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주체성의 이념 - 철학의 혁신을 위한 서론 인문정신의 탐구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7년 2월
품절


철학은 자유인을 위한 학문이다. 이런 사정은 개인이든 민족이든 마찬가지여서,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기를 일으켜 세우려는 겨레만이 철학을 필요로 한다. 자유란 소박하게 말하자면 남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요,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는 것이지만, 이것은 고립된 자기관계 속에서 가능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세계 속에서 동료 인간들과 더불어 사회와 세계의 부분으로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모든 부분은 전체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을 수 없으니 만약 전체 사회와 세계가 나로부터 소외된 타자적 힘과 권력으로서 나에게 대립한다면, 나는 결국 그 전체에 의해 규정되는 노예 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내가 사회와 세계에 의해 규정되고 지배받는 백성이 아니라 그것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입법자가 되고 주권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부분으로서의 우리 모두는 오직 전체의 주인이 되는 한에서만 자기의 주인이 될 수도 있으니, 어떤 경우에도 자유가 단순한 분릴와 독립만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오직 자기의 세계를 스스로 형성해가는 활동 속에서만 온전히 실현되는 것이다.-11-12쪽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단순히 압제에 저항하는 용기 뿐만 아니라, 자기의 세계를 스스로 형성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이 요구된다.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계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칸트가 깨우쳐주었듯이 세계는 눈에 보이는 사물적 대상이 아니라 오직 생각 속에서만 열리고 생성되는 이념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모든 있는 것들의 총체이다. 만약 있는 것들이 오직 물리적 사물들이라면 세계는 그런 사물들의 총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물들의 시간적 공간적 전체를 눈으로 볼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사물들의 절대적 전체는 사물이 아니라 이념이다. 그런데 있는 것은 고정된 사물로서 주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다. 모든 있는 것은 될 수 있는 것이니, 있음은 언제나 될 수 있음이다. 그런즉 세계는 단지 일방적으로 고정되어 주어져 있는 것들의 총체가 아니라, 동시에 무엇인가 될 수 있는 것들의 총체이다.-12-13쪽

자유인으로서 세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사물의 주어져 있음을 넘어서 모든 될 수 있음과 역사에 이르기까지 있음의 모든 차원들을 자기 속에 포괄하는 참된 총체성으로서의 세계를 파악하고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13쪽

이른바 인권변호사 출신의 대통령은 신념을 가지고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밀어붙이고, 민청학련 사형수 출신의 철도공사 사장은 고속철도 여승무원 문제에서 보듯 그들이 비판했던 자본가들과 한치의 다름도 없이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다. 쉽게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단지 그들 개인의 문제로 돌려 변절이라 비판하겠지만, 사실은 이 모든 위기적 징후가 우리 모두의 정신의 빈곤에서 비롯된 일이다. 우리는 압제에 저항해서 싸우는 일에는 영웅적인 용기를 보여준 겨레이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일에는 너무도 게을렀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억압의 사실을 끊어내고 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을 때, 어떤 세상을 만들어야 할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다만 싸우고 또 싸워왔다. 하지만 막상 우리에게 권력이 주어졌을 때, 우리의 머리 속에는 참으로 새로운 우리들 자신의 세계상이 아무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지도도 설계도도 없이 자기의 세계를 형성하고 자기의 집을 지어야 했으니, 남이 만들어놓은 세계상에 의존하는 것 말고 달리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즉 지금 우리가 눈앞에 보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사유의 빈곤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16쪽

"자아는 근원적으로 정신적 삶의 초기 단계부터 욕동에 사로잡혀 있으며, 또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 그 욕동을 만족시킬 능력도 지니고 있다. 이런 상태를 우리는 나르시시즘이라 부르며, 또 그렇게 스스로 만족을 얻는 방식을 자기성애라 일컫는다." (프로이트)-46쪽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이론 자체를 서양적 나르시시즘의 현대적표현이라고 주장할 때 우리는 나르시시즘의 개념을 프로이트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사용한다. 프로이트에게서 나르시시즘이란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자기애와 같은 말로 쓰인다. 그러나 자기애는 한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의식하고 자기와 반성적인 관계를 맺으며 더 나아가 다른 무엇보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모든 사람이 에고이스트인 것과 마찬가지로 동시에 나르시스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자기를 아끼고 사랑한다고 해서 그 방식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자기애라도 자기가 어떠하냐에 따라 그것은 긍지로 나타날 수도 있고 연민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혐오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려는 서양 정신의 나르시시즘이란 자기에 대한 긍지가 하나의 지속적 성격으로 굳어진 특수한 심리 상태를 의미한다.-49쪽

본래적 나르시시즘이 내용은 다른 무엇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느끼는 자기에 대한 "확고한 긍지"로 나타난다. 긍지란 '위에-있음'의 의식이다. 아름다운에서 내가 남보다 위에 있음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긍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르시시즘은 단순한 대자적 반성이 아니라 대타적 반성의 결과이다. 자기의 아름다움을 의식하되 그것을 남과의 관계, 또는 객관적 비교 가운데서 우월한 것으로 의식하는 것, 이것이 나르시시즘인 것이다. 그 우월성의 의식이 긍지인데, 이 긍지는 결코 모든 사람에게 허락되는 자기의식이 아니라, 오직 아름다운 사람에게만 가능한 의식이다. 이에 반해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 자기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자기혐오나 자기연민일 수는 있으나 결코 긍지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본래적 의미의 나르시시즘은 아무에게도 허락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보편적 감정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객관적으로 우월하고 탁월하다고 스스로 느끼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한 자기감정인 것이다-54쪽

그렇게 내가 남보다 위에 있음을 자각하는 나르시스는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뭇 타인들을 멸시한다. 그리고 이 멸시가 타인에 대한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사랑은 매혹되고 사로잡히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자기가 멸시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그는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뭇사람에게 사랑받았으나, 자기 자신은 누구에게도 매혹되지 못하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다. 그렇게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는 나르시스적 정신은 언제나 자기 속에 머물러 자기와 관계한다. 그것은 타자와의 만남을 거부하는 정신이다. 물론 모든 주체에게는 타자가 있고 이런 사정은 나르시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에게 타인은 진정한 타자적 주체로서 대접받지 못한다. 오비디우스는 나르시스를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우리에게 전해주는데, 그 이름이 에코, 곧 메아리이다. 자기의 말을 빼앗기고 나르시스의 말을 단지 어눌하게 반복할 수 있을 뿐인 에코는 서양 정신 앞에서 자기의 언어와 주체성을 상실한 모든 타자적 정신의 은유이다.-54-55쪽

그렇게 치명적인 사랑으로부터 떠나지도 못하고 사랑을 이루지도 못하는 나르시스에게 남은 운명은 죽음 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 속에 머물러 자기의 존재를 완성하려는 모든 홀로주체성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리하여 주체의 죽음은 우리 시대의 철학적 관용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주체의 죽음은 주체가 자기 집착의 허망함을 깨우쳐 스스로 자신의 주체성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주체의 자기집착의 필연적 결과로서 일어난 일이다. 나르시스적 주체는 결코 스스로 자기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 오비디우스의 신화가 말해주듯이 하데스로 내려간 나르시스는 지금도 스틱스 강에 하염없이 자기의 얼굴을 비춰 보고 있는 것이다.-56-57쪽

"자아의 본질은 자유이다. 즉 자아는 오로지 절대적인 자기권력으로부터 자기를 어떤 사물이 아니라 순수한 자아로서 정립하는 것을 통해서만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쉘링)-64쪽

"나는 나 자신과 나의 표상들의 대상이다. 나 밖에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나 자신의 산물이다. 나는 나 자신을 만든다. ......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든다." (셸링)

여기서 보듯이 자기 자신을 만드는 것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드는 것은 다른 행위가 아니다. 내가 세계로부터 고립된 존재자가 아닌 까닭에 우리는 오직 세계를 형성하는 한에서 나를 스스로 형성하는 것이며 세계의 주인이 되는 한에서 나의 주인이 된다. 주체의 자유는 그렇게 자기와 세계를 무제약적으로 형성하는 근원적 행위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66쪽

생각하면 서양 정신이 보여주는 타자에 대한 공포는 바로 이 수동성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나와 동등한 타자가 나 밖에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그에 의해 언제라도 예속되고 수동적으로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의한다. 그리하여 수동성을 회피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타자적 관계를 지양하는 것은 자유를 구제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데, 근대 철학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과제를 수행하였다.-67쪽

여기서 우리는 서양 정신이 배제하는 것이 타자적 주체이지 타자 일반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떠한 타자도 없는 정신은 공허한 정신이다. 그것은 아무런 대상도 없는 생각은 현실적 생각으로 발생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정신은 오직 타자를 대상이나 객체로 삼는 한에서 자기의 존재를 실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타자를 정신 밖에 자립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나의 타자를 정신 밖에 자립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경우 나의 자유가 침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르시스적 정신은 이런 상황에서 타자를 자기화하고 내면화한다. 즉 그것은 자기 속에서 타자를 정립하는 대신, 또는 비슷한 말이지만 모든 타자를 자기의 내재적 계기로 만드는 정신이다.-69-70쪽

서양적 자유의 이념 속에 내재된 배리와 역설은 자기의 자유를 위해 타자적 주체를 부정해야 한다는 데 있거니와 이것은 현실 역사 속에서는 북미 대륙에서처럼 원주민의 집단 학살과 같은 타자의 절멸로 나타나는가 하면, 이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타자를 자기에게 동화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동화가 자기와 타자의 절대적 동일성으로 발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서양 정신은 타자를 자기화하는 만큼 자기 속에서 다시 타자를 정립하는 정신이다. 즉 그것은 자기가 주인이 된 세계 속에서 다시 타자적 관계를 산출하는 정신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 정신의 나르시시즘은 자기 속에서 타자를 일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필연적으로 (반)정립하게 되는데, 이때 자기 속에서 반정립되는 타자는 정신의 타자일뿐 타자적 주체일 수는 없다. 그것은 관념 속에서는 대상화되고 객체화되는 타자이며, 현실 속에서는 도구화되고 노예화되는 타자이다. 그렇게 타자를 자기 속에서 노예화하는 것이 바로 제국주의이다. 제국주의란 주체가 자기 자신을 보편자로 실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기 밖에 타자를 남겨두지 않을 경우에 그 타자의 주체성, 곧 타자적 자유 부정하고 타자를 노예화하는 전략이다. 그러니까 그리스에서 미국에 이르기까지 반복되어온 제국주의의 역사는 그리스에서 태동한 서양적 자유의 이념의 현실태인 것이다-70-71쪽

서양 철학의 나르시시즘은 존재의 근저에 놓인 이 근원적인 권력을 자기화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 권력에 참여하고 그것을 전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자기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나와 이질적인 것이라면 나는 결코 그것에 참여할 수도 없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을 수도 없다. 오직 존재론적 권력이 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일 때에만 나는 그것을 나 속에서 따라체험하고 반복할 수 있으며, 또한 그때에만 나는 그 권력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 정신이 만물을 지배하는 존재론적인 권력을 바로 자기 자신의 형상 속에서 찾은 까닭이다. 그리고 이처럼 존재의 본질적 진리를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표상하는 것이 나르시시즘의 탄생기의 특징이다.-77쪽

신이 정신적인 존재라는 것은 그것이 인간적인 존재라는 말과 같다. 정신은 인간의 본질규정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이 정신으로 파악되었다는 것은 신과 인간의 본질적 동일성이 확보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요, 이는 인간이 신적인 존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신과 인간의 무차별한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호메로스에게서 그랬듯이 여기서도 본질적 동일성의 지평 속에 내재적 차이가 정립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신적인 정신은 인간의 정신처럼 자기 밖의 대상을 생각하는 정신이 아니다. 만약 그런 정신이었다면, 그것은 타자에 의한 수동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정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의 정신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정신으로서, 오로지 자기하고만 관계하는 정신 곧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정신이다. 프로이트에 빗대어 말하자면 그것은 절대적 나르시시즘의 현실태인 것이다.-89-90쪽

중세철학의 역사는 그 신에서 시작된다. 신에게 몰입하는 정신이 중세의 정신이다. 그것은 사냥에 지쳐 연못가에 와서 물 위에 엎드린 나르시스와도 같다. 그는 수면에서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타인의 얼굴을 발견하고 그에 매혹된다. 그 얼굴은 사실은 남의 얼굴이 아니라 자기의 얼굴이었으나, 나르시스는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와 사랑에 빠져든다. 바로 이 단계가 중세이다. 그것은 신이 자기 자신의 영상인 줄 모르고 신에게 몰입하는 정신인 것이다. 그러나 중세철학이 찾았던 신은 고대 그리스 정신이 발견한, 아니 투사한 신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그리고 이 차이가 나르시시즘의 탄생기와 성장기를 나눈다. -91쪽

그러니까 인격적인 신에 대해 열광하는 까닭은 신이 본질적으로 나와 같은 인격적 존재이므로 내가 신과 같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과 같아짐이야말로 신에 대한 기독교적 열광의 지향점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적 겸허나 자기비하의 감저이 신 앞에서의 자기부정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의 확장과 신격화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만약 서양 정신이 마주한 그 타자가 자기와 동등한 상대적 타자였더라면, 자기를 타자와 일치시키려는 열망이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을 것이요, 자기가 타자 앞에서 수동성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정신이 마주한 타자적 정신은 절대적 정신이요, 절대적 주체인 신이었다. 신 앞에서 내가 나를 부정하는 것은 나를 신에게 일치시키기 위함이다. 그렇게 내가 신과 하나 된다는 것은 내가 그의 나라와 권력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의 절대화이다. 기독교적 열광은 이처럼 내가 신을 통해 절대적 권력의 주체가 된다는 데 대한 열광이다. 결과적으로 신에 대한 열광은 자기에 대한 열광이다. 신에 대한 사랑은 그 본바탕에서 보자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인 까닭에 그리도 열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106쪽

자아의 자유는 자기를 그렇게 주체로서 스스로 정립하는 것에 존립한다. 인간은 주체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자유가 있다. 근대 철학은 바로 이런 자유를 보편화하였다. 왜냐하면 근대 철학이 말한 자아의 주체성은 다른 어떤 경험적 조건도 배제한 순수한 사유의 주체성을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사람들 사이의 어떤 차별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자기를 반성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본질적으로 주체이다. 자유와 주체성의 보편화, 이것이 바로 근대 철학의 영속적인 공적이다-117쪽

그러나 인간의 자유는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자기정립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는 자기를 정립하는 것만큼 세계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데 존립하는 것이며, 사유의 주체성 또한 단순히 추상적 자아의 정립이 아니라 현실의 능동적 형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즉 자아는 자기정립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 현실의 법칙의 입법자일 때 비로소 온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 중략 ... 자아가 타율적 법칙의 지배 아래 있는 한 그는 타율적 강제 아래 있는 것이요, 노예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런 사정은 도덕법칙이나 인륜적 법칙뿐만 아니라 자연 법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아는 오직 자기가 모든 객관적 법칙들의 입법자가 될 때 비로소 온전히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117쪽

근대에 이르면 자아는 절대적 권력을 직접 자기 속에서 반복하고 따라체험함으로써 자기가 그 권력의 주체가 되려 한다. 중세 철학이 신과의 합일 속에서 진리와 자유에 참여하려 했을 때, 진리와 자유의 최종적 실행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다. 인간은 다만 신과 하나됨으로써, 절대적 권력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원리는 나 속에서 직접 실현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 그 자체로서 존립한다는 어떤 객관적 진리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 객관적 진리는 소외된 진리일 뿐이다. 진리는 나 속에서 반복되고 따라체험되는 한에서만 진리이다. 절대자는 더 이상 피안의 환상이 아니라 자아 속에 현전하는 현실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기도와 은총을 통한 간접적인 만남이 아니라 자아 자신의 직접적인 활동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유는 이제 신의 절대적 권력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삶과 행위 속에서 실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118쪽

현대적 정신은 욕망과 억압 사이에서 갈등한다. 자아는 초자아와 같아지기를 욕망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도리어 그것에 의해 억압받고 상처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런 상황을 종식시키지 못한다. 만약 그가 자기를 욕망하기를 멈추고, 어두운 수면으로부터 고개를 돌릴 수 있다면, 그는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 자기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리하여 자아는 계속해서 초자아에 예속되고 억압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욕망에 휘둘리고 초자아에 억압받는 자아가 바로 우리 시대, 정신의 자화상이다. 그것은 근대적 정신이 생각했던 자율적인 주체가 아니다. 이것이 이른바 주체의 죽음이다. -129쪽

"의지는 다른 것, 외적인 것, 자기와 별개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다만 자기 자신을 바꿔 말하면 의지를 의지하는 한에서만 자유이다. 앞의 경우에 의지는 다른 것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자유란 이것, 곧 자유롭고 의지하는 것이다." (헤겔, <역사철학강의>)-130쪽

내가 인식한다는 것, 그러니까 인식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내가 잠재적으로 사물의 생성과 존재의 주체가 된다는 것과 같다. 반면에 한 사물이 인식의 객체가 된다는 것은 형성의 객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가 인식 가운데서 사물의 생성을 반복할 때, 인식되는 그 사물은 생성의 근거와 원인들에 의해 형성되는 객체가 된다. 물론 인식은 사물을 형성하되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생각 속에서 형성한다. 하지만 이것이 본질적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현실공간 속이든 사유공간 속이든 중요한 것은 사물이 자기의 형성의 원리를 타자적 아르케에게 양도하고 객체의 자리에 놓인다는 것이다. 현실공간에서 사물은 아르케로부터 형성된다. 그리고 이 형성에 대응하여 사유공간 속에서 사물은 개념적으로 구성된다. 그렇게 형성되고 구성되는 한에서 사물은 수동성 속에 있다. 그리고 인식의 사물의 형성 원리를 모방하고 반복할 때, 그것은 사물을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주체의 자리에 서게 된다. 이처럼 사물을 형성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야말로 인식을 통해 자아가 얻는 권력인 것이다. -143쪽

서구적 인식에서 인식과 기술은 공속한다. 기술과 인식이 공속하는 한에서 인식의 대상은 동시에 기술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기술적 재생산과 조작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뜻하는 것인데, 이는 인식의 대상이 기술적 사유 앞에서 객체화되고 사물화 될 수 밖에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말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말했듯이 "기술은 기술이 적용되는 대상을 지배하고 다스리기 때문이다." 그런 한에서 기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지배하는 주체이다. 기술이 주체가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인식이기 때문이다. 인식하는 것은 정신이다. 그러나 기술 자체는 주관적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기술이 객관적 정신의 체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49쪽

법이 나의 동의 없이 나에게 명령할 때, 그것은 타율적 강제의 체계이다. 그러나 내가 법에 동의할 때, 법은 나의 주관적 의지의 보편화이다. 그리하여 내가 동의하는 법에 복종할 때, 그것은 내가 타율적 강제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이른바 자율성의 의미이다.
-151쪽

자유는 처음엔은 개인의 의지의 자율성으로 발생하지만 개인적 자유는 언제나 사회적 지평에서 완성된다. 개인적 자유를 사회적 지평에서 완성하는 것이 바로 법이다. 인간은 법의 주체가 됨으로써 보편적 권력의 주체가 된다. 자유와 권력을 향한 욕구에 한계가 없듯이 법의 적용 범위에도 한계는 없다.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자아는 무제약적인 보편적 법의 주체가 되려 하고, 이에 따라 법의 외연은 시민법에서 국제법 그리고 마지막에는 세계시민법의 이념을 향해 끝없이 확장된다.-152쪽

"네가 외적으로 행위할 때, 너의 자의의 자유로운 사용이 모든 사람의 자유와 보편적인 법칙에 의해 더불어 공존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칸트)

법은 자유의 현실태이다. 그러나 내가 자유로운 만큼 타인의 자유 역시 존중되어야 한다. 법은 나의 자유의 현실태인 만큼 타인의 자유의 현실태이기도 하다. 법의 입장에서 보자면 각 사람의 행위의 합법성은 각자의 자유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한에서만 확보된다. 칸트의 저 말은 이런 법정신의 표현인 것이다. 법은 모든 주체들을 동일화한 뒤에, 그 주체들 사이에 현실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권리의 불균형을 시정하고, 이를 통해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154-155쪽

우리는 오직 우리가 모든 것을 소유할 때 온전히 자족할 수 있으며 자유로울 수 있다. ... 중략 ... 이제는 자유를 향한 욕망이 사물에 대한 욕망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욕망이 무제한적인 만큼 소유에 대한 욕망도 무제한적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근대 사회에서 자유의 원리가 보편화된 만큼 소유의 권리도 보편화된다. 나의 소유와 타인의 소유는 공존할 수 있어야 하며, 나의 소유가 타인의 소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공존과 균형의 원칙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 중략 ... 그러나 소유가 강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교환에 의해 주고 받는 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소유 가능성은 교환 가능성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무제약적인 소유 가능성은 무제약적인 교환 가능성인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모든 것을 교환 가능하게 만드는 보편적 교환의 지평을 산출하게 된다.-158쪽

그렇다면 나르시스적 주체성을 극복하기 위해 철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나르시스적 주체성이 타자적 주체를 배제하는 홀로주체성이라면, 나르시스적 주체성을 극복하기 위한 첫 걸음은 주체성을 타자와의 만남, 특히 인격적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사유하는 일이다. 나의 주체성이 너와의 만남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와의 만남 속에서만 온전히 생성되고 정립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나르시스적 홀로주체성을 극복하기 위해 철학이 수행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철학이 지금까지 참된 주체성이 무엇인지를 물어왔던 것처럼 참된 만남이 무엇인지를 같이 물어야만 한다. -167쪽

선험론적 철학은 나의 존재든 세계의 존재든 그 어떤 존재도 그 자체로서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믿음을 거부한다. 모든 존재 주체의 활동을 통해 개방된다는 것이야말로 선험론적 철학의 근본 통찰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칸트에 의해 기초가 놓인 선험론적 철학의 길을 따른다.-168쪽

우리의 과제는 헤겔이 멈춘 바로 그 지점에서 생각을 시작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만남 속에서만 생성되고 정립되는 주체성을 참된 의미에서 개념적으로 해명하는 일이다. 주체는 사물이 아니라 활동이다. 인간은 자동적으로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체로 정립하는 활동을 통해 주체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때 객체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성이란 우리가 실현해야 할 과제이지,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기성품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주체성이 본질은 오로지 활동에 있다.-172쪽

서양 정신이 타자적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지 않은 채, 타자 없는 자기 관계 속에서 자유와 주체성을 추구해왔기 때문에 도리어 주체의 죽음에 이르게 되고 이런 위험이 수동성과 능동성의 공속을 생각하게 만드는 배경이라면, 한국인들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자기를 자유로운 주체로서 정립하지 못한 역사를 살아오면서 지속적인 예속과 수동성에 사로잡혀 있었고 정신적으로 타자적 주체 속에서 자기를 상실해왔던 까닭에 자기를 온전히 주체로서 정립하지 못한 것이 수동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배경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 서양 정신은 타자적 정신에 의해 침해되지 않는 자기가 먼저 있었으니, 그 자기의 아성을 타자적 주체를 향해 해체하고 개방하는 것이 과제이다. 이에 반해 한국인은 처음부터 온전한 의미에서 자기를 주체로서 정립하지 못한 민족이요, 그 결과 타자적 주체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민족이었다. 그리하여 이 겨레는 통일된 나라를 형성한 이래 한 번도 타자에 의해 강제되는 수동성의 굴레를 벗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수동성에 빠져 있었던 겨레에서도 주체성이라는 것이 가능한가?-176쪽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정신의 자기상실이다. 생각하면 자기의 철학이 없는 민족이 바로 한민족이다. 철학은 자기인식이다. 그것은 현실의 자기반성이다. 그러나 한민족은 자기의 현실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자기의 언어로 반성하는 일에 너무도 게을렀다. 기존의 세계관이 현실 적합성을 잃어버렸을 때 이 나라의 주류 철학자들은 스스로 새로운 철학을 정립하기보다는 대개 남의 철학을 수입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불교가 수입된 이래 이 나라의 철학은 언제나 수입된 철학이었다. 불교가 쇠하면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성리학이 쓸모없어지면 서양의 철학을 받아들인 것이 이 나라 철학사의 지배적 경향이었으니, 그렇게 수입한 남의 철학에 주석을 다는 것이 이 나라 대다수 철학자들이 한 일이었다.-179쪽

그렇게 하나로 이어진 생각의 총체성의 객관적 현실태를 가리켜 우리는 세계관이라 부르는데, 이런 세계관을 기투하고 형성하는 정신의 노동이 바로 철학이다. 철학은 사유의 총체성 속에서 경험을 통일하고, 이를 통해 온전한 의미에서 세계를 통일된 경험의 지평으로 개방한다. 칸트가 말했듯이 세계는 경험적으로 주어진 사물적 대상이 아니라 생각의 활동을 통해서 정립되는 이념이다. 철학은 비어 있는 총체성의 이념인 세계를 구체적 규정 속에서 형성하는 정신의 노동이다. 주체는 그런 철학을 통해 비로소 자기의 세계를 가지게 되는데, 그 세계가 자기의 세계인 한에서 주체는 그 세계의 주인이다. 그런즉 자기를 주체로서 세우려는 자는 개인이든 민족이든 먼저 자기의 철학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181쪽

타자적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민족이 주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앞서 말했듯이 주체성이란 단순한 논리적 자기동일성의 의식이 아니라 총체적 인식체계로서 세계관을 스스로 정립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한국인들은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떻든 그들도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 구성된 연속적인 세계관이 아니다. 개항 이후 서양의 온갖 철학과 세계관이 밀려 들어온 뒤에 한국 땅에는 너무도 많은 세계관들이 중첩되어 있는 까닭에 단절 없는 잘 구성된 하나의 세계관의 지평이 없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인들에게는 잘 구성된 연속적인 자기 또한 없다. 한국인에겐 자기가 그 자체로서 타자성의 총체이다. 이 타자성 속에서 한국인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고통스럽게 단절과 불화를 자기 속에서 경험해야만 하며, 결과적으로 온전한 주체로서 행위할 수도 없게 된다. -188쪽

홀로주체성은 나르시스적 주체성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관계와 자기 동일성을 통해 정립되는 주체성이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홀로주체성은 타자적 주체를 배제하는 주체성인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가 여기서 새로이 추구하려는 서로 주체성은 오로지 타자적 주체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생성되는 주체성이다. 나는 오직 너와의 만남 속에서 우리가 됨으로써만 참된 의미에서 내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나와 네가 우리가 된다는 것은 나와 네가 우리 속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전적으로 양도하고 객체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다시말해 나와 네가 만나 우리가 된다는 것은 이제 우리만이 주체이고 나와 너는 그 우리라는 공동주체의 속성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주체성은 한편에서는 나와 네가 서로 만나 보다 확장된 주체인 우리가 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이름인 동시에 나와 네가 서로서로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나와 네가 우리에 대해 동등한 주체라는 것을 표현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234쪽

주체성이란 단순히 논리적 자기의식이나 이론적 자기의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말했듯이, 주체는 고정되어 존재하는 사물적 실체가 아니라 자아의 존재 방식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고 객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다.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앞의 경우는 내가 나의 주인으로서 자기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활동의 주체란 말이요, 뒤의 경우는 내가 남의 작용에 의해 이리저리 규정되는 객체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만남 속에서 주체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내가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만 참된 의미에서 나의 주인으로서도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35쪽

서양적 인식이론에서 앎은 본질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앎의 대상은 보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습이다. 그러나 앎은 눈에 보이는 것을 정신화하고 이를 통해 그것을 보편화한다. 그렇게 정신화 작용을 거쳐 보편화될 수 있는 객관적 모습이 형상이다. 그렇게 정신화된 형상이 바로 개념이다. 그리고 개념이 인식의 주관적 내용인 것이다.-255쪽

말을 하고 듣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로주체적이다. 말하는 자가 말하는 한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것처럼 말하면서 듣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라면, 듣는 자 역시 들리는 말을 듣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지만 동시에 그 말의 뜻을 알아듣는다는 점에서 능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듣는 일에 관해서는 어느 한쪽을 가리켜 주체라 하고 다른 한쪽을 객체라고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말하고 듣는 사람이 모두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며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이기 때문이다.-262쪽

반성이 자기를 보는 것이냐 아니면 듣는 것이냐 하는 우리의 물음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성립 불가능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반성은 신체적 감각의 일이 아니라 순수한 생각의 일이기 때문이다. 반성이란 보는 것도 아니고 듣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나는 내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다가 마찬가지로 내가 내면의 소리를 밖의 소리를 듣듯이 귀로 듣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체적 감각이 문제라면 내적인 자기반성은 듣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이 보는 것이냐 듣는 것이냐 하는 물음은 무의미한 물음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내적 반성이 신체적 감각 그 자체로서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체적 감각과 유비적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으로 지각하는 대상이 모두 같은 종류인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그 대상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할 것도 있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할 것도 있다. ... 중략 ... 이처럼 우리는 신체의 귀와 눈을 통한 감각은 아니지만 마음의 일에도 보는 것과 듣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 과연 마음으로 자기를 보는 것인가 아니면 듣는 것인가 하는 물음도 의미 없는 물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반성 속에서 우리 앞에 마주 선 타자로서의 내가 과연 어떤 의미의 타자인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 그것은 한갓 형상인가, 아니면 말이요 뜻인가? 반성 속에서 내가 되돌아가는 나 자신이 한갓 형상이라면 반성은 마음의 눈으로 나를 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반성 속에서 내가 마주 서는 나 자신이 말과 뜻이라면 나는 오직 마음의 귀를 기울여서만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264-265쪽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만남이 있다. 하지만 모든 만남이 서로 주체성을 실현하는 것은 안다. 도리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의 홀로주체성을 확장하기 위해 만남을 맺으려 할 뿐이다. 그때 만남의 대상은 동등한 서로주체가 아니라 한갓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자기의 홀로주체성을 확장하기 위해 만남을 맺는 사람은 만남 속에서 결코 자기의 동일성이나 정체성을 지양하지 않으려 한다. 그 결과 만남의 상대방에게 자기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강요하게 된다. 이를테면 사사로운 관계에서 남자와 여자에게 자기의 취향과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나, 국제관계에서 미국이 이른바 법률과 제도에서 미국적 기준을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것은 모두 만남을 서로주체성의 실현이 아니라 자기의 홀로주체성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 삼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이런 만남은 참된 만남이 아니다. -291쪽

중요한 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주체성이다. 그런즉 민족이 문제라면 민족이 순수하게 그 동일성을 유지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얼마나 주체적이냐 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이다. 순수한 동일성이 문제라면 사물은 스스로 변하지 않으니 순수하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것은 사물적 동일성이 아니라 자유이며, 활동하는 주체성인 것이다. 한 개인이 주체적이 되는 것이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서로주체성을 이룰 때 가능한 일이듯이 한 공동체가 주체적이 되는 것도 언제나 다른 공동체와 서로주체성 속에 있을 때이다. 이를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를 순수하게 보존하고 고수하려는 집착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열린 개방성이며, 타자와의 만남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버릴 수 있는 용기이다. 우리는 주체성이 실체가 아니라 오직 활동에 존립한다고 반복해서 말해왔다. 그런즉 만약 민족이 하나의 주체라면, 그것 역시 어떤 사물적 동일성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 속에서 타자를 위해 자기를 스스로 부정하고 비울 수 있는, 자발적인 자기부정의 활동성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292쪽

참된 서로주체성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자기 부정의 의미에 대한 오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한 가지는 말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타인을 위해 나를 부정한다는 것이 자기의 모든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너도 만남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근본에서부터 포기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된다. 어떤 경우에도 획일성이 서로주체성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모든 획일성은 동일성에의 집착이니 그것이야말로 홀로주체성의 징후인 것이다.-293-294쪽

서로주체성을 위한 동일성은 획일적 같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교환을 의미한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주체성 속에서 나와 네가 같닫는 것은 나와 네가 자기의 색깔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나처럼 그리고 나도 너처럼 같은 주체이듯이 너도 나에게 주체일 수 있을 때,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에게 같은 주체일 때 그것이 서로주체성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나에게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너를 주체로 승인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내가 너의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의 인식적 주체성의 교환은 사실은 서로주체성의 형성을 위해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 너를 주체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만해가 '복종'이라는 시에서 표현하려 했듯이 내가 낮은 자리에서 너를 모시고 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를 마음으로 섬기는 한에서만 참된 서로주체성은 생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나와 네가 서로를 모시고 섬기면서도 서로가 주체성을 잃지 않아야 하며 노예적 예속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295쪽

사랑에서 환대까지 그 모두 자기를 내려놓고 겸손히 타인에게 배움을 청하는 것에 비하면 결코 비움도 모심도 탁월한 방식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배움은 가장 탁월한 의미의 비움이요 모심이다. 그리고 참된 모심은 또한 배움이다. 아무도 자기를 비우지 않고 남에게 배울 수 없으며, 남에게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서 자기를 비우고 남을 모신다는 것도 빈말이다. 타인에게 자기를 낮추고 배우지 않고 다만 타인을 사랑하고 책임지겠다는 것은 타인을 지배하겠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타인에게 배우려는 사람은 이미 타인을 모시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이다. 인식은 대상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것이지만 배움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환대나 책임은 강자의 자리에서 타자를 맞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모심은 타인을 낮은 자리에서 받드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낮은 자리에서 타인에게 배우고 모시는 법을 배울 때에만 비로소 나는 온전히 나를 비울 줄 알게 되며, 나와 네가 그렇게 서로를 비우는 법을 배울 때 나와 너 사이의 참된 만남이 가능할 것이다.-296-297쪽

타자와 내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타자의 고통을 없애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동물이 아닌 사람이라도 우리는 동물 학대에 반대해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은 자기와 타자 사이에 선행적인 동일성을 조건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나눔을 통해 나와 타인 사이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주체성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서로주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공유하고 나누어야 할 동일성은 오직 같은 주체성과 같은 수동성이지 존재의 사실적 내용의 동일성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그 이외의 다른 동일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강요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결국 타자에 대한 폭력적 침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와 타자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타자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다면 그때 차이는 도리어 풍요한 다양성인바, 서로주체성은 그 차이와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개방성에 존립하는 것이다.-298쪽

홀로주체성은 나르시스적 주체성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기 관계와 자기 동일성을 통해 정립되는 주체성이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홀로주체성은 타자적 주체를 배제하는 주체성인 것이다. 이에 반해 우리가 여기서 새로이 추구하려는 서로 주체성은 오로지 타자적 주체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생성되는 주체성이다. 나는 오직 너와의 만남 속에서 우리가 됨으로써만 참된 의미에서 내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나와 네가 우리가 된다는 것은 나와 네가 우리 속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전적으로 양도하고 객체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다시말해 나와 네가 만나 우리가 된다는 것은 이제 우리만이 주체이고 나와 너는 그 우리라는 공동주체의 속성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주체성은 한편에서는 나와 네가 서로 만나 보다 확장된 주체인 우리가 된다는 것을 표현하는 이름인 동시에 나와 네가 서로서로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나와 네가 우리에 대해 동등한 주체라는 것을 표현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234쪽

주체성이란 단순히 논리적 자기의식이나 이론적 자기의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말했듯이, 주체는 고정되어 존재하는 사물적 실체가 아니라 자아의 존재 방식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고 객체로서 존재할 수도 있다. 단순화하여 말하자면 앞의 경우는 내가 나의 주인으로서 자기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활동의 주체란 말이요, 뒤의 경우는 내가 남의 작용에 의해 이리저리 규정되는 객체로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만남 속에서 주체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내가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만 참된 의미에서 나의 주인으로서도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235쪽

서양적 인식이론에서 앎은 본질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앎의 대상은 보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모습이다. 그러나 앎은 눈에 보이는 것을 정신화하고 이를 통해 그것을 보편화한다. 그렇게 정신화 작용을 거쳐 보편화될 수 있는 객관적 모습이 형상이다. 그렇게 정신화된 형상이 바로 개념이다. 그리고 개념이 인식의 주관적 내용인 것이다.-255쪽

말을 하고 듣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로주체적이다. 말하는 자가 말하는 한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것처럼 말하면서 듣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라면, 듣는 자 역시 들리는 말을 듣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지만 동시에 그 말의 뜻을 알아듣는다는 점에서 능동적인 것이다. 따라서 듣는 일에 관해서는 어느 한쪽을 가리켜 주체라 하고 다른 한쪽을 객체라고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말하고 듣는 사람이 모두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며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이기 때문이다.-262쪽

반성이 자기를 보는 것이냐 아니면 듣는 것이냐 하는 우리의 물음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성립 불가능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반성은 신체적 감각의 일이 아니라 순수한 생각의 일이기 때문이다. 반성이란 보는 것도 아니고 듣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나는 내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다가 마찬가지로 내가 내면의 소리를 밖의 소리를 듣듯이 귀로 듣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체적 감각이 문제라면 내적인 자기반성은 듣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이 보는 것이냐 듣는 것이냐 하는 물음은 무의미한 물음은 아니다. 왜냐하면 비록 내적 반성이 신체적 감각 그 자체로서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체적 감각과 유비적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으로 지각하는 대상이 모두 같은 종류인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그 대상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마음의 귀로 들어야 할 것도 있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할 것도 있다. ... 중략 ... 이처럼 우리는 신체의 귀와 눈을 통한 감각은 아니지만 마음의 일에도 보는 것과 듣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 과연 마음으로 자기를 보는 것인가 아니면 듣는 것인가 하는 물음도 의미 없는 물음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반성 속에서 우리 앞에 마주 선 타자로서의 내가 과연 어떤 의미의 타자인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 그것은 한갓 형상인가, 아니면 말이요 뜻인가? 반성 속에서 내가 되돌아가는 나 자신이 한갓 형상이라면 반성은 마음의 눈으로 나를 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반성 속에서 내가 마주 서는 나 자신이 말과 뜻이라면 나는 오직 마음의 귀를 기울여서만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264-265쪽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만남이 있다. 하지만 모든 만남이 서로 주체성을 실현하는 것은 안다. 도리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의 홀로주체성을 확장하기 위해 만남을 맺으려 할 뿐이다. 그때 만남의 대상은 동등한 서로주체가 아니라 한갓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자기의 홀로주체성을 확장하기 위해 만남을 맺는 사람은 만남 속에서 결코 자기의 동일성이나 정체성을 지양하지 않으려 한다. 그 결과 만남의 상대방에게 자기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강요하게 된다. 이를테면 사사로운 관계에서 남자와 여자에게 자기의 취향과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나, 국제관계에서 미국이 이른바 법률과 제도에서 미국적 기준을 다른 나라에 강요하는 것은 모두 만남을 서로주체성의 실현이 아니라 자기의 홀로주체성의 확장을 위한 도구로 삼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이런 만남은 참된 만남이 아니다. -291쪽

중요한 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주체성이다. 그런즉 민족이 문제라면 민족이 순수하게 그 동일성을 유지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얼마나 주체적이냐 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이다. 순수한 동일성이 문제라면 사물은 스스로 변하지 않으니 순수하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것은 사물적 동일성이 아니라 자유이며, 활동하는 주체성인 것이다. 한 개인이 주체적이 되는 것이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서로주체성을 이룰 때 가능한 일이듯이 한 공동체가 주체적이 되는 것도 언제나 다른 공동체와 서로주체성 속에 있을 때이다. 이를위해 필요한 것은 자기를 순수하게 보존하고 고수하려는 집착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열린 개방성이며, 타자와의 만남을 위해 자기를 비우고 버릴 수 있는 용기이다. 우리는 주체성이 실체가 아니라 오직 활동에 존립한다고 반복해서 말해왔다. 그런즉 만약 민족이 하나의 주체라면, 그것 역시 어떤 사물적 동일성에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 속에서 타자를 위해 자기를 스스로 부정하고 비울 수 있는, 자발적인 자기부정의 활동성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292쪽

참된 서로주체성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자기 부정의 의미에 대한 오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한 가지는 말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타인을 위해 나를 부정한다는 것이 자기의 모든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너도 만남 속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근본에서부터 포기하도록 강요받아서는 안된다. 어떤 경우에도 획일성이 서로주체성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모든 획일성은 동일성에의 집착이니 그것이야말로 홀로주체성의 징후인 것이다.-293-294쪽

서로주체성을 위한 동일성은 획일적 같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성의 교환을 의미한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주체성 속에서 나와 네가 같닫는 것은 나와 네가 자기의 색깔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나처럼 그리고 나도 너처럼 같은 주체이듯이 너도 나에게 주체일 수 있을 때,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에게 같은 주체일 때 그것이 서로주체성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나에게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너를 주체로 승인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내가 너의 인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의 인식적 주체성의 교환은 사실은 서로주체성의 형성을 위해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 너를 주체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만해가 '복종'이라는 시에서 표현하려 했듯이 내가 낮은 자리에서 너를 모시고 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그렇게 나와 네가 서로를 마음으로 섬기는 한에서만 참된 서로주체성은 생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나와 네가 서로를 모시고 섬기면서도 서로가 주체성을 잃지 않아야 하며 노예적 예속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295쪽

사랑에서 환대까지 그 모두 자기를 내려놓고 겸손히 타인에게 배움을 청하는 것에 비하면 결코 비움도 모심도 탁월한 방식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배움은 가장 탁월한 의미의 비움이요 모심이다. 그리고 참된 모심은 또한 배움이다. 아무도 자기를 비우지 않고 남에게 배울 수 없으며, 남에게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면서 자기를 비우고 남을 모신다는 것도 빈말이다. 타인에게 자기를 낮추고 배우지 않고 다만 타인을 사랑하고 책임지겠다는 것은 타인을 지배하겠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타인에게 배우려는 사람은 이미 타인을 모시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이다. 인식은 대상을 규정하고 지배하는 것이지만 배움은 자기를 비우고 낮추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환대나 책임은 강자의 자리에서 타자를 맞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모심은 타인을 낮은 자리에서 받드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낮은 자리에서 타인에게 배우고 모시는 법을 배울 때에만 비로소 나는 온전히 나를 비울 줄 알게 되며, 나와 네가 그렇게 서로를 비우는 법을 배울 때 나와 너 사이의 참된 만남이 가능할 것이다.-296-297쪽

타자와 내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타자의 고통을 없애는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동물이 아닌 사람이라도 우리는 동물 학대에 반대해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은 자기와 타자 사이에 선행적인 동일성을 조건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나눔을 통해 나와 타인 사이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주체성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서로주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가 공유하고 나누어야 할 동일성은 오직 같은 주체성과 같은 수동성이지 존재의 사실적 내용의 동일성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그 이외의 다른 동일성을 추구하고 그것을 강요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결국 타자에 대한 폭력적 침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와 타자의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타자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다면 그때 차이는 도리어 풍요한 다양성인바, 서로주체성은 그 차이와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개방성에 존립하는 것이다.-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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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07-2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추천받아서 읽고 있는데, 제가 아는게 없어서 쉽게 읽히지 않아 반쯤 읽고 덮어두고 있었는데.. 님 밑줄보고 다시 봐야겠단 용기가 생겼어요 ^^; 물론 여전히 제겐 쉽지 않겠지만..^^

마늘빵 2007-07-23 00:41   좋아요 0 | URL
아 제이드님 저도 이거 힘들게 읽었습니다. 근데 읽으면 읽을수록 모든 텍스트에 밑줄을 치고픈 욕망이 가득해집니다. 이 책 한권이 정말 많은걸 깨닫게 해줬습니다. 전 종교는 없지만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으며 느낄 때의 그런 '마음이 밝아짐'과 같은 느낌이랄까요. 이 책 완전 옆구리에 끼고 살아야겠습니다. 이거 밑줄긋기 옮겨 치느라 죽는줄 알았습니다. 휴.

2007-07-23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7-23 07:27   좋아요 0 | URL
속닥님 네 한번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가넷 2007-07-23 0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이거 지난번에 밑줄긋기로 올리지 않으셨어요?

마늘빵 2007-07-23 07:27   좋아요 0 | URL
엇, 아닐텐데요. -_- 제가 비공개로 계속 꾸준히 치면서 축적해온건데, 언제 한번 중간에 살짝 공개된 적이 있었나봐요. 그때 보셨나보다. :) 이게 완성본이에요. 다 읽었어요.

비로그인 2007-07-23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거 찬찬히 읽어두어야 할텐데 서재에선 이런글 같은데에 책갈피 꽂아두는 것같은걸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ㅜ..ㅠ

마늘빵 2007-07-23 20:18   좋아요 0 | URL
어 있잖아요. 찜기능. 저는 좀 오래 씹으며 읽어야 할 페이퍼나 리뷰들은 찜해놓고는 제 서재에서 열어보곤 합니다. :) 곱씹어 읽고 읽다 멈춰 사색할 문장이 많아요. 최근 이슈들과도 연관해서.
 
요즘 어떤 영화 보셨어요?

2007. 7. 18 예스24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6349&ref=77&m_type=1




* 스포일러 경고

   분명 다시 확인해봐도 영화 장르는 애정/멜로/로맨스를 벗어날 수 없는데, 영화를 보면 한 가지 장르를 추가해야 할 듯 하다. 미스테리. 이 영화를 보고서 관객이 충격받지 않도록 하려면 장르 명칭을 제대로 붙여야 한다. 멜로/로맨스로 알고 기대했던 영화를 보고 의외의 충격을 받는 관객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싶다. 미스테리 로맨스.

  영화를 무작정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이 영화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잘나가는 일본의 미스테리/추리물 작가의 동일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번역된 책에 달려있는 별의 갯수와 평가는 영화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별의 갯수가 중요한건 아니고, 그것이 영화를 평가하는 객관적인 척도도 될 수는 없겠지만, 책을 읽은, 영화를 본 많은 독자와 관객들의 주관적인 평가가 한데 모인 이 결과물을 무시할 수만은 없다. 영화 <변신>은 높아진 관객의 기대를 채우기엔 역부족이었고, 소설의 미스테리/추리도, 영화가 추구하려했던 멜로/로맨스도 모두 잡지 못했다.




  * 나루세 준이치(타마키 히로시). 메구미를 사랑했고, 사랑하지 않는건, 내가 다른 사람의 뇌를 이식받았기 때문인가.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고 생각하는건, 달라진건, 내가 다른 사람의 뇌를 이식받았기 때문인가. 생각을 전환하자. 영화를 달리 보자. 주어진 그대로를 바라보지 말자. 뇌이식은 잊어라.

  "타인의 뇌를 이식한 나는 본래의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영화는 어색한 멜로/로맨스의 스토리를 전개해나가면서도 끝까지 이 물음을 놓지 않고 있다. 총에 맞아 뇌의 일부가 다쳤고, 마침 십 만 분의 일이라는 확률에 나올까 말까한 나의 뇌에 딱 들어맞는 뇌가 있다고 하자. 수술대에 올라간 나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딱 들어맞는 뇌의 일부를 이식받았고, 몇날며칠을 잠을 잔 끝에 깨어났다. 뇌를 이식받기 전의 나와 이식받은 이후의 나는 동일인물인가. 의학적으로 일부의 뇌만을 이식하고 그로 인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뇌 기증자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의 행동습관을 무의식중에 따라하게 된다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의 진리 관계를 떠나 애초의 물음에서 좀 더 나아가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인식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뇌이식을 받기 이전의 나루세 준이치는 메구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자상하고 수줍고 착한 사랑스러운 남자였다. 하지만 뇌이식을 받은 이후의 준이치는 메구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귀찮을 따름이고, 그 누구로부터도 방해받고 싶지 않다. 심지어 옆방에서 떠드는 소리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식칼을 손에 쥐는 등의 살인충동까지 느낀다. 뇌이식을 전후해서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A의 뇌를 B의 뇌로 바꾼다면 A는 B가 될 수 있단 말일까.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인식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심리철학자 힐러리 퍼트넘은 '통 속의 뇌'라는 걸 가정했다. 베스트셀러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라는 책의 '완전한 은둔자' 부분에도 '통 속의 뇌'를 언급하고 있으니 참고하면 좋겠다. 

  "어떤 사악한 과학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는 한 사람의 뇌를 육체에서 분리하여 이 뇌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줄 영양액이 담긴 통 속에 옮겨 담았다. 뇌의 각 신경 조직은 초과학적 컴퓨터에 연결되고, 이 컴퓨터는 뇌에 전기적 자극을 주어 우리의 감각 경험과 똑같은 질적 정보를 준다. 그 사람(뇌)의 입장에선 환경, 각종 사물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존재하고 또한 완벽히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모든 것은 컴퓨터와 신경 세포 간의 전기적 자극의 결과일 뿐이다."

  통 속에 담긴 뇌가 컴퓨터의 전기적 자극에 의해 무엇인가를 인식한다면, 누군가가 피자를 먹고 있을 때 피자 맛이 나도록 전기 자극을 주고, 손을 들었다고 착각하도록 전기적 자극을 줄 수 있다. 심지어는 우리가 지금 가정하고 의심하고 있는 "어떤 사악한 과학자가 사람들의 뇌를 떼어내 뇌를 계속 살아 움직이게 할 영양분이 담긴 통 속에 집어넣고 이런저런 조작을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 모두의 뇌는 각기 다른 통 속에 들어있고 각각의 뇌는 각각의 전기적 자극을 통해서 대화한다고 느끼고, 숨을 쉰다고 느끼고, 생각을 한다고 느낄 수 있다. 지금 자판을 치고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나 또한 통 속의 뇌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가. 나 자신에게 몸이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두 팔과 두 다리가 두 눈이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심지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일까. 내가 바라보고 인식하는 모든 것들, 참이라 알고 있는 것들을 확신할 수 있는가. 힐러리 퍼트넘의 '통 속의 뇌'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도록 만든다.  결국 '통 속의 뇌' 개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현대적 검증이라 할 수 있다.



* 멜로/로맨스라 해서 눈물 쏙 빼겠다 싶었던 영화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상황으로 관객을 몰고간다. <변신>은 울고 싶지만 웃긴 영화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있는,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 여자, 메구미(아오이 유우). 결국 그녀가 받아들여야할 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었다. 준이치의 말과 행동과 마음이 달라졌다고 그녀의 준이치에 대한  사랑이 변하는건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준이치를 사랑했다.

  영화를 보면 수술대에서 회복 중이던 준이치가 일어나 병원의 다른 방으로 들어가 자신의 뇌와 기증자의 뇌가 통 속에 담긴 것을 보고 구토하는 장면이 나온다. 잘려진 나의 뇌와 잘려진 기증자의 뇌는 모두 투명한 통 속에 잘 보존되어있었다. 그로부터 지금 나는 내 뇌의 일부와 기증자의 뇌 일부를 가지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잘려진 일부의 뇌와 잘려진 일부의 뇌가 내 머리 속에 들어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아니다. 단지 그렇다고 추리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어느 것도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내가 통 속에 담긴 두 개의 뇌를 봤고 구토를 했다는 것은 확실한가. 그것도 믿을 수 없다. 투명한 통 속에 담긴 뇌는 나의 것이 아닐 수도 있고, 통에 붙여진 N.J. 라는 알파벳 약자를 통해 '나루세 준이치'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 조차도 또 거짓. 

  힐러리 퍼트넘의 '통 속의 뇌' 이론을 적용시켜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나루세 준이치의 뇌를 가졌을 때 사물을 인식하는 법과 기증자의 뇌를 가졌을 때 사물을 인식하는 법은 다르다고. 그 또한 조작된 것이라고. 결국 나루세 준이치가 자신의 뇌를 가졌을 때 보였던 행동양식과 가치관이 기증자의 뇌를 가졌을 때 보였던 그것과 다르다고 말 할 수도 없다. 전기적 자극에 의해 조작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메구미를 향한 준이치의 사랑도, 준이치에 대한 메구미의 사랑도. 

  뇌를 바꾸면 그 사람의 특성도 바뀌는지, 그 사람의 정체성도 바뀌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우리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애초의 물음 "타인의 뇌를 이식한 나는 본래의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에 대해서 그렇다, 아니다, 라는 확실한 답을 내리려하진 말자. 행동의 급격한 변화를 보인 뇌이식 이전의 나루세와 이후의 나루세 뿐 아니라, 뇌이식을 받지 않은 우리 모두 또한 변화하고 있다. '뇌이식'은 잊고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 "1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의심하라. 내가 인식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자기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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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신기루 2007-07-18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뇌만을 꺼내놓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통 속의 뇌'는 <매트릭스>와 비슷하네요
인간의 신체를 움직이는 데 사용될 에너지를 기계에 사용하는 대신 가만히 누워있게 만든 인간에게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을 머릿속으로만 인식하도록 하는 거 잖아요
만약 우리가 정말 매트릭스 안에 사는 거라면, 가상현실 속에서 뇌수술 따위를 하고 그로 인해 인격이 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거겠죠??(이 질문은 약간 생뚱맞은 듯.)
뇌이식에 대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은 정말 많은데 정리가 안돼요ㅠ_ㅠ

마늘빵 2007-07-19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닥님 / 다른 식을 전개해나가다가 바꾸지 못한 흔적이 그렇게 남을 줄이야. -_- 수정했습니다.
신기루님 / 모든 것이 의심스럽죠? :) 인간들은 어쩌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에 나오는 수많은 개미들 중 하나 일 수도 있어요. ㅋㅋ

마늘빵 2007-07-19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데도 하긴하는데, 활동은 잘 안하고 주요 글만 올립니다. 알라딘에서만 '놀아'요.
근데 <변신> 영화 영 아닙니다. -_-
 
비평 15 - 2007. 여름
비평이론학회 엮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5월
품절


어느 쪽이 낫다 못하다를 떠나서, 만약 우리가 고교생들에게 미국 방식의 에세이를 쓰게 한다면 어찌될까? 어림도 없는 얘기다. 학생들이 소질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금의 교육 현실에서는 우선 학생들의 소질을 북돋아 줄 방법이 없고, 이미 사회에 만연한 상호불신과 반교육적 '에토스'가 그런 자발성의 교육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대학으로서 당장 그 제출된 에세이가 학생이 제 손으로 쓴 것인지 누가 대신 써준 것인지 판별할 길이 없다. 미국 방식의 자유논술 같은 것은 "학생 에세이는 절대로 타인이 써주지 않는다"는 규칙과 명령의 교육적 준엄성이 사회적으로 존중되고 학교, 사교육장, 학부모, 학생이 모두 그 규칙을 준수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잘 쓴'혹은 '잘 썼다'는 에세이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시장이 즐비하고 대신 써줄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 데가 대한민국이고 우리의 교육 현실이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 규칙을 제 혼자 지키려는 자는 바보가 된다. 학생들은 바보이고 싶지 않다. 부모들도 바보이고자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대학에 붙고 보자"는 명령이 다른 모든 명령들을 압도하는 상황에서는 수단방법을 가리고 규칙을 따질 겨를이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어야 하기 때문에 그 '무슨 수'들이 아무리 부당하고 불법적이고 비교육적인 것이라 해도 일단 대학에 붙기만 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속임수를 포함해서 '무슨수' 이건 쓸 줄 아는 것이 오히려 '경쟁력'이다. 고교생 독서이력철 같은 제도가 시행되어도 대학으로선 그것을 믿을 수 없다는 난감한 문제에 봉착한다.

(경쟁력, 수월성, 창의성의 비극 - 도정일)-27-28쪽

대학입시 경쟁에서 91점을 받은 학생은 입학하고 90점을 받은 학생이 탈락하는 것은 개인의 실력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학과정원 수에 의해, 30명 정원일 경우 30등을 한 91점 학생은 입학이 가능하고 31등을 한 91점 학생은 탈락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기에 91점과 90점 간의 차이 1점은 결코 인간의 능력이 실력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1점으로 겨우 붙은 학생은 실력 있는 학생처럼 사회적으로 대우 받는 반면 90점으로 탈락한 학생은 열등생으로 낙인 받게 된다. 이것이 입시 위주 한국 교육의 병폐인 동시에 한국 교육의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다.

(교육 붕괴와 교육의 민주화 - 한준상)-32쪽

이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 어른들에게뿐만 아니라 곁 사람에게, 세상에, 그리고 자기 스스로에게 버르장머리가 없다. 사람대접은 보고 배운 적도, 따로 익힌 적도 없으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가끔 도저히 눈뜨고 볼 수가 없어서 불러 야단치면 "왜요?"하고 눈부터 치켜뜨고 대든다. 사회의 소수자나 약자는 고사하고 도대체 남을 배려하는 일엔 손방이다. 하기는 이들이 누구에게 뭘 보고 배워 그걸 알겠는가? 무엇보다도 사이버 공간에서 익명성에 기대 함부로 악담으로 대거리로 마녀사냥을 일삼는 이들의 버르장머리 없음과 배려 없음은 등골이 서늘할 지경이다. 또 디지털 세대로서 어른들보다 월등한 핵심역량으로 어른세대의 위선과 모순에 앙갚음하는 서슬 또한 무섭기 짝이 없다. 아이들을 이렇게 죽음과 죽임의 나락으로 내몬 어르신들은 과연 어떠신가?

그토록 교육이라면 맹신하다 못해 광신하는 세상에서 정작 교육을 맡은 교사들부터 헌신짝 취급이다. 그림자도 밟지 않도록 모시고 기리던 스승의 자취는 어느 새 간 데 없고, 스승의 날이면 교문 닫아걸고 손사래 치며 대접은커녕 손가락질이나 받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처지다. 그깟 세상이야 뭐라던 교직을 천직으로 알고 아이들 잘 가르치면 되지 않느냐는 말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일 뿐이다. 내가 아는 어느 초등교사가 울먹이며 한탄하듯이 아이들은 숫자나 글자는 죄 배워갖고 오면서, 정작 싸가지는 하나도 배워먹지 못하고 학교에 들어온다. 공부는 학원에서 하고, 학교에서는 퍼져 자기나 하다가 행여 이름이라도 부르면 눈을 부릎뜬다. 나무라거나 꾸지람 할라지면 핸드폰으로 호시탐탐 동영상 찍어 신고할 건수나 노린다. 부모들은 이제 교사 알기를 우습게 알고 아무 때나 달려들고, 걸핏하면 팔 걷어붙이고 나선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두렵다고, 부모들이 무섭다고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른다.

(교육, 마지막 식민지 - 정유성)-106-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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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공화국의 종말 - 인재와 시험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대한민국이 산다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6월
절판


주어진 문제를 틀리지 않고 정답을 골라야 하는 자아의 정신과 의식은 완전히 해체되어 문제를 출제하는 외부자의 일부분, 아니 외부자의 일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몰 주체화 과정이자 몰 개성화 과정이다. 즉 개인의 주체성과 개성을 부정하고 말살해버리는 과정이다. 이처럼 대학 입시에 점령당한, 대학 입시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한국의 교육은 근대사회가 요구하는 것과 정반대의 인간 유형을 양산하고 있다. 근대사회는 주체적이고 개성적인 개인들과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 위에 존립한다.-38-39쪽

사실 체벌은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몸은 더 이상 규율과 통제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은 정신과 더불어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의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나의 인격은 너의 인격과 마찬가지로 존엄하고 신성불가침한 것이다. 거기에는 그 어떠한 물리적이 강제력이나 폭력도 가해서는 안된다. 체벌은 다른 사람의 인격에 강제력과 폭력을 행사해도 괜찮다고 가르치는 꼴이다. 따라서 교육이나 훈육이 필요하다면 체벌이 아닌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한다.

(밑줄그은이 주 :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현실에서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간혹 발생한다. 명백히 누가 봐도 - 잘못을 저지른 본인을 포함 - 잘못인 것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을 경우, 다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통하지 않는다면, 해당 학생을 포기해버리거나 신체에 폭력을 가하더라도 잘못을 뉘우치도록 하는 두 가지 길 밖에 남지 않는다. 포기할 수 없으니 후자를 택할 밖에)-50쪽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교육을 담당하는 일선 교사들이 문제를 출제하고 채점한다. 가르친 사람이 그 결과를 평가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유기적이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가르치는 사람 따로 있고, 평가하는 사람 따로 있다. 후자는 전자를 철저히 무시하고, 전자가 소유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문화자본'을 가지고 전자가 가르친 학생들을 시험한다. 마치 자신의 지적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를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한국의 대학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비유기적으로 분리시키고 괴리시키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사회집단이다.-68-69쪽

그러나 민사고에서 10등은 어디까지나 10등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일반고의 1등은 어디까지나 1등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신이란 학생들이 동일한 환경과 여건에서 경쟁을 해서 나타난 결과를 점수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신은 학생들이 주어진 조건에서 얼마만큼 학업을 성취했는가를 따지는 제도인 관계로 서로 조건이 다른 고등학교의 내신을 비교해서는 안된다. 민사고 학생의 학업 성취도는 어디까지나 다른 민사고 학생들의 그것과 비교함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특목고의 경우도 그렇고 일반고의 경우도 그렇다. 서로 다른 학교의 내신은 상호 비교할 수도 없고 비교해서도 안 된다. 바로 이러한 근거로 일반고에서 1등은 민사고나 특목고에서 1등과 동일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108-109쪽

내가 보기엔 내신 그 자체가 말이 안된다. 즉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학업 성취도에 따라서 줄을 세운다는 발상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객관화하고 계량화하고 그 결과에 근거해 상호 비교할 수 있다는 생각의 발로이다. 여기서 인간은 객체화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 그리고 인격은 부정되고 무화된다. 남는 것은 산술적 논리일 뿐이다. -109쪽

정답을 고르는 객관식 시험의 경우 내가 받은 90점은 네가 받은 95점과 당연히 비교된다. 정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시험에 정답이 없다면 나의 A학점과 너의 B학점은 단순히 비교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너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 중략 ... 그러므로 굳이 내신을 반영해야 한다면,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를 해야한다. 즉 단순히 기계적으로 누가 몇 등급에 속하므로 몇 점을 받는다고 평가해서는 안되고, 그가 주어진 여건에서 어느 정도의 학업 성취도를 보여주었는가를, 그리고 그가 지원하는 대학에서 어느 정도의 학업을 성취할 수 있는가를 평가해야 한다.-109-110쪽

한국인들은 외국의 언론사들이 실시하는 대학의 서열화 작업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거기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대학들이 고등학교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선발해 그렇게 되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른바 세계적인 대학들은 우수한 교수를 확보하고 뛰어난 연구 업적을 쌓으며 질높은 교육을 시키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오늘날의 발전을 이룩하고 명성을 획득한 것이지, '쩨쩨하게' 고등학교에 기대고 힘입어 그리된 것이 아니다.-112쪽

최소한 동일한 조건인 경우에는 일반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열악한 환경과 조건에서 공부한 학생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그만큼 불리할 수 밖에 없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대학에서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잠재력과 창의성이지 결코 고등학교에서의 학업 성취도를 계량화하고 지수화한 점수가 아니다. -114쪽

요즈음에는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 공교육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고등학교들이 제법 눈에 띈다. 그러나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하나 있으니, 이러한 학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사교육으로 왜곡된 학교 교육을 바로잡아 전인 교육이나 인성 교육을 시키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다만 학생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고 학교에서 대학 입시 준비를 시킨다는 점에서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 -142쪽

(밑줄그은이 주 : 음주 문화와 와인의 이해 등의 실용적인(?) 과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물론 대학은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뒤처져 고리타분한 '상아탑주의'로 남아서는 안된다. 글로벌화와 글로벌 시대는 대학 사회에도 커다란 도전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글로벌 에티켓'을 가르치는 것에 대학의 역할이나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학은 오히려 글로벌 에티켓을 글로벌 시대의 구성요소로서 연구 대상으로 삼아 분석하고 설명하고 그에 대한 과학적인 토론을 전개해야 한다. 즉 글로벌 시대는 대학에게 인식의 대상이지 예의범절의 대상이 아니다. 예의범절로서 글로벌 시대는 시민회관이나 백화점의 문화센터에서 배우도록 하라-162쪽

대학에서는 단 한두 명 밖에 수강생이 없더라도 칸트, 하이데거에 대한 강좌를, 성리학에 대한 강좌를 개설해야 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토론식과 논술식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대학이외의 그 어떠한 사회문화적 조직이나 공간에 의해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업이 이를 대체할 수 있다면 대학은 굳이 존재할 근거나 의미가 없다. 역으로 만일 대학이 상품을 생산하고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면 기업의 존재 근거와 의미는 퇴색하거나 없어질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시민 교양 수준의 강좌는 폐지해야 한다. 설령 수백명이 몰린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대학 밖의 어디서 그런 강좌가 열리는지 홍보하는 포스터나 책자는 학생들을 위해서 비치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말이다. 대학생에게는 교양을 갖추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추구할 곳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대학 밖 어딘가에-162-163쪽

시험에서도 고등학교와 대학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고 전도된 모습을 보여준다. 서울대는 2008학년도 논술 고사의 시험시간을 5시간으로 결정했다. 문항은 인문계가 3개, 자연계가 4개를 각각 출제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다른 대학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술 고사를 거쳐서 들어간 대학에서 치르는 시험은 어떠한가? 대략 한 시간 정도에 걸쳐 2-3문제를 푸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도 말이 주관식 서술형이지 강의 시간에 배운 것을 착실히 암기해 충실히 답안을 채우는 방식이 주종을 이룬다. 결국 변형된 객관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험으로 학생들을 측정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논술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182-183쪽

독일의 대학에서 진행되는 세미나식 수업 방식의 구조와 과정은 다음과 같이 기술해 볼 수 있겠다. 우선 담당 교수는 한 학기 동안 진행할 세미나의 주제, 목표 및 세부적인 주제를 제시한다. 물론 구체적인 사항들을 학생들과 의논해서 결정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리고 학생들은 개인적으로 또는 그룹에 속해서 담당 교수가 제시한 또는 공동으로 결정한 세미나 주제 중에서 특정한 것에 대해서 발제함으로써, 참석자들에게 토론의 실마리와 자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어느 발제가 좋았느냐, 아니면 나빴느냐에 대한 기준은 얼마나 발제자가 혼자서 많은 말을 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졌느냐에 달려 있다. 세미나에서 발제한 내용은 이후에 글로 써서 제출해야 하는데 저학년 세미나에서는 주로 발제 내용의 정리 수준에 머문다면, 고학년 세미나에서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작은 논문 형식을 취하게 된다. 한편 담당 교수는 제출된 글을 면밀히 검토한 후에 해당 학생들과 직접 면담하고 토론을 하는데, 그는 여기에서 학생의 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후에 점수를 주게 된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서 비로소 한 과목의 이수가 끝나게 되는 것이다.-217-218쪽

한국에서 엘리트는 명문대 출신과 동일시되는 명목상의 엘리트이다. 엘리트다운 능력을 겸비하지 못한 명목상의 엘리트는 당연히 허약할 수 밖에 없다. 한국의 엘리트가 허약하다는 명제는 무엇보다도 엘리트 집단은 획일적이며 정답을 찾아 헤매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통해 입증된다. 그리고 이처럼 허약한 엘리트가 지배하는 사회는 당연히 허약할 수 밖에 없다.-229쪽

객관식 시험은 언제나 정답과 오답을 구분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도록 강요함으로써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범주화하는 흑백논리를 키우기 수비다. 한국 사회에서는 '빨갱이'이니 '이단'이니 하는 흑백논리를 아주 쉽게 접한다. 물론 이 둘은 한국 사회의 독특한 정치적 경험과 종교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빨갱이'와 '이단'과 같은 흑백논리의 형성에 교육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 또는 우리, 즉 '정답'을 고른 개인이나 집단은 너 또는 너희, 즉 '오답'을 고른 개인이나 집단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정답'은 선한 것이요, '오답'은 악한 것이다. 둘이 왜 그리고 어떻게 다른지, 둘 사이에 접점과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지 등등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 '정답'과 '오답'은 논의나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객관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찾지 못한 개인이나 집단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273쪽

언젠가 도덕시험에 '다음 중 중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라는 문제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5개의 지문이 주어졌단다. 그러자 그 학생은 자신이 볼 때 중학생이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문항을 골랐다. 그는 나름대로 '주관적 정답' - 물론 표현이 좀 어색하지만 - 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답으로 처리되었다. 그래서 교사에게 항의했더니, 교사가 제시한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교과서 어딘가에 중학생이 되면 하는 일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정답이 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중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을 교과서에서 규정할 수 있다는건가. 그리고 학교와 교사는 교과서의 내용을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참고 자료로 이용할 수 있지, 어떻게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아니 신주 모시듯이 하면서 무성찰적이고 무비판적으로 학생 평가 자료로 이용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객관식 시험을 통해서 말이다. 섬뜩한 기분이 든다.-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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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7-07-21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점점 찌들어버렸던 불행했던 학창시절이 생각나네요. 언제쯤 학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곳이 될까요.

마늘빵 2007-07-21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르치는 저도 힘겹습니다. 읽기만 해도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교과서를 가지고 수업해야한다는게 - 그렇다고 따로 뭔가를 만들어 수업할 능력도 안되고 - 답답합니다. 사고를 강요하는 교과서는 바뀌어야합니다. 특히나 마지막 밑줄긋기 부분에서 볼 수 있듯 도덕교과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옳고 그름을 재단하고, 사고의 틀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코미디죠. 저런걸 가르치는 저나, 시험보기 위해 외우고 있는 학생들이나.
 
요즘 어떤 영화 보셨어요?

2007. 7. 16   예스24

http://movie.yes24.com/movie/movie_memwr/view.aspx?s_code=SUB_MEMWR&page=1&no=16312&ref=76&m_type=0



 
* 스포일러 경고 

  개봉한 지 좀 시간이 흘렀고 이름 높은 영화평론가들에 따르면 그다지 뛰어난 작품이 아님에도 내게는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영화이다. 생명보험회사와 고객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영화의 배경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매일 신문 재테크란을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의 의뢰로 전문가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조언을 해준다. 현재 빚이 얼마가 있고, 연봉은 얼마이며, 생활비는 얼마를 쓰고 있다. 은행저축보다는 적금을 매달 얼마씩 들고 있는데, 좀 더 효율적인 재테크 방법이 없겠느냐고 문의를 하고, 일단 적금은 만기가 찰 때까지 놔두시고 이후에는 적립식 펀드 해외형, 국내형 분산투자하시고, 청약부금에 가입하시고, 보험에도 얼마씩 넣으라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취업을 하고나면 일단 생각하는 것이 월급을 어떻게 유용하게 쓸 것인가 하는 점인데,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보험에 가입하고 매달 얼마씩을 넣으며, 적금과 펀드를 이용해서 나름 재테크라는걸 시도한다. 그래봐야 종잣돈도 없는 이들에겐 남들따라 흉내내는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번듯한 집 하나 전세로 얻기도 힘든 판이니 어쩌랴. 먹여살릴 자식있는 결혼한 가장의 경우,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자신과 아내에게 생명보험을 들어놓고 나 아닌 다른 가족 구성원을 위한 미래에 대비하기도 한다. 나야 죽으면 그만이지만, 남은 자식들은 어찌하냐는 지극히 이타적인 사고(<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에 의하면 이런 것도 결국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길이길이 보존하기 위한 지극히 '이기적인' 행위로 비춰지겠지만).




* 검은집의 내부는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미로처럼 새로운 공간이 나온다. 이 집의 외양새는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 본따 만들었다고 한다. ‘빛의 제국’은 하늘은 맑은데 집과 그 주변은 깜깜한 밤처럼 보인다. 신태라 감독이 미술팀에 보여 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빛과 제국' 이 영감의 실마리가 됐다고 한다. 

  영화 <검은집>은 이토록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 위에 현실적인 공포를 덧씌운다. 언젠가부터 보험이란 제도를 통해 우리는 보호받고 있다. 보험사는 나름대로 수익을 내는 이익집단이지만 그들은 그들대로 수익을 내고 우리는 우리대로 언제 닥칠지 모를 위험한 순간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 생물학에는 r 전략과 K 전략이란 것이 있는데, r전략은 곤충처럼 수많은 자손을 만든 다음 거의 내버려두는 방법이고, K전략은 인간처럼 소수의 자식을 에지우지하면서 키우는 것을 지칭한다. 영화 <검은집>의 원작인 기시 유스케의 소설 <검은집>의 등장인물 기나이시는 이렇게 보험회사의 등장으로 인한 사회변화를 설명한다.

"인간은 포유류 중에서도 특히 자식을 소중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K전략자이지요. 옛날에는 잠시 눈을 떼기만 해도 아이가 죽어버리는 유아 사망률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에, 부모가 따뜻하게 보살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지나면서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하게 되었고, 문자 그대로 부모 없이도 자식이 자랄 수 있게 되자 r전략의 상대적 유리성이 증가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자식을 만들고 싶은 만큼 만들어두고 내동댕이쳐도 사회가 돌봐주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자식을 남길 수 있지요. 즉, 자식을 열심히 키우는 것보다, 자식을 만들어놓고 도망치는 전략이 유리해져 버린 것입니다."(p242)

  결국 언제 닥칠질 모르는 위험으로부터 우리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제도 중 하나인 보험이 약자를 보호해주는 사회제도의 역할을 넘어 냉혹한 r 전략자를 증가시켰다는 말. 생물학을 공부해보지 않은 필자로서는 소설 속의 대사에 불과한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의 사실여부를 떠나 적어도 우리네 현실이 냉혹해지고 있는건 사실이다. 바로 이 r 전략자의 전형적인 사례가 이 영화의 주인공인 '사이코패스'이다.

  사이코패스. 어떤 국어사전에도 사이코패스에 대해 설명한 부분은 없다. 동일명의 영화를 보고 책을 읽어본 바로 간단하게 사이코와 사이코패스를 정리해보자면 이렇다. 사이코는 살인 자체에 목적을 두고 행동한다. 살인 이후의 어떤 쾌감을 얻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사이코라면 사이코패스는 자신이 원하는 목적이 따로 있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살인이란 방법을 택하는 경우이다. 이런 사이코패스에겐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양심이 결여되어있다.  

  영화 속에서는 이런 사이코패스를 일반인과 구별하는 방법으로, 웃거나 우는 사진을 여러장 보여주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웃는 사진을 분류해낼 수 있다면 정상인이고, 구별하지 못한다면 사이코패스라는 말이다. 그들은 타인의 웃고 우는 감정의 변화모습을 구별해내지 못한다. 즉 타인의 감정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다. 보통사람이 사이코패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 중에 사이코패스가 섞여있다고 한다. 그들은 겉으로보아 우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내 친구와 가족, 회사동료들 중에서 사이코패스를 찾아낼 수 없다. 양심이 없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없다면, 사이코패스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뉘우치는 척, 반성하는 척은 할 수 있어도, 뉘우치거나 반성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 "이봐 이제 나올 때도 됐잖아? 나는 참을 만큼 참았어. 제발 부탁하는데, 꼭 돈이 필요하다구!" "죄송합니다. 본사에서 결정하는 일이라서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빨리 처리해 달라고 재촉해보겠습니다." "나는 보험료를 냈잖아! 비싼 보험료를 한 달도 빠지지 않고 냈단 말이야. 그런데 아이가 죽었는데도 왜 보험금을 주지 않는거야?" 

  매일 같이 뉴스에 보도되는 애인, 친구, 가족을 잔혹하게 살해한 이들의 소식은 더 이상 우리에게 놀랍지 않다. 얼마전 다시 본 영화 <공공의 적 2>에서 보여지는 돈많은 재벌회장 한상우는 아버지를 죽이고, 형을 죽이고, 이어 자신을 추척하는 검사 강철중을 죽이려한다. 탐욕과 이익을 위해서 윗사람에게 아부하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에겐 가혹하다. 골프채를 휘두르고, 주먹을 날리고, 때로는 이용해먹기 위해 기꺼이 맞는 일도 감수한다. 많이 배웠지만 양심이 결여된 그는 똑똑한 만큼 상황을 역이용할줄도 안다. 반면 작은 불의로운 일에도 내 일처럼 나서서 부정의를 시정하려하고, 정의감으로 똘똘뭉친 강철중과 처자식도 떠나버린 부장검사 김신일은 한상우와는 정반대편에 머물러있다.

  모든 연쇄살인범들을 사이코패스라고 할수는 없지만 그들 중 다수인 사이코패스는 같은 사람을 죽이는데 있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죄의식과 죄책감이란 것이 없으니 사람을 죽이기 한결 쉽다. 영화 속 신이화는 자식을 자살로 위장해 보험금을 타고, 박충배의 손가락과 나아가 두 팔을 자름으로써 추가로 보험금을 타냈다. 그리고 묻는다. "혹시 이 남자가 죽으면 보험금을 탈 수 있나요?"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생명보험이라는 것이 가족구성원을 죽여가면서 보험금을 받아내는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비단 영화 속의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뉴스거리도 안되는 너무나 일상적인 이야기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자살로 위장해 살인 한 후 보험금을 받아내는 그들이나, 남편이나 아내가 죽은 뒤 우연히 언젠가 가입된 거액의 보험금에 기뻐하는 이들은 얼마나 다른가. 전자는 사이코패스라 칭하고, 후자는 일반인이라 칭할 것인가. 전자와 후자는 정도의 차이일뿐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나이 많으신 여자분의 남편이 돌아가셨는데 며칠 후 보험사에서 연락이 왔더라. 가입한지 몰랐던 보험사로부터 거액의 보험금을 받았고 그걸로 새 집을 사서 들어갔다. 얼마나 다행이냐고. 잘됐다, 라고 하기보다 다행이다, 라고 했기에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지극히 일반적인 현대인의 모습이고 아마 같은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목적과 고의적인 행위가 전제된다고 해서 비난의 대상이 되고, 그렇지 않다 해서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건 아니지 싶다. 물론 전자와 후자는 엄밀히 구분하여 전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처벌이 들어가야겠지만, 사람사는 모습은 전자와 후자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사이코패스는 유전적으로 희귀하게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감정을 지배하는 전두엽의 기능이 일반인의 15% 에 불과해서 타인의 감정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또한 양심도 결여되어있다. 물론 후천적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화학 성분의 과다축적으로, 임신 중에 병에 걸리거나 약물로 뇌에 손상을 입는 경우에도, 장시간의 스트레스에도 후천적 사이코패스가 될 수 있다고 한다.



* 연극배우 강신일씨는 공교롭게도 사이코패스 영화에 거듭 출연했다.  <공공의 적> 1,2 는 사이코패스 영화라 홍보하지 않았지만, 사이코패스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다. 첫편에서 자신의 부모를 무참히 살해한 조규환과 뒷편에서 돈과 야망을 위해 자신의 아버지, 형 등을 죽인 한상우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가 아닐런지. <공공의 적>과 더불어 <검은집>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도 탁월했다.     

  범죄는 날로 흉악해지고 잦아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뉴스에도 쉽게 당혹하거나 놀라지 않는다. 티비 뉴스와 신문을 통해 이런 소식을 접하는 것이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렸고,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것이 나에게, 나의 가족에게, 나의 친구에게 닥치지 않는 한 딴 세상 이야기고 결코 난 그런 잔혹한 범죄로부터 벗어나있다고 생각한다. 닥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한다. 이런 '지극히 일상적인' 우리들이야말로 사이코패스가 아닐런지.

  얼마전 일본 기차에서 한 젊은 여성이 모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어떤 남자로부터 성추행받고 있었음에도, 그 여자가 도와달라고 소리쳤음에도, 그 열차칸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고 한다. 하다못해 직접 나서지 못한다면 전화로 신고를 할 수 있고, 달려가 차장에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여자는 기차 뒷편 화장실에서 성폭행 당했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성폭행범만의 잘못이라고 할 것인가, 그저 성폭행 당한 여자가 재수가 없었으려니 하고 말 일인가. 처벌은 물론 성폭행범이 받겠지만 침묵하고 바라보던 그들 모두 유죄이다. 사이코패스는 어떤 특수한 유전적 결함이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전두엽의 기능이 일반인의 15%에 불과한 양심을 결여한 이들 뿐 아니라, 부정의를 당하고 있는 누군가를 보고서도 나서지 않는, 아무렇지 않은, 우리 모두는 사이코패스이다. 

  맹자는 인간에겐 네 가지 선한 마음이 있다 하였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그것인데, 인간의 본성이 선함을 논증하기 위해 맹자는 측은지심의 사례를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았다. 그는 분명 깜짝 놀라 얼른 달려가 아이를 구하려 들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위험에 처한 아이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맹자는 인간은 측은지심이 발생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인 '수오지심', 양보하는 마음인 '사양지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인 '시비지심' 등도 우리 인간의 내면 안에 자리잡고 있는 본성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사람이라면 무릇 이같은 네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사이코패스라 불리우는 특별한 문제가 있는 어떤 병자뿐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네 가지 본성이 결여되어있음을 느낀다. 사이코패스와 일반인을 분류하고 그들을 병자취급하는 우리들 또한 사이코패스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맹자는 <맹자>의 '공손추'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사단을 가지고 있는 이는 모두 계발시켜 채워갈 줄 안다. 불이 처음 타오르고 물이 처음 솟아나듯이 진실로 사단을 계발시켜 채워갈 수 있으면, 온 세상을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계발시켜 확충해가지 못한다면 부모조차 섬길 수 없을 것이다." 약자를 보호한답시고 여러가지 제도를 만들고 시행하지만, 정작 약자는 보호받지 못하고 부작용만 속출하고 있다.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노라고 새로운 법을 만들었지만 정작 비정규직은 예전보다 더욱 살기 힘들어지고 있다. 최근 발생한 이랜드 사태는 대표적인 사례다. 맹자의 네 가지 선한 본성은 그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다스리고 키워나감으로써 확충시킬 수 있는 것이다. 계발하지 않고 자신의 선한 본성을 버려둔다면 그것이 사이코패스가 되는 지름길이요, 열심히 계발해 확충한다면 그것이 '사람'이 되는 지름길일 것이다. 사이코패스가 되고 사람이 되고는 당신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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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16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7-16 15:03   좋아요 0 | URL
앗 찔리시다니요. 속닥님이요? 그럴리가요. :)

비로그인 2007-07-16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되게 땡기네요. 난 영화는 별로일것 같더라구?
그러고보니 난 이미 사이코패스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크흐흐...

마늘빵 2007-07-16 17:31   좋아요 0 | URL
아니 체셔님이 왜 싸이코패스에요? 이거 영화도 재밌고 책도 재밌어요. 책은 영화가 다루지 못하는 저런 류의 인간에 대한 깊이있는 대화를 싣고있어서 생각해볼 거리를 찾기엔 더 좋습니다. 이런 영화는 집에서 티비나 컴퓨터로 보면 실감나지 않을거고, 극장서 봐야 제 맛이 납니다.

프레이야 2007-07-16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뎌 쓰셨군요, 아프님.
연쇄살인범들의 뇌를 연구하고 싸이코패스를 정의하던 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납니다. 15% 정도의 양심만으로 버티려는 우리가 싸이코패스의
혐의에서 풀리기란 쉽지 않겠어요. 양심을 콱콱 찔러대는 글..^^
강신일은 다른 영화에서도 참 연기를 잘 하더군요.

마늘빵 2007-07-16 18:15   좋아요 0 | URL
아 저도 그 프로그램을 보고싶은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사이코패스에 대해 관심이 깊어져서. 강신일씨의 <진술>이란 연극을 대학로에서 봤는데 대단했습니다. 또 한다면 꼭 보러갈겁니다.

네꼬 2007-07-16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감당하지 못해서 못 볼 것 같아요. =_= 무서워.

마늘빵 2007-07-16 18:16   좋아요 0 | URL
ㅋㅋ 네꼬님 좀 무섭긴해요. 집에서 보면 별로 안무서울거에요. 영화관에서 보면 무섭지만. 무섭다기보다 소름끼치죠. 무엇보다 현실감있는 영화라.

푸른신기루 2007-07-16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힝.. 영화보고 싶어요..ㅠ_ㅠ

마늘빵 2007-07-16 21:33   좋아요 0 | URL
이거 재밌어요. 평은 별로인데 난 재밌었는데... -_- 너무 나 믿지는 마삼. ㅋㅋㅋ

비로그인 2007-07-16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너무너무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 게다가 듀나의 평을 본뒤에 볼까 말까...하고 있어요.

마늘빵 2007-07-16 22:29   좋아요 0 | URL
책을 먼저 읽으셨군요. 책이 어쩜 더 재밌고 깊이있을수도 있어요. 영화를 먼저 보는게 나았을텐데. 한번 보세요. 강신일씨의 연기에 주목하면서. :) 듀나가 이 영화 평도 썼었나요? 듀나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비로그인 2007-11-05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영화 봤어요. 삭제된 부분이 있었으면 훨씬 더 이해가 빠를터인데. 넘 많이 잘라내서 으응?했어요. 여하간 원작의 기시 유스케도 나왔고, 유선 연기 잘하더군요. 황정민씨는 으으음...여하간, 책보다 덜, 그러나 듀나의 평보단 훨씬 더 재미있었어요. 여기서 깨달은 점: 영화평 보고 가서 영화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