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옵티콘
팬옵티콘 2
최근 주제 사라마구의 책을 몇 권 연속해서 읽다가 의문점이 생겼다. 엄밀히 예전에 어디서 흘려들었던 건데 떠올랐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아마도 사라마구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뒤에 신문에서 그에 관해 다루느라 알아보다 그것 자체가 기사가 된 경우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땐 사라마구에도, 외래어 표기법에도 관심이 없었던 때라 유심히 살피지 못했다. 그러다가, 최근 관심이 생겼다. 지난해 '파놉티콘'과 '판옵티콘'과 '팬옵티콘'이 왜 함께 쓰이는지, 어떤 것이 정확한 표기법인가에 대해 가졌던 의문의 연장이다. 결론만 말하면 한국의 외래어 표기법에 의하면 '파놉티콘' 맞고, 교과서의 '판옵티콘'과 둘보다 조금 덜 쓰이지만 어쨌든 함께 쓰이는 '팬옵티콘'은 틀렸다(이전에 쓴 글 참조).
현재 한국의 '외래어표기법'에는 21개 언어에 관해서만 통일안이 확정됐다고 한다. 중국어, 일본어, 베트남어, 타이어, 말레이 인도네시아어, 영어, 도이치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헝가리어, 체코어, 세르보크로아트어, 덴마크어, 그르웨이어, 스웨덴어, 폴란드어, 루마니아어가 21개 언어에 속한다. 그밖에 터키어, 그리스어, 아랍어 3개 언어에 관해선 현재 논의 중이라고 한다. 주제 사라마구는 포르투갈 사람이다. 그러면 이미 외래어 표기법에 포르투갈어에 관한 통일 규정을 두었으므로, 이에 따르면 될 일이다. 그런데 왜 주제 사라마구와 호세 사라마구, 호제 사라마구가 함께 쓰이고, 번역된 그의 책은 모두 주제 사라마구로 표기하고 있을까.
어떤 것이 맞을까? 정답은 의외로 쉽게 얻을 수 있다. 국립국어원에 문의하면 된다. 각 언어마다 통일된 나름의 기준에 따라 맞고 틀리고 여부를 알려주므로 간단하게 그곳에 물어보면 된다. 그런데, 단순히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왜, 어떻게 맞고 틀리는가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나아가 이러한 나의 관심이 외래어 표기법 전체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그냥 묻고 끝내기엔 많이 아쉽다는 것. 해서 자꾸 이거저거 틀춰보며 공부하게 된다. 파면 팔수록 어문 규정이라는 게 굉장히 재밌다. 외래어 표기법뿐 아니라 한글 맞춤법이나 표준어 규정도 알수록 점점 더 새롭게 느껴진다.
외래어 표기법을 좀더 파보면, 우리말에서는 된소리를 사용하는 외래어 표기는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 예를 들면 'p, t, k'를 'ㄲ,ㄸ,ㅃ'으로 표기하지 않는다 - 언제나 그렇듯이 예외가 있다. 2004년 통일 규범이 나왔다는 베트남어와 타이어는 된소리를 모두 허용하기로 했는데, 그 이유는 그 외의 다른 언어는 굳이 된소리가 아니어도 표기가 가능한데, 이 두 나라는 된소리를 써야만 현지어에 가깝게 된다는 것이다. 워낙 된소리를 많이 쓰는 언어인지라. 오래전 신문에서 '호치민'이라고 표기하던 것을 지금은 '호찌민'이라고 표기하고, '푸켓'은 '푸껫'으로 표기하는 것이 그 예다.
또 예외가 있는데, 중국어와 일본어이다. 베트남어와 타이어만큼이나 모든 된소리를 허용하는 경우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 허용하는 특별한 경우다. '양자강'은 '양쯔강'으로, 공자의 현지어 발음을 한글로 표기할 때 '쿵쯔'로, '강택민'은 '장쩌민'으로, '사천성'은 '쓰촨성'(이상 중국어)으로 표기한다. 또, 일본 회사 '미쓰비시', '대마도'의 일본 발음을 한글로 '쓰시마'(이상 일본어)로 표기한다. 중국어와 일본어 표기에서 위의 "p, t, k'를 'ㄲ,ㄸ,ㅃ'으로 표기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위배되는 건 아니지만, 'ㅆ'과 'ㅉ' 등 부분적으로 된소리 표기를 허용한다. 또 다른 특별한 예외가 있는데 - 예외가 많은 건 규정을 먼저 만들고 언어가 이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먼저 사용되고 이에 따라 통일된 규정을 만들기 때문이다 - 일상적인 한국말로 쓰고 있는 '껌'이나 '빵' 같은 경우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지만 인정한다는 사실.
이러한 외래어 표기법은 "대한민국의 국립국어원이 정한, 다른 언어에서 빌려온 어휘(외래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규정이다. 현행 규정은 1986년에 제정, 고시된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언어마다 음운 체계나 문자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언어의 어휘를 한 국어로 흡수하여 표기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칙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외래어 표기법'의 경우 한국어 이외의 다른 언어에 있는 음운을 표준어에 있는 비슷한 음운과 1대 1로 대응시켜 한글로 표기하는 방식을 기본 원칙으로 하고 있다."(위키백과) 그래서 베트남어와 타이어에, 중국어와 일본어에 대해 예외를 허용할 수밖에 없고, 껌과 빵 같은 경우도 발생하는 것이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외국어를 자국의 언어로 표기하는 데 있어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사람 이름을 표기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상황이다.
유명인들의 이름만을 모아 표기한 인명 사전만 모아도 방대한 분량이고, 같은 나라에 산다고 해도 출신마다 이름 표기는 다를 수 있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도 버락 오바마냐 바락 오바마냐 기타 여러 가지 이름 표기가 난무했고, 티모시 가이트너도 티머시 가이스너냐 티모시 가이스너냐 티머시 가이트너냐 혼란을 겪게 된다. 해서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는 사람 이름을 모아 통계를 내, 몇몇 알파벳의 결합으로 자주 쓰이는 발음을 뽑아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사람 이름에 관해선 각종 예외를 두더라도 어떤 규정이나 법칙을 두고서 일관되게 표기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외국어 표기는 우리의 자음과 모음을 가지고 현지어에 가깝게 표기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우리말이 모든 외국어의 현지 발음을 정확히 표기해내기는 어려우므로 한계가 있다.
주제 사라마구냐 호세 사라마구냐 호제 사라마구냐. 정답이 뭐든 간에, 그건 현지 발음에 가까운 한글 표기일뿐 현지 발음과 정확히 부합하긴 힘들다. 오래전 영어를 처음 배울 때 선생님이 불러주는대로 한글로 받아 적었던 기억이 난다. "This is an orange" 을 그때 "디스 이즈 언 오렌지"로 받아적었다. 한글로 받아적은대로 발음하면 외국에서 못 알아듣는단다. "디스 이즈 언"까지는 모르겠지만 - 내가 외국에 나가 본 적도 없고, 외국인하고 대화한 적도 없어서 - 오렌지는 작년에 여러가지 발음이 난무했지 않은가. 오렌지, 어렌쥐, 오렌쥐, 어린쥐(?) 등등. (물론, 그것을 정확히 발음하는 것과 그것을 정확히 한글로 표기하는 것은 다른 문제긴 하다.) 평생을 배우려고 낑낑 거리는 영어도 이러한데 다른 외국어들은 어떨까.
그럼에도, 한국에서 비행기 한 번 안타보고 평생을 살아갈 한국인들에겐 외래어 표기법이 꼭 필요하다. 그걸 현지어로 옮겨 적고 읽을 수는 없으므로. 정확히 하려면 그 나라말을 배우고 그 나라말로 표기해야겠지만, 불가능하지 않은가. 대다수의 한국인들을 위해 정확치 않더라도 외래어 표기법은 필요하다.
p.s. 위 내용 중 상당 부분은 한겨레 신문사 최인호 기자가 말한 것을 다듬었다. 일단 먼저 국립국어원에 문의하지 않고 '포르투갈어 자모와 한글 대조표'를 찾아보면 'j'는 'ㅈ'으로 표기한다고 되어 있다. 가장 널리 쓰이는 '주제 사라마구'가 옳은 표기일 - 현지 발음은 어떤지 모르지만 - 가능성이 크다.
p.s 2. 국립국어원에 문의한 결과 '주제 사라마구'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고 - 엄밀하게 그렇게 하기로 합의했다고 -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