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주제 사라마구 지음, 김승욱 옮김 / 해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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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말할 가치가 없거나, 딱 한 번만 말하면 되는 말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더 가치있는 다른 말의 자리를 차지해 버릴 것이다. 그 말이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 말이 불러올 수 있는 결과 때문에 그렇다. -48쪽

사방에서 풀이 자라고 있어서, 백 년도 채 지나기 전에 이 진흙 언덕 밑에 누가 묻혀 있는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설사 그때 사람들이 무덤의 주인을 여전히 알고 있다 해도, 그들이 무덤에 관심을 보일 것 같지는 않다. 누군가의 말처럼, 죽은 사람은 깨지거나 떨어져 나온 부품을 붙일 때 사용하던, 시대에 뒤떨어진 꺽쇠, 아니면 지금처럼 비유를 이용한다면, 거억과 후회라는 꺽쇠를 붙일 가치도 없는 깨진 접시와 같다. -54쪽

혼란에 빠진 사람에게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한다. 마치 자신을 앙는 것이 쉬운 일인 것처럼. 모든 것에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말한다. 매일 이 말을 뒤집어 버리며 즐거워하는 잔혹한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우유부단한 사람에게 우리는 모든 것은 첫걸음부터라고 말한다. 마치 느슨하게 감겨 있는 실의 끄트머리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어서 그 끝을 계속 잡아당기기만 하면 반대편 끝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실이 얽히지도 않고 헝클어지지도 않아서 매끄럽게 계속 풀려나오는 것처럼. 실이 이렇게 풀려나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여기서 흔해빠진 표현을 한 번 더 써도 된다면, 인생이라는 실타래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중략) -89-90쪽

(이어서) 이것은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의 망상이다. 첫걸음이 실의 끝자락처럼 분명하고 정확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첫걸음은 길고 고통스럽고 느린 과정이며, 그 첫걸음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알아내려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첫걸음은 마치 눈먼 사람처럼 길을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고, 첫걸음은 첫걸음일 뿐이다. 그 전에 있었던 일은 거의 가치가 없다. -90쪽

여자들의 생각은 대체로 다르다.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아니라면, 밤이나 오후나 오전을 온전히 둘이서만 보낼 수 있다면, 여자는 사랑의 행위를 하기 전에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편을 더 좋아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남자의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팽이처럼 소용돌이 치고 있는 그 성적인 충동 말고 다른 것에 대해서. 아주 깊어서 서서히 물에 차오르는 물병처럼, 여자는 아주 천천히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아니, 여자가 남자를 자신에게 끌어당긴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마침내 남자의 절박함과 여자의 갈망이 일치하면서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물병 속의 물은 노래를 부르며 물병 가장자리까지 차오른다. -149쪽

모든 사전들은 우스꽝스럽다는 단어의 뜻을 조롱거리나 웃음거리가 될 만한 것, 경멸받아 마땅한 것, 우스워 보이거나 코미디로 변질되기 쉬운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참으로 놀라우면서도 안심이 되는 의견일치가 아닐 수 없다. 사전의 입장에서 보면, 개별적인 정황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사전에는 정황이라는 단어가 어떤 사실에 동반하는 상태로 정의되어 있고, 괄호 속에는 사실과 정황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 되며, 정황을 먼저 고려하지 않고 사실을 판단해서도 안 된다는 경고가 분명히 실려 있는데도 말이다.-215쪽

어쩌면 꿀벌의 비밀이라는 것은 고객에게 적절한 자극을 주어 욕구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사용가치가 점점 높아지도록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용가치가 높아지면 곧바로 교환가치가 높아질 것이다. 교환가치는 교활한 생산자가 구매자에게 강요하는 가치이다. 생산자는 서서히 교묘하게 구매자의 내적인 방어벽을 무너뜨린다. 이 방어벽은 구매자가 자신의 성격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만약 오점 하나 없는 결백한 사람이 정말로 존재했다면, 이 방어벽이 비록 불확실하기는 할망정, 그에게 최소한의 저항력과 자제력을 부여해 주었을 것이다. -322-323쪽

그냥 살다 보면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할 뿐이죠, 마치 그 흐름에 반항할 힘이 없는 것처럼, 그러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강이 우리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와요, 다른 사람들은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만 우리만 그걸 눈치채는 거죠, 누가 우리를 본다면 물 속으로 빠지기 직전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우리의 항해기술은 절정에 이르러 있죠. -4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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