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난 이런 영화인줄은 몰랐다. 대략 내가 예상한 바는 영화 <비포선셋>이나 <비포선라이즈> 정도의 단촐한 대화형식의 로맨스인줄 알았다. 예상은 빗나갔다. 이는 전적으로 내가 사전에 영화 줄거리를 검색해보지 않은 탓, 광고를 미리 접해보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마음에 안들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대체로 흡족했다. 하지만 나 같은 생각을 하고 이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은 아마도 실망하는 부류가 더 많으리라 생각된다. 더불어 이 영화는 흥행에 있어서는 그다지 성공적일 것 같지도 않다.

 미국영화이지만 미국식 사랑 영화라기보다는 프랑스식의 사랑 영화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확실히 사랑에 있어서 조차도 비주류 영화-주류와 비주류가 뭐냐고 묻는다는 건 우습지만-로 분류되는 영화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비주류 영화들이 소수의 관객만을 만족시키듯이 이 영화 또한 그 공식을 벗어나지는 않을 터이고 다수의 관객을 만족시킨다는 전제가 깔려야하는 흥행성적에는 그다지 영향력이 없다는 말이다.

 단지 이 영화가 혹시라도 관객을 좀더 끌어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영화가 재밌다는 입소문 때문이 아니라 쥬드 로를 보러 오는 여성관객과 줄리아 로버츠나 나탈리 포트만을 보러오는 남성관객 때문이리라. 즉 영화 내용과 상관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들을 보러오기 때문일 것이라는 말이다.

 영화는 "안녕! 낯선 사람" (헬로우! 스트레인져) 라는 대사로 급속한 스토리 전개가 이어진다. 저마다 제 갈길을 가는 도심의 복잡한 거리에서 두 남녀가 반대방향에서 마주보고 걷다 서로를 쳐다본다. 여자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깨자 그를 향해 "안녕! 낯선사람"이라는 대사를 날려준다. 물론 현실에서 그럴 여자는 찾아보기 힘들 듯.

 둘의 사랑이 이어지고, 남자의 외도, 그리고 여자의 이별선언, 또 다른 여자의 외도, 그의 남편의 이별선언. 네 사람이 엮고 엮이는 스토리는 영화 <콘스탄틴>의 유행어(?) "또 엮였군요"를 연상시킨다. 아 이런 또 엮여버렸다. 엮이면 언젠가 꼬이게 마련이다. 두 남자와 두 여자는 서로 엮여 꼬여버렸고 결국 꼬임의 결과는 이별이다.

 이들의 사랑방식은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아닌가? 정상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비정상성을 숨기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것이 비정상적인 사랑방식으로 보이는걸까? 진실은 스스로만 알 수 있다. 이상한 사랑이기는 하지만 가능한 사랑이기도 하다는 것이 나의 감상. 그렇다고 내가 저들의 사랑방식으로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난 27살 먹는 동안 사랑이라고는 그다지 경험이 없는 초짜이니 말이다.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모두 떠나서. 사랑 그 자체로서.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사랑을 모른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단 한번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강하게 왔다 가면 쓰라린 법이다. 사랑은 서서히 갑작스레 왔고 서서히 진행되다 갑작스레 떠났다. 원래 사랑은 그런 거다. 어제까지 사랑했던 이들이 다음 날 "헤어져"라고 말하는 건 그땐 충격이지만, 그리고 그 상황을 경험하는 당시에도 충격이겠지만, 그리고 상황이 종료된 이후에도 충격으로 남아있겠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애써 준비하지 않을 뿐이다.

 상당한 수위의 상당한 시간 동안의 노출씬. 역시 영화는 18금이었다. 난 몰랐다. 영화를 직접 보기 전까지 이 영화가 18금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알았더라도 18금이 뭐 오늘날 대수로운 정돈가. 같은 18금이라하더라도 영화마다 천차만별인 것을. 하지만 단체로 관람하기에는 다소 야했다. 하핫. 이 영화를 보며 8명의 남녀가 단체 관람을 한 팀은 우리 밖에 없을 터. 뻘쭘.

 그들을 비정상이라 말하지 마라. 당신의 마음 속에도 그들의 캐릭터가 존재하고 있으니. 다만 표출되지 않았을 뿐.

 아웃사이더, 비정상, 변태, 괴짜, 우울, 사랑 이라는 키워드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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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5-02-14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웃사이더, 비정상, 변태, 괴짜, 우울, 사랑 이라는 키워드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추.천....켁..보려고 했는데 마지막 멘트가...=.=;;

마늘빵 2005-02-14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 비연님도 혹시 마음 속에 그런 키워드 하나쯤은 없나 생각해보세요. 전 많은데...ㅋㅋ

2005-02-14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자와 21세기 - 1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9년 11월
절판


"최소한 대학교육은 거의 완벽하게 국가의 손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대학교육은 그 나름대로의 법칙이나 자유경쟁의 사회체제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운영되도록 방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학이야말로 사학이 관학을 리드해야 하며, 사학은 국가제도의 통제권 상위의 도덕성에 의하여 자율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다. 국가의 개입이 어느 상황에서든지 긍정적 효과보다는 부정적 효과만을 잉태시켜 온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브레인 코리아"와 같은 발상 그 자체가 근원적으로 대학의 성격 자체를 잘못 이해한데서 출발한 발상인 것이다."
('방송문화의 한 전기를 위하여'에서)

밑줄그은 이 주 : 개인적으로는 도올의 주장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내가 보기에 그의 주장은 지금의 대학들이 돈되는 과를 키우고 기업맞춤형 인재를 양성해내기 위한 체제로 돌입한 것에 대해 동의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쪽으로 상당부분 오해될 염려가 있다. 아마도 그의 주장은 정부든 기업이든 간섭을 받지 말고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과거의 서당과도 같은 형식으로 꾸려야된다라는 말 같다.-13쪽

"기술이란 본시 삶의 예술의 모든 것을 지칭한다. 즉 기술이란 살아가는 방편으로서 필요한 모든 예술 즉 기예(테크네)를 말하는 것이다."
('21세기의 3대 과제 중)-32쪽

"과학이란, 인간의 지식을 특징지우는 어떠한 측면이다. 과학이란 기술과는 무관한 인간의 사변이성의 산물인 것이다. 과학의 특징은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를 법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때 '법칙적'이라는 것은 대강 희랍인들에 의하여 "연역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는데, 이 연역적인 인간의 사유의 방법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수학"이라는 것이다."('21세기의 3대 과제 중)-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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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21세기 - 1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언제 어디서고 무슨 일만 하면 무슨 말만 하면 화제가 되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대중철학서다. 실제로 EBS를 통해 노자를 강의하면서 티비로뿐만 아니라 책으로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노자 철학서를 쓴 것이다. 그러나 티비를 보듯이 일반 대중이 이 책을 그냥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지 싶다. 아무리 대중을 위한 책이라고 하더라도 노자를 해석하는데 있어 이론이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고, 최대한 쉽게 썼다고는 하지만 그 이론의 난해감, 여러 해석의 가능성 때문에 소설 읽듯 쉽게만 읽을 수는 없는게 사실이다.

 <노자와 21세기>에서 소개되는 책은 우리가 흔히 <도덕경>이라고 알고 있는 책이다. 오래전에는 이를 <노자>라고도 했으나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는 <도덕경>이 가장 널리 쓰인다. 그러나 <노자>가 됐든 <도덕경>이 됐든 또 그 옛날의 <덕도경>이 됐든간에 서로 다르게 불려지는 것일 뿐 이들이 모두 같은 책임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다만 <덕도경>과 <도덕경>은 道편과 德편 중 어느 것이 책의 앞부분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불리울 뿐이다.

 나는 철학과를 다니면서 노자철학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기억나는 것은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그것은 도가 아니다"라는 <도덕경>의 첫구절뿐이다. 공부를 게을리한 탓이겠지만 말이다.

 <도덕경>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다. 엄밀하게는 판본이 여러가지라고 해야할 것이다. 1973년 마왕퇴에서 발견된 비단에 쓰여진 도덕경, 1993년 곽점촌에서 발견된 대나무에 쓰여진 도덕경, 그리고 기존에 알려져있던 왕필의 도덕경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뉘우며,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이 세가지 모두를 다 종합해서 소개하고 있다. 기존의 도덕경이 왕필의 것에 크게 의지한 반면 도올의 해석은 세 가지를 다 참고해다는 것이 특이사항이다. 그러나 난 다만 세가지가 있다는 것만 알 뿐 자세한 건 모르겠다. 이 책을 열심히 꼼꼼하게 읽는다면 그 차이를 혼자서도 깨우칠지 모르겠지만 난 그다지 열심히 읽지는 않았다. 이론적인 부분은 그냥 넘기고 도올의 경험담과 관련된 해석을 즐겨 읽었을 뿐이다. 따라서 도가사상의 이론에 관한 논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도올의 도덕경이 다른 도덕경에 대한 해석본과 다른 점이 또 있다. 도올은 지극히 일상적인 체험을 기반으로 해서 도덕경을 풀이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대중서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어릴적  할아버지와의 경험부터 최근에 자신이 세계 곳곳에서 강의했던 체험까지, 뉴질랜드에서 랍스타를 먹은 일까지 세세하게 드러내며 일상 속으로 노자를 안내한다.

 대중서라고 해서 쉽게 구입해 읽을 만한 책은 아니지만 그저 도올에 대한 에피소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재미를 느껴도 좋을 것이다. 더불어 홀로 이 책을 토대로 꼼꼼히 공부한다면 노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도덕경>과 관련해 그렇게 강력히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지만 참고할 만한 서적은 된다.

 

노자와 21세기(전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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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스탄틴>이라는 영화가 개봉되기 전부터 영화광고문구에는 항상 '<매트릭스> 그 이후'라는 문구가 따라붙었었다. 그리고 유독 매트릭스와 함께 영화의 주인공이 키아누 리브스임을 강조했다. 이 영화는 어쩌면 '매트릭스'와 '키아누 리브스'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에게 덜 관심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를 홍보하는데 있어서 그 둘을 이용해먹었다 하더라도 영화의 품질은 결코 기대이하로 떨어지지 않은 작품이다. 한 마디로 인상 깊었다.

 영화는 <매트릭스>에 버금가는 현란한 개인기(?)와 액션을 선보이지는 않지만 고독한 한 영웅의 고민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트릭스>와 공통적이다. 그런데 그 고독한 영웅은 두 영화 모두에서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영웅은 탄생하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질 뿐이다."라는 말은 두 영화 모두에 적용시킬 수 있다.

 태어날때부터 천사와 악마를 구분하는 능력을 지닌 존 콘스탄틴.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마 혼혈족과 천사 혼혈족을 볼 수 있고, 악마 혼혈족을 퇴치하는 퇴마사다. 한때 자신의 이와 같은 능력을 저주해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시 살아남았고 결국은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살며 혼혈 악마를 지옥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일상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악마의 아들이 이승으로 나타난 것이다. 콘스탄틴은 지상의 선악의 균등이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악마의 아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선다.

 결국 예상했던대로 승리는 그의 것이다. 하지만 결과를 뻔히 들여다보면서도 영화의 중간중간 공포영화인지 사람 놀래키는 여러 장면들과 특수효과, 그리고 영화의 진행에 있어 전제되어있는 내용들로 인해 볼거리와 생각거리를 동시에 전해주고 있다. <매트릭스>를 처음 접했을 때의 그 수많은 충격까지는 아니지만 이 영화 역시 여러 가지 생각거리와 볼거리를 던져놓고 간다는 점에서 영화관람 후의 파장이 크다.
 
 이 영화는 기독교 홍보영화인가? 영화를 보고있자면 마치 교회 다니세요, 교회 안다니면 지옥가요. 아까 지옥불 보셨죠? 라고 관객에게 말하는 듯 하다. 시나리오를 만든 사람이 독실한 기독교신자인지는 난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애초에 천국과 지옥을 전제하고 천사와 악마의 대결구도를 만듦으로써 천국과 지옥의 존재는 당연시된다. 물론 영화 속의 가정이지만 함께 영화를 본 다른 이가 "우리 교회다니자"라는 말을 꺼낼 정도면-물론 우스개소리지만- 영화는 대단한 기독교 홍보효과를 뽑아내고 있다고 봐야겠다. 그야말로 상상속에서나 가능한 엄청난 지옥불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믿어야하고 교회를 열심히 다녀야한다라는 메세지를 보이지 않게 흘려놓는다.

 영화 줄거리에서 특이할 점 또 하나는, 현실세계에도 천사와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이는 현실에도 천국와 지옥이 있다는 말이다.
현실은 선과 악이 대결하고 있으며 혼혈 천사와 악마는 인간의 행위에 전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매개를 통해 이들을 조종할 수는 있다. 천국과 지옥은 기독교에서 말하듯 죽음 뒤의 세계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 속에도 존재하며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행위의 결과로 그것은 천국이 될 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영화를 보기 전에도 본 후에도 마찬가지로 천국과 지옥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의 존재여부를 내게 묻는다고 해서 이에 대한 마당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메세지에는 공감한다. 그것의 목적이 구원이든 아니든 간에 현실 세계에서 바른 행위를 하고 선하게 살라는 것이다. 구원을 제외하고는 이는 모든 종교가 말하는 현실의 삶의 태도이다. 기독교라는 영화 속 배경은 내게 있어선 그저 하나의 영화 속 장치일 뿐 내가 주목하는 것은 영화의 메시지다.

 우리네 현실 삶 속에서 혼혈 악마와 혼혈 천사가 존재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개인에 따라 좀더 선한 본성을 키운 사람과 악한 본성을 키운 사람은 존재한다고 본다. 본래 인간은 백지상태라고 생각하며(중국의 고자의 성무성악설) 선과 악의 본성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본다면 자라나면서 어떤 본성을 키워내느냐에 따라 지금의 나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본다.

 어찌되었건 "착하게 살자"가 영화가 주는 메세지인 듯하다. 더불어 영화는 금연광고와 금주광고도 함께 하고 있다. 연신 담배만 피워대는 존 콘스탄틴은 결국 폐암으로 두달에서 일년정도밖에 못산다는 경고를 받고, 그의 친구이자 신부는 알콜 중독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적시에 알콜을 섭취하지 못함으로써 사망한다. 담배피지 맙시다. 과음하지 맙시다. 공익광고가 따로 필요없다.

 키아누 리브스는 이 영화를 통해 <매트릭스>에 이어 확실한 인류의 구원자 역할을 굳히게 되었다. 고독한 사색하는 어딘가 좀 어설퍼보이는 영웅의 이미지. 인류는 어쩌면 이런저런 갈등과 분쟁 속에서 구원자를 희망하며 영화 속에서 그 갈증을 해소하는지도 모르겠다. 또, 서양식의 성장중시, 물질중시의 풍조로 인한 여러 폐해의 속출이 동양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매트릭스>에서도 그러했고, <콘스탄틴>에서도 그러하다. 레바논 태생이며 중국계 하와이인의 아버지를 두고 있는 키아누 리브스가 그 구원자 역할을 맡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구원자로서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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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2-11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얼핏 예고편 보니, '데블스 애드버킷' 생각 나더군요.

마늘빵 2005-02-11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그 영화 굉장히 인상깊게 봤어요. 그러고보니 소재가 비슷하네요. ^^;
 
이문열과 김용옥 - 하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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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이론서적도 아닌데 책 한권 읽는데 3일이나 걸렸다. 아주 부담없는 인물비평서인데도 말이다. 설연휴임에도 이 정도라면 나는 참 놀고 먹는 백수다. 게으름증이 뼈 속까지 스며들었나보다.

 이 책은 <이문열과 김용옥> 전 2권 중 김용옥 비판에 대해 다루고 있는 하권이다. 상권이 머리말을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이문열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는 반면, 하권은 책의 절반 가량만을 김용옥을 위한 장에 할애하고 나머지는 다시 이문열에게로 돌아가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만큼 강준만 교수는 이문열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았나보다.

 상권을 읽고 쓴 리뷰에서 상권은 이문열, 하권은 김용옥을 위한 책이라고 말했지만 수정해야할 듯 하다. 김용옥 비판에 대한 글을 읽기 위해서는 하권만 읽어도 충분하지만, 이문열 비판을 위한 글을 읽기 위해선 상, 하권 모두 읽어야겠다. 단 하권의 앞 절반가량의 김용옥 부분을 제외하고 말이다.

 상권과 하권이 차이점은 또 있다. 이는 엄밀하게는 상권과 하권의 차이라기보다는 강준만의 이문열과 김용옥에 대한 시선의 차이라고 해야 옳겠다. 강준만은 이문열에 대해서는 '얄짤없다'. 하지만 김용옥에 대해서는 김용옥을 둘러싼 수많은 비판을 물리치고 그를 옹호하는 면모를 보인다. 심지어 일본 가나가와대 윤건차 교수의 책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에서 한국의 지식인 지도에 있어서 동일하게 '비판적 자유주의' 진영에 속해있는 진중권으로부터 가혹한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강준만은 김용옥을 옹호한다.

 물론 강준만은 김용옥을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김용옥 비판은 옹호에 비하면 매우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그의 이문열과 김용옥에 대한 관점은 내가 책을 읽기전에 가지고 있었던 두 사람에 대한 그것과도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어 반갑기까지 하다.

 나는 강준만 만큼이나 구체적으로는 아니지만 이문열의 정치적 언사에 대해서 심히 불쾌했었고, 김용옥에 대한 항간의 비판에 대해서는 그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져서 안아주고 싶었을 정도였다. 표현이 너무 너무 과장되었나? 어쨌든 나의 두 사람에 대한 시선은 이 책을 읽기전에도 강준만의 그것과 비슷했다.

 김용옥은 주변이 모두 경기고-서울대 출신인 KS 마크를 밟은 집안에서 자랐고, 홀로 지지리도 공부못하는 바보로 취급받으며 고려대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SKY대학인데 바보 취급했다니 너무한다. 그래도 먹어준다는 학벌이 아닌가? 그럼 스카이도 못간 이들은 뭐가 되나? 이것도 스카이 아닌 이들에게 가해지는 또다른 '지식폭력'이다.

 어쨌든 김용옥은 한국사회 전체에서 보자면 괜찮은 학벌이지만 그 집안에서는 나홀로 돌탱이인 고려대를 들어갔고 무지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나보다. 그러한 집안의 지식폭력에 시달리며 그는 고려대 철학과에 재입학해 대학원을 마치고, 대만, 일본, 미국의 최고 대학들에서 학위를 받아 한국에 '당당하게' 돌아왔다. 서울대는 가볍게 제친 것이다. 그의 학벌 앞에서 서울대는 우습다. 게다가 40중반 나이에 원광대 한의학과까지 들어가 졸업하고 한의학 자격을 획득하다니. 실로 그의 공부벽이 놀랍다. 아니 학위수집벽이라 해야겠다. 

 그렇게 그는 한국사회에서 그 누구도 무지할 수 없는 막강화력의 학벌을 가지고 떵떵거리며 자신의 철학을 펼친다. 그것도 최초로 EBS 방송을 통해 전국 생방송 중계되는 2시간 넘는 철학강의를 펼치다니 실로 놀랍다. 그런데 그 사실만으로 놀라운데 더 놀라운 것은 일반 시민들이 그의 강의에 푹 빠져 헤어나오질 못하는 사이비 종교단체의 광기와도 같은 분위기다.

 바로 여기서 김용옥에 대한 비판이 거세진다. 당신은 연예인인가, 철학자인가? 를 시작으로 도올이 펼치는 노자강의가 학계에서 통용되는 정식해석방식이 아닌갑네, 니 강의 방식이 영 마음에 안든다 왜 욕설을 지껄이느냐는 등 비판도 가지가지다. 자신을 천재, 신이라고 표현한 도올이 열받을만하다.

 강준만은 이들의 모든 가지각색의 비판들을 종합해 반론을 펴고 도올을 구해준다. 하지만 그라고 도올의 모든 것을 포용하지는 않는다. 극우 언론을 비롯한 수구반동세력의 입을 빌어 글을 쓰는 것이나 노태우, 김영삼의 똥구멍을 핥는 용비어천가를 내놓은 것도 영 못마땅하다. 이점에서는 나 또한 강준만에 동의한다. 나도 도올의 이런점만은 영 못마땅하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도올이 철학을 대중화시킨 점이나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학문을 아무나 접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지식폭력으로부터 대중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철학은 그들만이 언어가 아니다. 지금껏 그랬을지 모르지만 도올은 이를 거부하고 쉽게 쉽게 쓰고 일부러 재밌으라고 욕도 섞고 무당이 굿하듯 쇼도 하면서 강연을 한 것이다.

 그가 자신에 대한 비판에 답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또다른 지식폭력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던 핵심적인 지식폭력, 지식의 독점을 깼다는 점에 비하면 그의 또다른 지식폭력은 아주 사소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김용옥을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학문을 혼자만 소유하려하지 않았고 대중과 함께 하길 바랬으며, 그것이 비록 쇼라는 형식을 통해 온갖 욕설이 난무하는 환경에서 벌어졌다 하더라도 대단한 일임은 인정해야한다. 우박 쏟아지듯 하는 비판에 결국 방송을 그만두고 잠적해버렸지만 나는 그가 다시 나와 광기를 부려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덧붙이며...

 나는 한국사회에서 영향력있는 SKY 학벌을 지니고 있지 않다. 나는 도올과도 같은 학벌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며 대학을 수직서열화시키는 이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대학의 수직서열화는 곧 한 개인의 인생의 수직서열화로 연결된다. 학벌을 타파하자는 구호는 간혹 곳곳에서 들리고 있지만 아직 멀었다. 학벌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사라진 듯 보일 뿐이다.

 나는 서울의 중위권 학부 대학을 나와 스카이중 한 곳인 고려대 대학원으로 간다. 그러나 우리네 학벌사회에서 적용되는 것은 석사, 박사를 어디서 땄느냐보다는 학부를 어디나왔느냐다. 그 점에서 나는 비록 고려대로 가 석사를  받는다해도 학벌사회의 피해자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도올이 지식폭력의 희생자였다고 하지만 도올은 나에 비하면 상위층에서 시작해 최상위층으로 올라선 셈이다. 나는 바닥에서 시작해야한다.

 또한 서열화에 있어서 나보다 못한 대학을 나온 이들은 나보다 더 밑에서부터 그들의 인생을 시작해야한다는 점에서 나보다 더한 지식폭력을 경험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학벌타파가 유일한 해법이지만 학벌은 타파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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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2-09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첫직장에서 이대석사가 한명 있었는데 어느날 사장이 그 사람에 대해 "학력세탁이나 한 것이 말이야"라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그 사람이 다른 여대학부를 나오고 대학원을 이대로 갔다 해서 한 말이더군요^^ 약간 끔찍하죠?

마늘빵 2005-02-09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런 너무하네요. 대학원을 좋은데 나와도 그걸 또 세탁했다고 하는군요. 우리나라의 학벌구분이 역시 '학부'에 있다는걸 증명하는 한 사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