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복제, 그 빛과 그림자
안종주 지음 / 궁리 / 2003년 1월
절판


복제 인간은 복제 세포를 제공한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자라는 환경에 따라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에게 인위적으로 원본 인간이 살아온 것과 비슷한 조건의 환경을 만들어준다 할지라도 그 원본 인간이 걸어온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복제 인간이 가진 습관이나 말투, 사고 방식 등은 원본 인간과 완전히 다를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그가 태어난 곳과 자란 곳, 다닌 학교, 가정, 국가, 그 사회와 문화, 과학 기술 문명 등 수많은 외부 조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제 인간은 원본 인간과 유전자가 같을 뿐 또 하나의 새로운, 완전한 인간인 셈이다. -42쪽

또 인간이 복제 인간을 만들어 자신이 해야 할일을 그에게 맡기고 자신은 편하게 살아갈 때, 반대로 복제 인간은 열심히 일해 문화를 개척하고 인간의 생활을 향상시켰을 때, 복제 인간들이 건설한 문화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리고 인간이 단순히 쾌락과 편리함만 추구하는 몸뚱이로 전락된다면 어떻게 될까라고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아마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영화를 본 뒤 품은 상상인 것 같은데 복제 인간과 보통 인간은 단지 생식 세포의 결합으로 태어났느냐 체세포의 복제로 태어났느냐의 차이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태어난 복제 인간에게 애초부터 복제 인간이란 표시를 하지 않는 이상 그가 복제 인간이란 사실조차 알 수 없다. 그의 세포를 떼어내 게놈 전체를 샅샅이 조사한다 하더라도 보통 인간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막연한 불안, 비과학적 사고 방식이 빚어낸, 과잉 염려증에 지나지 않는다. -44-45쪽

1995년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설치된 미국의 국가생명윤리자문위원회(NBAC)는 동물 복제 연구를 하는 이유로, 1) 연구 목적에 쓰일, 유전적으로 동일한 동물 집단을 만들기 위해, 2) 원하는 가축을 빨리 키우기 위해, 3) 형질 전환한 가축의 발생률과 증식률을 높이기 위해, 4) 가축의 유전자를 바꾸기 위해, 5) 세포 분화에 관한 기초 지식을 얻기 위해서라고 꼽았다. -79-80쪽

선스타인은 인간 복제를 금지하는 것은 미국 헌법에 어긋난다는 판결을 내릴 경우, 아이를 가질 것인지 가지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는 헌법이 보장하는 프라이버시권의 본질적 부분이라는 논거를 제시할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개인의 자유나 권리도 정부가 제한해야 할 극히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으나, 복제는 그렇게 제한할 타당한 이유가 못된다는 것이다. -198-199쪽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인간의 복제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이는 인간을 세상에 출생시키는 고귀한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녀는 자신들의 진정한 부모를 가질 권리가 있으며, 남편과 아내의 결혼을 통한 사랑의 열매로 인정받아야 한다. 자녀는 우리의 설계에 따라서 제작할 수 있는 산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특정하게 요구되는 특성을 소유하려는 사람들의 교묘한 의도의 복사물로 태어나서는 안 된다.

(미 가톨릭교회 생명인권위원회의 견해) -218쪽

생명복제는 근본적으로 다르마를 파괴하는 일일 수 있다. 그것은 육상(六相)의 틀 속에 있는 변이가 아니라 인위적인 조작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야기되는 문제는 이 질서 파괴에 다른 업보이다. 이미 생태계 파괴의 심각성은 과학 뿐만 아니라 철학, 종교의 중심 테마가 되고 있지만 생명 복제에 따른 파장은 엄청난 후유증을 잉태할 수 밖에 없다. 오늘날 인류가 겪고 있는 심각한 양상들은 삼독이 낳은 인과응보이다. 그러나 생명 복제의 과보가 안고 있는 문제는 보다 가혹하다고 본다. 더구나 특수한 목적에 악용될 경우에 대한 보완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그 개발은 중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병조 동국대 부총장 '불교 윤리와 생명 복제' 中)-225쪽

언젠가 우리들은 뛰어난 소질을 가진 선량한 시민의 제일의 의무는 자기 자신의 혈연을 후세에 남기는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아가서 바람직하지 않은 소질을 가진 사람들의 존속을 허용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문명을 발전시키는 데 최대의 과제는,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 가치가 덜한 사람들 또는 해가 되는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많아지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과제는 유전의 거대한 영향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한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소질이 뒤진 사람들이 자손을 전혀 남기지 않도록 배려되기를 절실히 원하는 바이다. 특히 사악한 본성을 가진 경우에는 절대로 자손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범죄인은 단종(斷種)해야 하고 정신박약아에 대해서는 자손을 남기지 못하도록 해야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26대 前 美 대통령, 1913년 발언)-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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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는 정말로 비윤리적인가? 민음 바칼로레아 1
로렝 드고 지음, 김성희 옮김, 최재천 감수 / 민음인 / 2006년 1월
구판절판


1997년 유네스코 186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발표한 '인간유전체와 인권에 관한 일반 선언'은 제11조에서 "인간 존엄성에 반하는 행위, 즉 인간 복제 따위는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같은 해 유럽 평의회 41개 회원국은 "유전자에 근거한 모든 형태의 차별을 금지하고 연구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배아의 복제를 금지"하는 '유럽 생명 윤리 협약'을 채택했으며, 2001년 이를 다시 보완하여 "살아 있는(또는 죽은) 인간 생명체와 유전적으로 동일한 인간 생명체를 인위적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를 금지하는 '인간 복제 금지에 관한 추가 의정서'를 채택했다. -11쪽

독일은 인간 배아에 대한 모든 종류의 실험을 금지한 반면, 영국은 인간 배아에 대한 각종 실험을 허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분야를 연구하라고 학자들을 격려까지 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복제를 무조건 반대하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치료 목적의 복제 연구는 찬성하는 리오넬 조스팽 총리가 의견대립을 보인 적도 있다.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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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 지적 열정을 추구한 나의 삶, 나의 길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박이문. 이름 세 자를 하얀백지에 써놓고 보면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박이문의 책을 두번째 읽는데 그를 직접 만나보거나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글에서 그 사람의 냄새가 느껴진다. 박이문의 냄새는 이렇게 설명해볼 수 있다. 신체는 이미 많이 늙었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고 언제나 사색을 끊지 않는다. 인생의 끝에 거의 다다랐지만 아직까지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으며, 그간 낸 수많은 저서들은 모두 그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기'에 대한 고민을 거듭해왔다고. 이 책 역시 2005년의 박이문이 작성한 자서전이다.

  "나는 이미 약 20년 전에 <사물의 언어 - 실존적 자서전> 이라는 책을 펴낸 적이 있다. 그런데 새삼 이러한 자서전적 책자를 또 내는 데에는 그후 나의 외부에서는 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나의 삶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생의 황혼을 피부로 실감하면서 나의 삶을 마지막으로 총정리할 실존적 요청을 실감하게 되었고, 덧붙혀 이러한 나의 초상화가 혹시 다른 이들, 특히 젊은이들의 삶에도 참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설사 그것이 반면교사로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이러한 자기반성을 통해서나마 앞으로 내게 남아 있는 삶을 조금이나마 더 보람 있게 살아보자는데 있다."

  이런 겸손한 노 철학자가 있나. 사실 박이문은 대학에서 불문학을 공부했고, 이후에 불문학 석박사를 취득하고,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이화여대 불문과 교수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박이문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교수자리로 충분치 않았고,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느즈막한 나이에 대학생이 된다. 미국의 남가주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석박사를 취득해, 그곳에서 또 25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가 불문학을 공부한 이유는 문학을 하기 위함이었고, 그것은 시였다. 박이문의 시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 아마도 내가 시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읽어볼일이 없을 듯 하다 - 그의 시도 그의 다른 글과 마찬가지로 자전적 성격을 띠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그러나 박이문은 시를 쓰면서 관심은 철학에 있었다. 불문학과 시가 해결해주지 않는 존재에 대한 의문과 자기자신에 대한 고민을 철학이 해결해 줄 수 있을거라 믿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미국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프랑스 철학에 심취했고, 여기서 해결되지 않는 갈증을 미국에서 해결해보려 했으나 오히려 실망만이 돌아왔다. 하지만 곧 실망은 기대로 바뀌었고, 열심히 사색을 이어갔다.

  그는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고, 시를 쓰고, 철학을 한다. 오랜 세월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박이문에게 있어 갈증은 아직 남아있는 듯 하다. 자서전 성격을 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바는, 박이문이 아직도 고민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갈증을 풀어줄 뭔가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갈증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공부를 할수록, 고민을 거듭할수록, 물음을 던질수록, 아는 것은 점점 줄어들 것이고 알고픈 것은 점점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목마름은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직업으로부터, 철학으로부터, 모든 물질적, 사회적, 관념적 속박과 구소으로부터는 물론 애착으로부터도 해방되어 자유분방하면서 충만한 생명체로서 흰 구름처럼, 끊임없이 떠도는 바람처럼 존재하고 싶다. 철학적 사유처럼 투명하고, 예술작품처럼 아름답고, 종교적 삶처럼 열정적으로 살고 싶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모두 '- 싶다'로 끝맺는다. 뭐 그리 하고픈 것이, 되고픈 것이 많을까. 1930년 출생인 박이문의 나이 올해 일흔여덟이다. 지나온 삶을 정리하고 되돌아볼 시기에 그는 아직도 이팔청춘마냥 꿈을 꾸고 있다. 그러나 그 꿈은 헛되지 않다. 꿈이 있다는건, 꿈을 가진다는건, 삶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이제 늙었으니 집에서 소일하며 책이나 보고 손자손녀나 봐야지,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는 달리 그는 아직도 꿈을 가지고, 꿈을  실현하려 한다. 부럽다. 그의 인생이. 그의 열정이. 그의 삶이. 내 나이의 두 배가 훨씬 넘는 그를 보면서 열정이 식어버린 나를 반성하고, 나를 채찍질한다. 고작 그 정도였더냐 너의 질문과 너의 고민은 이제 해결되었더냐. 미궁에 빠진 채 나오려 발버둥치지 않고 그저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며 살아가려 하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20대의 내가 '우울한 허무주의자'였고, 30-40대의 내가 '철학적  허무주의자'였다면 오늘의 나를 나 스스로 '행복한 허무주의자'라고 자처하게 되었다. 나는 일상생활을 해 가는 과정에서 그 자체로서 무한한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지만, 내 인생 자체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 그리고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그 자체를 초월한 어떤 우주적 목적 즉 의미, 더 나아가서 우주 자체를 떠난 우주의 목적 즉 의미의 존재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구약의 전도서가 되풀이 말해주듯이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생각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이문은 허무주의자다. 그의 생각을 읽고 있노라면 허무주의자도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눈은 저 멀리 나아가 있다. 보이지 않는 끝없는 곳을 바라보고 있으니 모든 것이 허망하고 허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20대의 우울한 허무주의자는 아니다. 그의 20대가 우울했던건 그만큼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혼란을 겪었기 때문일게다. 하지만 지금 그는 여전히 허무주의자이지만 적어도 행복하다. 여전히 고민은 남아있지만 그 허무함의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애써 그 허전함을 메우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철학자라 칭하고 싶다. 그는 불문학자로 시작해 시인을 거쳐 철학자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땄다는 의미에서 철학자가 아니라, 끊임없는 고민과 사색을 거듭하며 나의 인생을 채워나갔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고 싶다. 프랑스 문학도, 시도, 철학도, 박이문의 허무를 채워주지는 못했지만, 지나온 삶의 과정 자체가 그의 허무를 채워나가는 과정이었다. 철학계에 있어 대단한 업적을 남기지도 못했고, 이후 세월이 한참 지난 후 '한국의 철학자 ' 에 그의 이름은 포함되지 않겠지만, 그는 진정 철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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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5-23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겸손한 노학자는 저의 로망 중 하나예요. 어떡하죠. 나, 이번 달엔 책 안 사려고 했는데. 했는데. 했는데.... ㅠ_ㅠ

마늘빵 2007-05-2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했는데.. 했는데... 지르셔야죠. :)

비로그인 2007-05-24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중학이후, 평생토록 사숙하고 존경하는 '한국의 철학자'입니다.

 
인간복제의 시대가 온다 살림지식총서 183
김홍재 지음 / 살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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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 잉여 배아나 유산된 태아 외에도 인간 배아 줄기세포를 얻을 수 있는 제3의 방법이 있다. '인간 배아복제'로 체세포의 핵을 미리 핵을 제거한 난자와 융합시키는 체세포 복제 기술로 만든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것이다.
인간 배아복제를 하면 복제 배아를 다량으로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복제 배아에서 얻을 수 있는 줄기세포의 양도 엄청나게 많아지게 된다. 반면 냉동 배아나 유산된 태아의 경우에는 수가 한정되기 때문에 치료용으로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또 인간 배아복제에는 기존의 배아 줄기세포가 갖고 있는 면역 문제가 전혀 없다. 기존의 냉동 배아에서 추출하는 줄기세포는 만능 세포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의 세포에서 면역거부반응을 일으킨다는 문제점을 지닌다. 백혈병 환자가 면역거부반응 때문에 자신과 비슷한 가족이나 형제를 찾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간 배아 복제를 사용하면 이런 문제가 간단히 해결된다. 치료할 환자의 체세포로 복제 배아를 만들면 원본인 환자와 똑같은 유전정보를 갖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추출한 배아 줄기세포를 사용하면 그 환자를 치료할 때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 배아복제 역시 윤리적인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40-41쪽

일란성 쌍둥이는 수정란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나뉘어져 두명으로 자란 것이기 때문에 유전정보가 완전히 똑같다. 개체의 발달을 총 지휘하는 유전정보가 같아도 쌍둥이가 완전히 똑같지 않은 이유는 밑바탕이 같아도 유전정보가 발현되는 과정에서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유전정보의 발현 양상은 자라면서 접하는 주변 환경에 의해 많이 결정된다고 한다.
복제인간이 일란성 쌍둥이처럼 유전정보가 똑같다고 하더라도, 복제인간과 원본인 인간과의 차이는 일란성 쌍둥이보다 당연히 더 클 수 밖에 없다. 일란성 쌍둥이와 달리 복제인간은 몇 살이든 나이가 든 사람을 복제한 것이므로 나이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나이 차이는 복제인간을 일란성 쌍둥이보다 더욱 다른 환경에서 자라게 한다. -54쪽

인간복제를 찬성하는 측에서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를 키우기를 원하기 때문에 입양은 그렇게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얘기한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아이를 낳아서 키울 수 있는 자유를 엄연히 보장해줘야 한다면, 그 선택이 다른 사람이나 사회 전체의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간복제는 당연히 허용돼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63쪽

인간복제를 반대하는 윤리적인 이유는 복제기술의 결과로 태어난 아이는 존엄성을 간직한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 취급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복제인간은 불임 부부가 됐든 동성애자가 됐든 다른 사람의 특정한 요구에 의해 태어나게 된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복제인간은 '고귀한 생명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기 쉽다. -72-73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제된 아이의 성과를 별개로 보지 않고 원본과 함께 놓고 볼 가능성이 크다. 복제로 태어난 아이가 밤을 새가면서 열심히 공부해 반에서 1등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뛰어난 원본이 존재하면 복제인간이 거둔 성과는 그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유전자의 덕 때문이라고 폄하될 수 밖에 없다. 즉, 독립적인 별개의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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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5-22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인간 복제'라는 말만 보면...17살 때, 등 떠밀려 썼던 허접한 논술이 생각납니다.
'인간 복제의 찬.반론에 대하여'라는 주제를 가지고 절충형을 썼었는데.
등 떠밀려 쓰다 보니, '주관'이 맥주 김 빠진 듯 써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정말 성의없게 썼는데도 작은 상이라도 받은 것이 참 부끄러운 과거입니다...(긁적)
하지만, 지금도 다시 쓰라 하면, 여전히 저는 절충형 논술을 쓸 것입니다.
분명, 그 '장.단점'을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요.
문제는 인간이 '지나침의 선'을 넘을까, 넘지 않을까 하는 것이 관건.

마늘빵 2007-05-22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엘신님 이건 자랑댓글인데요? ㅎㅎ
절충형 논술은 위험하죠. 잘못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게 되어버리기 때문에.
학생들이 많이 선택하는 것이 절충형인데 저는 가급적 한쪽을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안되는건 아니지만 대개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식이 되기 때문에.

비로그인 2007-05-22 14: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까. '절충형'에 대한 인식이 다소 다른군요, 저와.
저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식'의 절충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줏대 없잖아요.
제가 말한 절충형은 찬.반론의 양측 입장을 모두 표현한 것을 말합니다.
어찌 보면 어느 쪽의 입장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양쪽 모두를 비판함과 동시에 -
양쪽 모두를 밀어주는 형식이랄까요. 사실, 다른 모든 분야에는 거의 한쪽의 주관을
강하게 밀고 나가는 스타일입니다만, '인간 복제'라는 주제에 한해서는 -
그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으며, 객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싶으니까요.

객관적인 입장을 표현하는 것도 학생들의 '주관'이 될 수 있으므로 -
아프님의 사견대로 어느 한 쪽을 택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머리가 굳어지면서 스스로 판단 기준을 자연스럽게 만들어가도록 유도해야지,
어른이 개입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웃음)

혹시, 제 반론에 기분 상하신건 아니시죠? 솔직히, 아프님이니까 이런 논쟁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웃음)

마늘빵 2007-05-22 1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핫. 아니요. 저는 한쪽으로 밀으라고 하는게 아니라, 음. 뭐랄까. 양시양비를 하게 되면 애매모호하고 주관이 없어보일 수 있으니깐 자신이 없다면 한쪽 입장을 취하는게 낫다라고 하는거죠. :) 물론 하고픈 사람들은 주관이 있다면 뭘하든 상관없다고 이야기합니다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더군요. 확고한 생각이 없으면서 애매모호하게 쓰는 경향이 있어서 경계심을 주기 위해 그리 말한거랍니다. 여러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


비로그인 2007-05-22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음 - 그렇군요.
하긴, 아프님이 생각없이 그리 할 분이 아니시지. (웃음)
제가 경솔했습니다. (꾸벅)

마늘빵 2007-05-22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생각없이 그리 할 분입니다. 크흣. :)

비로그인 2007-05-23 1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후하핫.

302moon 2007-05-23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분, 대단하십니다. 덕분에, 엄청 웃었습니다. / 이 책도 리스트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늘빵 2007-05-23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02moon 님 / 아니 이 은밀한(?) 대화를 보셨군요. :) 요즘 인간복제 관련 책들을 보고 있는데, 음 이 책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양쪽 모두를 소개한 종합적인 책입니다. 살림총서라 얇지만 정리는 잘 되어있는듯. 다만. -_- 황우석 박사 이야기가. 음. '거짓말 들통' 이전에 시간이 멈춰있습니다.
 

2007. 5. 22 예스24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5668&ref=65&m_type=0




* 스포일러 경고

SF 천재 작가로 불리우는 필립 K. 딕의 원작소설 『골든맨』을 영화화한 <넥스트>는 소재 자체의 신선함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액션영화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실제 소설 속 주인공의 초능력은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생겨난 것이며 그 배경은 미래라 하지만, 영화에선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아예 없고, 배경 또한 현재이다. SF는 기본적으로 과학기술의 발전 내지는 변형ㆍ조작을 통해서 미래사회의 모습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이런 기본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았으니 당연히 SF 느낌이 나지 않을 밖에. "필립 K. 딕" 원작 소설이라는 문구를 보고 영화관에 입장한 관객들은 영화 시작 전 머리 속에서 "필립 K. 딕"을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라스베이거스의 싸구려 마술무대에 서는 크리스 존슨. 사실 그는 마술사가 아니라 초능력을 가진 특별한 존재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2분 먼저 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능력이자 행운이다. 하지만 남들과 똑같은 평범한 삶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숨긴 채 마술쇼로 생계를 이어간다. "내"가 개입된 사건에 대해서는 무엇이든 2분 뒤의 상황을 미리 예측할 수 있고, 이미 조금 뒤의 상황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미래를 바꿔놓을 수 있다. 내가 죽는 순간까지 예측할 수 없다 할지라도 단 2분은 충분히 나의 미래를 바꿔놓을 수 있다. 중국 베이징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다음날 미국 뉴욕에 폭풍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나비효과처럼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2분이지만 잠깐의 2분은 이후의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다.

언젠가 버스 안에서 내 앞에 앉아있던 그 여자 참 마음에 들었는데 어떻게 작업을 할까. 언제 내가 그 여자를 봤던 것도 아니고, 잠깐 버스 안에서의 우연한 스침일 뿐인데 우연을 인연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머리 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른다. 어느 광고처럼 "저 지금 내려요" 라고 말하고 내려버릴까, 아니면 막무가내로 "저 연락처 좀 주시겠어요" 하고 대놓고 데이트 신청을 할까, 그도 아니면 그녀가 내리는 정거장에서 같이 내린 다음 "도를 아십니까" 하고 접근할까. 여러 가지 가능한 작업들을 떠올려보고 2분 뒤를 예상한다. "저 지금 내려요" 했더니 대답이 없다, "저 연락처 좀 주시겠어요" 그랬더니 그냥 내려버리더라, 그런데 "도를 아십니까" 했더니 "어머! 저 도에 관심 많아요" 하고 대꾸하더라. 어떤 방식이 그녀에게 먹힐지는 시도하기 전엔 모른다. 하지만 2분 뒤를 예상할 수 있다면 아무리 쑥맥이어도 작업은 통한다.

내 삶의 시작부터 끝이 정해져 있다면, 다시 말해 운명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나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 2분 뒤에 벌어질 일들을 예상하고 나는 정해진 운명을 거부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 버스 안의 그 여자와 내게 그저 한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함께 가는 정도가 정해진 운명의 전부였다면 나는 운명을 거부하고 그녀와의 로맨스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다.

 

잠깐만 기다려. 좌측 12시 방향을 겨냥해. 자신과 관련된 사건이라면 2분 뒤를 예측할 수 있는 크리스는 여러 목숨 살려냈다. 하지만 이 기이한 능력 때문에 그렇게 바라던 평범한 삶은 떠나갔고, 나는 지금 여기서 이들과 함께 총격전을 벌이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또 어디에.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는 그의 책 『에티카』에서 "주어진 일정한 원인에서 필연적으로 결과가 생긴다. 이와 반대로 일정한 원인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 결과도 생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세상의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나는 법이 없으며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신에 의해 미리 결정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신의 변치 않는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는 말이다.

"정신 안에는 절대적이거나 자유로운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은 이것 또는 저것을 의지하도록 어떤 원인에 의해 결정되며, 이 원인 역시 다른 원인으로 인하여 결정되고, 이것은 다시금 다른 원인에 의해 결정되며, 이렇게 무한히 진행한다." (『에티카』, 스피노자 저, 강영계 역, 서광사, 116쪽)

결국 내가 자유롭게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위한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것도 결코 자유롭지 않다. 모든 행위의 원인에는 원인이 있고, 그 앞의 원인이 있고, 무한히 소급해 들어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크리스가 기다리는 식당으로 리즈가 오게 된 것도, 거기서 그녀를 쫓아온 남자를 만나게 된 것도, 현실에서 오늘 내가 영화 <넥스트>를 혼자 보러 간 것도, 극장을 용산CGV로 택한 것도, 가는 길에 은행에 들러 현금인출을 한 것도 모두 나의 자유의지의 결과가 아니다.

내가 고통에 처했을 때도 그것은 운명이니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도, 우리집의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어 보이는 것도, 남들 연봉 3000만원씩 받아가며 차 굴릴 때 학자금 대출 갚아가며 버스 타고 다니는 것도 모두 운명이니 받아들여야 하는가. 고통은 우리가 고통의 원인을 확실히 인식할 때 벗어날 수 있다. 비록 주어진 상황과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것을 객관적인 인과관계 속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왜 남들 자가용 끌고 다닐 때 나는 버스를 타야 하는가, 왜 이 좋은 여름날 남들 이쁜 사랑 나누며 데이트할 때 난 방구석에서 타자 치고 있어야 하는가, 기타 등등의 현실 속에서 왜 그것이 필연적인 일인지를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성의 힘으로 극복 가능하다. 우리가 고통을 겪는 건 정념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오직 이성에 의해서만 산다면 자기존재를 보존하면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하였다.

 

영화 <매트릭스>는 저리 가라. 네오는 빠른 몸놀림으로 총알을 보고 피했지만 크리스는 저격수의 위치도 모른 채 네오보다 어설픈 동작으로 총알을 피한다. 멋대가리 하나 없지만 총알 피하는 솜씨는 일품이다.

인간의 삶에서 고통을 제거할 수는 없다. 지금 외제 스포츠카 굴려가며 떵떵거리고 살던 사람이 내일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지금 서울역 앞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는 사람이 뛰어난 소설을 써서 작가로 등단할 수도 있다. 고통과 불행은 언제라도 우리를 찾아올 수 있고, 행복 또한 언제라도 우리를 찾아올 수 있다. 불행한 운명은 우리의 2분 후를 예측함으로써만 행복한 운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고통과 불행을 미리 차단할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상황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느냐에 따라서 "현실의 인식"은 바꿀 수 있다. 똑같은 상황에서 너 없이는 못산다, 차라리 죽겠다, 고 결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래 내가 너 아니면 못사냐, 두고 봐라 너보다 더 좋은 남자 만난다, 고 마음을 다잡는 사람도 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은 나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불행이다. 함께 겪고 있는 많은 이들을 생각한다면 나의 고통은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2분 후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크리스 존슨의 삶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분명 못난 외모와 허술한 옷차림, 어눌한 말투로,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리즈에게 접근해 작업에 성공하긴 했지만 그의 특별한 능력을 써먹기 위한 FBI와 악당들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2분 뒤를 예측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특별한 능력도 아니며, 내 인생의 미래를 바꿔주지도 못할 것이고, 나 혼자만 2분 뒤를 예측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기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나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은 지금 당장은 유용할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보아 내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행복이란 마음먹기에 달려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대학입학을 앞두고 어느 대학을 가야할지, 결혼은 언제쯤 할지, 배우자는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게 좋을지,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게 적성에 맞는지, 지금 만나는 여자친구와의 궁합은 어떤지, 심지어는 내 성격은 어떻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묻기 위해 점집을 찾는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지금의 내 답답한 심정을 토해내고 들어줄 맞장구쳐 줄 사람이 필요해 점집을 찾는 것이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누군가 시원하게 결정해주고 이 길로 걸어가라고 말해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내 인생은 결국 내가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고, 내 결정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 내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결정을 남에게 맡기는 건 책임회피에 불과하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긍정적으로, 내 인생의 결정은 내가.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는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극복하고 깨고 나가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으며, 오늘 고통을 겪지만 이후에 다가올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만 괴롭고 힘든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도 다 괴롭고 힘들다. 다만 처해있는 상황과 현실이 다를 뿐. 미래를 볼 수 있다면 미래를 바꿀 수 있겠지만 우리는 미래를 볼 수 없고 현재의 고통만 느낄 뿐이다. 2분 뒤 미래를 예언하려고 하기보다 지금 처해있는 현실의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것이 현명하게 현실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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