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액션을 선보인다. 액션영화 매니아라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선택. 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화면만 쳐다보고 있고 싶은 사람에게도 적절한 선택. 영화는 뻔히 보이는 전통 액션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고 있다. 약자가 당한다. 그리고 분노한다. 영웅이 나타나 그들을 제압한다. 뻔히 보이는 스토리지만 그래도 이런 전통 액션 영화를 찾는 것은 영웅의 무용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이소룡과 성룡이 쿵후를 했다면, 이연걸은 우수로, 그리고 이제는 토니 자의 무에타이다.

   토니 자는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영화 세트장에서 요리사, 스탭, 심부름꾼 등 잡다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5년 후 한 영화에서 스턴트 대역을 맡았고, 이후 <옹박>으로 일약 액션영화계의 스타로 떴다. 그의 나이 28살. 나랑 동갑이군. 녀석. 17년 동안 닦은 무에타이 실력으로 그는 그동안 영화 속에서 보여진 와이어액션에 대한 불만을 실제로 재현함으로써 촬영장 스탭들의 입을 쩍 벌어지게 했다한다. 그간의 무술훈련이 빛을 발한 영화다. 17년의 경력과 7년의 준비과정이 있었기에 갑작스런 발탁에도 그는 동요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무술을 선보일 수 있었다. 오랜 인내의 결과.

  * 많은 무술영화들이 있지만, 또 무술영화를 별로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굳이 그중에서 내 취향대로 하나를 꼽아보자면, 난 이연걸식 영화를 선택하겠다. 이소룡, 성룡은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지만 난 그다지 그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이 무술의 달인이라는 것은 인정하나 영화로서 보여지는 재미는 별로. <옹박>을 통해 선보인 무에타이는 신선하긴 했지만, 영화 스타일이 옛날식을 고집해서인지 얘도 별로. 이연걸이 나오는 영화는 무술만 보여주기보다는 스토리를 중시한다. 짜임새있고 알찬 스토리가 바탕이 되어 불가피하게 이연걸이 무술을 선보일 수 밖에 없게끔 만든다. 어떻게 보면 이소룡과 성룡, 토니 자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감독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지금 언급한 세 사람의 무술은 짜임새있는 스토리를 통해 뭔가 보여주기에는 투박하고 거칠다. 이연걸의 우슈는 좀더 부드럽고 싸우지 않는 듯 하면서 싸우는 스타일이랄까. 순수하게 무술을 보기 위해서라면 이연걸 영화보다는 다른 세 사람의 영화가 더 낫겠지만, 영화 자체가 주는 재미를 느끼고자 한다면 이연걸이 단연 우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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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마니아 2006-07-06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옹박을 이제야 봤군. 입만 다물고 있으면 더 멋있을텐데 말이야.
근데 이 영화가 제목이 좀 이상해서 우리 나라에서 흥행이 안좋았다는 말이 있더라

마늘빵 2006-07-07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신영화이지만 옛날방식을 따르고 있는 영화인지라 과거의 홍콩액션물을 좋아했던 이들에겐 반가울거 같은데, 난 대략 별루.
 
작가의 방 - 우리 시대 대표 작가 6인의 책과 서재 이야기
박래부 지음, 안희원 그림, 박신우 사진 / 서해문집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의도는 좋았지만 기대한 만큼의 무엇을 보여주지 못했던 책"이라 감상을 이야기 하고 싶다. '작가의 방'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는 신선했다. 작가들의 오랜 노력 끝에 서점에서나 접했던 그들의 창작물이 아닌, 그들이 창작을 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방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은 독자들에게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티비 오락 프로그램에서 탈랜드, 가수들의 방을 들여다본 적은 있어도, 소설가, 시인의 방을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탈랜트나, 가수, 배우들은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인물이었던 반면, 소설가와 시인은 평소 책을 접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이였기 때문이었을 터. 또 한가지 덧붙이자면 티비나 극장 상영관을 통해 '비디오'를 보여주는 배우와 탈랜트는 당연히 브라운관을 통해 엿보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활자를 통해 독자와 교류하는 소설가와 시인의 경우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브라운관 보다는 활자를 통해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방>은 그런 차원에서 매우 적절한 방법으로 작가에게 다가갔던 책이라 말하고 싶다.

  책을 즐겨 읽는 이라면, 또 그중에서 빌려보기보다 사보는 이라면, 집에 적어도 책 수십권쯤은 있을 터이고, 책이 쌓여감에 따라 나도 서재를 꾸려보고 싶다라는 생각은 한번쯤 들 터, 내가 꿈꾸는 서재는 백지에서 상상력의 발현을 통해 만들어지기 보다는 기존의 무엇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려지기 마련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서재사진들. 아름답고 깔끔하지만 책을 찾아보기에는 불편한 서재도 있고, 지저분하고 정리가 안된 듯 하지만 푸근하고 인간미 넘치는 서재도 있다.

  <작가의 방>에서는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 중에서 이문열, 김영하, 강은교, 공지영, 김용택, 신경숙 이렇게 여섯 사람만들 다루고 있다. 선택 기준은 따로 없는 듯 하고 이 책을 기획한 박래부씨의 마음이지 뭐. 그가 선택한 작가들은 모두 우리 문단을 대표할 만한 이들이고, 충분히 독자들이 그들의 서재를 궁금해 할 만한 작가들이다.

  책은 매우 이쁘게 만들어졌다. 그냥 책표지만 보더라도 가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내용은 둘째치고 서재를 그려낸 그림들이 아기자기하고 이쁘다. 한국일보 수석논설위원 박래부는 사진가와 일러스트레이터 한 명씩을 대동하고 작가의 집을 방문한다. 그는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메모하고, 사진가는 작가의 집 구석구석을 촬영하고, 일러스트레이터는 손바쁘게 서재를 중심으로 집안 곳곳을 그려낸다. 마치 수색영장 들고 용의자 집을 수색하는 경찰 같다.

  나만의 비밀 공간이 만천하에 공개된다는 것은, 일단 나에게 그런 제의가 왔다는 자체로서 기쁜 일이기도 하지만, 조심스럽고 꺼림칙하기도 하다. 작가의 방은 그 자체가 작업 공간이며, 그것은 나의 글쓰기의 노하우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문열씨는 의자에 앉아 책상다리를 하고 노트북에 글을 쓰고, 어두칙칙한 교수 연구동 구석에 박혀 글을 쓴다. 공지영씨는 고급스런 양털 침대에서 다리를 펴고 책을 보기도 하고 잠을 청하기도 한다. 이문열씨의 방은 대체로 예상했던 그런 과거 문인들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그런 방이었고, 김영하씨의 방은 신세대(?) 작가다운 냄새가 풍기는 방이었고, 강은교씨의 방은 정리가 깔끔하게 잘 된, 하지만 책무덤이라 할 만큼 엄청난 책들에 둘러싸인 그런 방이었고, 공지영씨의 방은 고급스런 유럽의 귀족들의 방과 같은 느낌이었다. 공주방이라고나 할까. 김용택씨는 좁은 집구석에 책을 한가득 쌓고 쌓고 또 쌓아올려 방을 좁혀가고 있는 형국이었고, 신경숙씨는 역시 정리가 잘 되고 깔끔한 하지만 고요히 나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작가들의 각자의 성격이 잘 묻어나는 서재였다.

  박래부씨와 여섯명의 작가가 주고받는 입담들, 그리고 방안 곳곳의 사진, 귀엽게 그려낸 서재그림이 잘 어우러져 하나의 이쁜 책으로 만들어졌다. 기획의도도 좋았고, 작업 방식도, 책의 형태도 좋았다. 하지만 못내 아쉬운 것은, '작가의 방'이라고 했지만 '방'만 있고 '책'은 없는 듯한 느낌이다. 그들의 방만 살펴볼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집필 방식, 작가가 되기 전의 어린시절부터의 이야기, 그들이 읽어온 책들에 대한 이야기가 좀더 풍성하고 알차게 들어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 나에게도 서재를 가지고 싶다는 꿈이 있다. 많다 할 순 없지만 내 좁은 방안 한쪽을 가득 메운 책꽂이는 이제 꽉 들어차 더이상 책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다. 방바닥에서부터 책은 한권, 두권 쌓아올려지고 내 생활공간은 줄어들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 책과 함께 있어. 내가 바라는 나의 미래의 모습 중 하나는 책무덤에 갇혀 사는 것이다. 너무나도 책이 많아 발 디딜 틈이 없고 어떻게 분류를 해야할지 감히 엄두도 안나는, 퇴근 후 매일매일 진땀빼며 한달은 족히 정리를 해야만 하는 그런 책방을 가지고 싶다. 이문열씨의 서재 중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높이의 책장이 있었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책이 많으면 사다리를 탄단 말인가. 나도 그런 서재를 가지고 싶다. 내 서재를 꾸리고 군데 군데 사진을 찍으며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즐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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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마니아 2006-07-04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샀군. 작가의 방이란 책에서 '방' 외에 '책'까지 요구하는 건 좀 무리지 않을까? 이 책의 컨셉 자체가 작가의 서재를 보여준다는 건데 그만으로 신선한 기획이라 보는데, 그 이상을 요구하는 건 좀 무리지 않을까 싶다. 다른 곳에서 작가의 생각, 철학 등에 대해선 접할 수 있으니 말이야 ^^

마늘빵 2006-07-05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작가의 방'이라 하면 '방'보다는 '작가'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 사실이고, 독자들은 '방'보다 '작가'의 서재에 기대를 걸지 않을까 싶다. 책 제목이 내용을 속이거나 한 건 아니지만 독자들의 기대치에는 부응하지 못한 인상.

마늘빵 2006-07-06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밑천이 보여서. ㅋㅋ 음 저는 잘 꾸려놓고 나중에 공개하고 싶어요. 김용택 시인 서재는 서재라기보다 그냥 집구석이던데요? ^^ 하긴 그런게 더 정감있어 보이긴 해요.

씩씩하니 2006-07-06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재 있는대.........그냥 알라딘.서재..헤~~~
자가의 방이 궁금하긴했는데 아 이런 책도 있었네요..요즘은 숙제(!!) 하느라 허덕이는 중이라 나중에 읽을까봐요...
나중에 정말 멋진 서재 구경시켜주세요~ 사다리 타고 있는 아프락사스님을 기대하며...

kleinsusun 2006-08-01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지영 서재 사진이 참 맘에 들었어요. 당장 서재는 아니더라도 그런 길다란 쇼파를 하나 사려구요.^^ 저도 빨리 멋진 서재를 갖고 싶어요.

marine 2006-09-25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신경숙씨 서재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나중에 따라 해 보고 싶어요
그리고 공지영씨 서재의 그 스툴도 멋있었구요
궁금한 게 있으면 일단 책부터 산다는 공지영씨 말이 어찌나 공감이 가던지...^^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 - 양장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3월
절판


풀섶에서 자라는 붉은 장미여,
빛에 씻긴 진홍 색깔과,
그 농염하고 향기로운 자태를 자랑한다만,
아니다. 내 바르게 이르거니와,
너의 불행은 목전이다.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 -7쪽

화자는 자기 작품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해석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소설을 쓰지 말 일이다. 소설이라는 것은 수많은 해석을 발생시키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가 작품을 해석하지 않는다는 이 고결한 원칙을 지키는 데엔 한 가지 장애가 있으니 그것은 모든 소설에는 제목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10쪽

소설의 작가가 누릴 수 있는 위안 가운데 가장 으뜸 가는 위안은,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썼는데도 불구하고 독자의 이해를 통하여 전혀 다른 독법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다. 학문적인 논문을 썼을 경우, 서평자에 대한 나의 자세는 법관의 판단 만큼이나 명쾌하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그가 정확히 이해했는가, 혹은 하지 못했는가? 그러나 소설의 경우 상황은 전혀 다르다. 나는, 작가가 타인에 의해 발견된 독법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설사 그런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침묵을 지킴으로써 다른 독자들에게도 텍스트 자체를 통해 그 잘못된 해석에 도전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15쪽

작품이 끝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 죽음으로써 그 작품의 해석을 가로막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19쪽

나는 중세에 <대해서> 쓰고자 결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세<에서> 쓰기로 결심했다. 말하자면 그 시대 연대기 작가의 입을 통하여 중세라는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35쪽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소설의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소설의 세계를 구축해 놓으면 언어는 거기에서 필연적으로 따라온다. Rem tene, verba sequentur, 즉 <주제를 붙잡으라, 그러면 언어가 뒤따라온다> 인 것이다. 시의 경우는 Verba tene, res sequentur, 즉 <언어를 붙잡으라, 그러면 주제가 뒤따라온다>. -43쪽

저자는 책을 쓸 때 마음 속에 어떤 경험적인 독자를 상정하고 쓴다. 근대 소설을 확립한 리처드슨, 필딩, 디포 같은 작가들(출판업자와 자기네 마누라를 위해서 쓴)도 그렇게 썼다. 그러나 그들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조이스 역시,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상적인 독자를 상상하면서 소설을 썼다. 작가가 자기 작품을 기다리고 있는 대중을 위해서 쓰건, 돈을 위해서 쓰건, 아니면 새로운 독자를 만들기 위해서 쓰건, 글쓰기라는 것은 곧 텍스트를 통하여 자기 나름의 독자를 확보하는 작업이다.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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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하 Mr. Know 세계문학 16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절판


서책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새로운 탐구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삼는 것이 옳다. 서책을 대할 때는 서책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성서의 주석서 저자들이 늘 우리들에게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서책의 뜻은 우리에게, 일각수는 도덕적 진실, 비유적 진실, 우화적 진실을 나타내고 있음을 가르친다. 그러나 순결이 고결한 미덕이듯이, 이 서책이 드러내는 의미 또한 진실이다. 그러나 나머지 세 가지 진실을 지지하는 언어적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떤 경험이 이러한 표현을 부여했는지를 한번 따져 보아야 한다. 아무리 그 뜻이 고상하다고 하더라도 언어적 관념이라는 것은 반드시 논의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법이다. -588쪽

우리는 <우리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되 모든 것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퀴나스께서는, <필요로 하는 자가 있거든 쓰게 하라, 이는 자비가 아니라 의무이니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642쪽

나는 <탐구>라고 하지 않고 분명히 <보존>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까닭인가요? 하느님께 속하는, 지 식이라는 재산은 완전한 것이고, 태초부터 완전한 것으로 정제된 것이고, 말씀의 완전함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중략... 지식의 역사에는 발전이나 진보가 있을리 없습니다. 오로지 연속적이고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한 요점 약설이 있을 뿐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창조에서 부활을 거쳐, 구름 위에 좌정하시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르기까지 눈에 띄지 않게 변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지식, 지상적인 지식은 이런 길을 걷지 않습니다. 난공불락의 성채같이 단단한 이 지식은, 우리가 겸손하게 귀를 기울일 때만 우리가 걸을 길을 예언하고 우리에게 우리가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을 내어 줍니다. 그러나 이 길이 지식을 변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유대의 하느님께서는, <내가 바로 그 길>이라고 하셨고, 우리 주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 두 진리의 무서운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장미의 이름' 호르헤 수도사) -7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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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읽기 - 텍스트 해석의 한계를 에코에게 묻다
강유원 지음 / 미토 / 2004년 12월
절판


기호의 생산이나 해석은 기호 그 자체만 가지고서는 불가능하고 반드시 여러 가지 사회적 학습의 성과들이 은연중에 결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기호를 제대로 만들어내고 해석하는 일은 정확한 기의를 확실한 기표에 담는 일 뿐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당사자들의 학습 배경과 수준에 달린 일이기도 한 것이다. -20쪽

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기본 요소인 기호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에 이어 텍스트의 정의에 포함된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어던 코드들에 입각해서 통일성을 이룬 기호학적 체계'라는 규정을 한마디로 다시 쓰면 '기호들의 통일적 질서'이다. 여기서 '질서'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기호들이 여기저기에 아무런 배치나 의도 없이, 말 그대로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으면 그것은 단순한 기호 덩어리일 뿐 텍스트는 아니다. 텍스트는 기호들이 일정한 질서에 따라 배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 그 질어의 원리를 만들고, 누가 그것에 따라 배치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기호들이 생명을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 움직여 어떤 배치를 이루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기호에 질서를 부여하고 배치하는 이는 인간, 즉 저자, 기호를 이용하여 텍스트를 생산하는 자이다.-22쪽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물건을 소유했던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할 수도사들은 재물을 소유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교황은 재물을 소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황제를 임명하는 권한까지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교황 요한 22세가 이를 못 마땅해 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중략...
이미 요한 22세에 의해 파문을 당하고 그에 대응하여 교황을 배교자로 비방했던 신성로마 제국 황제 루드비히와 이단으로 몰리고 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손을잡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말이었고, 이들은 교황파에 대립하는 황제파를 형성하게 된다. -31-32쪽

"철학은 이 웅장한 책, 즉 우주에 쓰여진다. 이 책은 우리 시야 앞에 항상 펼쳐진 채 서 있지만, 그 언어를 이해하고 그 언어를 쓴 문자를 해석하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져있으며, 그 문자는 삼각형, 원 및 그 밖의 기하학적 도형이다. 이것들이 없다면 인간의 힘만으로는 단 한 단어도 이해할 수 없으며, 이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캄캄한 미로 속에서 방황할 것이다."
(갈릴레이)

"이 세상 만물은 그림과 책처럼 우리에게 거울로 나타난다."
(알라누스데 인술리스-프랑스 신학자이자 시인)-47쪽

수도사만이 서책을 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쓴 맛이 온 몸에 배어들어오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이들도 서책을 손에 잡고 서책에서 얻는 한 모금의 위안에 안도하곤 한다. 서책이 위안을 준다 해도 이들이 서책에 중독되는 일이란 없다. 그들의 한 발이 서책 밖의 세계를 딛고 있는 한, 그들은 세상에서 서책보다 즐거운 것이 발견되면, 바로 그 순간 서책을 팽개친다. 그 즐거움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면 그들은 평생 다시는 서책을 잡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서책이 삶의 거짓 모방이라는 것을 몸으로써 안다. 서책은 그런 것이다. 그렇게 중독되고 그렇게 버려지는 것이다. -112-113쪽

"인간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도구들 가운데 가장 놀랄 만한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책이다. 다른 것들은 신체의 확장이다. 현미경과 망원경은 시각을 확장한 것이며, 전화는 목소뢰의 확장이고, 칼과 쟁기는 팔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다른 것이다. 즉, 책은 기억의 확장이며 상상력의 확장"이다. (보르헤스) -151쪽

담론은 순수한 학적 언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언설이 은닉하고 있는,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권력관계까지도 담고 있다. 이 권력관계에는 발언자의 사회적 위치와 배경, 발언 시점, 발언이 전달되는 매체 등도 중요한 요소로서 포함된다. 이러한 맥락이 고려될 때 담론분석은 권력분석이 되는 것이다. -168쪽

중세의 공부는 독해에서 시작한다. 이는 주어진 텍스트를 읽는 것인데, 다시 또 3단계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가 텍스트에 대한 문법적 분석이다. 읽는 이는 이 분석을 통해서 문자의 뜻을 알아낸다. 그 다음에는 논리적 설명을 시도하여 의미를 찾아낸다. 마지막으로 학문과 사고의 내용을 드러내는 주석을 통해 텍스트 주해가 완성된다. 어떤 텍스트가 주어지면 이처럼 형식과 내용에 대한 철저한 검토를 거친 후에 그러한 독해 결과를 놓고 토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토론의 첫번째 절차는 질의이다. 학생은 이제 텍스트를 질문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에 답을 하는 교사는 자기 나름의 해답을 찾아내어 결론이라는 사색의 작품을 창조한다. ...중략...

중세 스콜라의 학문 방법은 낡은 것으로 간주되어 근대의 학자들에게 배척당했다. 근대의 학자들은 텍스트의 권위에 기대어 끊임없이 전거만을 찾는 것이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는 방법이라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데카르트같은 이는 자신의 학문의 출발점으로 모든 것을 의심하는 방법론적 회의주의를 세우기도 하였고, 베이컨은 '새로운 기관'을 정립하기도 하였다. 근대의 학문 방법이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해서 중세의 독해, 쟁의, 쿠오들리베타가 가진 깊은 사색의 힘까지 배척되어서는 안된다. 중세의 교사들은 그러한 사색과 쟁론을 통해서 진정한 독토로 doctor - 이는 본래 '교사'라는 뜻을 가졌다 - 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168-170쪽

윌리엄은 '이름은 사물의 궁극'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이름은 사물의 본질과 무관하게 아담이 임의로 붙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장미'라고 불리는 사물도 그것이 무어라 불리든 그 본질은 '장미'라는 이름과는 무관하다. 그 사물의 이름이 무엇이건 그것은 그것 자체인 것이다. 아담이 사물에 임의로 이름을 붙였듯이 모든 이름은 사람이 약정을 통해 붙이는 것이다. -172쪽

권능이란 권위와 물리적인 힘이 합쳐진 단어이다. 즉 형식과 내용의 권위를 갖춘 상황에서 힘까지 가진 상태가 권능이다. 베르나르 기가 로마 교회의 권능을 믿느냐고 레미지오에게 묻는 것은 레미지오가 로마 교회가 지닌 헤게모니, 즉 동의된 권력을 인정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178쪽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성자 중에서 이단자가 나오고 선견자들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르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도사)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진리가 아니겠느냐?"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도사)
-192-1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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