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하지 않으면 몸을 완전히 맡길 수 없어. 춤을 출 때만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해!"

 <댄서의 순정>이라는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대사이다.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여자에게 버림받고 무릎도 다치게 된 1급 스포츠 댄스 트레이너 나영새. 그가 연변처녀 장채린에게 춤을 가르치며 던진 말 한마디. 영새는 채린에게 춤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사랑을 가르친 것이고, 채린은 영새에게 춤을 배운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배운 것이었다.

 1급 스포츠 댄스 트레이너이자 댄서였던 나영새는 자신이 가르쳐서 파트너로 삼은 사랑하는 여자 세영을 라이벌이자 재력가인 현수에게 빼앗긴다. 그리고 대회도중 현수의 고의적인 행위로 무릎을 심하게 다쳐 그 바닥을 뜬지 오래다.

 하지만 선배 상두의 권유로 중국에서 나름대로 유명한 연변처녀를 파트너 삼게 되는데 이런! 기대했던 연변처녀는 안오고 그녀의 19살 먹은 동생 장채린이 와버렸다. 몸치다.

 하지만 영새는 순수한 그녀를 가련함 반, 동정심 반으로-그거나 그거나- 파트너로 받아들이고 몸치에서 최고의 댄서로 변신시킨다. 하지만 또 현수의 작업이 시작되고, 결국 그녀는 영새를 위해 현수에게 가고, 결국 댄스 스포츠 대회서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며 우승한다.

 어쩌면 <댄서의 순정>은 오직 문근영을 위한, 문근영에 의한, 문근영의 영화인지도 모른다. '문근영'이라는 이름 석자는 이제 더이상 우리에게 어린 여배우 정도로 인식되지 않고 다른 어떤 일급 여배우들과 견주어도 뒤쳐지지 않는 하나의 문화권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문근영' 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상업적인 성공은 보장받는다.

 <댄서의 순정>이 아쉬운 점은 바로 그런 점이다. 어떤 사람은 이 영화를 향해 이런 지적을 했다.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댄스영화가 없다. 댄스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정말 말 그대로 영화 속에서 댄스는 소재로서 쓰였을 뿐이라는 말이다. <댄서의 순정> 역시도 문근영이라는 자라나는 문화권력(?) 앞에서 댄스는 묻혀지고 말았다. 관객은 댄스를 보러 영화관에 가지 않고 문근영을 보러 영화관에 간다. 나 역시도 그러했고.

 어쩌면 이 영화가 댄스를 위한 영화가 되길 바라는 것은 우리의 소망일지도 모른다. 감독도 그런 의도로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니고, 배우도 그런 의도로 연기를 한 것이 아닌데 일부 관객들이 그렇길 바라는 희망사항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에 아쉬움은 표하지만 영화를 비판할 수는 없다.

 댄스가 주가 되기 보다 배우가 주가 되긴 했지만 어쨌든 문근영과 박건형은 이 영화에서 대단한 댄스 실력을 보여주었고 우리는 충분히 볼거리를 보상받았다. 아니 어떻게 저렇게 잘 출 수가 있나. 물론 카메라 효과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정말 단기간에 이와같은 댄스실력을 키웠다는 것이 대단하게 보인다.

 마냥 어리기만 할 것 같은 문근영이 이제 고3이 되었고,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서서히 그녀는 연기변신을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쁘고 공부 열심히 한다는 고3이 연기를 병행하면서 이만한 성과를 낸다는 것은 개인의 부단한 노력없이는 불가능할 것 같다. 그녀는 또 공부도 잘 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쁘고, 공부 잘하고, 연기도 잘 하고 뭐 하나 빠지는 거 없는 문근영. 그녀를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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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다 본 뒤에야 그 였음을 알게 됐다. 리들리 스콧 감독. 그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감독이었다. 리들리 스콧. 리들리 스콧. 계속 입 속에서 되뇌이면서 어느 영화의 감독이었지. 내 머리 속에 그의 이름은 꽤 좋게 기억되어있었는데 정작 어느 영화의 감독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보고나서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리들리 스콧의 전작 <글래디에이터>와 꽤나 유사하다. 엄청난 스케일과 웅장함, 그리고 한낱 대장장이에서 왕국을 살리게 되는 영웅, 이 영웅의 존재에 위협을 느끼고 죽이려드는 왕국의 후계자, 영웅을 좋아하는 신분 고귀한 여왕. 이 모든 것이 <글래디에이터>를 답습하고 있다. <글래디에이터>만큼의 화려하고 거친 긴장감 넘치는 결투씬은 없지만 그보다 더 웅장하고 스케일이 크다.

 <킹덤 오브 헤븐> 하늘의 왕국. 좀더 들어가면 하느님의 왕국. 즉 예루살렘을 둘러싼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십자군 전쟁. 예루살렘은 어떤 의미인가. 기독교인에게, 유대인에게, 무슬림에게.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 유럽인들은 다른 믿음과 종교를 가진 이방인들에 대항해 싸운 크리스트교의 거룩한 전쟁이라고 믿는다. 십자군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예루살렘을 찾아 크리스트교의 통치아래 두는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을 찾으면 골고다 언덕에 올라 성묘 교회에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고 그 묘에 묻혔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발리안은 예루살렘을 맨 먼저 찾았을 때 그곳에 올라 기도를 올린다.

 한편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찾으면 통곡의 벽을 찾아 운다고 한다. 유서 깊은 유대교 성전을 로마 군이 파괴한 뒤 이 성전의 잔해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또 무슬림들은 이곳을 찾으면 오마르 사원을 찾아 반석 위의 돔에 참배를 한다. 예언자 무하마드가 메카에서 천마를 타고 와 이곳에서 승천, 일곱 하늘을 돌아보고 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루살렘은 각각의 종교인들에게 소중한 장소이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3000년경 한 가나안 부족이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면서 생겨났다. 그들은 이곳을 '평화의 도시'란 뜻의 '우루살림'으로 불렀는데 유대인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이래 이 도시의 운명은 이름과 달리 기구하기만 했다. 이집트 바빌로니아, 로마 등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렸으며 로마가 기독교의 성지로 인정한 다음에는 사산 조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았다. 전화로 얼룩져온 예루살렘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100년 전 이슬람 세력이 이곳을 점령하면서부터 였다. 우마이야 왕조는 승천 장소에 사원을 세웠지만 기독교도나 유대교도가 자기들의 성지를 참배하는 데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11세기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유럽의 역사상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

 영화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부터 시작이 되고 비록 기독교인들이 정복한 상태지만 타종교인들에게도 예루살렘을 개방시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이 죽고 후계자인 여왕이 즉위 그의 남편 가이 드 루시안에게 왕권을 이양함으로써 상황은 바뀐다. 그는 전쟁광이고, 대군을 이끌로 살라딘에 맞섰다. 결과는 살라딘의 대승. 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던 발리안은 남은 기사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사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살라딘의 엄청난 대군의 공격을 마냥 버텨낼 수는 없다. 결국 성벽은 무너지고. 하지만 자비로운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가져가되 그 안의 백성들은 온전히 살려준다.
 
 감독은 이점에 있어서 지극히 두 종교에 공정했다. 대개 부시를 위시한 미국인들이 기독교의 교리를 전쟁의 근거로 내세우며 충동질하는데 반해 리들리 스콧은 양쪽 종교에 공정한 시각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 살라딘은 무자비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궁지에 몰린 기독교인들을 살려줌으로써 관용을 베풀었고, 그동안의 무수한 기독교와의 전쟁에서의 패배를 복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자비했던 것은 십자군이었다. 살라딘이 예루살렘에 갇힌 기독교인들을 살려주는 장면이 왜 이리도 감동적으로 다가오는지. 이 영화는 부시와 그의 작전참모들이 봐야만 했다. 기독교만이 선이오 나머지는 악이다 라는 문구는 이곳에 없었다.

 십자군 전쟁은 영화에서도 밝혔듯이 종교를 위한 싸움은 아니었다. 종교는 핑계였을 뿐 저들은 자신들의 위대함을 알리려 했으며, 모험과 약탈과 정복의 기회로서 삼았을 뿐이었다. 그 어느 곳에도 신은 없었다. 신은 단지 핑계였을 뿐. 발리안이 이슬람인들과의 평화공존을 외치는 대목에서 어떤 이는 신성모독이라고 했지만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이 모시는 신이나 우리가 모시는 신이나 같은 신이다. 단지 이름만 다를 뿐.

 영화는 화려한 전투씬과 권력암투, 사랑 등 수많은 볼거리도 볼거리지만 그 안에 담긴 이와같은 메세지를 읽어낸다면 더욱 감동적이고 값지게 다가올 것이다.

 "어느 곳에도 신은 없다. 신은 단지 핑계일뿐."

 하나 더.
 
 발리안이 예루살렘을 사수하며 그곳에 남은 백성들을 모두 무릎 꿇리고 기사작위를 주는 장면은 정말 또 하나의 감동이다. 그는 천민에게도 노예에게도 기사 작위를 수여함으로써 신분을 파괴했다. 이건 대단한 혁명이다. 그 사람들이 모두 열심히 싸운 것은 '나는 기사다'라는 어떤 자부심이나 명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자신의 천한 신분을 없애준 발리안이 고마워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는 오늘날의 세계인권선언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영화 속 저 장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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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다른 사람들 사랑은 몰라도
  내 사랑은 변치 않을 거라 믿었습니다.
  제 연인이 제가 보낸 러브레터를
  다른 사람의 것으로 오해하고 설레여 할 줄은 상상도 못했죠.
  제 사랑은 한 길이었는데 그는 그렇지 않나 봅니다.
  그의 사랑은 의심스럽고 그의 친구는 전과 다르게 보입니다.
  이제는 제 마음조차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사랑이 흔들립니다."

  <어바웃 러브>가 상영되기 전부터 예고편을 통해 알려졌던 문구. 실제 영화 속에서 앨리스가 이런 말을 하지는 않지만 앨리스의 마음 속을 고스란히 나타내주는 솔직한 멘트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엔 너무 편안해져버린 우리의 관계에 진동을 울리고자 보냈던 엽서 한 장. 장난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별로 끝이 나고 말았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그의 실체를 일찌감치 알아버렸으니.

 오래된 사랑에 긴장을 주기 위해 시작된 장난은 너무 위험했던 것일까? 애초에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게 더 좋았을까? 내 남자의 바람을 일찌감치(?) 알아버린 것이 더 나은 것일까? 아니면 아예 모른 채 결혼생활을 유지하는게 더 나은 것일까?

 난 앨리스의 시도가 비록 오래된 사랑에 긴장을 주기 위해 시작된 장난이었지만 오히려 이를 통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남자의 바람사실을 모른 채 그냥 계속 살았다면 과연 그녀의 삶을 행복했다 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몰랐으니 내 남자에 대한 믿음으로 유지된 앨리스만의 사랑이 그녀에겐 더 행복했다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속임을 당한 일방적인 사랑이었을 뿐이다.

 서로의 신뢰가 아닌 일방적인 신뢰. 서로의 사랑이 아닌 일방적인 사랑은 가련하다. 오히려 친구의 여자를 오래토록 사랑해왔지만 말하지 못한 아치의 사랑이 앨리스에겐 더 행복할지 모른다. 그리고 감독도 역시 둘을 이어줌으로써 사랑을, 앨리스의 사랑을 완성시켰다.

 바람난 샘이 앨리스를 사랑하지 않았기에 바람을 핀 것인가? 라는 질문은 사실 여기에선 묻혀진다. 그러나 이 질문 앞에 나는 샘이 앨리스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는 앨리스도 사랑했고, 미지의 여인도 사랑했으며, 케챠도  사랑했다. 다만 사랑의 종류가 달랐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랑이라고 해서 바람직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이 사랑인 것과 그것이 바람직한 사랑인 것은 엄연히 구별되어야 하고, 바람직한 사랑이라는 것 또한 인류가 만들어낸 하나의 정형화된 모범적인 사랑의 유형일지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두 사람의 믿음이 기반되지 않는, 서로의 사랑이 아닌, 일방적인 사랑은 보기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샘의 사랑이 문제가 있는 것은 그의 사랑이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앨리스의 사랑과 달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사랑을 하되 서로 다른 사랑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앨리스는 결국 자신과 같은 종류의 사랑을 하는 아치와 연결된 것이다.

  당신의 사랑은 당신의 연인의 사랑과 종류가 같은가? 그의 혹은 그녀의 사랑을 의심해보기보다 나와 당신의 사랑의 종류가 같은 것인가를 한번 의심해보자.

 

 한마디
 야한 장면도 없는 15세 관람가인지라 영화관에 고딩들이 몇 보였지만 은근한 긴장감을 주는 이 영화는 성인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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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재밌는 애미메이션은 처음 봤다. 보는내내 속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지금도 장면장면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온다. 평소 잘 웃지 않고 웬만한 코미디 프로그램에도 반응하지 않는 나로서는 이렇게 재밌었던 적은 정말 오랫만인 것 같았다.

애니메이션을 잘 만들기도 했지만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우리네 웃음의 요소를 찾아내어 잘 바꿔준 점도 대단했다. 외국식 개그를 한국식 개그로 바꾸는 작업은 쉽지 않다. 어떤 영화를 보면 함께 극장안에서 보고 있는 한국인들은 다 웃는데 외국인은 웃지 않는 장면도 있고, 반대로 외국인은 박장대소하는데 한국인은 그냥 아무렇지 않는 장면도 있다. 이는 순영어와 한국어로의 번역 과정의 괴리일 것이다.

어쩌면 <니모를 찾아서> 또한 그런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웃는 그 장면에서 외국인들은 웃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영어를 그대로 다 알아듣는 편도 아니라 귀에 들리는 영어와 눈으로 보는 한국어 번역을 비교해가며 영화를 즐길 형편도 아니다.

그럼 다시 정리를 해봐야겠다. 영어를 한국어로 잘 번역했기 때문에 재밌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영어로는 별 의미없지만 한국어로 하면 재밌는 부분들을 잘 각색했기 때문에 재밌었는지도 모르겠다. 라고.

상어의 공격으로 아빠 물고기 말린은 쓰러지고, 깼을 때는 이미 엄마 물고기는 도망을 간건지 죽은건지 단 하나의 알을 남겨두고 사라졌다. 말린은 하나 남은 알에 '니모'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니모는 태어날 때부터 기형이다. 한쪽 지느러미가 작아서 헤엄치기가 힘들다. 이런 니모가 바다학교를 다니게 되고 니모는 아빠가 하지 말라던 언덕 저 너머의 세계를 구경하러 올라간다. 결국 인간들의 손에 들어가고 니모는 치과의사 집의 딸의 방, 수족관에 들어가게 된다. 당연히 말린은 니모를 찾으러 사방을 헤매고 그 과정에 붕어 도리를 만난다.

사실 주요 등장 동물은 몇 안되지만 이들의 대화가 정말 재밌다. 니모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우리를 웃기는 건 니모가 아니라 말린과 도리의 대화다. 붕어대가리가 나쁘다 라는 통설을 따라 이 붕어는 단기기억 상실증을 갖고 있고, 자기가 한 말을 잊고, 자기가 누구고, 자기가 왜 여기있고, 누구와 함께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정말 말 그대로 붕어대가리다.

깔끔하고 사실감있는 애니메이션 동작들, 그냥 눈으로 봐도 아름다운 바다속 풍경은 그것만으로 마음을 짠하게 만든다. 여기에 니모를 찾는 아빠 말린의 부성애, 나약한 니모가 강한 니모로 변모해가는 과정. 그리고 말린과 도리의 우정, 니모와 수족관 친구들의 우정 등은 애니메이션을 풍부하게 하는 양념거리들이다.

단 한편으로 인해 많은 부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교훈을 주려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많은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런면에서 이 에니메이션은 지극히 철학적이다. 다시 보고픈 애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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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숑숑 계란탁'인가, '파송송 계란탁'인가? 영화사진을 찾으려고 검색을 하는데 '파숑숑'이라 하니 안나온다. 그래서 다른 사이트에서 찾았더니 그래도 안나온다. '파송송'이라 치니 그제서야 사진이 나온다. 나는 왜 이 영화 제목을 '파숑숑 계란탁'이라고 생각을 했을까 라고 잠시 생각해봤다.

결론은 영화 속에서 쬐그만 꼬마아이가 계속 혀짧은 발음으로 '파숑숑~ 계란~탁' 하고 말하고 다녔기 때문에 나는 영화 제목을 '파숑숑 계란탁'으로 인지했던 것이다. 숑숑이건 송송이건 어쨌든 파 썰어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니 같다 봐야지.

대학 때 한창 음악한답시고 깝치다가(?) 지금은 짝퉁음반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26살 청춘의 대규. 여자꼬시기를 특기이자 취미로 하고 있는 그가 여자를 낚아서 집에 데려갔는데 딩동~ 하는 소리. 문을 여니 웬 9살 꼬마가 지집드나들듯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마시고 침대에 앉는다. 아니 이런 황당한 놈이 있나.

아홉살 꼬마 맞아?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당돌하고 발랑 까진(?) 이 놈을 어찌한다. 아니 소설 <아홉살 인생>에서 나오는 아홉살과 이 아홉살은 왜 이리도 다르단 말인가? 정신의 조루증이냐?

이 아이를 대규가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영화적 설정. 아이가 갑자기 쓰러지고 뭐 무슨 죽을병에 걸려서 고작 길어야 2-3개월 산다고? 대규로 하여금 동정심을 이끌어내 아이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감독의 술책.

오상훈 감독은 <위대한 유산>으로 감독으로서의 데뷔를 했다. 그때의 위대한 유산은 찰스 디킨스의 유명한 소설 <위대한 유산>이 아니어라. 김선아 주연의 코미디가 바로 이 영화여라. 오상훈 감독은 파숑숑 을 만들때 이런 생각을 했다 한다. 어디선가 내 아들이 자라고 있다면? 이라는 가상설정을 해봤단다. 이런 사고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오상훈 감독이 여기저기 씨뿌리고 다니는 농사꾼이라고 된단 말인가? 나야 그런적이 없으니 나는 당연히 어디서도 내 아들이 자라고 있을리 없다. 당연히 딸도 있을리 없다. 자기자신이 그렇다 라는 말을 돌려서 이렇게 영화적 설정을 해버리는 감독.

국토종단을 하고 싶다는 이 얼마 살지 못할 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갑자기 대규는 마음착한 천사가 되어 땅끝마을부터 걷기 시작한다. 결국 중도에서 아이는 쓰러지기를 몇번.

영화는 장르구분에 따라 지극히 휴먼코미디다. 인간적인 눈물을 짜내게 하는 감동과 그 안에 깃든 자잘한 코믹스러운 행위들. 라면을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라면을 좋아하는건지 돈이 없어 라면을 먹는건지 모르지만- 또 파와 계란이 없으면 라면을 먹지 않는 아이를 위해 없는 돈 쪼개 파와 계란까지 샀다. 파 숑숑 썰고, 계란 탁 깨뜨려 첨벙. 꿀꺽. 침 넘어간다.

한편의 감동적인 코미디. 두번 볼만한 영화는 아니지만 한번은 볼만한 영화. 감동의 눈물 한방울 라면에 떨궈 드실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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