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공화국의 종말 - 인재와 시험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대한민국이 산다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6월
절판


주어진 문제를 틀리지 않고 정답을 골라야 하는 자아의 정신과 의식은 완전히 해체되어 문제를 출제하는 외부자의 일부분, 아니 외부자의 일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몰 주체화 과정이자 몰 개성화 과정이다. 즉 개인의 주체성과 개성을 부정하고 말살해버리는 과정이다. 이처럼 대학 입시에 점령당한, 대학 입시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한국의 교육은 근대사회가 요구하는 것과 정반대의 인간 유형을 양산하고 있다. 근대사회는 주체적이고 개성적인 개인들과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 위에 존립한다.-38-39쪽

사실 체벌은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몸은 더 이상 규율과 통제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은 정신과 더불어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의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나의 인격은 너의 인격과 마찬가지로 존엄하고 신성불가침한 것이다. 거기에는 그 어떠한 물리적이 강제력이나 폭력도 가해서는 안된다. 체벌은 다른 사람의 인격에 강제력과 폭력을 행사해도 괜찮다고 가르치는 꼴이다. 따라서 교육이나 훈육이 필요하다면 체벌이 아닌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한다.

(밑줄그은이 주 :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현실에서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간혹 발생한다. 명백히 누가 봐도 - 잘못을 저지른 본인을 포함 - 잘못인 것에 대해서 반성하지 않을 경우, 다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통하지 않는다면, 해당 학생을 포기해버리거나 신체에 폭력을 가하더라도 잘못을 뉘우치도록 하는 두 가지 길 밖에 남지 않는다. 포기할 수 없으니 후자를 택할 밖에)-50쪽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교육을 담당하는 일선 교사들이 문제를 출제하고 채점한다. 가르친 사람이 그 결과를 평가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유기적이다.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가르치는 사람 따로 있고, 평가하는 사람 따로 있다. 후자는 전자를 철저히 무시하고, 전자가 소유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문화자본'을 가지고 전자가 가르친 학생들을 시험한다. 마치 자신의 지적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를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한국의 대학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비유기적으로 분리시키고 괴리시키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사회집단이다.-68-69쪽

그러나 민사고에서 10등은 어디까지나 10등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일반고의 1등은 어디까지나 1등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신이란 학생들이 동일한 환경과 여건에서 경쟁을 해서 나타난 결과를 점수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신은 학생들이 주어진 조건에서 얼마만큼 학업을 성취했는가를 따지는 제도인 관계로 서로 조건이 다른 고등학교의 내신을 비교해서는 안된다. 민사고 학생의 학업 성취도는 어디까지나 다른 민사고 학생들의 그것과 비교함으로써 의미를 지닌다. 특목고의 경우도 그렇고 일반고의 경우도 그렇다. 서로 다른 학교의 내신은 상호 비교할 수도 없고 비교해서도 안 된다. 바로 이러한 근거로 일반고에서 1등은 민사고나 특목고에서 1등과 동일한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108-109쪽

내가 보기엔 내신 그 자체가 말이 안된다. 즉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학업 성취도에 따라서 줄을 세운다는 발상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객관화하고 계량화하고 그 결과에 근거해 상호 비교할 수 있다는 생각의 발로이다. 여기서 인간은 객체화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 그리고 인격은 부정되고 무화된다. 남는 것은 산술적 논리일 뿐이다. -109쪽

정답을 고르는 객관식 시험의 경우 내가 받은 90점은 네가 받은 95점과 당연히 비교된다. 정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시험에 정답이 없다면 나의 A학점과 너의 B학점은 단순히 비교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너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 중략 ... 그러므로 굳이 내신을 반영해야 한다면,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를 해야한다. 즉 단순히 기계적으로 누가 몇 등급에 속하므로 몇 점을 받는다고 평가해서는 안되고, 그가 주어진 여건에서 어느 정도의 학업 성취도를 보여주었는가를, 그리고 그가 지원하는 대학에서 어느 정도의 학업을 성취할 수 있는가를 평가해야 한다.-109-110쪽

한국인들은 외국의 언론사들이 실시하는 대학의 서열화 작업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거기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대학들이 고등학교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선발해 그렇게 되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른바 세계적인 대학들은 우수한 교수를 확보하고 뛰어난 연구 업적을 쌓으며 질높은 교육을 시키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오늘날의 발전을 이룩하고 명성을 획득한 것이지, '쩨쩨하게' 고등학교에 기대고 힘입어 그리된 것이 아니다.-112쪽

최소한 동일한 조건인 경우에는 일반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우선권을 주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열악한 환경과 조건에서 공부한 학생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그만큼 불리할 수 밖에 없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대학에서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잠재력과 창의성이지 결코 고등학교에서의 학업 성취도를 계량화하고 지수화한 점수가 아니다. -114쪽

요즈음에는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 공교육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고등학교들이 제법 눈에 띈다. 그러나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하나 있으니, 이러한 학교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사교육으로 왜곡된 학교 교육을 바로잡아 전인 교육이나 인성 교육을 시키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다만 학생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고 학교에서 대학 입시 준비를 시킨다는 점에서 다르다면 다를 뿐이다. -142쪽

(밑줄그은이 주 : 음주 문화와 와인의 이해 등의 실용적인(?) 과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물론 대학은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뒤처져 고리타분한 '상아탑주의'로 남아서는 안된다. 글로벌화와 글로벌 시대는 대학 사회에도 커다란 도전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글로벌 에티켓'을 가르치는 것에 대학의 역할이나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학은 오히려 글로벌 에티켓을 글로벌 시대의 구성요소로서 연구 대상으로 삼아 분석하고 설명하고 그에 대한 과학적인 토론을 전개해야 한다. 즉 글로벌 시대는 대학에게 인식의 대상이지 예의범절의 대상이 아니다. 예의범절로서 글로벌 시대는 시민회관이나 백화점의 문화센터에서 배우도록 하라-162쪽

대학에서는 단 한두 명 밖에 수강생이 없더라도 칸트, 하이데거에 대한 강좌를, 성리학에 대한 강좌를 개설해야 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토론식과 논술식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대학이외의 그 어떠한 사회문화적 조직이나 공간에 의해 대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업이 이를 대체할 수 있다면 대학은 굳이 존재할 근거나 의미가 없다. 역으로 만일 대학이 상품을 생산하고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면 기업의 존재 근거와 의미는 퇴색하거나 없어질 것이다. 이와 더불어 시민 교양 수준의 강좌는 폐지해야 한다. 설령 수백명이 몰린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대학 밖의 어디서 그런 강좌가 열리는지 홍보하는 포스터나 책자는 학생들을 위해서 비치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말이다. 대학생에게는 교양을 갖추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추구할 곳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대학 밖 어딘가에-162-163쪽

시험에서도 고등학교와 대학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고 전도된 모습을 보여준다. 서울대는 2008학년도 논술 고사의 시험시간을 5시간으로 결정했다. 문항은 인문계가 3개, 자연계가 4개를 각각 출제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다른 대학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술 고사를 거쳐서 들어간 대학에서 치르는 시험은 어떠한가? 대략 한 시간 정도에 걸쳐 2-3문제를 푸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도 말이 주관식 서술형이지 강의 시간에 배운 것을 착실히 암기해 충실히 답안을 채우는 방식이 주종을 이룬다. 결국 변형된 객관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험으로 학생들을 측정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논술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182-183쪽

독일의 대학에서 진행되는 세미나식 수업 방식의 구조와 과정은 다음과 같이 기술해 볼 수 있겠다. 우선 담당 교수는 한 학기 동안 진행할 세미나의 주제, 목표 및 세부적인 주제를 제시한다. 물론 구체적인 사항들을 학생들과 의논해서 결정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리고 학생들은 개인적으로 또는 그룹에 속해서 담당 교수가 제시한 또는 공동으로 결정한 세미나 주제 중에서 특정한 것에 대해서 발제함으로써, 참석자들에게 토론의 실마리와 자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어느 발제가 좋았느냐, 아니면 나빴느냐에 대한 기준은 얼마나 발제자가 혼자서 많은 말을 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졌느냐에 달려 있다. 세미나에서 발제한 내용은 이후에 글로 써서 제출해야 하는데 저학년 세미나에서는 주로 발제 내용의 정리 수준에 머문다면, 고학년 세미나에서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작은 논문 형식을 취하게 된다. 한편 담당 교수는 제출된 글을 면밀히 검토한 후에 해당 학생들과 직접 면담하고 토론을 하는데, 그는 여기에서 학생의 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후에 점수를 주게 된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서 비로소 한 과목의 이수가 끝나게 되는 것이다.-217-218쪽

한국에서 엘리트는 명문대 출신과 동일시되는 명목상의 엘리트이다. 엘리트다운 능력을 겸비하지 못한 명목상의 엘리트는 당연히 허약할 수 밖에 없다. 한국의 엘리트가 허약하다는 명제는 무엇보다도 엘리트 집단은 획일적이며 정답을 찾아 헤매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통해 입증된다. 그리고 이처럼 허약한 엘리트가 지배하는 사회는 당연히 허약할 수 밖에 없다.-229쪽

객관식 시험은 언제나 정답과 오답을 구분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도록 강요함으로써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범주화하는 흑백논리를 키우기 수비다. 한국 사회에서는 '빨갱이'이니 '이단'이니 하는 흑백논리를 아주 쉽게 접한다. 물론 이 둘은 한국 사회의 독특한 정치적 경험과 종교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빨갱이'와 '이단'과 같은 흑백논리의 형성에 교육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 또는 우리, 즉 '정답'을 고른 개인이나 집단은 너 또는 너희, 즉 '오답'을 고른 개인이나 집단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정답'은 선한 것이요, '오답'은 악한 것이다. 둘이 왜 그리고 어떻게 다른지, 둘 사이에 접점과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지 등등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 '정답'과 '오답'은 논의나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객관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찾지 못한 개인이나 집단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273쪽

언젠가 도덕시험에 '다음 중 중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라는 문제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5개의 지문이 주어졌단다. 그러자 그 학생은 자신이 볼 때 중학생이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문항을 골랐다. 그는 나름대로 '주관적 정답' - 물론 표현이 좀 어색하지만 - 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답으로 처리되었다. 그래서 교사에게 항의했더니, 교사가 제시한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교과서 어딘가에 중학생이 되면 하는 일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정답이 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중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을 교과서에서 규정할 수 있다는건가. 그리고 학교와 교사는 교과서의 내용을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참고 자료로 이용할 수 있지, 어떻게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아니 신주 모시듯이 하면서 무성찰적이고 무비판적으로 학생 평가 자료로 이용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객관식 시험을 통해서 말이다. 섬뜩한 기분이 든다.-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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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2007-07-21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점점 찌들어버렸던 불행했던 학창시절이 생각나네요. 언제쯤 학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곳이 될까요.

마늘빵 2007-07-21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르치는 저도 힘겹습니다. 읽기만 해도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교과서를 가지고 수업해야한다는게 - 그렇다고 따로 뭔가를 만들어 수업할 능력도 안되고 - 답답합니다. 사고를 강요하는 교과서는 바뀌어야합니다. 특히나 마지막 밑줄긋기 부분에서 볼 수 있듯 도덕교과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옳고 그름을 재단하고, 사고의 틀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코미디죠. 저런걸 가르치는 저나, 시험보기 위해 외우고 있는 학생들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