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후에 오는 것들 - 공지영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공지영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5년 12월
품절


전화를 끊으려는데 수화기 저쪽에서 민준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홍...... 나 보고 싶지 않니?"
나 보고 싶었어? 얼마만큼? 언제? 라고 나도 물었던 적이 있다. 아마 내가 준고와 사랑에 빠졌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왜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나 자주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인지, 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그렇게나 자주 보고 싶었느냐고 묻는지...... 나는 민준을 두고 그가 나를 사랑할까, 라든가 그가 나를 보고 싶어할까, 라든가 하는 궁금증을 가져 본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민준은 친구인 나를 두고 사랑에 빠져 것인지, 나는 당황스러워졌고 그래서 그저 응, 이라고 말해버렸다.
"보고 싶으냐는 물음이 아니라 보고 싶지 않으냐는 물음에 응이라고 대답한 건 대체 무슨 뜻이니?"
민준은 하하, 웃었다. -72-73쪽

"엄마는 아빠를 아직도 사랑해?"
내가 물었다. 내가 빰을 대고 있는 엄마의 등이 잠시 굳어졌다.
"......사랑은, 하지. 그런데 좋아하지는 않아."
나는 엄마의 등에 계속 얼굴을 댄 채로 엄마가 틀어 놓은 개수대의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사랑은 하는데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건 어떻게 다른 것일까.
"엄마, 나 민준일 좋아하고 있어. 참 보기 드문 훌륭한 남자라는 것도 알고 있어. 엄마 맘에 들고 아빠 맘에 들고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도 알고 있어."
엄마가 행주질을 멈추고 허리를 감고 있는 내 손을 떼어 놓은 다음 나를 돌아보았다. 왠지 나는 엄마를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훌륭한 남자라고 해서 내가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77쪽

"엄마가 말이야. 아빠를 사랑하기는 하는데 좋아하지는 않는대...... 그건 어떻게 다른 걸까 내내 생각해 봤어. 사랑하면 말이야. 그 사람이 고통스럽기를 바라게 돼. 다른 걸로는 말고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고통스럽기를, 내가 고통스러운 것보다 조금 만 더 고통스럽기를..... . 오래전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나는 너를...... ."
-95쪽

친구들은 꽃잎이 지듯 하나 둘씩 미혼 딱지를 떼었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결혼이라는 것만큼 이미 해본 사람은 하지 말라 하고, 하지 않은 사람은 기어이 하고 마려는 것이 또 있을까. 사람들은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할 때면 그토록 꼼꼼히 리뷰들을 챙기면서 결혼이라는 사건에 대해서는 누구의 리뷰도 신경쓰려고 하지 않는다.-104쪽

헤어짐이 슬픈건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만남의 가치를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쉬운 이유는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그 빈자리 속에서 비로소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건 사랑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야 알게 되기 때문에.-109쪽

"그런데 지희야, 혹시 사람에겐 일생 동안 쏟을 수 있는 사랑의 양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닐까? 난 그걸 그 사람한테 다 쏟아버린 것 같아...... 그리고 내 표정이 아무리 이상해져도 앞으로도 늘 이렇게 말해줘.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해줘. 부탁이야."-119쪽

"여자들은 말이야, 너무 매사를 사랑에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있어. 사랑에 집착하는 순간, 거기에 모든 걸 거는 순간, 남자는 떠나가는거야. 남자의 본성은 사냥꾼이거든. 잡아 놓은 짐승보다는 아슬아슬하게 도망 다니는 언덕 위의 날랜 사슴을 쫓아가고 싶어하거든. 우리 여자들이 할 일은 그들의 그런 본성을 인정하고 쿨해지는 거야. 그래야 남자들의 사냥 본능을 만족시킬 수 있거든."-125쪽

'지금 울고 있느냐?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고통과 불안이 사랑이라고 믿는다면 아프리카로 떠나라.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널려있다.' -127쪽

'사랑이 깨어지는 방식은 이래. 남자와 여자가 첫눈에 반한다. 대개는 남자가 먼저지. 그러다가 여자가 그 마음을 받아들인다. 사랑이 익숙해질수록 여자는 사랑을 조금씩 더 많이 주기 시작한다. 그러면 남자는 슬슬 여자가 지겨워지고 새로운 사람에 흥미를 느낀다. 여자는 더 집착하고 그럴수록 남자는 더 떠나고 싶어하고, 그럴수록 여자는 더 집착한다. 그리고 끝. 속편은 이거야. 여자는 친구를 붙들고 남자들은 다 똑같아, 나는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어, 라고 다짐하지. 마지막은 긴 눈물과 중무장한 분노, 그리고 냉소지. 하지만 어느 날인가 또다시 여자를 흥미있게 생각하는 남자의 구애를 받게 되고 이렇게 끝도 없이 다시 시작되는거야.'-146쪽

바람이 불 때마다 마른 나뭇가지들이 사각거렸다. 돌아보고 싶었지만 나는 기도했다.
'비가 오게 해주세요. 가방이 두 개라 우산을 못 들어요. 너무 무거워서 한 손으로 다 잡을 수도 없어요. 그런데 눈물이 날테니까, 많이 날 테니까 가려 주세요. 빗물인 줄 알게 가려 주세요.'
다음날은 비가 내렸다. 그 다음날도 내렸다. 나는 그렇게 일본을 떠났다. -209-210쪽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니?"
낮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미안해."
내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하다고?"
민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랑한다고 십오 년 동안이나 널 바라보기만 하면서 기다린 사람한테, 결혼을 약속하자는 사람한테 미안하다고 말하는 여자가 세상에 너 말고 또 있을까?"
민준의 목소리가 그렇게 격앙된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나는 또 그에게 야단을 맞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늘 어른스러웠고 그래서 나는 늘 철부지 같았다.
"...... 민준아."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흘러내린 눈물이 어둠 속에서 반짝 하고 빛났다. -222쪽

'후회하지마. 부끄러하지도 마. 너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의 편이고 변하지 않는 사랑을 믿는 사람들의 편이고, 행복한 사람들의 편이야...... 왜냐하면 네 가슴은 사랑받았고 사랑했던 나날들의 꽃과 별과 바람이 가득할테니까. 쓸쓸한 생은 많은 사람에게 그런 행복한 순간을 허용하지 않는데, 너는 한때 그것을 가졌어...... 그건 사실 모든 것을 가진 거잖아.'-228쪽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사람이라는 이야기고 살아있다는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살아 있기에 상처 입고 살아 있기에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것도 말이죠. (지은이 후기)-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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