 꽤 적게 나왔기에), 2학기 대학원 학자금 대출한건 지난달에 못낸거 같은데, 아 이것도 개인신용도에 타격이 있다고 들었는데(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요새는 핸드폰 요금 연체되는 것, 신용카드 대금 연체되는 것까지도 신용도에 반영이 된다고 하니 정말 무서운 세상이다. 난 수시로 핸폰요금 연체되고, 신용카드 대금도 몇번 연체했는데 이제부터라도 신경써야겠다), 이것저것 다 계산해서 다이어리에 결제일과 요금금액, 해당통장이름을 적어놓는다. 그리고 나머지는 몽땅 한 통장에 넣는다. 왜냐면 잠깐이라도 그렇게해야 이자가 붙으니까. 이 이자라는 것도 별거 아닌게 아무리 이율이 높다고 하더라도 현금인출 한번 하고나면 몇백원이 수수료로 쑥 빠져버리니 이자노리는 것보다 수수료를 안내는 쪽을 택하는게 훨씬 이득이다. 이득이야? 아니면 손해가 아닌거야?

  우얏건 30분가량에 걸쳐 집중한 결과 계산은 완료. 얼마 안되는 월급에 세금은 40만원 이상이 빠져나갔다. 이런 된장. 나머지 월급은 고스란히 통장에 모셔놔야지. 씀씀이도 좀 줄여야쓰것다. 음반이며, 책이며 좀 자제하고, 데이트 자금도 줄이고, 최대한 집구석에 처박혀서 놀고, 요새 자꾸 눈독들이고 있는 멋진 가방이며 목걸이며 기타 악세사리에 대한 관심도도 낮춰야할듯. 그런데 그게 막상 쉽게 될지는 나도 장담할 수 없다. 벌써 지르고파서 간질간질한 것이 사실이니까. 며칠전부터 보관함에 넣어둔 음반이며 책은 어찌할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봐놨던 이쁜 가방은 어찌할꼬. 이럴때보면 난 꼭 여자같다. -_-

  이제부터 말로만이라도 긴축정책. 정말 '말로만'이 되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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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0-1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벼르고 있다가, 저는 알라딘에 들어오면 허물어지고 만다는..

BRINY 2006-10-17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거에 여자, 남자 구분이 있나요 뭐~

Mephistopheles 2006-10-17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10월달에 3년을 끌고 있던 대출을 전부 상환하고 나니...
아주 속이 다 후련해지더라구요..^^

춤추는인생. 2006-10-1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긴축정책을 하게되면. 기분이 실업자 신세가 되는거 같아요..
그리고 돈은 정말 세어봐야 내손으로 꼭쥐어야. 들어온걸 제대로 실감하는건데요..
그치요?^^

비로그인 2006-10-17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걸이 어쩌구 해서 저도 잠깐 헷갈렸다가 '이럴때보면 난 꼭 여자 같다' 에서 확인이 되었어요.
그래도 월급 받았으면 기분한번 내보는것도 좋지 않아요? 한달에 한 번뿐인데.

마늘빵 2006-10-17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드님 / ^^ 아 저 허물어졌습니다. 방금. -_-v 알라딘과 예스 둘다 질렀는데 알라딘은 이거저거 다 해서 1400원 들었고, 예스서도 절반가격에 질렀어요. 다행.
브라이니님 / ^^
메피스토님 / 아 저도 대학원 대출 3년인데. 쩝. -_- 매일 신경쓰게 생겼습니다. 다음 마지막 학기는 어떻게든 대출은 막아봐야지.
춤추는 인생님 / 뭐 그 정도까지 하려는건 아니에요. 평소 제가 한달 벌면 한달 다 쓰고 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소득에 비해 지출이 너무나 큰거 같아서, 정신을 차려보겠다는 거여요. ^^
승연님 / ^^ 목걸이. 얼마전에 질러서 목걸이는 당분간 최근 구매한 세 개 가지고 돌아가며 차고, 지금은 가방이 자꾸 눈에 들어와서 고민중이에요. 흠. 기분낼라고 책이랑 음반 질렀어요. -_-v

내이름은김삼순 2006-10-17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급 들어오는 날~부러운걸요,
저는 언제쯤 통장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을지^^
그래도 어머님 핸드폰 요금도 내주시고 대출받은것도 갚으시고 대단하셔요,
알뜰살뜰 부자되세요~~~~^^

paviana 2006-10-17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재미도 없으면 이 지겨운 월급장이 생활 어떻게 하겠어요.전 계산도 귀찮아서 모두 한 계좌에서 나가게 다 바꿨어요. 수시로 들어가서 줄어드는 잔고 보면서 이체하는 것도 맘 아프더라구요.

미미달 2006-10-17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르시오. 돈이야 뭐 벌면 되는 것 아닙니까. ㅋㅋㅋㅋㅋ

마늘빵 2006-10-17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삼순님 / -_- 어머니는 매달 꼬박꼬박 10만원씩 내놓으라고 하세요. 아직 안드렸지만. 나 돈 없다, 대출금 갚기도 벅차다, 다음 학기 등록금 만들기도 힘들다, 맨날 말씀드리지만 -_- 내놓으라고 하십니다.
파비아나님 / 아 저도 한 계좌에서 하고픈데 대학원등록금은 은행이 제것이 아니라 안쓰던 통장 쓰고 있고, 거래은행은 핸폰이랑 머 주 용도로 쓰고 있죠.
미달 / -_- 돈을 벌데가 없으니깐 그르지.

마늘빵 2006-10-17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침반님 자세히 아시네요? ^^ 저 그거 한지 얼마 안됐어요. 근데 매달 버는 돈 매달 사라지고 있어서 소용도 없어요. -_- 조금이라도 모아야 100원이라도 붙을텐데. 저도 대학원 등록금 때문에 아주 허리 휩니다. 현직교사는 감면해주는데 저는 꼬박꼬박 다 내고 있으니. 원래는 철학 일반 대학원 다니고팠는데 쩝. 나중에 기회되면 다닐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빛바랜 오래된 옛 사진 한 장 살며시 바람에 날리는 기분이랄까. 소설을 읽고 난 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살며시 눈을 감고 있는 나는, 그동안 꼬깃꼬깃 구겨넣은 마음의 응어리를 배출해낸 기분이었다. 후련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아직 미쳐 닦아내지 못한 눈물이 한두 방울 눈가에 맺혀있기도 하고, 똑 떨어지진 않았지만, 그리고 똑 떨어지지도 않겠지만, 딱 그만큼 슬픈 이야기. 읽는 내내 중간중간 울컥울컥 하며 와락 눈물을 쏟고픈 것을, 지나가는 길거리에서, 지하철안에서 그럴 수는 없지 않겠느냐. 꾹꾹 참아가며 눈물을 감추려 했지만 그러나, 이내 뚝 한 방울 바닥에 닿는다.

  개인적으로는 공지영이란 작가를 처음 대면한 계기이기도 했고 - 어떻게 그렇게 유명한 작가를 이제서야 대면할 수 있단 말이냐 다그치면 할 말 없다. 내가 그동안 책을 게을리 읽었다 할 수 밖에 - 그녀의 나머지 작품들에도 관심을 쏟고픈 마음이 든 책이기도 했다. 실제 그녀를 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작품에서 묻어나오는 손 대면 툭 터질 듯한 그런 슬픈 감성의 소유자는 아니라고 하지만, 되려 활발, 명랑, 유쾌, 발랄에 더 가까운 아주 천진난만한 소녀같은 수다쟁이 아줌마라고 하지만, 또 글을 쓰는 목적이 돈을 벌기 위함이라고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대놓고 이야기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더라도 소설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이미지는 너무나... 촉촉하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 사형제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상처받은 이들이 서로를 치유하는 이야기. 소설은 보기에 따라 여러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테마는 '사랑'이다. 어린 시절 난생 처음 유부남인 사촌오빠에게 그 짓을 당하고도 어머니와 오빠들에게 '침묵'이라는 또 한번의 상처를 받은 유정, 그리고 정말 이런 환경에서라면 이런 조건에서라면 이런 삶을 살 수 밖에 없었겠다 싶은, 오히려 그런 환경에서조차 이 악물고 열심히 살다 억울하게(?) 누명 쓴 사형수 윤수. 두 사람의 슬픈 사랑 이야기다. 모르고 있었다. 우리의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우리의 사랑이 눈물로 끝나리란걸. 한 사람에겐 생을 마감하는 시간이, 한 사람에겐 홀로 생을 살아야하는 시간이, 그러나 두 사람에겐 공통적으로 이젠 더 이상 서로를 볼 수 없는 시간이 다가오리란 걸 알면서 두 사람은 짧은 만남이었지만, 또 남들이 데이트라 부를 수 있는 그런 데이트 다운 데이트 조차 한번도 해보지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 애틋하게 서로를 생각하며 미소지었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랴.

 사형수에 대한 지나친 미화다, 라는 항간의 소설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 우리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도 후회와 참회와 사랑과 용서의 시간이 있었음을, 필요함을, 일깨워준 이야기라고 할까. 나의 아픔은 타인에게 고백하는 시간을 통해 비로소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건만 유정이도 윤수도 스스로를 옭아맨 마음의 감옥 안에 갇혀 살아왔다. 상처를 받은 자는 상처를 받은 자를 통해 내 상처를, 그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 애초 치유가 목적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 나눌 상대가 필요했음을 알지만 그것은 마음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는 길로 나아가는 여정이었다.

  친한 친구 하나 없이 감옥에서 대면한 사형수에게 나의 어린 시절의 아픔을 고백하고, 어릴적부터 사회로부터 소외되어왔던 비운의 사형수는 나와 잘 맞지 않을 것만 같은 잘 차려입고 대학에서 강의하는 부잣집 딸내미를 만나 그날의 일을 털어놓는다. 고백하는 자와 고백받는 자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누구를 위한 눈물이던가. 나의 아픔을 고백하며 그날을 떠올리며 떨구는 그간의 서러움의 눈물이던가, 죽어마땅하다고 생각한, 돈 많은 부잣집 딸내미라고만 생각한, 상대방에게도 생각지못했던 그런 아픔이 있었구나 하는 상대에 대한 동정의 눈물이던가. 나를 위한 눈물이건, 상대를 향한 눈물이건, 그것을 따져 무엇하랴.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흔하디 흔한 위로의 말을 그들에게 던지기엔 너무나 우습다. 유정과 윤수는 그간 어려움에 의지해왔고, 자신이 처한 어려움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어려움을 감수하는 것과 어려움에 의지하는 것은 어쩌면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언제나 어려움에 의지해야 한다"는 릴케의 싯구절은 삶은 곧 고난이고,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고난을 당하고 이겨내는 것의 연속이라는, 오히려 고난에 의지하는 것이 삶이라는 의미로 해석해볼 수 있겠지만, 두 사람에겐 너무나 버겁고 힘겨운 고난의 세월들이 있었다.

  끝내 고난은 두 사람에게 떠나지 않고, 마지막, 사랑하는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더할 수 없는 크나큰 형벌을 통해 사랑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간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같은 고통을 주시나이까. 어렵게 어렵게 인고의 세월을 보냈고 이제서야 비로소 마음의 응어리를 훌쩍 꺼내보았건만 삶은 그리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는구나. 사랑한단 말 한 마디 못해보고, 사랑하는 사람 한번 안아보지도 못하고, 이별은 갑작스레 닥쳤다. 펌푸질 하듯 울컥거리며 끝없이 눈물은 쏟아지나 한편에선 소설 따위 읽으며 펑펑 눈물 쏟는 내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아서 참아본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떨군 것을. 눈물 쏙 빼고 나면 그동안 뭐 그리 많이도 쌓였던지 커다란 감정의 돌덩이를 내뱉은 기분이다. 후련하다. 내 마음은 후련하나 내 가슴은 슬프다.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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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10-15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보신 분들의 공통적인 의견은...눈물이군요...
갈등이군요 봐야하나 말아야하나..^^

프레이야 2006-10-15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를 먼저 보아서인지 책을 읽으면서는 눈물이 나지 않더군요. 그보다 삶을 먼저 살다간 사람들의 경구들이 강한 인상을 주었어요. 리뷰도 좋지만 님의 따스한 감성이 더 좋습니다.^^

마늘빵 2006-10-15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 눈물은 필수입니다... 좋잖아요.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게.
배혜경님 / 저도 영화를 먼저 봤어요. 전 책을 읽으면서 영화의 장면들이 자꾸 떠올라서 울컥울컥 하던데... 일부러 원작인 책을 더 나중에 봤어요. ^^

비로그인 2006-10-1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도,책도 멋져요.. 정말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이야기에요..ㅠㅜ

마늘빵 2006-10-15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슈님 / ^^ 네. 한번 왈칵 쏟아내고 나면 시원해지실 겁니다.

kleinsusun 2006-10-18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상하게.....눈물이 나지 않았어요. 원래 잘 우는 편인데 말이죠.
대신....책을 읽으면서 "폭력"에 대해 생각했어요.
폭력이 폭력을 낳는 상황에 대해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준 소설이었어요.

sweetmagic 2006-10-23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못 울었어요... 진짜 잘 우는데...
책으로도 읽어 보고 싶네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6년 9월
절판


장난스럽게 듣고 있던 선우가 자세를 바로하고 혜완을 마주했다.
"그건 그렇지만 너도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게 있는데...... 너한테는 약간 말이야..... 남자한테 오해를 하게 할 만한 부분이 있어. 나야 오해 안하지만 다른 사람들 말이야."
담배를 입에 가져가려던 혜완이 문득 동작을 멈추었다.
"그게 뭔데?"
반응이 생각보다 격렬했기 때문인지 선우가 입을 우물거렸다.
"말해봐. 그게 뭔데?"
"뭐라고 딱 꼬집을 수는 없지만 첫째로 말이야 넌 너무 잘 웃고...... 그리고 너무 정이 많아. 남자들은 그러면 가끔 오해해. 더구나 넌 지금 혼자고......"
혜완이 입술을 물었다. 선우가 실수를 깨달은 듯 서둘러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84쪽

"어쩌면 결혼 생활이 그렇게 이어져왔는지도 몰라. ...... 얼마 전에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나는 알 수 있었어. 로댕이 왜 전부인을 버리지 않았는지. 예술을 할 때 그는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동료가 필요했지만 일상에서 그는 하녀가 필요했던 거야. ...... 예술에 대한 토론은 날로 새로워지니까 파트너가 늘 일정할 필요는 없지만 반복되는 일상에선 누군가 익숙한 사람이 좋았을 거야. 가령 미역국을 끊일 때 그가 조개를 넣고 소금간을 하는 미역국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쇠고기를 넣고 참기름에 달달 볶아 간장간을 하는 미역국을 좋아하는지 말야...... 애 아빠는 쇠고기 쪽을 좋아했거든. 나는 그가 좋아하는 그런 식의 입맛을 한 백 가지는 넘게 알고 있었지. 어쩌면 그게 우리 결혼 생활을 유지시켰을 거야." -115쪽

걷다가 돌아보니 밤이었다. 언제나 밤은 그렇게 왔다. 켜켜이 조금씩 내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커다란 솜이불을 후루룩 펼치고 그것이 내려앉듯 짧은 시간에 어둠이 거리를 덮는 것이다. 거의 푸른색에 가까운 어둠 속에서 거리에 밝혀진 불빛들이 영롱했다. -144쪽

생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불어닥치지 않았던가. 언제나 제멋대로 그녀가 어떤 준비도 하기 전에 생은 그녀의 머리칼을 잡아 다른 골목길로 내팽개치지 않았던가...... 그러나 갑작스레, 더 돌아보지 말고 해치워버리자. 돌연히 다가온 이 이별의 기회를 다시는 놓치지 말고..... 놓치고 나서 이 가을밤을 또다시 잠 못 이루지 말고..... 그녀는 걸음을 천천히 내딛었다.
그러나 생이 그녀를 예까지 데려와 팽개쳐버린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렇다고 해도...... 모든 것이 그녀의 손을 거쳐서 지나갔다. 선택은 어쨌든 그녀가 했던 것이다. -154쪽

- 같이 방송국 시험 안볼래?
혜완은 고개를 저었다.
- 왜?
- 웃을 수가 없어서 ......
- 그게 무슨 소린데.
- 아나운서들은 맨날 웃고 있잖아. 난 내가 싫은 일 있으면 하루 종일 화를 내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거든.
- 난 뭐 웃기 싫을 때도 잘 웃을 수 있다는 말같이 들리는구나. 하지만 그것도 소질이지.
농담이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싫은 사람이 인터뷰 상대자로 나온다면 혜완은 그것이 아무리 카메라 앞일지라도 싫은 표정을 지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경혜는 할 수 있었다. 나쁜 느낌이 전혀 없이 그것은 소질이었고 어쩌면 어른스러움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웃고 싶지 않을 때도 웃어야 된다는 걸 자연스레 깨닫는 일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210-211쪽

"나도 그저 봉건적인 여자 만나서 살림이나 하게 하면서 살고 싶은 마음도 있어. 그 여선생을 집안에까지 인사시켰던 것은 니가 이혼녀라서가 아니라, 그래서 집안하고 싸워야 될 일이 번거롭고 두려웠기 때문이 분명히 아니라...... 니가 니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국 얼치기 결혼 생활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던 거야. 내가 사랑했던 씩씩하고 꿋꿋했던 서혜완이는 어느날 갑자기 주눅이 든 채로 내게 기대기 시작했어. 그리고는 핑계를 댔지. 사회가, 남자들이, 혹은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든다고 말이야. 아니, 우리 어머니들은 그보다 강했어. 여자로 태어난 이상 넌 그것과 당당히 맞섰어야 했어...... 혼자서라도 우선 혼자서라도...... 다시 말하지만 내가 너에게 정말로 원하는 것은 그거야." (선우가 혜완에게)-272쪽

"나 실은 그 여선생한테 결혼 못하겠다고 했어. 너를 만나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데..."
선우는 말을 하면서 혜완의 시선을 피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 눈을 깜박이던 혜완의 시선이 천천히 낙엽이 뒹구는 보도로 떨어졌다.
이미 가을도 깊었고 저 멀리서 겨울을 몰고 오는 바람만 두 사람 사이를 황량하게 스쳐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여선생이랑 누나네 지벵서 만나기로 했지. 내가 가니까 여선생이 먼저 수제비를 만들고 있었어. 잘못 간을 맞추는 바람에 간이 조금 짰지...... 내 성격 알지...... 좀 짜군요. 내가 말했어. 그러자 그녀가 몹시 당황한 얼굴을 했어. 누나가 말했지. 요즘 요리 학원에도 다니고 있어 곧 좋아질 거야...... 그런데 빌어먹게도 하필이면 그때 니 생각이 난 거야...... 너 같으면 이렇게 말하겠지. 난 글 쓰는 것도 바빠. 간이 짜면 물을 좀더 부어 먹어. 싱거우면 간장을 치고...... 넌 나보다 요리 더 못하잖아? 만들어준 것만도 고맙다고 해야 옳을 것이지...... 왜 고맙다는 소리는 쏙 빼고 불평부터 하니? 넌 어머니나 누나가 요리를 해줘도 고맙다는 생각 안하는 것 같더라. 안 그래? 그건 분명히 고마운 거야. 이렇게 말이야. 말도 안되는 고집을 세워가면서......" -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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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구판절판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왜냐하면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5쪽

할렘은 이를테면 뉴욕시와 그리고 도심지에서 돈을 벌며 사는 부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고발이다. 할렘의 유곽과 윤락녀들과 마약중독자들과 기타 모든 것들은 파크 애비뉴의 의젓하고 세련된 가식 속에서 무수히 행해지는 이혼과 음행의 거울이요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하느님의 평가이다.
(토마스 머튼)-6쪽

느끼지 못하는 것보다 사악한 것은 한 가지 뿐이지.
그건 당신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거야.
(찰스 프레드 앨퍼드 <인간은 왜 악에 굴복하는가>)-17쪽

사람을 괴물처럼 대하면 그 사람은 괴물이 된다.
(범죄심리학)-35쪽

왕이시여! 이 때문에 울지 마소서
저들이나 또 다른 이들 가운데 그토록 짧은 삶에서
삶보다 죽음을 한 번 이상 원치 않은 이가 없나이다.
(헤로도투스 <역사>)-59쪽

슬픔 속에서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
눈물에 젖은 채 내일을 갈망하며 밤을 지새우지 못한 사람
그들은 모른다 성스러운 힘을
(괴테)-70쪽

네가 어떤 사람인지 내게 말해보아라.
네가 어떤 하느님을 믿고 있는지 내가 말해주리라.
(니체) -90쪽

조용히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 없이 기다려라.
왜냐하면 희망은 그릇된 것에 대한 희망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 없이 기다려라.
왜냐하면 사랑도 그릇된 사랑에 대한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T.S.엘리어트 <네 개의 사중주>)-105쪽

누구에게나 슬픔은 있다. 이것은 자신이 남에게 줄 수 없는 재산이다.
모든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있지만 자신만은 남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소유한 비극은 있다.
그 비극은 영원히 자신이 소유해야 할 상흔이다.
눈물의 강, 슬픔의 강, 통곡의 강,
슬픔은 재산과는 달리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 분배되어 있다.
(박삼중 스님)-126쪽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대지에 입을 맞추세요.
그리고 온 세상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치세요.
"나는 살인자입니다."하고.
(한때 사형수였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중, 소냐의 말)-140쪽

저는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다만 기적에 의지해 살아갈 뿐입니다.
(칼 라너)-154쪽

주위의 모든 사람이 진흙 같은 빵 한 조각 때문에 투쟁할 때
고상한 즐거움을 누리는 게 옳다고 할 수 있을까?
(크로포트킨)-175쪽

사형제도는 그 벌을 당하는 자들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제도이다. 정신적으로 수개월 내지 수년동안 육체적으로
생명이 다하지 않은 제 몸뚱이가 둘로 잘리는 절망적이고도
잔인한 시간 동안 그 형벌을 당하는 사형수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른 품위라고는 아무 것도 없으니, 오직 진실이라는 품위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이 형벌을 제 이름으로 불러서 그것이 본질적으로
어떤지 인정하자. 사형의 본질은 복수라는 것을.
(알베르 카뮈 <단두대에 대한 성찰>)-214쪽

우리는 곰팡내 나는 지하실과 비좁은 감옥에 앉아서
금가고 파괴적인 운명의 기습을 받아 신음한다. 우리는 결국 사물에
그릇된 광채와 잘못된 존엄성을 더 이상 부여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구제받지 못한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해야 한다.
(나치의 감옥에서 죽은, 알프레드 델프) -237쪽

너무 늦게 당신을 사랑했나이다.
이토록 오래되어도 늘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이다지도 늦게야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나이다.
(성 아우구스틴)
-254쪽

신비롭게도 사람이 삶을 배우는 데 일생이 걸린다.
더더욱 신비롭게도 사람이 죽음을 배우는데 또 일생이 걸린다.
(세네카)-269쪽

그가 못된 행실을 한 자라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겠느냐?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라도 그 가던 길에서 발길을 돌려 살게 되는 것이
어찌 내 기쁨이 되지 않겠느냐?
(구약, <에제키엘서>)-287쪽

나는 항상 이것만은 말하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틀림없다고 확신하는 것은
우리들은 언제나 어려움에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어려운 쪽이 바로 우리들의 몫이지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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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10-09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69쪽 세네카의 말이 가슴에 박힙니다. 그리고 카뮈의 단두대에 대한 성찰도... 오늘 이 책을 선물 받았어요. 영화보다 더 좋을 듯 싶네요.

마늘빵 2006-10-09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영화도 봤는데 영화보다 책이 낫습니다. 영화를 먼저 봐서 책을 보며 울컥 울컥 한 부분이 많았어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구판절판


"왜 이제야 나한테 왔어? 귀국하고 내가 몇 번 수녀원으로 전활 했는데 늘 안 계시더라구."
"그래...... 고모가 많이 바빴어. 그래서 미안해. 변명하자면 난 네가 이제 그만 서른이 넘었으니...... 다 큰 줄 알았던 거지."
미안하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서늘해왔다. 고모가 내게 미안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내가 미안했다. 서른이 넘도록 아직 다 크지도 못해서, 나는 미안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그런 표현들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같은 말들을, 그냥 건성으로 하는거 말고 진정 그 말이 필요할 때, 그 말이 아니면 안 되는 바로 그때에는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31쪽

신기하게도 기억은 그 당시에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보게 해준다. 무대 구석에서 작은 제스처를 하는 엑스트라에게 비추어지는 핀 라이트처럼, 기억은 우리에게 그 순간을 다시 살게 해줄 뿐 아니라 그 순간에 다른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 가치는 때로 우리가 우리의 기억이라고 믿었던 것과 모순될 수도 있다. -129쪽

"목사나 신부나 수녀나 스님이나 선생이나 아무튼 우리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위선자들 참 많아. 어쩌면 내가 그 대표적 인물일지도 모르지...... 위선을 행한다는 것은 적어도 선한 게 뭔지 감은 잡고 있는 거야. 깊은 내면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보여지는 것만큼 훌륭하지 못하다는 걸 알아. 의식하든 안 하든 말이야. 그래서 고모는 그런 사람들 안 싫어해. 죽는 날까지 자기자신 이외에 아무에게도 자기가 위선자라는걸 들키지 않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생각해. 고모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위악을 떠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남에게 악한 짓을 하면서 실은 자기네들이 실은 어느 정도는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위악을 떠는 그 순간에도 남들이 실은 자기들의 속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래. 그 사람들은 실은 위선자들보다 더 교만하고 더 가엾어...... ."
바보같이. 지금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하고 나는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가슴 한 구석, 내가 보여주기 싫어하는 내 속옷 깊은 곳의 흉터를 보여주는 것처럼 수치심이 몰려왔다. 나는 앞에 가는 승합차를 한 대 추월해버렸다. 차가 휘청하자 고모가 손잡이를 잡았다.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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