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하하. 영화 포스터 정말 잘 만들었다. 영화의 줄거리를 이렇게 재밌게 단촐하게 요약해준 포스터도 없을 것이다. 대개 영화 포스터는 실제 영화 속 장면의 일부분을 따가 삼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언젠가부터 영화 속의 장면보다는 영화의 줄거리와 내용, 장르를 한꺼번에 잘 보여줄 수 있는 설정형의 포스터들이 많아지고 있다. <달콤, 살벌한 연인>의 포스터 또한 그와 같은 종류. 최강희가 무식한(?) 부엌칼을 들고 생닭을 도마위에 올려놓고 살벌한 표정으로 요리하려 들고, 한쪽에선 냉장고로 추정되는 폐쇄된 공간에 구석에 찌그러져 묶여있는 잔뜩 쫄은 박용우가 올려져있다.

  "수상한 남녀의 예측불허 연애담" 이라는 짧은 수식어 또한 영화의 줄거리를 매우  함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본으로 만들어졌다는, 대박 배우도, 대박 감독도 없는 이 영화가 이만큼의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영화에 대한 올바른(?) 기대감을 심어줬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재미도 재미지만 개봉이전의 포스터를 비롯한 광고에서부터 영화는 110분의 줄거리를 한 컷의 설정 사진에 적절하게 담아내고 있다. 영화에 대한 관객의 기대와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의 감상이 딱 떨어지게 만든 것이다. 올바르지 못한 기대감을 갖게 하여 극장 좌석에 앉힐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의 실망감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영화판 상황이다. 이미 영화를 보고난 관객의 입소문은 그 무엇보다 확실한 영화 광고다. 그러니 괜한 기대감을 갖게 만들어 영화를 보게 만드는 것보다 이렇게 제대로 된 기대감과 그에 맞는 만족감을 선사하는 영화가 오래간다. 백만 스물 둘, 백만 스물 셋. 힘세고 오래가는 건전지 에너자이저.

 

* 대학 영문학 강사 황대우. 앞좌석에서 그가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은 듣지 않고 문자질을 하고 있는 여학생을 쳐다보고 있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 아휴. 한심한 것들.



* 우아한 저 자태. 와인잔을 살짝 손에 쥔 포즈하며, 깔끔하고 단정하면서도 섹시한 흰색 강의.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적당한 조명 아래 와인 한 모금의 맛을 느끼는 그녀. 그녀가 살인자라고요? 어떻게 믿어요?

  살벌녀 최강희. 본명 이미자. 가명 이미나. 나이는 20대 후반으로 이탈리아에서 그림공부를 하려고 계획중이다. 정말? 옛 남자친구 처리하기가 특기이며 남자 꼬시는데도 일가견이 있다. 칼 좀 쓸 줄 알고 김치냉장고를 사랑한다.

 달콤남 박용우. 이름 황대우.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대학교에서 영문학 강사를 하고 있으며, 닭살커플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연애라는건 유치한 애들이 하는 짓거리라는 그가 경험한 첫 연애는 과연 어떤 연애? 허리다치고 갑자기 연애가 하고 싶어졌다는 그는 아랫집에 사는 신비한(?) 분위기의 그녀에게 푹 빠져 얼떨결에 데이트를 하게 되고, 닭살 커플을 제일 싫어한다는 그가 영화도 같이 보고 손도 잡고 키스도 하고 하룻밤을 함께 보내기도. 그런 그가 어느날 이렇게 말한다면. 전 세상에서 김치냉장고가 제일 싫어요.

  선수녀와 순수남의 만남. 전혀 선수 같아 보이지 않는 그녀는 연애에도 선수지만 살인에도 선수다. 손잡고 키스하고 혀 집어넣고 껴안고 온갖 스킨쉽의 여왕이면서 이렇게 달콤한 면모 이면에는 눈깜빡하지 않고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냉정함(?)을 갖추고 있다. 이 절묘한 조화. 최상의 조합인가. 확실히 선수는 선수다. 이런 선수에게 공부만 했던 순수남이 걸려들었으니 어찌 벗어날 수 있으랴. 죽음은 면할 수 있을까. 뭐 그가 그녀에게 잘만한다면야 죽이기야 하겠어.

  영화는 매우 재밌다. 달콤하게 키스하면서도 살벌하게 칼부림하고 코믹한 대사 던져주는 센스. 두 주인공 못지 않게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한 커플이 있으니, 그들은 장미와 계동.

#1
장미 "칼질도 해본 년이나 잘하지. 입맛이 좀 없네요. 넌 참 비위도 좋다 미나야. 어제는 쑤시고 오늘은 썰고."

#2
미나 "지금 나한테 씨발 이라고 그랬어요?"
대우 "네 씨발이라고 했어요. 나도 화나면 욕해요. 씨발."
계동 "씨발이 욕이랜다. 씨발"

#3
대우 "이게 뭐에요?"
미나 "혀요. 혀 싫어요? 빼요?"
대우 "빼지마요. 빼지마. 혀 너무 좋아."

#4
대우 "참 너도 키스할 때 입에다 혀 집어넣고 그러니?"

#5
미나 "땀 때문에 씻어야 되는데"
대우 "괜찮아요. 저혈압이라서 짜게 먹어도 돼요."


  아주 대사들이 어쩜 장면장면과 그렇게 딱딱 떨어지면서 웃음을 자아내는지 110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봤다. 너무나 적나라하고 솔직한 대사 때문에 웃고, 또 너무나 재밌는 상황에 살벌한 대사 때문에 웃기도 하고. 웃음을 자극하는 요소는 각각 다르지만 공통점은 웃기다는 사실. 살벌해도 웃기고 적나라해도 웃기고. 두 사람의 표정이며 행동이며 대사 하나하나며 어쩜 이렇게 코믹할 수가 있는지. 또 보고 싶다. 

  <이 영화를 통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것 >

  하나.  평생 공부하느라 연애  한번 못해본 사람들은 순수하다. 그리고 쉽게 넘어간다. 그리고 푹 빠진다. 작업에 성공하기 위한 비법 하나. 순수남, 순수녀를 공략하라. 살짝 작업들어가도 금방 넘어온다.

  둘. 공부남, 공부녀는 연애에 관심없다? 노 노 노. 관심있다. 그런데 관심 없는 척하는 거다. 연애에 관심 없는 남녀가 어딨어.

  셋. 이쁜 여자는 살인해도 된다? 된다 된다 된다 안됀다. 되긴 뭐가 안돼. 안돼지. (무슨 소리야) 어떤 의도에서 살인을 했건  살인은 용납되지 않는다. 영화는 두 남녀의 재미난 연애담을 담아내느라 살인을 저질러버린 미나에 대해 너무나 관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살인'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영화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묻어가게' 되는건 안된다. 사랑하면 살인도 용서가 된다? 그건 아니지. "과거는 상관없어. 사람만 안죽였음 돼지"라던 대우의 첫날밤의 대사는 영화 말미에 "괜찮아 뭐 죽일 수도 있는거지." 로 치환된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영화는 코믹한 요소를 자아내기 위해 살인이라는 소재를 삼아 살벌함과 달콤함을 버무렸지만 그렇다고 살인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뭐 이 영화가 의도적으로 그리 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넘어갈 수만은 없는 부분인 것은 사실.

  영화가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또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도 아니지만, 실제 범죄자들은 어떤 영화나 음악, 소설을 통해 살인을 결심하게 되는 사례들이 실제로 있다. 마릴린 맨슨의 음악을 듣고 총기난사를 했던 미국의 어느 고등학생 이야기나 영화 <친구>를 보고서 죽이는 법을 배웠다는 한 젊은이의 말은 영화나 음악, 소설 등의 문화적 매체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 또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박용우와 최강희. 두 사람 모두 영화계 거물은 아니다. <여고괴담>으로 얼굴을 선보인 최강희는 이후 드라마와 영화에서 종횡무진하며 그녀만의 매력에 푹 빠지게 만들었다. 그다지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연말마다 상을 받는 드라마나 영화는 없었지만, 그녀가 출연한 작품들은 모두 나를 포함한 그녀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매니아층을 만들었다. 드라마 <광끼> <학교> <단팥빵>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와니와 준하> 등. 오히려 영화로 얼굴을 선보였지만 영화보다 드라마에서 더 강세를 보였던 그녀. 난 그녀가 너무 좋다. 특히나 일요일 아침마다 했던 <단팥빵>을 보기 위해 꼬박꼬박 8시에 일어나던 그때가 생각난다. 최강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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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05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무지하게 잼나게 봤는뎅^^ 근데 끝이.. 좀... 허무했어요..ㅠㅜ 그냥 베스트극장의 결말 같은..?? 그것만빼면 재미있는 영화였는듯...

마늘빵 2006-05-05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 저도 이거 재밌게 봤어요. 끝은 정말 무슨 베스트극장 결말처럼 끝나버렸죠? 결국 맺어지지도 않고.

비연 2006-05-05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요즘 영화를 많이 보시는 듯~^^ 덕분에 평 열심히 잘 읽고 있어요..ㅋ
가서 보지는 못하고 대리만족하는 비연...으흐흑~

마늘빵 2006-05-06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 비연님. 이주전쯤부터 본 걸 계속 귀찮아서 안쓰고 있다가 오늘 필받은김에 다 썼어요. 아 다는 아니고 또 남았어요. ^^

비연 2006-05-07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그렇군요....^^;; 전 낼 미션 임파서블 3를 볼 예정인데..

마늘빵 2006-05-07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그거 보고 왔어요. ^^ 써야지...
 



  요즘 개봉되고 있는 한국 영화에는 대작 감독들의 작품이 전무하다. 죄 신인감독들, 혹은 한 두편의 그닥 성공하지 못했던 감독들의 작품이 대부분. <사생결단>의 최호 감독 역시 처음 들어본 사람이었고, 가벼운 뒷조사 결과 그는 <후아유>와 <바이준>으로 얼굴을 내민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두 작품 모두 보지 않았으니 패스.

  "한국판 느와르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라고 하여, <달콤한 인생>에 한국판 느와르의 맛을 제대로 들여버린 나로서는 이 영화 또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를 최고로 알았던 때에서 <달콤한 인생>으로의 놀라움을 느끼기까지에 이르며 푹 빠져버린 나는 <사생결단>까지 보고야 말았다. 그러나. 역시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뭐 그냥 "그럭저럭 만족" 이라고나 할까.

  범죄와 파멸이 반복되는 어두운 지하세계의 우울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 에이 인생 갈대로 가라는 자조적인 가치관과 시니컬하고 껄렁껄렁한 말투. 이런 영화들이 요즘 왜 이렇게 좋은지. 류승범과 황정민이라는 걸출한 두 배우를 앞세워 마약 판매상 대 끈질긴 형사의 구조를 삼아 전개되는 영화는 폼생폼사. 두 주인공의 옷차림이나 말투, 행동거지 하나하나  폼에 잔뜩 신경을 썼지만 그에 못지 않게 영화 속 배경이나 장면 하나하나, 구도 하나하나까지도 폼 좀 잡았다.


 

 

 

 

 

 



 

 

 

 

 

  폼만 잔뜩 들어간 마약 중간판매상 이상도. 사실 그는 별거 아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배운 것이 도둑질이니 할 줄 아는 게 이거 밖에 더 있으랴. 처음엔 꼬봉으로 시작해 지금은 그래도 부산에서는 어느 정도 어깨에 힘 좀 들어간 중간상이다. 또 다른 한편에는 사는게 그지꼴이지만 폼 나는 멋진 검은 선그라스에 살림살이에 맞지 않게 양복 빼입고 등장한 마약거물 장철을 잡는데 미친 무대뽀 경찰 도경장이 있다.

   이상도 VS 도경장

 장철 잡이에 실패하고 찌끄래기로 이상도를 감옥에 넣었던 도경장, "그 동안에 니 멀 해묵든... 최선을 다 해서... 뒤봐주께!" 라고 말만 그럴 듯 하게 포장해 출소한 이상도를 꼬드긴다. 믿어? 못믿어? 못믿어 못믿어 믿어 믿어 믿어, 로 바뀌어버린 이상도. 그는 순수한걸까 멍청한걸까? 다시 도경장의 그물에 말려들어 함정수사에 협조를 하고, 결국은 범인이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감지한 그는 범인을 신고하길 포기하고, 내 살 길 찾기 위해 또 한 탕 저지른다.   결국 죽음을 향한 두 사람의 질주는 한 사람의 죽음을 불러오고.

  진실은 없다. 살기 위해 몸부림칠뿐. 마약상인 이상도도 경찰인 도경장도 결국 각자의 살 길을 찾기 위해 질주했을 뿐이다. 삶의 정점을 향해 질주 했을 뿐이다. 진실은 없다. 단지 살고 싶었을 뿐. 제대로 폼 나게 한번 살아보고 싶었을 뿐. 폼 내기 이렇게 힘들어서야 쓰겠나. 결국 폼 잡으려다 목숨을 담보로 내놓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되니.

  폼 좀 잡으려는 사람들은 영화 <사생결단> 속의 그들이 아니라, 여기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돈 좀 더 벌어보겠다고,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살아보겠다고, 약육강식의 사회 속에서 짓밟히는 약자가 되기보다는 짓밟는 강자가 되겠다고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상도와 도경장. 그 어느 누구도 삶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합법과 범법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무엇이 합법이고 그 무엇이 범법이란 말인가. 한쪽은 범죄자로 한쪽은 경찰로 겉보기에 한쪽은 범법자로 한쪽은 법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로 비춰질지 모르지만 그건 껍데기일 뿐이다. 두 사람은 모두 폼나는 삶을 위해 살았고, 여기 우리들도 폼 나는 삶을 살기 위해 오늘을 산다. <사생결단>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양자택일을 한 우리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영화 속에서 가장 솔직하고 선량한 사람은 따로 없다. 모두가 솔직했고 모두가 선량했다. 이상도도, 도경장도, 마약계 거물 장철도, 이상도가 돌봐준 여자 지영이도. 삶을 위해 몸부림 쳤건만 누구는 죽임을 당하고 누구는 살아남고 누구는 새 삶을 찾았고 누구는 자살했다. 길은 정해져있지 않다. 끝까지 가봐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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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5-05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랑 같이 보는거에요? 애인 생기셨나...

마늘빵 2006-05-05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녀 요새 혼자보러 댕겨요. ㅠ-ㅠ

라주미힌 2006-05-05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헉... ^^;; 얼렁 애인 생기시길...
전 자꾸 집에서 결혼하래요. ㅡ..ㅡ;
뭐가 있어야 하지.

마늘빵 2006-05-05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 라주미힌님 결혼하기엔 뭐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나이 이시긴 하지만 아직 인생을 좀더 재밌게 즐기면서 보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어요. 전 아직 덜 놀아서. ㅋㅋㅋ 뭐 결혼한다고 삶이 쫑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전'과 '이후'는 분명히 다를테니.
 

  개봉전부터 실제 커플을 주인공으로 삼아 화제가 되었던 영화 <도마뱀>. 조승우를 좋아라하는 수많은 여성팬들과 강혜정을 좋아라하는 수많은 남성팬들 덕분에 특별한 홍보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홍보가 되고 입소문으로 널리널리 퍼졌던 영화. 그렇게 기대를 한껏 모았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영화는 생각만큼 썩 재밌고 감동적이진 않았다. 에이 그렇고 그런 사랑 이야기에, 가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던 환타지적 요소. 기대 이하였고, 대략 지금껏 영화 시나리오를 잘 선택해왔던 두 사람이 왜 이번엔 그러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도 가져본다. 아마도 두 사람이 모두 주인공으로, 영화 속 연인으로 출연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며. 또 한편으로는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나마 이 영화가 이 정도라도 빛나지 않았겠다는 생각도 해보며.

  슬프고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에는 항상 누군가 아파야 한다. 그리고 어릴 적 인연이 끊겼다 재회하는 장면도 있으면 좋다. 아슬아슬하게 맺어질 듯 맺어질 듯 하면서 끊어지는 인연은, 그리고 그것이 어느 한쪽에 의해 의도된 인연의 장난질이라면, 그리고 또 그 뒤에 숨어있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할 수 있으리라. 영화 <도마뱀>은 그런 영화다. 그런 이야기다.  


*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햇빛 쨍쨍한 날씨에도 노란 우비를 입고 다니던 엉뚱하고 당돌한 아이 아리 

 
* 18살이란 나이에 다시 만난 우리는 그만 또 헤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녀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지구인이 아니라 노란 우비를 입고 다녀야 하며 자신을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당돌하고 엉뚱한 소녀 아리에게 그녀를 무서워하지만 그러면서도 조금씩 다가서는, 그녀를 좋아하는 소년 조강이란 친구가 생겼다. 나를 만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작은 도마뱀 하나를 데리고 다니는 그녀는 어느 비오는 날 조강과 함께 논두렁 옆을 거닐다 도마뱀을 잃어버리고, 조강은 나무로 짝은 도마뱀을 선물한다. 그리고 10년.

 고등학교 2학년의 나이에 다시 만난 두 사람. 공부를 핑계삼아 암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그녀를 위해 마을로 내려가 잠든 아버지를 깨워 초밥을 만들게 하고 산속에서 이벤트까지 열어줬던 조강은 또 다시 그녀와 이별을 해야만 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그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그녀는 또 사라져버렸다.

  은행원인 남편을 만나 함께 은행을 털어 우주선을 사겠다고 했던 엉뚱한 거짓말을 그대로 믿어 은행원이 되어버린 조강. 그에겐 아직도 아리뿐이다. 어느날 또 거짓말 같이 아리가 나타나고 그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조강은 이번엔 결코 놓치치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그녀는 또 사라졌다.

  그녀를 좋아하는 줄 알면서, 그녀 뿐인걸 알면서 왜 자꾸 도망가는거야. 사라져버리는거야. 조강은 아리가 야속하다. 왜. 도대체 이유가 뭘까. 왜 그녀는 내게 다시 나타나서는 엉뚱한 거짓말을 변명이랍시고 해대고는 그걸 그대로 믿게 만들어놓고는 또 사라져버리는걸까. 못됐다. 어쩜 그럴 수가 있니.

  그녀는 우주인도 아니었고,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가 다시 풀려난 것도 아니다. 그녀의 진실을 알아버린 조강은 그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저 눈물만 흐른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으면서 자신을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는건지. 그녀를 사랑하는데,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했는데, 그녀를 이대로 떠나보내야만 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스토리는 슬프지만 아리가 조강과 만나 내뱉는 진실같은(?) 거짓말 덕분에 관객은 유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감독은 영화 속에 엉뚱한 조미료를 첨가함으로써 영화를 코믹 SF(?)로 만들어버렸다. UFO를 불러내기 위해 갈대밭(?)에 서클을 만들어놓고 기원하지를 않나, 또 그걸로 그만뒀으면 좋았을 것을, 정말로 우주선이 내려와 그녀를 데려가질 않나.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진실로 받아들인 순수한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해서 그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어버리는 감독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아 이걸 보고 있는 관객들은 얼마나 황당했을고. 순수함은 엉뚱함으로 변질되어 다가왔다. 조승우와 강혜정이 아니었다면 보지 않았을 영화, 두 사람 때문에 봤건만 그다지 기대에 차지 않았던 또 하나의 사랑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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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6-05-06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영화의 라인을 따라가면 충분히 우주선으로 끝낼 수 있을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리는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신파극처럼 죽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줄 것이냐, 아니면 미화시킬 것이냐라는 선택의 문제 앞에서 미화를 결정한 거죠. 결국은 아리가 '죽었다'는 것을 '우주선 타고 외계로 갔다'로 미화시킨 거죠. 어떻게 해서든 마무리를 짓기 위해 한 선택인데 상상력이 충분히 발휘되었다는 점에서 잘한 선택이라고 봤습니다. 저는.

마늘빵 2006-05-06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이쁘게 마무리 짓기 위해 필요한 선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영화가 '유치'하게 흘러가는 듯 하여 별로였어요. 감독의 불가피한 선택임은 알겠지만요.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한 선택이었지만 순수한 로맨스 만을 기대하고 온 관객들에겐 그 기대를 저버린 영화였다는 생각입니다. ^^
 
디지로그 digilog - 선언편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4월
절판


시루떡은 사람 손으로 일일이 공들여 만든 것으로 집마다 그 맛이 다 다르다. 하지만 공장에서 다량으로 생산된 스팸 통조림 맛은 백이든 천이든 그 맛이 똑같다. 무엇보다도 시루떡은 잔칫날처럼 어쩌다가 만들어먹는 별식인데 비해서 스팸은 값싸고 장기간 보존이 가능하여 미군 부대에서 매일 같이 먹는 대표적 군용 식품이다. 그래서 시루떡을 보면 "왠 떡이냐?"하고 놀라지만 스팸을 본 병사들은 "어제도 스팸! 오늘도 스팸! 내일도 스팸! 다음주도 스팸!"이라고 투덜댄다고 한다.

...중략...

그러므로 스팸이란 말은 벽에 부딪힌 오늘의 정보사회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같은 것만 되풀이해서 먹으면 금세 식상해진다. 그리고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듯이 배가 고프면 음식 맛을 더 잘 느끼지만 반대로 배가 부르면 산해진미라도 그 맛을 알 수가 없다. 스팸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정보포식'상태와 그러한 정황 속에서 우리가 잃고 있는 디지털의 '정보현실감'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36-37쪽

숟가락은 주로 국문을 떠먹는 것으로 음에 속하는 것이고, 젓가락은 양에 속하는 것으로 고체형 마른 식품을 집는데 사용된다. 건식에 편중되어 있는 서양의 식기가 접시 위주로 되어 있는데 비해 습식 문화의 한국 식기는 종기 뚝배기 사발 등 움푹 팬 것들이 많다. 그러니까 같은 동북 아시아권 가운데서도 '음양 조화'의 문화를 가장 철저하게 생활화한 것이 바로 한국 문화라고 할 수 있다. -62쪽

"정보가 샌다" "정보를 흘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보를 물과 같은 액체로 생각한 것이다. 물꼬를 자기 논에다 대던 농경시대적 개념이다. 그러나 "정보를 캔다" "정보를 묻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보를 무슨 석탄이나 노다지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산업시대인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정보가 환하다" "정보에 어둡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보는 액체도 고체도 아닌 빛이다. 만화에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전구를 그려놓듯 에디슨 시대의 유물인 것이다.
"정보를 맡았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냥꾼들이 사냥감을 추적할 때 짐승이 지나간 채취를 통해 추적하던 원시적 감각의 산물이다. 정보는 이렇게 수렵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잠재의시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지식 정보의 새로운 기술을 옛 패러다임으로 읽고 있다는 증거다.
정보기술을 새 패러다임으로 비유하자면 그것은 액체도 고체도 아닌 '공기'라고 말할 수 있다. 공유는 해도 독점할 수 없는 것이 공기이며 지식이다. 사용을 해도 없어지지 않고 순환하는 것 또한 공기의 속성이며 정보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가치'는 있어도 '가격'은 없는 것이 공기이며 지식정보다. -130-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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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8
제인 오스틴 지음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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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은, 내가 보기에는 가장 흔한 결함이야." 메리가 자신의 깊은 사고력을 뽐내며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바로 미루어 볼 때, 오만이란 실제로 아주 일반적이라는 것, 인간 본성은 오만에 기울어지기 쉽다는 것, 실재건 상상이건 자신이 지닌 이런저런 자질에 대해 자만심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거의 없다는 것이 확실해. 허영과 오만은 종종 동의어로 쓰이긴 하지만 그 뜻이 달라. 허영심이 강하지 않더라도 오만할 수 있지. 오만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과 더 관계되거든."-31쪽

콜린스 씨는 똑똑한 사람도, 함께 있기에 즐거운 사람도 분명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지루했고, 그녀에 대한 그의 애정도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어찌 됐든 그녀는 남편을 갖게 될 것이었다. 남자나 혼인 관계 그 자체를 중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은 언제나 그녀의 목표였다. 좋은 교육을 받았지만 재산이 없는 아가씨에겐 오직 결혼만이 명예로운 생활 대책이었고, 결혼이 가져다줄 행복 여부가 아무리 불확실하다 해도 결혼만이 가장 좋은 가난 예방책임이 분명했다. -177쪽

"얘. 리지. 그런 기분에 빠져들지마. 그럼 네가 불행해져. 사람마다 상황과 성격이 다르다는걸 충분히 고려해야지. 콜린스 씨의 사회적 지위와 샬럿의 신중하고 무던한 성격을 생각해봐. 샬럿네가 대가족이라는 것, 재산으로 보자면 그만하면 훌륭한 결합이라는 것도 생각해야겠고. 그리고 샬럿이 우리 사촌한테 애정이나 존경심 같은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고 믿어보려고 해봐. 모두를 위해서 말이야."-194-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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