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경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힌, 두 여인의 위험한 유혹"이라는 포스터문구를 보고, 아 좀 야한 영화구나, 싶었는데 기대(?)와는 달리 야하다기보다 무서운 영화였다. 그렇다 스릴러 공포였던 것이다. 하지만 허리우드식의 스릴러 공포와 같이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의 긴박감과 빠른 이야기 진행은 찾아 볼 수 없다. 느릿느릿하고 천천히 다가가지만 순간순간 섬뜩 놀라게 하는 고요한 밤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공포라고나 할까. 공포는 못생기고 기괴하게 생긴 괴물이나 전기톱을 든 잔인한 살인마에게서도 느낄 수 있지만, 평온하고 행복한 연못에 커다란 돌맹이 하나 던져놓는 것에서 오기도 한다.  

  그들이 오기전까지는 행복했었다. 그 누구보다 서로에게 헌신적인 결혼 3년차 젊은 부부, 알랭과 베네딕트에겐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다. 퇴근 후 아기자기하고 조용한 집안에서 정성껏 만든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함께 티비도 보고, 또 사랑의 장난질(?)도 나누는 그들은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행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들은 아름답고 이쁜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그들이 오면서 두 사람의 행복은 깨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이 행복이 얼마나 오래갈 것 같아?" 라고 대뜸 질문을 던지는 검은 선그라스낀 사장의 아내 알리스. 마치 우리 둘의 행복이 부러워 시샘하는 듯 하다. 질투 혹은 더 나아가 저주?  



* 늦은 밤의 이 평온하고 행복한 저녁식사를 깰 자 누구더냐.



* 몰래 부엌에서 키스하다 들켜버렸다. 근데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저 여자는 뭐야. 
 

  알리스는 이 편안하고 안락한 저녁식사를 망쳐버렸다. 알랭의 사장이자 그의 남편인 리차드를 향해 계속 퍼부어대는 저주의 발언들, 신경질적인 태도는 식탁 위의 평화를 깨버렸다. 사장 부부를 보내며 "내가 저렇게 되면 안락사 시켜줘." 베네딕트는 우스게소리로 그랬을지 모르나 자신이 정말 그리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알랭에게 접근하는 알리스, 대뜸 집에 찾아와 아파 누워있겠다더니 권총자살해버린 알리스, 이를 어찌 받아들일 것인가. 이상한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베네딕트가 이상해졌다. 그녀는 알랭을 향해 신경질을 내고 저주를 퍼붓는다. 안락사시켜야 하나? 그러게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영화는 리처드와 알리스 부부, 알랭과 베네딕트 부부, 이렇게 네 사람을 등장시키며 각각의 인물들의 숨겨진 욕망과 환타지를 보여준다. 알리스는 알랭을 유혹하고, 유혹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만약 베네딕트가 아니었다면 그 유혹에 응했을 알랭, 베네딕트는 리처드를 유혹하고, 리처드는 이를 달갑게 받아들인다. 그녀가 내가 좋다는데 어쩌겠어 라는 리처드의 말에 사랑은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알랭. 

  이성의 지배하에 평온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삶일까. 아니면 나의 내면의 욕망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삶일까. 영화는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성의 통제 아니면 내면의 거침없는 욕망. 어쩌면 '바람직한' 이라는 표현보다는 '행복한' 이라는 수식어가 더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사는가, 라는 질문 앞에 행복하기 위해서, 라고 대답한다면,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행복이 될테니까. 하지만 행복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의문.   네 사람의 저녁식사 이전의 알랭과 베네딕트의 평온한 일상이 행복인지, 아니면 저녁 식사 이후에 전개되는 기존의 평화를 깨버린 욕망이 행복인지는 그들 각자의 마음 속에 달려있는 일.  

  영화제목 '레밍'은 스칸디나비아에 거주하는 쥐과의 '레밍'을 의미한다. 레밍은 선두 레밍이 절벽에서 떨어지면 뒤에 따르는 나머지 레밍들도 그를 따라 떨어져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이런저런 가설을 내놓지만 그 어떤 것도 확실하게 레밍의 자살(?)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그들이 왜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지는. 알리스의 신경질적이고 괴이한 행동들은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지 모르나 베네딕트에게로, 알랭에게, 리처드에게 전해짐으로써 마치 레밍의 행동패턴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가 네 사람 사이에 끼지 전까지는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괜찮았다. 하지만 그녀의 출연 이후 베네딕트를 시작으로 나머지  세 사람은 모두 이상하게 변해간다. 이성은 간데 없고 감정만 남았다. 욕망, 시기, 질투, 거침없는 욕설, 저주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을 지배한다.  

  영화는 생각거리를 툭 던져놓고는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아니 어쩌라는거지, 결론이 뭐야, 깜깜한 극장안에서 올라오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사람들은 한동안 넋놓고 앉아있다. 그런면에서 영화는 불친절하다. 하지만 난 불친절한 영화가 좋다. 결론이 정해져있는건 재미없다. 감독은 분명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을테지만 그것은 감독이 영화를 보는 관점이고, 결론을 맺듭짓지 않음으로써 그는 관객에게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결론은 관객 각자의 마음 속에 있다. 내게 있어 이 영화를 보는 주된 코드는 '행복'이었다. 니들이 언제까지 행복할 것 같으냐, 라는 알리스의 말은 내가 영화를 보는 주된 질문이자 관점이었다. 지금의 평온함과 일상의 안락, 행복함은 영원하지 않다. 또 진실되지도 않다. 그것은 포장된 행복이며, 나의 이성의 통제하에 주문걸어온 행복이며, 지속적인 행복과도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를 부정한다면 그 또한 나의 삶에 불안과 고통을 가져다줄터. 행복은 무엇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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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06 14: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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