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바쁜 하루였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회사에 출근하고, 당장 급한 것을 해결하고는, 머리를 굴렸습니다. 영화 시간이 1시인데, 그 사이에 운동을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해봐야 1시간 정도인데, 오고가는 시간, 샤워하는 시간 빼면 하나마나겠다 싶어 버스를 타고 역사박물관 앞 미로 스페이스로 향합니다. 보고 싶었던 영화인 <디파이언스>를 보고는, 천천히 광화문으로, 종각으로, 청계천으로 향했습니다. '폭력 살인 진압 규탄 및 MB 악법 저지를 위한 국민 대회' - 이름 참 길다 - 가 4시에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3시 30분. 광화문에서 청계천으로 가는 길은 벌써부터 도로 주변에 전경버스로 가득했습니다. 청계천 광장으로 가는 길은 힘들었습니다.
종각으로 들어가자 전경버스는 더 많이 보입니다. 전경들도 내려서 대열은 갖추지 않았지만 슬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소라광장으로 들어갈 수 없게 청계천 중간 다리지점을 전경버스가 이미 들어와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도로변으로 못나오게 전경버스를 배치했겠지만, 도로는 물론이고, 아예 청계천 내부까지 막아놨던 것입니다. 아주 조금만 열어놨습니다. 사람 두 명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모전교(毛廛橋)'라고 쓰여진 다리입니다. 4시가 넘었는데, 시민들은 이리저리 흩어져있고, 일부는 다리 앞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리 아래 청계천은 양쪽 길 모두 전경들 너댓명이서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가봐야 소용없으니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다른쪽 상황은 어떤가 해서 주변을 빙 돌아봤습니다. 두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틈새로 들어가 소라광장으로 향했는데, 그쪽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습니다. 그러나 거기도 도로로 나가지 못하게 전경버스가 막고 있었습니다. 해서 시청쪽에서 소라광장으로 들어오는 시민들은 일부 차단될 수밖에 없었고, 세종문화회관 쪽 광화문 역 출구로 나오시는 분들도 그쪽에 고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너댓군데로 분산될 수밖에 없던 거지요. 경찰이 미리 수를 쓴겁니다. 함께 하지 못하도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4시반경이 되자 트럭 한대가 상호저축은행 앞 다리에 위치하고 누군가 마이크를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그쪽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모두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안되었고, 대다수가 서서 환호를 하거나 구호를 외쳤습니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상호저축은행 바로 앞은 트럭 앞 집회와는 별개로 조금 뜨거웠습니다. '10대 연합'이라고 쓰여진 검은 깃발을 든 남녀고등학생들이 쇠파이프를 들고와 가로막은 전경버스를 쳤습니다. 차창이 강화 플라스틱으로 되어있어 쉽게 부서지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아무래도 쇠파이프다보니 소리가 컸고, 시선이 집중됐습니다. 어떤 사람은 발로 버스를 찼고, 어떤 사람은 팜플렛을 차장에 붙이고 불을 붙였습니다. 종이는 그대로 타들어가 재가 됐습니다. 아직 환한 대낮이었으나 전경버스 뒤로 물대포 한대가 도착했고, 목소리가 익숙한 여경 한 명이 방송을 했습니다. 앵커를 바꿨음 좋겠는데 '5월의 그녀'인것 같습니다. 다음 목소리는 좀 달랐습니다. 종로경찰서장이 직접 왔습니다. "물포를 쏘겠다"고 위협했고, 물대포가 하늘로 머리를 내밉니다.
시민들은 뒤로 물러나거나 보도블록 위로 올라섰습니다. 위협은 몇 번 있었지만 시위대를 자극하기 싫었던지 현명하게도 쏘진 않았습니다. 아마 쐈다면 상황은 심각해졌을 겁니다. 검은 망토를 두른 행렬이 앞으로 다가 왔고, 어떤 이는 국화를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근조(謹弔) 리본을 달고 나온 시민들도 있었고, 상여복을 입은 이도 있었습니다. 또다른 10대 무리가 큰 상자를 들고와 사람들에게 촛불을 나눠줬습니다. 시간은 어느덧 6시반으로 넘어갔습니다. 오늘 유난히 바람이 셌습니다. 깃발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뻗습니다. 아침 신문을 봤을 때 온도가 괜찮아서 목도리와 장갑을 가지고 가지 않았더니 많이 추웠습니다. 베지밀 하나를 사서 몸을 덥힙니다. 오늘 이 가게 장사 잘 되더군요. 아주 작은 구멍가게인데.
어둑어둑해진 청계천. 386 깃발이 앞서고 사람들이 뒤를 따릅니다. 거리 행진입니다. 모두 차단되어 있지만, 어떻게 뚫린 한 곳을 찾았나 봅니다. 무교동 골목입니다. 한 손엔 촛불을 들고, 한 손은 주머니에 집어넣고 행렬을 따릅니다. 구호를 외칩니다. 살.인.정.권.명.박.퇴.진. 김.석.기.를.구.속.하.라. 애초 차단된 인원으로 시작했지만 행렬이 꽤 깁니다. 날은 어둡고 추웠지만 사람들은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들을 따라 거리로 나갔고, 을지로를 지나 명동으로 향했습니다. 행렬은 명동 애비뉴얼 앞에서 멈췄습니다. 경찰이 앞뒤로 막았고, 도로변으로도 시위대가 보도로 나가지 못하도록, 또 보도에 있던 사람들이 시위대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인간띠를 형성해 차단했습니다. 하지만 갇힌 건 아니었습니다. 왼쪽 보도블록으로 가는 길엔 전경이 없었습니다. 세 군데서 압박해서 그쪽으로 몰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리에 주저 앉았습니다. 일부는 서서 오른쪽에 인간띠를 형성한 전경들을 막아섰는데, 저는 그쪽 앞대열에 있었습니다. 빡세게! 앞으로! 라고 말하는 듯한 구호가 들리고 전경들이 오른쪽 보도블록에서 안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앞뒤에는 이미 물대포 차량 몇대가 도착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여러분은 지금 불법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집시법 20조(?)에 의거 해산을 명합니다. 해산하지 않을 경우 강제로 해산시키거나 물포를 동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1차 경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는 또 밀려 한쪽 차선을 내줬습니다. 2차 경고가 들립니다. "노약자, 어린이, 청소년 등은 보도블록으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불법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자진 해산하지 않을 경우 강제 해산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아까보다 전경이 거세게 치고 들어옵니다.
대열 둘째 줄에 있던 저는 어느덧 맨 앞줄에 전경과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겁났습니다. 제 뒤쪽에서 밀고, 전경쪽에서 밀고 오징어가 됐는데, 전경 대열 두번째 있던 녀석이 제 마스크를 낚아챕니다. 앞대열에서 욕하고 주먹질하는 아저씨 뒤로 보내고, 적당히 하자고, 욕하지 말고, 때리지도 말고, 서로 자극하지 말자고, 말했음에도 그 녀석이 저를 자극했습니다. 그래도 그냥 웃었습니다. 맨 앞에 있던 푸근하게 생긴 전경에게 말했습니다. 두번째 있는 저 아저씨 좀 말려봐요, 하지 말재니까, 밀려날 때 밀려나더라도 좀 적당히 합시다, 말이 먹히는지 웃습니다. 밀리다밀리다 결국 차선 달랑 하나만을 남겨놓고 잠시 대치 상태가 지속됐습니다. 어떤 시민들이 앞 대열에 물을 전달해 하나 받았습니다. 전경에게 물 마시겠냐고 건넸더니 웃으며 거절합니다.
뒤에선 어떤 시민들이 기타치고 노래하고,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녀 두 커플은 서로 장난을 칩니다. 한 아주머니는 전경 앞으로 가서 설교를 합니다. 설교가 너무 길어져서 말리고도 싶었으나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니라 그냥 보고 있었습니다. 어떤 할아버지는 앞으로 다가와 뭐라뭐라 하고 다시 등을 돌리고 나가십니다. 경찰이 세번째 경고를 해왔습니다. 대치 상태는 계속 되었고, 그 푸근한 얼굴의 전경이 갑자기 제 뒤를 보며 웃습니다. SBS 카메라 기자인지 기자 보조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 사람을 향해 손흔듭니다. "친구에요?" "아니요, 저희 소대에 있다 제대한 선임입니다." "아 이런 경우도 있군요. 재밌네요. 기자 됐나봐요?" "네 그런가봅니다." 푸근한 전경 주변에 있던 다른 전경들도 서로 수다떨며 웃습니다. 한 전경이 앞으로 오라 손짓했지만 카메라 기자는 그냥 그자리에서 손만 흔듭니다.
시간은 어느덧 9시반. 3차 경고 이후 갑자기 무장을 한 경찰 아저씨들이 전경을 뒤로 물리고 인간띠를 형성해 앞으로 치고 나옵니다. 나이가 많아 보입니다. 말을 건넸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치고 오면 좀 그렇잖아요. 때되면 물러날테니 적당히 치고 오세요." 그냥 털털하게 웃습니다. 순식간에 보도블록 위로 밀렸습니다. 날이 춥고, 어둡고, 지치고, 여기서 더 다른 상황이 벌어질 것 같진 않아 오늘은 이만 돌아왔습니다. 다음엔 목도리와 장갑을 꼭 가져가야겠습니다. 마스크도. 사진, 동영상을 많이 찍힌거 같습니다. 아까 그 녀석이 마스크를 뺏어가는 바람에. 꽤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채웠고, 오랫동안 촛불을 들었습니다. 내일도 크게 집회를 한다고 합니다. 2월 2일 월요일 7시에도 집회를 한답니다. 다시 촛불은 타올랐습니다.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추운 겨울이 됐지만, 잠시 휴식을 취했을 뿐 촛불은 여전했습니다.
참조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