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 : 지식인과 실천 問 라이브러리 6
윤평중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품절


바람직한 지식인은 스스로의 계층적 이해관계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역동적이고 종합적인 관찰자’로서 실천하려 노력하지만 동시에 지식의 존재구속성이라는 역사적 조건 위에서 활동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20쪽

지식의 존재구속성이라는 본질적 조건을 경시하면서 도덕주의의 색채가 짙은 교조적 종합에 너무 쉽게 빠져든다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의 표상으로 자리 잡아온 계몽적 참여지식인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종종 이들은 거대한 적과 싸우는 자신의 언설이 진리와 정의를 상징한다고 강변한다. 탄압을 무릅쓰고 독재와 싸우던 시절에는 확신에 찬 그들의 태도가 감동을 주면서 일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갖기도 했다. 존재구속성의 한계를 시인하는 열린 지식인조차도 자신이 개진하는 담론만은 일반성과 보편성을 지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식이란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며 종국적 진리도 아니다. (중략) 지식은 부분성 및 잠정성이라는 근본적 존재조건을 전제한다. 지식은 ‘끝나지 않을 탐구’의 도정에서 ‘진리에 점차 접근해 감’이라는 지향성과 역동적으로 맞물리는 토론과 검증외의 다른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식인이란 진리 파지자나 설교자가 아니다. 지식인은 잠정적 담론을 생산, 토의하고 반증하면서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해 함께 가는 해석학적 행위자인 것이다. -21-22쪽

나에 대한 반대자도 나만큼 옳을 수 있다는 유연성과 개방성이 배제될 때 남는 것은 진리의 전제와 독단의 횡포뿐이다. 나나 우리 편에 대한 반대나 이의 제기가 진리를 그르치는 악의 음모로 인지될 때 지식사회의 황폐화와 지식인의 타락은 이미 예정된 것이다. -22쪽

신지식인론은 지식인의 임무를 한것된 사회적 효용창출로 환원시킴으로써 오늘날 지식인 위기의 한 연원이 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신지식인론의 지식인상이 전통적 지식인과 전연 관련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지식인의 한 측면만을 대대적으로 부풀려 놓았다는 문제가 있었다. -23쪽

명예나 학위, 직위 같은 외면적 조건이 지식인의 자기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으로 오해될 때 지식인 되기의 역동성과 개방성은 사라지고 만다. 지식인은 실체가 아니라, 권력비판과 지식생산의 과정을 육화시킨 ‘항상적 지식인 되기’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지식인 되기를 규정하는 조건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지식담론의 보편적 정당화 가능성과 비판적 실천 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37쪽

한 행위자의 진정성(眞正性)이 주관적 덕목으로 왜소화될 때 정치적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 현실정치의 지평에서 의도 대신 행위의 결과가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교훈이다. 마찬가지로 진정성도 단순한 내면적 덕목의 표출에 머무르지 말고 상호주관적 검증과 비판의 장 앞에 개방되어야 한다. 나의 진실성과 너의 신실함이 특정한 현안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할 때 서로 자신의 주관적 확신에만 집착한다면 출구는 발견되지 않는다. 유일한 해법은 상대방의 주관적 성실성을 인정한다는 전제 위에서, 현안을 둘러싼 사실에 대한 이해와 공감대를 가능한 한 늘리는 데 있다. 진정성은 주관적 진실성과 상호주관적 검증 가능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며, 양자를 잇는 다리는 사실과 비판인 것이다. 양심과 헌신, 주관적 확신과 정의감 등도 그 타당성을 공론장의 지평에 개방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43쪽

진리는 사실에 대한 엄정한 접근이 아니라 주관적 신념에 대한 복무로 정의되고 만다. 이념의 옳고 그름이 사실에 의해 획정되는 대신,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은 ‘제대로 된 사실(진실)’이 아니므로 무시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합적 삶의 실천인 정치를 객관적 진리의 실현 과정으로 보는 진리의 정치가 극단화할 때 당파성의 해악도 최대화된다. -44쪽

성찰을 결여한 지식은 억견에 불과하며, 겸허함을 잃은 지식인은 독단론자에 지나지 않는다. -46쪽

(송두율을 논하며)
자기정합성이 특히 지식인에게 중요한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지식인은 자신의 입론이나 학설을 변론하는 존재며 그 논변에 대한 공론장의 비판과 반비판을 흔쾌히 수용하는 사람이다. 토론의 결과 스스로의 입장에 변화가 있다면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런 변화가 자신의 삶의 궤적에서 갖는 의미를 투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물론 자기정합성이라는 규준으로 예전에 요구되었던 이론과 실천의 통합, 즉 학자의 학설과 실존적 삶 사이의 조화까지 요구하는 것은 현대의 기준으로 지나친 것이다. 현대 지식인의 자기정합성은 논변과 학술적 신념의 일관성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자기정합성에 의해 견인되지 않는 지식생산과 권력비판은 공허한 것이거나, 최악의 경우 거짓으로 타락한다. -104-105쪽

김훈이 보기에는 극단화된 진리의 정치야말로 건전한 삶을 위협하는 최악의 추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진리의 정치가 흘러넘치는 한국현대사의 시평에서 ‘반시대적 고찰’에 가까운 김훈 문학의 정치성은 진리정치의 과잉에 대항하는 또 다른 과잉의 수사학이다. -123쪽

헤게모니의 변환과 함께 이 시대의 화두로 부상하고 있는 경제적 실용주의가 김훈이 암시하는 삶의 정치와 친연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한국의 신보수가 내세우는 실용주의가 이념 대신 실용을 강조하고 말보다 일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김훈의 텍스트들은 삶의 실감으로부터 분리된 채 부유하는 진리정치의 기표에 대한 혐오감을 감추지 않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치세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공격하는 신보수주의의 논리와 닮아 있는 것이다.(계속)-127-128쪽

그러나 신보수의 실용주의와 김훈의 삶의 정치 사이에는 날카로운 긴장이 존재한다. 요새 주목받는 실용성 담론은 자본주의적 욕망 확산과 충족의 논리에 전념한다. 죽음과 몸, 밥벌이라는 실존의 궁극에 관한 김훈의 천착이 인위와 욕망의 무한확대라는 시대의 대세를 오히려 거스르는 길을 가는 것과 선명하게 대비된다. 삶의 정치가 말하는 소박한 생의 질감과, 화폐의 만능을 고취하는 실용성은 상호대척적이다. 단기간의 돌관방식으로 전시효과를 겨냥하는 부화한 실용주의는 사회를 들뜨게 하고 안온한 일상을 오히려 위협할 수 있다. 평상심을 어지럽히는 ‘스펙터클의 사회’는 삶의 정치에 고유한 감수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127-128쪽

정부의 진단과는 달리 광우병 사태는 민초들의 시각에서 볼 때 ‘나’의 구체적 삶의 현장을 위협하는 데 대한 자연스러운 대응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상에서 먹거나 접하게 되는 물질이 부적절한 정부조치 때문에 직접 나의 건강권과 생명권을 침해할지도 모른다는 데 대한 적절한 분노와 불안감의 표현인 것이다.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자들의 촛불시위가 문화제 형식으로 축제 비슷하게 진행된 것도 말의 자기표현적 특질과 연관해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명박 정부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작은 기술적 이슈가 특정집단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갈등과 얽혀서 과잉 정치화되었다는 음모론적 분석 틀을 구태어 감추지 않았는데 이는 창조적 실용주의의 상상력 빈곤을 예증할 뿐이다. -142쪽

표면적 레토릭과는 달리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에는 실용정신의 보편적 의의에 대한 균형 잡힌 감수성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실용적인 것의 내용은 압도적으로 경제적인 것의 지평을 지칭한다. 경제 자체도 아주 포괄적이고 복합적인 외연과 의지평을 담고 있는 개념일 터인데,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가 주목하는 경제에서는 ‘선진화된 세계일류국가’를 이루기 위한 강력한 ‘신발전 체제구축’만이 배타적으로 강조된다. 분배나 복지는 성장의 부가적 요소로 간주될 뿐이다. 실용주의가 경제지상주의로 축소되고, 경제는 성장으로 환원되고 마는 것이다. -149-150쪽

일탈한 국가와 함께 신자유주의 시대에 과대평창한 시장은 공화정을 위협하는 또 다른 주체다. 우리가 ‘삼성 사태’에서 확인한 것처럼 민주 질서에 의해 견제되지 않은 시장은 모든 걸 집어삼키는 불랙홀이 되기 쉽다. 생산력과 개인의 창조력을 극대화하는 시장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지만 그것이 너무 커진 나머지 오히려 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형해화한 공공성이 경제적 효율성에 의해 잠식되는 정도에 비례해, 자본이 국가와 민주질서를 식민화하게 되는 것이다. -158쪽

한국사회는 지금 극단의 시대를 뜨거운 열병을 앓으면서 통과하는 중이다. 모든 것이 흔들릴 때 지식인의 임무는 성찰적 균형 속에서 중심을 잡는 일이다. 극단의 담론은 맹목적 추수주의를 강요하거나 부화뇌동을 빌미로 우리를 유혹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강요와 유혹은 신념의 견결함이나 취향의 세련됨이라는 미명을 동반해 세상을 미혹한다. 세계를 투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이지만 시류와 유행이라는 것, 즉 ‘세상에의 부역’은 항상 지성의 최대 적이었다. 극단의 시대는 극단의 담론에 의해서는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이다. -176-177쪽

악은 결코 궁극적으로 해소되거나 척결될 수 없으며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 역사에서 가장 나쁜 경우 악은 확대 재생산된다. 가장 좋은 경우에도 악이 축소 재생산되는 경우는 드물다. 역사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하나의 방식은 그것을 부단히 논의하고 반성해 기억의 정치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책임규명을 무화시키는 역사허무주의의 발언이 아니며, ‘모두가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는 역사 도덕주의로의 후퇴도 아니다. 악의 평범성 테제는 선악을 너무 쉽게 전유하려는 정치적 인간의 오만을 꾸짖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과 집합적 역사 앞에 좀 더 겸허해야 한다고 고언한다. -192-193쪽

진보는 모든 종류의 억압, 차별, 부정의, 불평등에 대한 비판과 극복 시도로 정의된다. 그 비판의 지평은 널리 열려 있으며 비판방법론과 극복 시도의 타당성과 효용성은 오직 실천에 의해서만 증명 가능하다. 이에 비해 보수는 현실에 그런 부정적 요소가 엄존함을 부인하지 않지만, 부정적 요소도 현실의 일부이므로 점진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204쪽

삶의 곤핍함을 보통사람들에게서 완화시켜줄 수 있어야만 진정한 진보다. 미래의 헛된 희망으로 현재의 곤고함을 메우려는 논자들은 사이비진보에 불과하다. 평균적 시민의 생활 세계에서 호소력과 타당성이 입증되지 않은 논설들은 공론일 뿐이다. 긴박한 서민의 구체적 삶과 겉도는 논쟁은 무익한 자기위안의 정열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진보가 위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다음의 요청에서 명쾌하게 압축된다. "그대 진보여,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20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국가는 폭력이다 - 평화와 비폭력에 관한 성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조윤정 옮김 / 달팽이 / 2008년 7월
장바구니담기


국가는 집중되고 조직된 형태의 폭력을 대변한다. (마하트마 간디)-5쪽

정신적 영향력은 사람의 바람을 변화시키는데, 이에 따라 그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요구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인다. 결국 정신적 영향력에 순응하는 사람은 자신의 바람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권력은, 일반적으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바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권력 기관에 복종하는 사람은 자신의 바람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강요된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 원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고 원치 않는 행동을 하게 만들기 위해 육체적 폭력을 이용하거나 육체적 폭력으로 위협한다. 자유를 박탈하거나 상해 혹은 구타를 가하거나 아니면 이런 식으로 처벌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다. 과거나 현재나 이것이 바로 권력의 실체다. -28쪽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민족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할 필요성 때문에 군대가 늘어난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노예화되고 억압받는 국민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35쪽

노동자들의 노동으로 축적된 거대한 부가 모두가 아닌 배타적인 특정한 개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면,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이 돈을 원하는 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력이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부여된다면, 노동 계급의 파업이 금지되고 자본가들의 연합이 장려된다면,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할 법률의 입안권이,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력이 주어진다면,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아이들의 세속적, 종교적 교육 방법을 선택할 자격이 주어진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원해서가 아니며 어떤 자연 법칙의 결과도 아니고 정부와 통치 계급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이를 원하고 물리적 폭력과 물리적 억압으로 그 같은 제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35-36쪽

사람들은 정부가 개개인간의 갈등으로 일어나는 잔인한 행위로부터 사람들을 구제하고 그들에게 국가적 삶이라는 불가침의 질서를 보장해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정부는 사람들을 똑같은 투쟁의 필요성에 종속시켰다. 단지 개인적 투쟁을 다른 나라의 국민들과 벌이는 전쟁으로 바꾸어놓았을 뿐이다. 따라서 국가에게나 개인에게나 똑같이 파멸의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38쪽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듣곤 했다. 국가권력에 복종하지 않으면, 사악한 사람이나 내부 또는 외부의 적에게 공격당할 위험에 처하여, 목숨을 걸고 그들과 싸워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곤경에서 구제되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익이다. 이런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한때 그 얘기를 사실로 믿었다. 국가에 허용해야 할 양보는 사소한 희생에 불과한 듯했고, 그 대신 안전한 공동체 안에서 평화로운 삶을 살리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공동체를 위해 일정 부분의 이익을 포기했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 이런 희생이 10배로 증가하고 약속된 이득은 아무것도 실현되지 않자,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국가에 대한 복종은 완전히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중략) 가장 큰 해악은 군대에 복무해야 하는 모든 시민들이 이로써 국가 조직의 지지자가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당하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들은 이제부터는 국가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 동조자로 간주된다. -39쪽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가의 지시를 거부하지 않고 따른다면, 그것은 그들이 두 가지 경우의 득과 실을 차분히 따져보아서가 아니라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이 최면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복종은 사람들에게 이성적 사고나 어떤 의지의 행사 없이 특정한 지시에 따르기를 요구한다. 이를 거부하려면 독립적인 사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복종과 불복종의 윤리적 중요성을 배제하고 각각의 경우에 어떤 점이 좋고 나쁜지 살펴보면, 국가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보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언제나 이롭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44쪽

애국심은 자기 국민만을 사랑하는 감정이며, 자기 마음의 평정, 재산을 희생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며 적들의 침략과 학살로부터 자기 국민을 보호한다는 신조이다. 애국심에 호소하여 이익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오늘날 애국심이 의미도 효용도 모두 상실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인 수단으로 이 개념을 고수하려 든다. 이런 사람들은 가장 강력한 수단을 사용하여 국민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53쪽

정부의 폭력을 없애는 데 필요한 일은 한 가지다. 폭력 기구를 지지하는 애국심이 미개하며 유해하고 수치스러우며 옳지 못하고 무엇보다 부도덕한 감정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는 것이다. 애국심은 도덕성의 가장 낮은 단계에 있는 사람들, 다른 이들에게 위해를 가할 마음을 품으면서 그 사람들이 똑같이 폭력을 가해올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에게나 자연스런 감정이기 때문에 미개한 감정이다. 애국심은 다른 민족과의 유익하며 즐겁고 평화로운 관계를 방해하고, 무엇보다 극악한 사람들이 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정부 조직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유해한 감정이다. 애국심은 인간을 노예로, 싸움닭으로, 황소로, 나아가 자신의 목표도 아닌 정부의 목표를 위해 힘을 낭비하고 목숨까지 바치는 검투사로 만들기 때문에 수치스런 감정이다. 애국심은 부도덕한 감정이다. (기독교 정신에서 가르치듯)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하거나, 하다못해 자신이 스스로의 이성에 따라 움직이는 자유로운 존재임을 얘기하는 대신, 애국심에 물든 사람은 자신을 조국의 아들로, 정부의 노예로 여기고, 이성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들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69쪽

우리는 가게 점원의 근무 시간에 대해 신경을 쓰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에 대해 더 많은 신경을 쓰며, 마부에게 너무 많은 짐을 실어 말이 혹사당하지 않게 하라고 지시하기도 하고, 더욱이 도살장에서 도살할 때 가축들이 가능한 한 고통을 덜 받게 하도록 조치한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서 천천히 그리고 대개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는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에 관한 한, 그들의 노동 생산물로 우리가 편의와 쾌락을 얻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두 눈을 굳게 감고 있다. -112쪽

한편으로는 세금을 납부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만드는 물품과 비슷한 물품을 훨씬 더 뛰어난 설비로 생산하는 자본가들과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그는 자본가들의 한시적인 또는 영구적인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만약 자본가 아래서 일하면서 자본가와 자유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자유를 팔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도, 그가 새로운 필요와 욕구를 좇게 되기 때문에 그런 가능성은 사라진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언제나 이런저런 식으로 세금, 토지, 그리고 그들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줄 상품을 지배하는 사람들 밑에서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142쪽

주인이 노예에게 강제로 노동을 시킬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법률은 그 주인들이 모든 땅을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률로 대체되었다. 모든 토지가 주인들의 사적 재산이 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률은 세법, 즉 세금을 주인의 수중에 쥐어주는 법률로 바뀔 수 있다. 세법은 물건이나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권을 방어해주는 법률로 대체될 수 있다. 토지나 물건,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권을 지켜주는 법률은 현재 제안되고 있듯이 강제 노동 법령에 의해 대체될 수도 있다.
따라서 오늘날 노예제를 낳는 법률들을 폐지한다고 해도 노예제는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가 등장할 것이다. -150쪽

복수의 감정과 분노를 표출할 때를 제외하면, 폭력은 어떤 사람에게 그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강요할 때 사용된다. 하지만 자신의 의사에 반해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노예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폭력이 존재하는 한, 노예제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163쪽

정부는 국민에게서 얻은 돈으로 무기를 사고, 정부에 맹종하는 야만적인 군 지휘관들을 고용하고 훈련시킨다.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정교하게 다듬어진 군사 교련 방법을 통해 군인으로 소집되어 온 사람들을 규율을 갖춘 군대 병력으로 변모시킨다. 군인들은 군대에 있는 동안 인간의 삶에서 소중한 모든 것과, 인간의 중요한 특질, 즉 이성적인 자유를 완전히 빼앗긴다. 그들은 조직화되고 위계화된 군대 체제 안에서 순종적인 살인 기계가 된다. 현대의 정부로 하여금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게 하는 기만의 본질은 이런 훈련된 군대에 있다. 정부가 스스로의 의지가 없는 이 폭력, 살인 기구를 수중에 넣으면, 전 국민이 그들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이다. 정부는 국민을 손아귀 밖으로 다시는 풀어주려 하지 않으며, 그들을 약탈하고 착취하고, 더욱이 종교와 애국적 교육을 통해 정부에 대한 충성과 숭배 의식을 주입한다. -166쪽

노예든 노예주인이든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자신의 조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조건을 향상시키고자 한다면, 그는 그와 그의 이웃을 노예화시키는 옳지 못한 일들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그와 그의 형제, 동포들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옳지 못한 일들을 중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의든 타의든 정부 행위에 참여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따라서 일개 병사나 야전 사령관, 국무 장관, 세무 관리, 법정 증인, 시 의회 의원, 배심원, 주지사, 국회 의원이나 국가 폭력과 관련된 그 어떤 지위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174-175쪽

관습이 뒷받침하는 자발적인 합의가 각 사회와 전 세계의 폭력을 언제 어느 정도로 몰아낼 수 있을지는 사람들 속에서 성장한 의식이 얼마만큼 강력하고 얼마만큼 명확한가 그리고 이런 의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각자 별개의 사람들이다. 각 개인은 당면한 목표를 명확하게 인식함으로써 인류의 보편적인 운동의 참여자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진보의 적이 될 수도 있다. 각 개인은 선택을 해야 한다. 모래 위에 짧고 헛된 삶의 불안정한 집을 지어 신의 뜻에 거스를 것인가 아니면 신의 뜻에 따라 죽음 없이 영원히 계속될 진정한 삶의 운동에 참여할 것인가. -178쪽

가장 유익한 사회 질서(경제적 측면이나 혹은 다른 면에서도)는 각자가 만인의 이익을 생각하고 이를 위해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는 형태이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한다면, 각자 가능한 최대의 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무익한 사회(경제적 측면이나 혹은 다른 면에서도)는 각자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고,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고 자기 자신만을 염두에 두는 사회다. 이것이 보편적인 사회적 형태라면, 서로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는 사회라면, 나는 그런 사회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186쪽

개인적 행복을 추구한다면, 개인적 행복도 보편적 행복도 이룰 수 없다. 무사무욕을 추구해야 개인적 행복과 보편적 행복을 이룰 수 있다. -194쪽

진정한 자유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살고 행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211쪽

권력은 인간의 합리적인 각성에 의해서만 철폐될 수 있다. -214쪽

사람들을 돕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스스로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여기서 이익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이 생각하듯 결코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사실 유일하게 현실적인 방법이다. 다른 모든 수단은 환상이다. 대중의 지도자들은 헛된 환상을 심어주어 대중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진정으로 올바른 길을 외면하게 만들고 있다. -223쪽

사람들을 훌륭한 삶으로 인도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다. 말하자면 스스로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다. -226쪽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국가와 강제력이 없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하지만 이와 반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성적인 존재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폭력을 인정하고 이성적 합의를 삶의 내적 연결고리로 인정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가?"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 아니면 비이성적인 존재이다.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인간들 사이의 모든 문제는 폭력에 의해 결정될 수 있으며 마땅히 그렇게 될 것이고, 누구에게는 폭력에 관한 권리가 주어지고 누구에게는 그런 권리가 주어지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면 인간들의 관계는 폭력이 아니라 이성에 기초하여 세워져야 할 것이다. -252-253쪽

자유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허락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면서 중대한 치명적 오류들이 생겨났다. 오늘날 사람들이 국가의 폭력에 복종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어떤 특정한 행위에 대한 국가 권력의 승인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같은 오류이다. 노예가 일요일 교회에 가거나 뜨거운 물에 목욕하거나 한가로운 시간에 옷을 수선할 수 있도록 허락받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270-27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9월이여, 오라 -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혜영 옮김 / 녹색평론사 / 2004년 6월
구판절판


작가들은 자기가 이 세계 속에서 이야기를 고른다고 상상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허영심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는 정반대로, 이야기가 작가를 골라냅니다. 이야기는 스스로를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공적이 이야기든, 사적인 이야기든, 이야기는 우리를 지배합니다. 이야기 자신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라고 명령합니다. 논픽션과 픽션은 이야기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 기법의 차이일 뿐입니다. 내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픽션은 내게서 춤추듯 흘러나오고, 논픽션은 내가 매일 아침 맞이하는 이 고통스럽고 깨진 세계가 비틀어 짜듯이 내보냅니다. (중략)
하나뿐인 이야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사물을 보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다른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하나의 절대적인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자 하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라, 사물을 보는 자기 나름의 방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가지기를 원하는 한 이야기꾼으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62-63쪽

최근에, 미국정부의 행동을 비판해온 사람들은 - 나 자신을 포함해서 - ‘반미적’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반미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신성화되고 있습니다. ‘반미적’이란 용어는 일반적으로 미국의 기성체제가 비판자들을 깎아내리고, 그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 틀린 것은 아니지만 부정확하게 - 사용하는 말입니다. 일단 누군가가 반미적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그의 발언은 들어보지도 않고 무시되며, 논리는 상처받은 국가적 자존심의 소용돌이 속에 사라져버립니다. -65-66쪽

1988년에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 북부의 수백개 촌락을 유린하였고, 쿠르드족 수천명을 죽이기 위해 화학무기와 기관총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바로 그 해에 미국이 후세인에게 미국산 농산물을 구입하도록 5억달러의 지원금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이듬해, 후세인의 인종학살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에, 미국정부는 지원금을 두배로 늘려 10억 달러를 주었습니다. 미국정부는 또한 후세인에게 고품질의 탄저병균과 헬리콥터 이외에, 화학 및 생물무기 제조에 이용될 수 있는 이중 용도의 물질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담 후세인이 가장 잔인한 악행을 자행하는 동안 미국과 영국 정부는 그의 가까운 동맹자였음이 드러납니다. -78쪽

지난 10년간 고삐 풀린 ‘세계화’ 속에서, 세계의 총소득은 연간 평균적으로 2.5퍼센트 증가해왔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빈민은 1억명이 더 늘어났습니다. 상위 100개 거대 경제 중에서 51개 경제는 국가가 아니라 기업입니다. 세계의 상위 1퍼센트가 보유한 부는 하위 57퍼센트의 부를 합한 것과 맞먹고, 이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습니다. -82-83쪽

‘자유시장’이 훼손하고 있는 것은 국가의 주권이 아니라 민주주의입니다. 빈부격차가 심화됨에 따라, 저 보이지 않는 주먹이 더욱 큰 역할을 합니다.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줄 ‘달콤한 거래’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 다국적기업들은 관련 개발도상국의 국가기구 - 경찰, 법원, 때로는 군대 - 로부터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이러한 거래를 추진하거나 프로젝트를 실행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계화’는 가난한 국가에게 인기 없는 구조개혁을 밀어붙이고,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서, 충성스럽고, 부패하고, 가급적 권위주의적인 정부들로 구성된 국제적 연합체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중략) 왜냐하면 세계화란 오직 돈과 상품과 특허와 서비스에 관한 것이지, 결코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이나 인권존중에 관한 것도, 인종차별이나 화학 및 핵무기, 또는 온실효과와 기후변화, 또는 정의에 관한 국제적 협약에 관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국제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약간의 제스처라고 있으면 ‘세계화’라는 사업 전체가 망할 것처럼 되어있습니다. -84-85쪽

도널드 럼스펠트는 ‘테러에 맞선 전쟁’에서 자신이 맡은 임무는, 미국인이 미국식 생활방식을 계속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세계를 상대로 설득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화난 임금이 미친 듯이 설칠 때에는 노예들은 꼼짝도 못하고 덜덜 떱니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여기에 서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즉, ‘미국식 생활방식’은, 간단히 말해서, 지속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국 바깥에 있는 세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86쪽

‘클리어채널 월드와이드사’는 미국에서 가장 큰 라디오 방송국 소유주입니다. 이 회사는 1,200개 이상의 라디오 채널을 운영하는데 이것은 전체 시장의 9%에 해당되는 점유율입니다. 이 회사의 최고 경영자는 부시의 선거유세에 수십만달러를 기부하였습니다. 수십만의 미국 시민들이 이라크전쟁에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왔을 때 클리어채널은 미국 전역에서 ‘미국을 위한 집회’라는 애국적인 전쟁찬성 대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사의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이 행사를 광고하고 마치 그것이 대단한 뉴스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특파원까지 파견하였습니다. 여론의 합의를 만들어내던 시대에서 뉴스를 만들어내는 시대로 넘어간 것입니다. 조만간 언론의 뉴스보도실은 이런 가식마저 던져버리고 저널리스트들 대신 연극 연출가를 고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146-147쪽

"(전략) 사물에 대해 생각하고, 세상에 참여하다보면,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끔찍한 고통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럴 때, 이 모든 것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하는 일의 과정을 즐기고, 가장 슬픔이 깊은 곳에서라도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햄버거를 먹고, 다이아몬드를 사고, 롤스로이스를 타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는 이것이 완전히 틀린 생각이라고, 최대한 행복한 모습으로 말하는 것입니다."-185-18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화? - Issue & Thinking 01
토머스 슈뢰터 지음, 유동환 옮김 / 푸른나무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이달의 읽을만한 책'으로 선정된 바 있는 <세계화?>. 세계화에 대해 전혀 모르는 청소년과 일반인들이 접하기 딱 좋은 눈높이의 책이다. 독일연방의회의 개발정책행동그룹 산하 경제협력위원회 등에서 정책 개발에 참여한 바 있는 다름슈타트 전문대학 초빙교수 토머스 슈뢰터가 쓰고, 한국노동운동연구소, 통일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 등을 거치며 활동을 한 유동환이 번역했다.

  이 책은 세계화의 처음으로 돌아가 출발한다. 근대 초기 상업의 중심지에서 후추를 실은 배가 재고를 빨리 처분하기 위해 어딘가로 가고 있다. 향신료와 비단, 설탕, 담배 등을 실은 배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정보만으로도 상인들은 엄청난 이윤을 남길 수도 쫄딱 망할 수도 있었다. 원거리 무역이 발달하자 해적과 노상강도에 대비하기 위한 보험이 생겨났고, 이것이 금융업의 시작이었다. 상업의 발달과 화폐의 활발한 이동은 곡물량이 15000-1600년 사이에 네 배나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빈부의 격차는 훨씬 커졌다. 

  한편에선 정의로운 전쟁이 시작됐다. 그들은 원주민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종과 복종을 요구했다. 반항하면 정의로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며. 수십만의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이 죽어갔고, 정복자들의 병균으로 더 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노예제는 식민지의 자원 착취로도 모자라 사람까지 착취하는 강제 이민이었으며, 그들이 끌려간 나라에서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반면 그들이 떠나온 나라의 토착 경제는 배고픔과 빈곤이 그들을 대신했다.

  이 책이 제시하는 장을 순차적으로 따라오다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에 도달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동시에 아주 오래 전 세계화의 출발점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그 모습만 달리해 오늘날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엔 언급한 근대 초기의 모습들은 모두 지금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식량은 증가했지만 지구 한 쪽에선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고, 지구 한 쪽에선 매 끼니마다 음식을 버리고 있다. 버리는 쪽의 음식을 굶어죽는 쪽에 전달하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지만 불행히도 현실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내가 요구하는 것을 위해 정의로운 전쟁도 불사한다. 언제나 평화를 추구하고,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는 미국이 최근 수십년간 가장 많은 전쟁을 벌여온 국가임을 부인할 수 없다. 중국, 한국, 과테말라, 인도네시아, 쿠바, 콩코, 페루,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 그레나다, 리비아,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파나마, 이라크, 보스니아, 수단, 유고슬라비아, 아프가니스탄까지 미국이 전쟁을 벌인 국가는 놀라울 정도로 많다. 그 무엇을 위해, 자유와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인권을 위해 불가피한 전쟁을 했다고 말한다면 세계가 웃을 것이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세계를 재편성한 미국의 다음 목표가 어디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자원을 최대한 안 가지고 있는 국가일수록 안전하다.

  정의로운 전쟁은 꼭 무기를 들고 벌어지진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브로커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타국으로 가서 굳을 일을 해가며 본국으로 돈을 부칠 수밖에 없는 이주노동자들은 근대 초기의 원주민 노예의 다른 얼굴이다. 원주민이 강제로, 이들이 자발적으로 대륙간 이동을 했다고 해서, 강제이주가 잘못이고, 자발적 이주가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긴 어렵다. 이들이 타국으로밖에 올 수 없었던 원인을 제공한, 구조를 만든 이들이 잘못이다.  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정의와 평화를 외치며 타국을 침공하는 이들과 자발적으로 건너온 이주 노동자들을 부릴대로 부려먹고 내팽개치는 이들의 모습은 다르지 않다.

 과거에 비해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은 없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부드러운 모습으로 더 악랄하게 침투하고 있다. 자본은 한곳으로 흡입되고, 가난한 국가는 착취 당하고, 사람들은 버려진다. 한편으로 세계화는 교류가 없던 사람들 간의 문화적, 인적 교류를 활성화시키고, 사물과 사람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지구 전체가 하나의 마을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해주기도 했지만, 그건 세계화의 아주 작은 단면일 뿐이다. 문화가 교류된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결국 문화는 다른 문화를 침식하고 들어갔고, 뒤이어 자본이 들어왔다. 다양한 문화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 통합되는 흐름이 세계화의 본질적인 모습이라 할 것이다.

  세계화는 어쩔 수 없는 흐름이 아니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살 길을 찾아야되지 않겠느냐고. 세계화를 거부하고 막는다면 결국 고립을 자초하는 것이 아니냐고, 그렇게 죽는 것보다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부당하지만 조금이나마 착취하며 우리가 취할 것은 취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알면서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까.

  큰 자본이 작은 자본을 잡아먹고, 큰 국가가 작은 국가를 잡어먹는 건 어쩌면 자연스럽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이라 하더라도. 그러나, 우리가 적어도 '다함께' 살고자 한다면 그것을 불가피한 선택이라 말해선 안된다. 세계화의 흐름을 막을 수 있는, 세계화의 부작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논의하고 개선시켜야 한다. 국가와 각 지역이 담을 쌓고 자급자족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이다. 그러면 담을 쌓지 않고 문을 열고 살면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착취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윤 극대화라는 명제와 목표를 내세우는 세계화에 대한 반세계화 저항 운동은 단지 '힘 있는 자들'에게 항의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다자간 투자 협정에 대한 반대 운동처럼, 일단 작은 성공을 거두면 그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게 되고 그럼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반대 운동에 참여한다. 결국 반세계화 운동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차이를 제대로 평가해서 그것을 하나의 비전으로 발전시키는 능력에 그 성패가 달려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선 세계화의 대안으로 몇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유엔의 권한을 강화하고 개혁하는 것이다. 유엔은 국제통화기금 IMF와는 달리 1국가 1표 라는 평등권이 주어지는 대표적인 국제기구 때문이라 한다. 둘째, 코스모폴리탄 민주주의를 제안하는데, 여기서 요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국제기구인 유엔의 민주화(제 3세계 발언권 강화 등), 강제적 사법권을 갖는 국제재판소, 국제인권법원의 설립, 유럽공동체와 같은 지역통합정부, 국제군대 창설, 글로벌 의회 수립, 권리와 의무에 관한 신헌장 제정, 글로벌 법 체계 정립 등이다. 셋째, IMF의 지배구조 개혁이다. 현재 IMF, 세계은행, WTO가 강대국의 이익을 대변해 힘을 행사하고 있으므로, 이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이런 말을 한다. "유럽의 소는 하루 2달러의 정부 보조금을 받는다. 그리고 후발 산업국 주민의 절반 이상은 그보다 적은 소득으로 살고 있다."

  넷째, 국제청산은행의 설립이다. 케인즈가 주장한 바 있는 전 지구적 중앙은행인 국제청산은행을 설립해 통화를 발행하지는 않지만 달러가 아닌 자국의 통화로 무역이나 금융 거래를 할 수 있게 하는 기구이다. 이 기구는 외국에 빚을 갚을 때 꼭 수출을 해서 외국환을 확보할 필요가 없이, 자국환으로 해결할 수 있다. 다섯째, 토빈세를 부과하는 것이다. 197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토빈이 제안한 개념으로 "토빈세가 단기적으로 투자했다가 회수해 가는 자본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세금을 부과하여 상품 무역이나 장기간의 자본 투자를 훼손하지 않고, 환율 안정으로 오히려 세계 무역을 촉진하며, 금융 위기 발생 가능성을 줄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강제적인 제도의 개선을 통해 세계화의 악랄한 면모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세계화는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 말하겠는가. 노력조차 하지 않고 지레 겁먹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면, 어떻게 막을 것인가를 논하면 된다. 대안은 찾으면 많다.

p.s. 이 책은 주의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역사적 실례를 하나하나 객관적으로 살펴보면서 오늘날의 세계화에 도달한다. 그리고 대안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큰 틀에서는 주장하고자 하는 방향이 설정되어 주관적이지만, 각각의 꼭지는 역사의 현장에 멈추어 살펴본다는 점에서 객관적이라 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구를 걸으며 나무를 심는 사람, 폴 콜먼
폴 콜먼 지음, 마용운 옮김 / 그물코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폴 콜먼.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나 1988년에 환경운동가로 변신해 유엔 평화문화대사와 영국 '리빙 레인포리스트'의 홍보대사 등 여러 직책을 맡고 있는 그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기도 하다. 영국 이튼스쿨, 캠브리지 대학 강연을 비롯해 지금까지 3천 여회의 강연을 했다고 하며, 최근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영화 <지구>의 해설을 맡기도 했다. 지난 18년 동안 39개국 47,000 킬로미터를 걸으며 110만 그루의 나무를 심은 그는, 돈도 없고 집도 없지만 행복하다.

  2005년엔 일본에서 만나 그에 관한 책을 쓴 작가 고노미 기쿠치와 결혼도 했고, 2006년에는 한국, 중국, 일본 3개국을 걸으며 평화의 메세지를 보내기도 했다. 최근엔 중국 베이징 올림픽에 환경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홍콩에서 중국 텐진까지 걸었다 한다. 이렇게 화제가 되는 곳마다 항상 걸어다니는 그를 왜 여태껏 몰랐을까. 신문이나 티비 뉴스를 통해서도 접한 적이 없다. 이번에 그물코에서 나온 이 책을 통해, 그가 18년 간 걸어온 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함께 걸었다.

  처음부터 환경운동가는 아니었다. 해군에 복무하면서 배 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매일마다 쓰레기더미를 버리며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지구상의 모든 배에서 매일마다 이렇게 쓰레기를 바다에 버린다면 바다는 어떻게 될까? 아주 사소한 의문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의심에 의심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끝에, 그는 환경운동가가 되었다. 부잣집 노인의 운전기사 역할을 한 적도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자연에 대한 사랑과 환경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운동가의 길을 택했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아도, 생사가 달려있는 아마존 정글이나 험한 사막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걸었다. 걷고 걷다보면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고, 언론이 주목할 거라 보았다. 단순히 주목받고 싶은 욕구라고 보기엔 그의 삶 자체가 너무나 헌신적이었다. 그는 단지 주목받기 위해서, 유명해지기 위해서 이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기왕이면 자신이 하는 일을 많은 이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야 당연히 있다. 그래서 국제 회의가 개최되는 곳마다, 전쟁이 벌어지는 곳마다 찾아가 나무를 심으며 평화의 메세지를 전달했다. 

  이 책은 그가 걸어온 여정을 처음부터 함께 걸으며 그가 발 디디는 곳에서 느끼고 생각했던 바를 풀어놨다. 크게는 마치 여행서, 기행문 같은 형태를 취하지만, 그가 겪고 느낀 것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놓다보면 한 인물의 자서전 같은 느낌이 든다. 대중을 향한 연설문이자, 자서전으로 봐도 무방하다. 책의 말미에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할 수 있다. 평화로운 시대에 대한 확고한 비전이 있다면 우리는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우리가 가진 가장 큰 힘은 신념이다. 전쟁이 없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면 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중략) 지구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처럼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러한 신념이 더욱 큰 힘이 되어 평화로운 세상을 실제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믿게 되면 우리는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게 된다."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그러므로 집착을 버리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어떤 문제 자체나 행동의 결과에 지나치게 사로잡히지 말고, 날마다 차근차근 꾸준히 행동해야 한다. 이렇게 하다보면 우리의 행동은 좀 더 강력해질 수 있다. 우리도 우리가 하는 일이나 우리의 삶에 대해 만족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감정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이 된다. 우리의 열정은 다른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영감을 주며, 미래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함께 만들 수 있다. 바로 당신이 변화의 주역이다."

  그렇다. 우리가 변화의 주역이다. 우리 개개인이 변화의 주역이다. 전쟁을 멈출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내가 먼저 그렇게 행동하면 된다. 평화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이 있다면, 환경을 지킬 수 있다는 신념이 있다면, 내가 먼저 그렇게 행동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개인과 개인과 개인이 모여 결국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바,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우리는 '함께'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 폴 콜먼은 실제로 그로부터 시작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많은 이들이 동참하고, 지원하고, 그들의 생각을 바꿈으로써 변화를 일구어내고 있다.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08-09-16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생 나무를 심어 사막을 푸른 숲으로 만든 엘제에르 부피에 노인의 실화를 담은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책도 있는데, 이렇게 걸어 다니며 나무를 심은 사람이 또 있군요~~ 변화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쉽지만, 또한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실천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해요~~ 감동과 감탄!

마늘빵 2008-09-16 08:52   좋아요 0 | URL
아 그 분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찾아봐야겠네요. 요 책은 나온지 얼마 안됐어요. 이주전쯤 신간소개에서 보고 산건데. 대단하죠.

아라리요 2008-09-17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아프님이 소개한 것 보고 사려고 찜만 해두었답니다.^^
언제 사서 읽게 될지는;;

마늘빵 2008-09-18 09:01   좋아요 0 | URL
^^ 요고 살짝 지루할 수도 있어요. 살짝. 이 사람이 걸어온 길을 쭉 훑어보는건데 괜찮습니다.

파란놀 2008-11-19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 책을 읽고서 지루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 책을 읽다가 지루하다면, 지금 자기 삶이 얼마나 지루한지를 먼저 깨달아야 할 테고, 책은 곧바로 덮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쉰이나 예순쯤 되어서 다시 펼쳐 본다면, 비로소 이 책이 무엇을 말하는 줄 몸으로 재미를 느끼리라 봅니다. 이 책은 적어도 두 달이나 석 달, 으레 여섯 달이나 한 해에 걸쳐서 조금씩 읽지 않고서는 참뜻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꾸며 놓았습니다.

마늘빵 2008-11-19 09:13   좋아요 0 | URL
바로 윗 댓글에 "지루할 수도 있"다는 말에 대한 댓글 같군요. :) 이 책 읽으며 아직 이 세상엔 꿈을 꾸는 이들이 많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꿈을 꾸는 이들이 모이다보면 세상이 변화하죠. 지루할 수 있다는 건 이 사람이 걸어온 여정이 지루하다는 것이 아니라, 책이 두껍고 판형도 크게 때문에, 그리고 대략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를 미리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지루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