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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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됨이 무엇을 뜻하는지 점점 더 모르게 된다. 『예언의 서』-7쪽

예를 들어 죽음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해 보라.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언어적 영역과 마주치지 않는다면 정말 이상한 일일 것이다. (비트겐슈타인)-9쪽

죽음이 모든 생물, 인간을 포함한 동물이든 네가 밟고 다니는 풀로부터 백 미터에 이르는 세콰이아덴드론 기간테움에 이르는 식물이든 모든 생물에게 똑같다면,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아는 인간을 죽이는 죽음과 그것을 절대 모르는 말의 죽음이 똑같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그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누에가 고치 안에서 스스로를 가두고 문을 걸어 잠갔을 때, 이 누에는 어느 시점에서 죽는가? 하나의 생명이 다른 것의 죽음에서 태어나는 것, 누에의 죽음에서 나방이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 둘이 같음녀서도 다른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아니면 나방이 아직 살아 있으므로 누에는 죽지 않은 것인가? (어항의 물 위를 움직이는 영이 초보 철학자에게 던진 질문)-95-96쪽

그 말(하나의 죽음에서 다른 것의 생명이 태어난 것을 변태라 부름)이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사물에 붙이는 이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구나, 너는 사물이 진정으로 어떠한지는 절대 모를 것이다, 심지어 그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네가 사물에 붙이는 이름은 그저 이름, 네가 붙이는 이름에 불과할 뿐이니까. (어항의 물 위를 움직이는 영이 초보 철학자의 대답에 붙이는 말)-96쪽

정말로 죽음이라는 이름값을 할 만한 죽음,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그 이름을 말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 죽음에 비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다른 것들은 아주 작고 하찮은 세목에 불과하지. 그러니까 죽음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로군요, 초보 철학자가 약간 불필요한 결론을 내렸다. 내가 말한 게 바로 그거다. 그래서 우리의 죽음이었던 것은 작동을 멈추었지만, 다른 죽음들, 동물과 식물의 죽음은 계속 작동을 하는 거다, 따라서 그 죽음들은 독립적인 거다, 각각 자기 영역에서 일을 하는 거다, 그런 말씀이죠. 이제 알아들었구나. 네. 좋아, 이제 가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라, 어항의 물 위를 움직이는 영이 말했다. -98쪽

memento, homo, quia pulvis es in pulverem reverteris (인간이여, 너는 흙이며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임을 기억하라)-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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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2-22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라마구에 빠지셨군요^^ 정영목씨가 사라마구 책을 많이 옮기는듯. 저도 빨리 입문해야 하는데 ㅠㅠ

마늘빵 2009-02-23 09:08   좋아요 0 | URL
^^ 네, 근데 이제 그만 읽으려고요. 눈뜬자, 눈먼자, 이름없는 자,까지가 제일 좋았고, 동굴, 도플갱어도 괜찮았는데, 죽음의 중지까지 읽으면서 흥미가 조금 떨어진거 같아요. 나중에 읽지 않은 다른 책들을 읽을 기회가 있으면 그때 읽고, 이제 다른 책을 봐야겠어요.
 
도플갱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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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한, 숨은 제스처라는 주제가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람들은 예를 들어 톰이나 딕이나 해리가 특정한 상황에서 이런저런 제스처를 했다고 말한다. 아주 간단하게. 마치 의심, 연대감, 경고를 표현하는 이런저런 제스처가 모두 항상 같은 의미인 것처럼. 의심은 항상 신중하고, 지지는 항상 무조건적이며, 경고는 항상 사리사욕 없이 이루어진다는 듯이. -59-60쪽

혼돈은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질서일 뿐이다.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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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9-02-14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라마구에 완전 빠지셨네요.^^


마늘빵 2009-02-16 09:21   좋아요 0 | URL
^^ 네. 새로 나온 책 또 읽고 있어요. 근데, 음, 아무래도 눈 먼자들의 도시, 눈 뜬자들의 도시보다는 못하네요.

[해이] 2009-02-15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라마구에 입문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못사고 있슴다ㅠㅠ

마늘빵 2009-02-16 09:22   좋아요 0 | URL
도서관을... ^^ 해이님도 책을 빌려읽지 않고 사서 읽는 스타일인가요? 그러면, 꾸준히 돈이 많이 들텐데. 저도 매달 책에 나가는 돈이 만만치 않아요.

[해이] 2009-02-16 11:33   좋아요 0 | URL
절판된 책이 아니면 도서관에서 안빌려요ㅋ 돈이 많이 들긴 하는데 그게 공부할땐 훨씬 편하드라고요~
 


 작년 하반기 조금 비싼 녹음기를 하나 샀는데, 이걸 아직 제대로 써먹지를 못했다. 이번에 김상봉 선생님 강연에 가서도 손으로 필기도 했고, 귀로도 열심히 들었지만, 그 울림을 남기고 싶어서, 녹음기를 가져갔다. 한번은 녹음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고, 한번은 녹음기가 방전된 상태였고, 한번은 야근하느라 못갔고, 한번은 녹음버튼과 정지버튼을 헷갈려서 강의 내내 정지상태로 있다가 쉬는 시간에 녹음버튼이 눌러졌고, 마지막 한번은 가방 속에서 며칠 동안 내내 켜져있어서 결국 또 녹음을 못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한 강도 녹음을 못했다. 다음주에는 선생님께서 베트남에 세미나 가시고, 다담주에 또 씨알재단에 강의를 하러 오시는데, 그때는 모두 녹음을 해야겠다.

  이번 강의는 20세기 한국 철학을 돌아보는 시간이었고, 다음 강의는 그 중 한 분인 함석헌 만을 5회에 걸쳐서 다루신다. 이번에는 함석헌, 유영모, 박동환 세 철학자를 말씀하셨는데, 함석헌 이외에 두 분 유영모와 박동환은 처음 들어보는 철학자였다. 유영모에 관해서는 그래도 여기저기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박동환에 관해서는 전혀 정보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선생님의 학창 시절 스승님이었다고 하는데, 선생님께서 지향하시는 바와는 상반된 철학을 하시는 분이라고. 그치만, 나와 같지 않다고 해서 그를 대단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 선생님께서는 철학자 박동환을 높게 평가하신다. 인터넷 서점에서 '박동환' 세 글자를 치면 저서가 두 권 나오는데, 구할 수 없는 책들이다. 선생님께서는 세 권 말씀하셨다. 헌책방에 혹시 있을까 해서 고고북으로 검색했는데 없다.  

  강의 시간에, 또 술잔을 기울이며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느낀 바 중 하나는, 우리네 현실에 기반한 철학을 해야 한다는 것. 철학, 사회학, 정치학 등 인문/사회 과학을 공부함에 있어 너무 서양의 지식 흐름을 따라가려는 노력만을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현실과 그네들의 현실은 분명히 다른데. 물론! 그네들의 현실에 기반한 말말말들을 우리말로 번역해 전파하면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서구 대가들의 번역서가 꾸준히 나오고, 세미나가 이루어지는 것도, 결국 거기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중요한 걸 잊는 듯 하다. 정확히 옮기고 전파하고 그들을 따라가는데 급급한 듯 하다. 이렇게 지금 따라간다고 하지만, 자칫 지금뿐 아니라 평생 따라가기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네 철학, 우리네 사회학, 우리네 정치학, 우리네 역사학이 필요한 것이다.  

  레비나스의 윤리에 대해 사람들이 찬사를 보낸다. 그런데, 레비나스가 인터뷰에서였는지, 책에서였는지 어떤 말을 했는데 - 아, 정확한 문구가 기억이 안난다. 이런. - 선생님께서 전달해주신 그 말을 듣고서 그의 철학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기억이 안나서 답답한데 - 저질 기억력은 여기서 또 훼방을 놓는구나. - 레비나스를 읽을 때 그 부분을 잊지 말고 염두에 두고서 읽어야겠다. 또, 촛불집회 시즌1(2008년 5월~9월) 동안에 나왔던 논의 중 프랑스의 68혁명과 비교해서 이로부터 교훈을 얻고, 앞으로의 대응 방안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보였는데, 이건 아니라고 하셨다. 나도 머릿속으로 프랑스의 68혁명이 이땅에서 재현될까, 생각했던 사람 중 한 명인데, 우리네 운동은 우리의 과거 역사적 현실과 비교해 이야기를 해야 맞다고 하셨다. 동학운동이나 4.19, 5.18, 6월 항쟁, 그리고 미선이효순이 촛불집회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해야지, 외국의 사례를 근본 바탕에 두고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셨다. 끄덕끄덕.  

  자칫 잘못 들으면 선생님께서 외국의 모든 이론과 역사적 사례들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건 아니다. 그건 참고사항일뿐 우리가 논의해야 할 기본 바탕이 아니라는 말씀이실 것이다. 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리네 과거로부터 그 교훈을 얻고, 문제점과 해결방안, 앞으로의 진행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는 말씀일게다. 선생님께서 계속 고민하고 연구하시는 것, 또 그 결과물로 내놓은 <서로주체성의 이념>이나 <나르시스의 꿈>은 모두 여기에 닿아있다. 서구의 철학의 한계점을 넘어서서 우리네 철학을 하기 위한 기초 세우기 작업인 것이다. 작년에 나왔던 <5.18 그리고 역사>는 그 고민을 우리네 역사적 현실에 접목시킨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부끄럽게도 선생님을 마음 속의 스승으로 모시면서 아직까지 선생님의 모든 저작을 읽지는 못했다. 열심히 쫓아다님과 동시에 책읽기도 부지런히 따라가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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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9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9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라 2009-02-10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부럽네요. 김상봉 선생님 강의 한번 들을 기회 있었으면 좋겠어요

마늘빵 2009-02-10 09:02   좋아요 0 | URL
저도 뵌 적은 있어도, 강의를 들은 건 처음이에요. 기회가 잘 없으니. 강의도 강의지만 술자리도 좋아요. ^^
 
동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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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말할 가치가 없거나, 딱 한 번만 말하면 되는 말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더 가치있는 다른 말의 자리를 차지해 버릴 것이다. 그 말이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말이 불러올 수 있는 결과 때문에 그렇다. -48쪽

사방에서 풀이 자라고 있어서, 백 년도 채 지나기 전에 이 진흙 언덕 밑에 누가 묻혀 있는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설사 그때 사람들이 무덤의 주인을 여전히 알고 있다 해도, 그들이 무덤에 관심을 보일 것 같지는 않다. 누군가의 말처럼, 죽은 사람은 깨지거나 떨어져 나온 부품을 붙일 때 사용하던, 시대에 뒤떨어진 꺽쇠, 아니면 지금처럼 비유를 이용한다면, 거억과 후회라는 꺽쇠를 붙일 가치도 없는 깨진 접시와 같다. -54쪽

혼란에 빠진 사람에게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다. 마치 자신을 앙는 것이 쉬운 일인 것처럼. 모든 것에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말한다. 매일 이 말을 뒤집어 버리며 즐거워하는 잔혹한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유부단한 사람에게 우리는 모든 것은 첫걸음부터라고 말한다. 마치 느슨하게 감겨 있는 실의 끄트머리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어서 그 끝을 계속 잡아당기기만 하면 반대편 끝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실이 얽히지도 않고 헝클어지지도 않아서 매끄럽게 계속 풀려나오는 것처럼. 실이 이렇게 풀려나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여기서 흔해빠진 표현을 한 번 더 써도 된다면, 인생이라는 실타래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중략) -89-90쪽

(이어서) 이것은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의 망상이다. 첫걸음이 실의 끝자락처럼 분명하고 정확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첫걸음은 길고 고통스럽고 느린 과정이며, 그 첫걸음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알아내려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첫걸음은 마치 눈먼 사람처럼 길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고, 첫걸음은 첫걸음일 뿐이다. 그 전에 있었던 일은 거의 가치가 없다. -90쪽

여자들의 생각은 대체로 다르다.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아니라면, 밤이나 오후나 오전을 온전히 둘이서만 보낼 수 있다면, 여자는 사랑의 행위를 하기 전에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편을 더 좋아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남자의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팽이처럼 소용돌이 치고 있는 그 성적인 충동 말고 다른 것에 대해서. 아주 깊어서 서서히 물에 차오르는 물병처럼, 여자는 아주 천천히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아니, 여자가 남자를 자신에게 끌어당긴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마침내 남자의 절박함과 여자의 갈망이 일치하면서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물병 속의 물은 노래를 부르며 물병 가장자리까지 차오른다. -149쪽

모든 사전들은 우스꽝스럽다는 단어의 뜻을 조롱거리나 웃음거리가 될 만한 것, 경멸받아 마땅한 것, 우스워 보이거나 코미디로 변질되기 쉬운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참으로 놀라우면서도 안심이 되는 의견일치가 아닐 수 없다. 사전의 입장에서 보면, 개별적인 정황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사전에는 정황이라는 단어가 어떤 사실에 동반하는 상태로 정의되어 있고, 괄호 속에는 사실과 정황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되며, 정황을 먼저 고려하지 않고 사실을 판단해서도 안 된다는 경고가 분명히 실려 있는데도 말이다.-215쪽

어쩌면 꿀벌의 비밀이라는 것은 고객에게 적절한 자극을 주어 욕구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사용가치가 점점 높아지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용가치가 높아지면 곧바로 교환가치가 높아질 것이다. 교환가치는 교활한 생산자가 구매자에게 강요하는 가치이다. 생산자는 서서히 교묘하게 구매자의 내적인 방어벽을 무너뜨린다. 이 방어벽은 구매자가 자신의 성격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만약 오점 하나 없는 결백한 사람이 정말로 존재했다면, 이 방어벽이 비록 불확실하기는 할망정, 그에게 최소한의 저항력과 자제력을 부여해 주었을 것이다. -322-323쪽

그냥 살다 보면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할 뿐이죠, 마치 그 흐름에 반항할 힘이 없는 것처럼,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강이 우리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와요, 다른 사람들은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만 우리만 그걸 눈치채는 거죠, 누가 우리를 본다면 물 속으로 빠지기 직전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우리의 항해기술은 절정에 이르러 있죠. -4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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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우 바쁜 하루였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회사에 출근하고, 당장 급한 것을 해결하고는, 머리를 굴렸습니다. 영화 시간이 1시인데, 그 사이에 운동을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해봐야 1시간 정도인데, 오고가는 시간, 샤워하는 시간 빼면 하나마나겠다 싶어 버스를 타고 역사박물관 앞 미로 스페이스로 향합니다. 보고 싶었던 영화인 <디파이언스>를 보고는, 천천히 광화문으로, 종각으로, 청계천으로 향했습니다. '폭력 살인 진압 규탄 및 MB 악법 저지를 위한 국민 대회' - 이름 참 길다 - 가 4시에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3시 30분. 광화문에서 청계천으로 가는 길은 벌써부터 도로 주변에 전경버스로 가득했습니다. 청계천 광장으로 가는 길은 힘들었습니다.

  종각으로 들어가자 전경버스는 더 많이 보입니다. 전경들도 내려서 대열은 갖추지 않았지만 슬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소라광장으로 들어갈 수 없게 청계천 중간 다리지점을 전경버스가 이미 들어와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도로변으로 못나오게 전경버스를 배치했겠지만, 도로는 물론이고, 아예 청계천 내부까지 막아놨던 것입니다. 아주 조금만 열어놨습니다. 사람 두 명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모전교(毛廛橋)'라고 쓰여진 다리입니다. 4시가 넘었는데, 시민들은 이리저리 흩어져있고, 일부는 다리 앞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리 아래 청계천은 양쪽 길 모두 전경들 너댓명이서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가봐야 소용없으니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다른쪽 상황은 어떤가 해서 주변을 빙 돌아봤습니다. 두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틈새로 들어가 소라광장으로 향했는데, 그쪽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습니다. 그러나 거기도 도로로 나가지 못하게 전경버스가 막고 있었습니다. 해서 시청쪽에서 소라광장으로 들어오는 시민들은 일부 차단될 수밖에 없었고, 세종문화회관 쪽 광화문 역 출구로 나오시는 분들도 그쪽에 고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너댓군데로 분산될 수밖에 없던 거지요. 경찰이 미리 수를 쓴겁니다. 함께 하지 못하도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4시반경이 되자 트럭 한대가 상호저축은행 앞 다리에 위치하고 누군가 마이크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쪽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모두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안되었고, 대다수가 서서 환호를 하거나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상호저축은행 바로 앞은 트럭 앞 집회와는 별개로 조금 뜨거웠습니다. '10대 연합'이라고 쓰여진 검은 깃발을 든 남녀고등학생들이 쇠파이프를 들고와 가로막은 전경버스를 쳤습니다. 차창이 강화 플라스틱으로  되어있어 쉽게 부서지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무래도 쇠파이프다보니 소리가 컸고, 시선이 집중됐습니다. 어떤 사람은 발로 버스를 찼고, 어떤 사람은 팜플렛을 차장에 붙이고 불을 붙였습니다. 종이는 그대로 타들어가 재가 됐습니다. 아직 환한 대낮이었으나 전경버스 뒤로 물대포 한대가 도착했고, 목소리가 익숙한 여경 한 명이 방송을 했습니다. 앵커를 바꿨음 좋겠는데 '5월의 그녀'인것 같습니다. 다음 목소리는 좀 달랐습니다. 종로경찰서장이 직접 왔습니다. "물포를 쏘겠다"고 위협했고, 물대포가 하늘로 머리를 내밉니다.

  시민들은 뒤로 물러나거나 보도블록 위로 올라섰습니다. 위협은 몇 번 있었지만 시위대를 자극하기 싫었던지 현명하게도 쏘진 않았습니다. 아마 쐈다면 상황은 심각해졌을 겁니다. 검은 망토를 두른 행렬이 앞으로 다가 왔고, 어떤 이는 국화를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근조(謹弔) 리본을 달고 나온 시민들도 있었고, 상여복을 입은 이도 있었습니다. 또다른 10대 무리가 큰 상자를 들고와 사람들에게 촛불을 나눠줬습니다. 시간은 어느덧 6시반으로 넘어갔습니다. 오늘 유난히 바람이 셌습니다. 깃발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뻗습니다. 아침 신문을 봤을 때 온도가 괜찮아서 목도리와 장갑을 가지고 가지 않았더니 많이 추웠습니다. 베지밀 하나를 사서 몸을 덥힙니다. 오늘 이 가게 장사 잘 되더군요. 아주 작은 구멍가게인데.  

  어둑어둑해진 청계천. 386 깃발이 앞서고 사람들이 뒤를 따릅니다. 거리 행진입니다. 모두 차단되어 있지만, 어떻게 뚫린 한 곳을 찾았나 봅니다. 무교동 골목입니다. 한 손엔 촛불을 들고, 한 손은 주머니에 집어넣고 행렬을 따릅니다. 구호를 외칩니다. 살.인.정.권.명.박.퇴.진. 김.석.기.를.구.속.하.라. 애초 차단된 인원으로 시작했지만 행렬이 꽤 깁니다. 날은 어둡고 추웠지만 사람들은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들을 따라 거리로 나갔고, 을지로를 지나 명동으로 향했습니다. 행렬은 명동 애비뉴얼 앞에서 멈췄습니다. 경찰이 앞뒤로 막았고, 도로변으로도 시위대가 보도로 나가지 못하도록, 또 보도에 있던 사람들이 시위대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인간띠를 형성해 차단했습니다. 하지만 갇힌 건 아니었습니다. 왼쪽 보도블록으로 가는 길엔 전경이 없었습니다. 세 군데서 압박해서 그쪽으로 몰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리에 주저 앉았습니다. 일부는 서서 오른쪽에 인간띠를 형성한 전경들을 막아섰는데, 저는 그쪽 앞대열에 있었습니다. 빡세게! 앞으로! 라고 말하는 듯한 구호가 들리고 전경들이 오른쪽 보도블록에서 안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앞뒤에는 이미 물대포 차량 몇대가 도착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여러분은 지금 불법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집시법 20조(?)에 의거 해산을 명합니다. 해산하지 않을 경우 강제로 해산시키거나 물포를 동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1차 경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는 또 밀려 한쪽 차선을 내줬습니다. 2차 경고가 들립니다. "노약자, 어린이, 청소년 등은 보도블록으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불법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자진 해산하지 않을 경우 강제 해산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아까보다 전경이 거세게 치고 들어옵니다.  

  대열 둘째 줄에 있던 저는 어느덧 맨 앞줄에 전경과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겁났습니다. 제 뒤쪽에서 밀고, 전경쪽에서 밀고 오징어가 됐는데, 전경 대열 두번째 있던 녀석이 제 마스크를 낚아챕니다. 앞대열에서 욕하고 주먹질하는 아저씨 뒤로 보내고, 적당히 하자고, 욕하지 말고, 때리지도 말고, 서로 자극하지 말자고, 말했음에도 그 녀석이 저를 자극했습니다. 그래도 그냥 웃었습니다. 맨 앞에 있던 푸근하게 생긴 전경에게 말했습니다. 두번째 있는 저 아저씨 좀 말려봐요, 하지 말재니까, 밀려날 때 밀려나더라도 좀 적당히 합시다, 말이 먹히는지 웃습니다. 밀리다밀리다 결국 차선 달랑 하나만을 남겨놓고 잠시 대치 상태가 지속됐습니다. 어떤 시민들이 앞 대열에 물을 전달해 하나 받았습니다. 전경에게 물 마시겠냐고 건넸더니 웃으며 거절합니다.  

  뒤에선 어떤 시민들이 기타치고 노래하고,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녀 두 커플은 서로 장난을 칩니다. 한 아주머니는 전경 앞으로 가서 설교를 합니다. 설교가 너무 길어져서 말리고도 싶었으나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니라 그냥 보고 있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는 앞으로 다가와 뭐라뭐라 하고 다시 등을 돌리고 나가십니다. 경찰이 세번째 경고를 해왔습니다. 대치 상태는 계속 되었고, 그 푸근한 얼굴의 전경이 갑자기 제 뒤를 보며 웃습니다. SBS 카메라 기자인지 기자 보조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 사람을 향해 손흔듭니다. "친구에요?" "아니요, 저희 소대에 있다 제대한 선임입니다." "아 이런 경우도 있군요. 재밌네요. 기자 됐나봐요?" "네 그런가봅니다." 푸근한 전경 주변에 있던 다른 전경들도 서로 수다떨며 웃습니다. 한 전경이 앞으로 오라 손짓했지만 카메라 기자는 그냥 그자리에서 손만 흔듭니다.

  시간은 어느덧 9시반. 3차 경고 이후 갑자기 무장을 한 경찰 아저씨들이 전경을 뒤로 물리고 인간띠를 형성해 앞으로 치고 나옵니다. 나이가 많아 보입니다. 말을 건넸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치고 오면 좀 그렇잖아요. 때되면 물러날테니 적당히 치고 오세요." 그냥 털털하게 웃습니다. 순식간에 보도블록 위로 밀렸습니다. 날이 춥고, 어둡고, 지치고, 여기서 더 다른 상황이 벌어질 것 같진 않아 오늘은 이만 돌아왔습니다. 다음엔 목도리와 장갑을 꼭 가져가야겠습니다. 마스크도. 사진, 동영상을 많이 찍힌거 같습니다. 아까 그 녀석이 마스크를 뺏어가는 바람에. 꽤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채웠고, 오랫동안 촛불을 들었습니다. 내일도 크게 집회를 한다고 합니다. 2월 2일 월요일 7시에도 집회를 한답니다. 다시 촛불은 타올랐습니다.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추운 겨울이 됐지만, 잠시 휴식을 취했을 뿐 촛불은 여전했습니다.   

참조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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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촛불은 어디로 가는가 : 촛불 회의론을 듣고
    from 거인의 정원에서 2009-02-01 00:30 
    작년 연말에 대기업에 다니는 한 중학교 동창과 만나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대학 때 운동권도 아니었는데도 바쁜 와중에 여러 차례 촛불집회에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별로 변화된 것이 없고, 이...
 
 
2009-02-01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1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이] 2009-02-03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같은 곳에 계셨군요^^ 반갑습니다ㅎㅎ 집회에 나갈땐 항상 으쌰으쌰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싸늘한 반응이나 곱지 않은 시선을 보면 항상 가슴이 아파요. 특히나 그날 명동까지 갔었을때 명동에서 쇼핑하던 사람들이 "아직도 촛불 해?" "어우 왜캐 짜증나게 사람이 많아?" 등등의 이야기를 하면 진이 빠지긴 하죠...

마늘빵 2009-02-03 09:13   좋아요 0 | URL
아, 반갑습니다. 애비뉴얼 앞에 계셨군요. ^^ 위에서 커피마시고, 쇼핑하던 사람들도 구경하더라고요. 보도블록에도 사람들 모여들고. 도로에 있던 시위대가 뒤로 밀려나기도 했지만. 아직도 시위를 왜 하는가,를 생각하기 보다는 당장 시위가 날 짜증나게 한다,는 체험에 충실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요일엔 야4당 나오는 바람에 크게 했더군요. 어제는 천주교신부님들 나오시고, 곧 스님과 목사님들도 각각 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