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살림지식총서 222
이진홍 지음 / 살림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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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하나. 스칸디나비아에 거주하는 햄스터같이 생긴 쥐 레밍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살을 한다.
하나. 세계적으로(국내포함) 유명한 사람들 중 자살한 이들이 많다.
-배우 이은주, 음악인 커트코베인, 배우 장국영, 철학자 들뢰즈, 가수 김광석, 서지원 등등 
하나.  누구나 한번쯤 자살 충동을 느낀 적 있다. 정말?
하나. 2002년도 우리나라에서 자살로 죽은 사람들은 총 8,631명으로 사망자 100명당 4명이라고 한다.


  많은 목숨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있지만, 또 심리학, 철학, 사회학 등등의 분야에서 자살에 대해 여러각도에서 분석하고 원인을 찾아내고 미리 방지하고자 하지만 여전히 자살자는 존재한다. 왜, 어떤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것일까. 수 억개의 정자가 하나의 난자를 만나 어렵게 수정되고, 열 달을 기다려 어렵게 세상의 빛을 보지만 그 소중한 목숨을 포기하는건 한 순간이다. 쉽다고는 말 못한다. 어렵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건 경험해보지 않았지만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무섭다.

  자살은 죽음의 한 종류이다. 죽음을 말함에 있어 자살을 말하지 않는 것은, 일부의 죽음만을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자살은 쉽게 말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우리가 태어남에 대해서 말할 수 없듯 죽음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태어남과 죽음은 모든 인간이 한번씩만 경험하는 것이고, 태어나기 전 그리고 죽은 후 우리는 그 경험을 풀어놓을 수 없다. 쉴러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한번, 죽음도 한번, 태어남도 한번, 소멸도 한번뿐이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기에 죽음에 대해 사색하고 고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색과 고찰은 인간의 '이성'의 영역으로 죽음을 들여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쓴이는 망설인다. 죽음을 고찰하는 것에 대해서.

  이 책은 죽음, 그 중에서도 자살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어떤 결론을 내려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저 의식하지 않고 지내던 죽음에 대해, 자살에 대해 의식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뿐이다. 가까이에서 벌어지지만 무심코 지나가는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 자살에 대한 해석

  예로부터 자살은 금기의 영역이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후기까지 자살은 신성에 대한 모독이며, 인간에 대한 범죄이며 자기자신에 대한 살인이므로 죄악으로 여겨졌으며, 18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자살'이라는 단어가 생겨났고,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자살을 희생으로 간주하여 하나의 병리적 현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우리가 자살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것도, 자살을 선택의 문제로 보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에 있어서 자살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철학자와 정치가에 한해서였다. 황제에게서 총애를 잃어버린, 신임을 받지 못하는 정치가의 경우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도리를 다했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이마신 것은 방법적 차원에서 스스로 마신 것이니 자살이지만, 국가에 의해 강제로 명령된 경우이니 순수한 자살로 보기 어렵다.

  19세기의 자살에 대한 인식은 크게 두 가지로 양분된다. 하나는 프로이드가 대표적인 경우로, 자살을 광기나 우울증, 신경쇠약, 자아분열과 같은 의학적, 심리학적 병리현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뒤르켐의 경우로, 자살은 사회적 현상이며, 하나의 문화권 안에서 발생하는 집합적 증후로 간주하는 경우이다. 순수하게 개인에게 국한된 현상이냐 아니면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냐, 이렇게 두 가지 해석이 존재했다. 나는 그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 라고 말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시대에 따라, 개인의 환경에 따라, 자살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미쳐서 자살한 경우야 프로이드식의 해설에 더 적합하겠지만, 청백리로 알려졌던 인물이 한 순간의 작은 죄악으로 자살을 택하는 경우 이는 프로이드보다는 뒤르켐의 해석을 따라야하지 않을까.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사망자 100명당 4명의 자살자는 대개 사회적 차원에서의 자살이 아닐까. 돈이 없고, 백도 없고, 살기 막막하고, 에라 모르겠다 세상아 같이 죽자, 자식 내던지고, 아내 살해하고, 나는 불태우고. 뒤르켐은 자살의 진짜 원인은 개인이 사회에 통합되는 정도와 그가 정신적으로 수행하는 적응하려는 행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도시보다 시골에서, 카톨릭보다 신교사회에서, 전통적 가족구조에서보다 이혼율이 높은 가족구조에서 자살율은 높게 나타난다.

  - 자살은 권리인가, 불가피한 선택인가

   자살에 관해서 많은 문제들이 얽혀있다. 위암 말기환자이고 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죽음에 점점 다가가고 있고, 죽음이 결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러나 너무나 고통스럽다. 고통을 견디며 죽어가는 것 보다 좀더 인간적으로 지금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다. 허락해달라. 안락사의 문제이다.

  안락사에 관한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인간의 목숨은 하느님이 주신거다. 어떻게 감히 인간인 너 따위가 죽음을 선택하려 드느냐는 기독교식의 논리에서 내가 나의 생사를 선택하겠다는데 남이 왜 참견이냐고 말하는 죽음의 권리를 내세우는 사람까지. 그 중간에는 참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의견들이 놓여있다. 안락사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순수하게 개인의 영역에 던져주지 못하는 것은, 안락사와 관련되어 사회적 범죄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며, 허가했을 때 사람들이 더 쉽게 어려운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허가하지 않자니 고통받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조차 주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보아도 자살에 대해서 모두 의견이 가지각색이었다.

  "자살이란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빚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자 그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에, 그리고 만일 이것이 의도적이고 자유롭게 영속적으로 행해진다면 오직 신에게만 속하는 권한을 사취하는 신에 대한 범죄이므로 자살은 치명적인 죄악으로 간주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방법이 죽음 말고는 다른 것이 없을 때 이 세계를 떠날 시간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오직 철학자에게만 속하는 지고의 존엄이다" (세네카)

  "만일 자살이 허용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만일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자살 또한 허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이것이 바로 윤리의 본질에 관한 문제다. 자살은 말하자면 가장 근본적인 죄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살을 알아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수증기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수은 증기를 만져보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중략) 그런데 자살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비트겐슈타인)

  형제가 셋이나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을 보았던 비트겐슈타인조차도 자살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하게 답변하고 있다. 자살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문제는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는 끝없는 논쟁의 영역에 놓여있다. 어릴적 난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실행에 옮겨본 적은 없다.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다. 내가 자살을 하려고 한 이유는 내가 너무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나를 억압하는 부모님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죽으면 부모님이 슬퍼하겠지, 하는 생각에 자살을 생각해봤으나 단지 '생각'의 차원이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쉽게 비난한다.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았으면서. 그 사람이 왜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 이해해보려고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 혹은 그녀를 비난한다. 아직까지 자살은 죄악이라는 의식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강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살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적어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을 존중해줄 필요는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키에르케고어의 말은 되새겨 볼만하지 않을까.

  "각자가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결정하는 곳에서 (타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그를 위해 걱정해 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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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6-06-07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책도 있었네요. 재미있겠네 ...
살림 지식 총서 중에는 꽤 알찬 책들이 제법 있더라구요. :-)

마늘빵 2006-06-07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 살림지식총서 제가 책 주문할 때 가격 맞춰 주문하려고 종종 집어넣어요. 괜찮은 책 많아요. <르 몽드> 좋았고, <자살>도 좋고요.

가넷 2006-06-0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보에서 몇권은 30% 할인 하더군요..-_-;;;(이 책말구요. 흠.)30%할인 하는 책 몇권은 교보에서... 지를려고 하는 중이여요..ㅎㅎ 르 몽드랑, 뉴에이지, 커피이야기 2004년도에 나온 몇권은 30%하던...^^ 흠.;

마늘빵 2006-06-0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가요? 이 싼 값에 더 할인해요? ^^ ㅎㅎ
전 그냥 다른 책 주문할 때 끼워서 하나씩 천천히 볼래요.

비로그인 2006-06-08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미셸 푸코가 자살했어요? 들뢰즈가 자살하고 푸코는 에이즈로 죽지 않았나요?

마늘빵 2006-06-08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자꾸때리다님/ 들뢰즈랑 푸코 착각한거 맞습니다. 얼른 고쳐야겠다.
 
영화음악 : 불멸의 사운드트랙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164
박신영 지음 / 살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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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가 3,300원, 분량 100페이지도 안되는 이 책에 애초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살림지식총서를 관심주제에 따라 골라가며 접해본 나로서는 이 책은 약간 실망이다. 책으로 내기 위해 쓰여진 글이라기보다는 개인 블로그나 영화 사이트에 연재하던 글을 모아놓은 듯한 느낌이다. 물론 그 역시 모아지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책을 낼 수 있으나, 이 책을 구입할 때 애초 기대한 바는 '영화음악'에 대한 좀더 넓고 깊이있는 '무엇'이었다. 영화와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 개인이 오랜 세월 영화를 접하고 또 영화 속 음악을 접하고 느껴온 바를 자신의 지식을 동원해 서술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음악은 글쓴이의 말마따나 이제 더 이상 영화 못지 않게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하나의 영역이다. 하지만 영화 음악이란 것은 영화가 없이는, 영화의 존재를 아래에 깔지 않고는 말조차 꺼낼 수 없는 영역이다. 영화를, 영화 속의 장면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영화음악의 존재의미이기 때문이다. 나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영화를 빛내주는 영화음악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했고, 고등학교 시절 OST가 original sound track 의 약자인 것도 모르고, 음반점에서 OST 주세요, 했던 나의 무지함은 이제 없다. 그때 그 얼굴 빨개지고 땀 뻘뻘 흘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우리나라의 영화음악은 아마도 영화 <접속>부터 붐이 일지 않았나 싶다. 저자도 책 어딘가에서 그런 이야기를 언급한 적이 있다. 접속OST는 당시 엄청나게 팔렸으며, 이후 <쉬리>에서의 'when I dream' 역시 영화만큼이나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근 10년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영화음악은 참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고, 영화음악의 한 가운데서 주목받고 있는 자는 '이병우'와 '조성우'를 들 수 있을 터. 나 역시 이 두 사람을 매우 좋아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너무 많은 영화음악 제작에 참여해 그간 형식의 다양성은 많이 늘어났지만, 작곡가의 다양성은 오히려 퇴보하지 않았나 싶다. 원래 기타리스트 였던 이병우씨는 순수하게 기타리스트로서보다는 영화음악가로, 조성우씨 역시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그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봄날은 간다>의 영화감독 허진호와는 친구사이이다 - 홀로 독자적 영역을 구축한, 어쩌면 취미로 시작해 성공한 케이스에 해당한다.

  자금이 뒤따라준다면 영화를 보고 마음에 드는 영화음악음반을 죄다 구입해 감상하고 싶지만 현실로 눈을 돌렸을 때 누추한 나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저 후일의 꿈으로 미뤄둔다. 글쓴이의 영화와 영화음악에 대한 개인적 감상과 해설로 인해, 이미 봤던 영화이지만 다시 보고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시 영화를 보게 된다면 그땐 영화음악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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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6-08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멜리에의 영화음악이 생각나요. 그녀가 물수제비를 뜨던 순간에 들리던 음악은 정말 슬프면서도 경쾌한, 봄같았어요. 러브 액츄얼리도 좋았지요. 가끔은, 내가 서있는 이곳에 BGM이 흐른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었어요.

마늘빵 2006-06-08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쥬드님 감성적이세요. 아멜리에는 전 아직 못봤어요. 러브 액츄얼리는 정말 좋았죠. 음악은 하나도 기억이 안나요. 하지만 제가 영화를 좋게 본 것은 배경에 흐르는 음악이 영화를 돋보이게 했다는 증거겠죠. 다시 보고 싶군요. 전에 디비디 사놓은것두 있는데.
 
영화음악 : 불멸의 사운드트랙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164
박신영 지음 / 살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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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언더 스코어링'은 고전 영화음악에서 흔히 사용되던 기법으로 '미키 마우징'이라 불리기도 한다. 디즈니 만화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주인공의 행동에 따라 음악이 그 장면을 추적하는 스코어링 방법이다. 발레와 서커스에서 이미 하나의 스타일로 굳어졌으며 영상과 일치하는 매력으로 등장인물의 감정을 보다 증폭시키는 효과를 이끌어낸다.

'언더 스코어링'과 비슷하게 들리지만 전혀 다른 뜻을 갖고 있는 '오버 스코어링'은 스코어가 영화 속의 다른 음향에 비해 좀더 과장된 소리로 들리게 하는 방법이다. 영화 속의 효과음은 거의 제거된 채 처음부터 끝까지 스코어만 들리는 기법으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데에 있어 탁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자칫하면 영화의 흐름을 깨는 역효과도 일으킬 수 있어 작업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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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살림지식총서 222
이진홍 지음 / 살림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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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번, 죽음도 한번, 태어남도 한번, 소멸도 한번뿐이다." (쉴러)-8쪽

어떤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고찰한다는 것은 이성의 질서에 따라서 고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은 부분적으로는 오히려 열정과 병리학의 질서를 따른다. 이것이 자살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자살에 대한 이성적인 논증들을 알고는 있지만 그 논증들이 자살자의 고통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 자살자의 고통을 전해주는 말은 이성적인 논증에 이르지 못한다. 인간이 인간을 진실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정이입이 필요하고, 나의 과학적 논증이 적어도 과학이라고 자처하려면 현상에 의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자살에 관한 논증들은 이 둘 사이를 영원한 평생선처럼 오락가락하는 것이다.-9쪽

인간은 오직 침묵 속에서만 자신을 가장 잘 제어할 수 있을 뿐이다. 그 경우가 아니라면 그는, 말하자면 끊임없는 장광설로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가 될 뿐으로서 오히려 자기가 아닌 타인으로서 자신을 유포하는 셈이다.(디누아르, <침묵의 미덕>)-13쪽

인생이란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오래 끌어가지 않으면 안 되늰 것과 같은 그런 애착이 가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대의 본질이 원래 어떻게 만들어져 있든 간에 남과 마찬가지로 그대 역시 죽지 않을 수 없으며, 품행이 나쁘고 신을 모독하는 일을 해온 사람도 마찬가지로 죽어간다. 그러므로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온갖 선물 중에서 적절한 시기에 죽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는 것을, 각자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영혼의 약으로서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더구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선물은 자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플리니우스, <박물지> 제28권 제 1장)

신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만능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은 설사 스스로 자살하기를 바란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이 가능하다. 스스로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자 최상의 선물이다.(플리니우스, <박물지> 제2권 제7장)-18-19쪽

"자살은 설사 그 사람 자신에 있어서는 부정한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국가에 대해서는 하나의 부정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 15장)-25쪽

자살이란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빚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자 그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에, 그리고 만일 이것이 의도적이고 자유롭게 영속적으로 행해진다면 오직 신에게만 속하는 권한을 사취하는 신에 대한 범죄이므로 자살은 치명적인 죄악으로 간주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33쪽

소크라테스는 자살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도덕적으로 나쁜 것임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것이 철학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철학자에게 죽음은 평정을 가지고 맞이해야 할 단순한 불행이 아닌, 자기 존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일반인에 대해서는 원하는 때에 죽을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철학자에게는 인정하고 있다. -62쪽

극기주의는 그것이 자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과 그 영역의 경계 밖에 잇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이고 자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확고하게 붙잡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자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다시말한다면 자살 행위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가 합리적인 결정에 따른 것이기만 하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 자유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65쪽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방법이 죽음 말고는 다른 것이 없을 때 이 세계를 떠날 시간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오직 철학자에게만 속하는 지고의 존엄이다. (세네카)-66쪽

그런데 모두가 자살을 개인적 의지의 승리로 간주하고는 있지만, 그 의지도 그 승리가 쟁취되는 순간에는 그 지지의 근거를 잃고 만다. 만일 시체가 다시 되살아난다면 그 승리가 결정적인 것만큼이나 순간적이라는 것을 알 것이지만 이제 그 승리를 연장시키고 그 기억을 보존하고 그 결과를 전개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남아 있는 전 인류의 몫이 된단 말인가? 자살을 어떠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살고자 하는 의지의 부정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그 반대로 생에 대한 보다 밀도 깊은 긍정의 징표로 간주한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한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죽음의 의지가 존중되어야 한다면 이것 또한 이기적인 쾌락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살고자 하는 욕망과 이 의지의 실현 사이의 장애가 너무 크기 때문에, 삶에서 의지를 실현시킬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그 의지라는 현상 자체를 소멸시켜 버리는 자살 이라는 형태로서 그것을 확인한다는 것은 의지를 보존하기 위해서 고통을 거부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68-69쪽

만일 자살이 허용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만일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자살 또한 허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이것이 바로 윤리의 본질에 관한 문제다. 자살은 말하자면 가장 근본적인 죄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살을 알아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수증기의 본질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수은 증기를 만져보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중략) 그런데 자살은 그 자체로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비트겐슈타인)-71-72쪽

"각자가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결정하는 곳에서 (타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그를 위해 걱정해 주는 것뿐이다."(키에르케고어)-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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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6-06-06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던가요?

마늘빵 2006-06-06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요? 네! 요 책 읽고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을 보면 딱 좋지 않을까 싶어요.
나아가 4만원에 육박하는 <죽음 앞의 인간>도 볼 수 있다면 더 좋을듯. 자살에 대해 짧은 시간 안에 축약적으로 볼 수 있는 책입니다.

가넷 2006-06-06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것 말고도 살림지식총서중 몇권 골라잡아서 지를까 생각중인데.. . 질러야 할까봐요. 정말 저렴한 가격에 질은 어떨지 궁금했었는데... 그리 나쁜 평들은 없는것 같으니까...음.;

마늘빵 2006-06-06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살림지식총서 괜찮은 거 많아요. 예전에 봤던 <르몽드>도 좋았고. 이번에 새로 산 <영화음악>도 아직 안봤는데 괜찮을거 같아요. 싸고 좋아요. 책 중에 제일 싸지 않을까 생각.

비로그인 2006-06-07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의 밑줄긋기 74쪽 때문에, 키에르케고르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딱 그만큼이지요.

마늘빵 2006-06-07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드님 / ^^
 

 * 스포일러 경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힌, 두 여인의 위험한 유혹"이라는 포스터문구를 보고, 아 좀 야한 영화구나, 싶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야하다기보다 무서운 영화였다. 그렇다 스릴러 공포였던 것이다. 하지만 허리우드식의 스릴러 공포와 같이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의 긴박감과 빠른 이야기 진행은 찾아 볼 수 없다. 느릿느릿하고 천천히 다가가지만 순간순간 섬뜩 놀라게 하는 고요한 밤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공포라고나 할까. 공포는 못생기고 기괴하게 생긴 괴물이나 전기톱을 든 잔인한 살인마에게서도 느낄 수 있지만, 평온하고 행복한 연못에 커다란 돌맹이 하나 던져놓는 것에서 오기도 한다.  

  그들이 오기전까지는 행복했었다. 그 누구보다 서로에게 헌신적인 결혼 3년차 젊은 부부, 알랭과 베네딕트에겐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다. 퇴근 후 아기자기하고 조용한 집안에서 정성껏 만든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함께 티비도 보고, 또 사랑의 장난질(?)도 나누는 그들은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행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들은 아름답고 이쁜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그들이 오면서 두 사람의 행복은 깨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이 행복이 얼마나 오래갈 것 같아?" 라고 대뜸 질문을 던지는 검은 선그라스낀 사장의 아내 알리스. 마치 우리 둘의 행복이 부러워 시샘하는 듯 하다. 질투 혹은 더 나아가 저주?  



* 늦은 밤의 이 평온하고 행복한 저녁식사를 깰 자 누구더냐.



* 몰래 부엌에서 키스하다 들켜버렸다. 근데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저 여자는 뭐야. 
 

  알리스는 이 편안하고 안락한 저녁식사를 망쳐버렸다. 알랭의 사장이자 그의 남편인 리차드를 향해 계속 퍼부어대는 저주의 발언들, 신경질적인 태도는 식탁 위의 평화를 깨버렸다. 사장 부부를 보내며 "내가 저렇게 되면 안락사 시켜줘." 베네딕트는 우스게소리로 그랬을지 모르나 자신이 정말 그리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알랭에게 접근하는 알리스, 대뜸 집에 찾아와 아파 누워있겠다더니 권총자살해버린 알리스, 이를 어찌 받아들일 것인가. 이상한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베네딕트가 이상해졌다. 그녀는 알랭을 향해 신경질을 내고 저주를 퍼붓는다. 안락사시켜야 하나? 그러게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영화는 리처드와 알리스 부부, 알랭과 베네딕트 부부, 이렇게 네 사람을 등장시키며 각각의 인물들의 숨겨진 욕망과 환타지를 보여준다. 알리스는 알랭을 유혹하고, 유혹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만약 베네딕트가 아니었다면 그 유혹에 응했을 알랭, 베네딕트는 리처드를 유혹하고, 리처드는 이를 달갑게 받아들인다. 그녀가 내가 좋다는데 어쩌겠어 라는 리처드의 말에 사랑은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알랭. 

  이성의 지배하에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삶일까. 아니면 나의 내면의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삶일까. 영화는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성의 통제 아니면 내면의 거침없는 욕망. 어쩌면 '바람직한' 이라는 표현보다는 '행복한' 이라는 수식어가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사는가, 라는 질문 앞에 행복하기 위해서, 라고 대답한다면,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행복이 될테니까. 하지만 행복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의문.   네 사람의 저녁식사 이전의 알랭과 베네딕트의 평온한 일상이 행복인지, 아니면 저녁 식사 이후에 전개되는 기존의 평화를 깨버린 욕망이 행복인지는 그들 각자의 마음 속에 달려있는 일.  

  영화제목 '레밍'은 스칸디나비아에 거주하는 쥐과의 '레밍'을 의미한다. 레밍은 선두 레밍이 절벽에서 떨어지면 뒤에 따르는 나머지 레밍들도 그를 따라 떨어져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이런저런 가설을 내놓지만 그 어떤 것도 확실하게 레밍의 자살(?)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들이 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지는. 알리스의 신경질적이고 괴이한 행동들은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지 모르나 베네딕트에게로, 알랭에게, 리처드에게 전해짐으로써 마치 레밍의 행동패턴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가 네 사람 사이에 끼지 전까지는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괜찮았다. 하지만 그녀의 출연 이후 베네딕트를 시작으로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이상하게 변해간다. 이성은 간데 없고 감정만 남았다. 욕망, 시기, 질투, 거침없는 욕설, 저주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을 지배한다.  

  영화는 생각거리를 툭 던져놓고는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아니 어쩌라는거지, 결론이 뭐야, 깜깜한 극장안에서 올라오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사람들은 한동안 넋놓고 앉아있다. 그런면에서 영화는 불친절하다. 하지만 난 불친절한 영화가 좋다. 결론이 정해져있는건 재미없다. 감독은 분명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을테지만 그것은 감독이 영화를 보는 관점이고, 결론을 맺듭짓지 않음으로써 그는 관객에게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결론은 관객 각자의 마음 속에 있다. 내게 있어 이 영화를 보는 주된 코드는 '행복'이었다. 니들이 언제까지 행복할 것 같으냐, 라는 알리스의 말은 내가 영화를 보는 주된 질문이자 관점이었다. 지금의 평온함과 일상의 안락, 행복함은 영원하지 않다. 또 진실되지도 않다. 그것은 포장된 행복이며, 나의 이성의 통제하에 주문걸어온 행복이며, 지속적인 행복과도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를 부정한다면 그 또한 나의 삶에 불안과 고통을 가져다줄터. 행복은 무엇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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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06 14: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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