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는 권력관계다 - 탁석산의 글쓰기 4 탁석산의 글쓰기 4
탁석산 지음 / 김영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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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네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정확하게 알고 그 문제에 대한 너만의 해결 방안을 내놓는 것이 바로 보고서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 네가 자료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모른다는 건 네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뭔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어.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이 그저 상사가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해서 무조건 자료를 읽으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보고서에 뭘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게 당연하지. 그러니 자료를 모으기 전에 해야 할 일은 너에게 주어진 문제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이야. 그 다음에야 정말 너에게 필요한 자료를 찾을 수 있어. 물론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읽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자료에서 중요한 아이디어를 얻을 때도 있지만 바쁜 세상에 그런 걸 기대하고 확실치 않은 자료를 다 읽을 수는 없는 일이지. 특히 요즘 같은 정보의 홍수 속에 정말 자신에게 꼭 필요한 자료만을 엄선할 수 있는 것은 중요한 능력이거든. 그리고 정말 필요한 자료를 찾아야 해답도 쉽게 찾을 수 있지." -42-43 쪽

자료 해석은 해석하는 사람에게 많이 의존하기 때문에 언제나 논쟁거리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보고서를 작성할 때는 자료가 스스로 말하게 해야 한다. 즉 다양한 해석 중에 자신의 해석 그리고 자신의 가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왜 그 자료가 제시되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전제와 결론의 형식을 갖춘 논증을 구성해서 관련된 자료를 순서에 맞게 잘 절이해서 제시하면 된다. -71쪽

자신의 가설, 즉 방향성을 갖고 자료를 모은다 -> 가설에 반하는 자료도 모은다 -> 가설을 수정, 보완한다. -> 어느 정도 정리되면 전제와 결론의 형식을 갖춘 논증으로 만든다(논증이 1/4쪽 보고서가 될 수 있다) -> 논증을 한 장의 보고서로 만든다(절대로 한 장을 넘어서는 안된다) -> 각 전제의 근거가 되는 자료를 차례로 제시한다.(이때 근거 자료는 첨부 서류로 처리한다) -> 각 전제에 대한 반박을 예상하고 예상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자료를 준비하여 붙인다. -94-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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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은 기싸움이다 - 탁석산의 글쓰기 5 탁석산의 글쓰기 5
탁석산 지음 / 김영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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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소피스트들은 근본적으로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며 인간과 무관한 진리란 없다고 봤다. 따라서 이것만이 진리라든가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라든가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란 인간에 의해 합의에 이른 것이고, 인간의 합의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고 변하기 때문에 당연히 진리도 변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피스트들은 절대적 진리를 찾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자임한 것이 아니라 더 나쁜 의견을 좋은 의겨능로 대체하는 것을 자신들의 임무로 여겼다.
현대 사회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어떤 것에 대한 절대 진리가 존재하지 않고 저마다의 의견을 주장한다. 결국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은 회의나 토론 등을 통해 합의에 이르고, 그렇지 못할 경우 다수결로 결정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말짱이 뜨는 것이다. 말을 잘하면 회의나 토론의 분위기를 확 휘어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42-43쪽

글은 논리의 세계인 데 반해 말은 논리를 비롯하여 감정, 몸짓, 소리, 옷차림, 머리 모양 등이 결합된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말은 대면성이 있는 반면 글은 없고, 말은 동시성이 있는 반면 글은 그렇지 않다.
말하기는 현장성이 강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공동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쪽도 우위를 차지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반응을 주고받는 관계다. 즉 말하기가 잘 되려면 청중도 역할을 해 줘야 한다는 얘기다.
말하기에 있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내용과 표현력이 거의 대등하게 중요하다는 점이다. 말하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목소리 등 형식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또한 흔히 글을 써서 그것을 소리 내어 읽으면 말하기가 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절대 금물이다. -63쪽

발표는 크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과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으로 나뉜다. 연설이나 발표의 경우 최소한 30분 이상 지속되는 것이 보통인데 초반에 시선을 끄는데 실패하면 나머지 시간 동안 고전하게 된다. 따라서 처음에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 중요하다.
청중이 어떤 사람들인지, 연설의 주제가 무엇인지에 따라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보통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강연은 전문 지식을 대중에게 알리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경우 처음에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쉽고 일상적인 사례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딱딱하고 논쟁적인 주제를 다룰 때, 즉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강연에서는 결론부터 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시작부분에 청중의 시선을 끌기 위한 장치가 필요했다면 마무리에서도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발표가 끝난 뒤에도 여운을 남기기 위해서는 유명 인사의 명언이나 일화를 소개해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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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6-11-06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저번에 이어서 나오는 건가요?

마늘빵 2006-11-06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얼마전에 나왔어요. 4,5권 다 나왔답니다. 전 5권 먼저 봤어요. 따로 봐도 상관없기에.

가넷 2006-11-06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갑자기 표지가 다르게 나와서;

마늘빵 2006-11-0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4,5권이 표지가 다르게 나왔어요. 꼭 따로따로 나온거처럼.
 
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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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 스물 여덟해. 책을 읽은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으며, 그중에서도 소설을 읽은지는 더더욱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를 향해 최고의 찬사를 날리고 싶다. 이 책 이전에 먼저 그녀의 단편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고 완전 푹 빠져버렸더랬는데 - 솔직히 <달콤한 나의 도시>도 최고지만 그녀의 단편집이 나는 더 마음에 든다 - 이 책을 통해 그녀는 내가 찜한 소설가 명단에 올랐다. 내 명단에 오른다고 그다지 명예가 되는 것도 자부심을 느낄 것도 없지만 여기에 오르면 나오는 즉각즉각 다 구입한다.

  마치 유치한 순정만화를 보는 듯한 책표지와 그에 딱 어울리는 소설 제목하며, 그 내용까지 삼박자를 갖추었다. 게다가 겉표지를 딱 들추는 순간 비록 72년생으로 나보다 7살이나 많지만 되려 나보다 더 어려보이는 - 그럼 내가 늙었다는거야 그녀가 젊어보인다는거야 - 뭔가 머뭇머뭇한 듯 순식간에 찍혀버린 것 같지만 그 와중에 살며시 미소짓고 있는 정이현의 사진. 반해버렸어.

  스물 아홉. 평균결혼연령은 통계를 낼 때마다 지맘대로 왔다리갔다리 하지만 이 정도의 나이라면 결혼을 적어도 한번은 생각해봤을만한 여자의 나이가 아니던가. 아니 남자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나이라면 마찬가지일터. 이 소설은 사랑과 연애와 결혼에 관한 현실적인 이야기이자 솔직한 이야기다. 지금 오늘 사랑과 연애와 결혼은 더 이상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사랑따로, 연애따로, 결혼따로' 가 어쩌면 오늘날의 남녀 이성간에 있을 수 있는 '친구'를 제외한 친밀한 관계의 양식일 터다. 어떤 남자랑 연애하고 싶고요, 어떤 남자랑은 결혼하고 싶어요. 사랑은 조금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이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애매어가 되었기 때문일 터다. 첫사랑에게 차이고 나서 사랑이란 뭘까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더랬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지만 사랑하진 않는 것 같다, 고 말 한 순간부터 - 어쩌면 그것은 그녀가 내게서 마음이 떠났음을 표현하고 헤어짐을 선고하기 위해 지어낸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와 헤어진지 아주 오랜 후에야 들었지만 - 나는 좋아함과 사랑함의 차이에 대해 고민했다. 어릴 적 연애와 사랑과 결혼을 일치시키지 않는 이들에 대해 혐오감을 품었고, 그네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더랬지만, 지금은 그네들이 이해가 되고, 어쩌면 '그네들' 속에 나도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의 주인공들은 당연스럽게도, 연애와 결혼을 분리시켜 생각하고 있으며,  첫째, 하고 싶은 사람과 둘째, 하고 싶을 때 셋째, 안전하게 하자. 라는 섹스의 규칙까지 세워놓는다.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과, 도 아니고, 하고 싶은 사람과 하고 싶을 때, 라니. 그것이 오늘날 많은 이들의 사랑법이고 굳이 부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예전보다 많은' 이들이 이쪽으로 옮겨왔거나, 아니면 예전엔 숨겨졌던 모습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지, 사랑법은 사람 개개인마다 모두 다르다는 것, 이건 인정하고 넘어가야 한다.

   몇차례의 연애와 이별을 반복한 나로서는,  스무살의 풋풋한 사랑은 이제 기대할 수 없다. 사랑과 연애와 결혼을 분리시켜 생각한다는 그 자체가 가능한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될터이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 그것이 사랑인지 좋아함인지 모르겠지만 - 머뭇머뭇 거리며 편지도 건네지 못하고 몇날며칠을 가슴앓이하는 그런 수줍은 나는 이제 없다. 아직 고백보다 고백받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나로서는 소위 말하는 작업을 걸기란 어렵다. 확실히 연애의 숫자가 하나 둘 늘어날수록, 그것은 처음의 그것보다 순수하지도 뜨겁지도 불안하지도 않다. 정말, 결혼은 때가 되어 만나는 사람과 한다는 것이 맞는 말인양, 사랑하는 사람보다 결혼하고픈 여자를 찾게 되는 것이 나이들어가며 느끼는 자연스러움이며, 사랑하고픈 여자와 결혼하고픈 여자는 분명 다르게 다가온다. 사랑해서 누군가를 사귀다가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이런저런 조건들이 눈에 들어오고, 굳이 그것들에 크게 신경쓰지는 않지만, 아무리 작더라도 고려대상이 되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디 나뿐이겠느냐.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에 등장하는 스물 아홉의 인생을 살고 있는 그녀들의 삶이란 것도, 결국 남자를 만나며 이 남자는 어떻고 저 남자는 어떻고 하는 품평회를 거쳐 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현실의, 정이현의 소설 속의 사랑법이다.

  "일부일처제 사회의 위대한 규칙 한 가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결혼하는 건 아니지만, 결혼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해야 한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사랑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이 가진 무언가를 사랑할 수도 있으며,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지 모르면서 사랑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맞선에서 만난 비뇨기과 의사를 대관절 '왜' 사랑하느냐는, 재인을 향한 유희의 질문은 애초부터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결혼하는 건 아니지만, 결혼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규칙. 그러나 전자의 사랑과 후자의 사랑은 과연 같은 것일까? 읽으면 읽을수록 후자의 사랑은 전자의 사랑보다 더 반경을 넓게 잡는다. 저 멀리 들판을 뛰어 여기, 에 말뚝을 박아놓고 여기까지가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다시 또 뛰어간다. 저 멀리로. 날 왜 사랑해? 너는 걔를 왜 사랑하니? 라는 물음만큼이나 대답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하지만 전자의 사랑의 의미로서 이런 질문을 할 수는 있지만, 후자의 사랑의 의미로서 이런 질문은 정이현의 말마따나 성립불가능하다. 왜 사랑하는데, 이유가 없다. 전자든 후자든 이유는 없지만, 전자는 그것을 표현하기 어렵다는 말로서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후자는 어떤 대답이든 다 대답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유가 없다.

   소설은 여자와 남자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순정만화나 눈물 질질짜는 멜로영화에 등장하는 사랑법과는 다르다. 차라리 <달콤 살벌한 연인>의 사랑법 <광식이 동생 광태> 사랑법에 더 가깝다고 할까. 어떤 것이 현실적이고 어떤 것이 이상적인 연애고 사랑법이라고는 말 못한다. 세상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참으로 많은 남녀가 사랑하고 있으며, 참으로 많은 남녀들의 사랑법이 다양하게 존재하니깐. 무엇이 현실적이며 무엇이 이상적이고, 무엇이 그르며 무엇이 바람직하다, 라고 결코 말 할 수 없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나와 같은 사랑법으로 나를 사랑해주기를,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사랑에 대해 저마다 한 가지씩 개인적 불문율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문제는, 자신의 규칙을 타인에게 적용하려들 때 발생한다. 자신의 편협한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기준을, 타인에게 들이대고 단죄하는 일이 가능할까. 사랑에 대한 나의 은밀한 윤리감각이 타인의 윤리감각과 충돌 할 때, 그것을 굳이 이해시키고 이해받을 필요가 있을까. 유희가 만나는 남자가 이혼남이든 유부남이든 수도승이든 내가 터치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한 다스의 남자를 만나든 한 두름의 남자를 만나든 유희 식의 윤리로 재단되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여자와 이혼한 과거의 남자친구와의 섹스를 친구에게 이야기하며 실력이 어쩌느니, 예나 지금이나 섹스를 너무 못해 지금까지 자신이 남자와 관계하며 구축해온(?) 거 다 허물어뜨리고 그 남자에게 맞춰 하향평준화한다느니, 꼭 미적분 다 떼고 일차방정식 푼다느니 하는 그런 섹스에 대한 노골적이고 솔직한 수다와 농담들은, 매우 감각적이고 가볍고 유쾌하고 달콤하지만, 이 달콤한 정이현식의 야한 수다들은 그것으로 족하진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테지만, 이 두꺼운 달콤한 수다를 쭉 훑어본 뒤에는 '사랑이란?' 이 머리 속에, 가슴 속에 남는다. 깔깔 큭큭 재밌게 읽은 뒤에 남는 것은 나의 과거에 지나갔던,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그녀들에 대한 생각과, 지금 나를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그녀에 대한 생각. 아 좋다. 정말 좋다. 기분이 꿀꿀하고 우울해지는 날, 연애와 사랑으로 가슴앓이하는 날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다시 또 생각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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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달 2006-11-05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 적령기 ... =ㅁ=

마늘빵 2006-11-05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왜? 미달이 멀었잖아.

미미달 2006-11-06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빠가 말야... ㅋㅋㅋㅋㅋ

마늘빵 2006-11-0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 나 쳇.

마태우스 2006-12-14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 하려고 리뷰 뒤지고 있다가 님 리뷰 보고 반가워서 댓글도 남겨요. 근데...적립금으로 사도 땡스투 되나 모르겠네요.^^

마늘빵 2006-12-14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마태님 그럼 저 땡스투 주시는거에요? ^^ 땡스에요.
 
한국인 코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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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농담삼아 "책읽듯 책을 낸다"고 말하는 강준만 교수의 올해의 책 중 하나. <한국인 코드>는 어쩌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한국사회에 대해 읽어내고 수많은 고민을 하며 애국자는 아니면서 함께 살아가는 이 공간에 대해 걱정하는 강준만 교수와 같은 이들이 반드시 써야할 책이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글을 쓴다는 데 대해서는 전공이 따로 없다. 우리나라에는 일본학과, 북한학과는 있지만, 또 영어영문학 말고 영어과, 일본어과 는 있지만, 한국어과는 없다. 그러나 몇몇 대학원엔 정식 대학원 과정으로서가 아닌 다른 특수대학원의 형태로서 한국학을 개설하고 있는 듯 하다. 한국에 대해서, 한국인에 대해서 말 할 수 있다는건 다른 전공과 달리 언제나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누구보다 매년 - 매년이라고 말하기엔 강준만의 작업은 너무나 빠르다 - 한국의 현시점에서 벌어지는 논쟁거리들에 대해 많은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강준만 이라면 반드시 써야 할 책. 강준만에게서 <한국인 코드>가 나온 것은 당연하다.

  그는 글을 매우 쉽고 재밌게 쓴다. 누가 봐도 금방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쓴다. 그건 그가 언론을 전공했고, 매체에 글을 자주 기고한다는 점이 만들어낸 그만의 글쓰기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편에서 그를 비판하는 자들은 그의 글쓰기가 그저 신문쪼가리 모아붙여 만들어낸 글로서의 가치도 없는 글이라고 폄하하지만 이런 글이야 말로 진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남들 모르는 현학적인 말 써가면서 어렵게 논문식으로 쓰지말고 이렇게 쓰란 말야. 그래야 좀 읽어볼거 아냐. 가장 가독율이 낮은 글이 논문이라지 않은가. 석사, 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두기 위한 것이니 그것만의 형식이 있는 것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강준만이 이 책 어딘가에서 지적했듯이 참고문헌이 고고한 학자들의 저서가 아니라 옛날, 오늘날의 언론매체들이라고 해서 그 가치를 뚝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싶다. 강준만은 필 받으면 앉은 자리에서 책 한권 뚝딱 할 인물이다. 좀 과장되긴 하지만. 그러니 아 이거 한번 써야겠다 싶으면 그간의 자료들 부시럭부시럭 긁어모아 써 짠 하고 내놓는다. 그리고 딱 적절한 시점에서 그의 책은 대중에게 선보인다. 고 시점에서 논쟁거리가 되는 문제들, 그리고 가장 민감한 현안들에 대해서.

  그의 책은 금방금방 태어나기도 하지만 수명이 짧기도 하다. 그것이 어떤 형이상학적이고 메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의 한국의 모습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인 코드>는 예외로 두어도 될 듯 하다. 이 책은 한국인의 속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며,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한국인의 모습이다. 나의 모습을 가장 잘 모르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한국인은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강준만 자신이 살펴본, 한국인을 말한다. 강준만 자신이 한국인 이라는 점에서 한국인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물음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한국인이 한국인 자신을 가장 잘 모르기도 하면서 가장 잘 알고 있지도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며 그의 발언에 긍정의 끄덕임을 해주고 싶다. 한국인이지만 강준만이라면 강준만이라면 한국인을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을 전해줄 것이다. 나의 그에 대한 턱없는 믿음인가.

  너나 잘하세요, 빨리빨리, 배 아픈건 못 참는다, 최고 최대 최초, 정, 6.25, 소용돌이, 서열, 아버지, 목숨걸고. 이렇게 총 10가지 장에 걸쳐서 한국인을 분석해내고 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여기 보여진 한국인의 모습이, 한국의 모습이, 우리가 보통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내는 성질이라는 것이며, 그의 주장이 당연해보인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뒤에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내 주변에서 그가 지적했던 한국인, 한국의 모습을 쉽게 관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친다. 그런데 도덕교과서라는건 "최고, 최대, 최초"가 가장 잘 드러난 표본이다. 민족과 민족문화를 소개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무엇이 나왔다느니, 우리나라가 통계상 1등이라느니 하는 지나치게 자기나라를 자랑하려는 모습을 발견한다. 최고, 최대, 최초 이것이 그렇게 중요하고, 이것은 결국엔 우리나라에 대한 자부심, 애국심으로 연결된다. 또 국가주의, 애국주의. 아 진절머리나. 이를 지극히도 싫어하는 나 조차 수업 중에 평소 신문 스크랩으로 긁어모은 온갖 통계자료를 들어가며 교과서가 가르치는 대로 증거자료를 열심히 보여주고 있는 나는 뭐냐. 1등이 아니면 안되는 문화. 세계일류를 고집하는 기업과 일류대학이 아니면 사회에서 제대로 취급받지 못하는 사회, 일등이 아니면 올림픽 시상식에서 눈물을 떨구며 국민들에게 죄송스러워 하는 선수들. 아 정말 짜증나.  인생에서 일등을 선점한 이들이 가장 살기 좋은 나라, 반면 일등이 아닌 이들이 가장 살기 어려운 나라가 바로 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다른 나라에서 살아본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지 않았으니 비교할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야.

   강준만의 목소리는 언제나 현실에 바탕을 깔고 있으며,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느끼는 일상의 삶에서 새로운 문제들을 지적하기에 새롭지 않으면서 신선하다. 그는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 생각하고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의 시각은 진부하면서 새롭다. 진부한 소재를 가지고 들먹이지만 새로운 시각을 전해준다. 그의 목소리는 지금 여기를 이야기한다. 그래서 난 그를 좋아한다.

  p.s. 이 책에서 조금 아쉽게 느껴지는 점은, 그가 들고 있는 근거라는 것이 때로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시각에서 충분히 볼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서 그것을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그의 발언의 내용에 비추어 굳이 지적하지 않고 넘어갈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한국인 코드>를 시리즈로 낼 계획인 듯 한데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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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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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 말하기 어렵다. 감동적인 신파극 하나 읽어냈다면 눈물 뚝뚝 떨구며 아 감동적이야 어떻게 이럴수가, 그럴테고,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매번 이번에는 괜찮기를 하고 매번 기대해보지만 번번히 나를 실망시킨다면 쉣, 이러면 그만이고, 내용은 별반 없지만 신나고 재미난 유쾌한 소설작품 하나 읽어냈다면 여전히 속으로 큭큭큭큭 거리며 재밌어할테지만, 이건 뭐냐. 어째 읽고 난 뒤에 아 탁월해, 정말 천재같아, 혹은 정말 재밌다, 아 참 쓰라리다, 뭐 기타 등등의 이런 감정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 뭐지. 뭐지. 굳이 표현하자면, 뭐 어쩜 이럴수가. 이런 정도랄까.

  말하기 굉장히 애매하면서도 그렇다고 '기대보다 실망작' 리스트보다는 '누군가에게 추천해주고픈 작품' 목록에 올리고픈, 하지만 딱히 뭐시기한 느낌은 없는 지금 이 상태. 패닉상태도 아니고, 그냥 멍한 상태다. 뭐냐. 너무 뛰어나서 멍하니 빠져있는 것이 아니라 읽고 난 뒤의 애매모호한 이 느낌. 거참 제목만큼이나 또 표지그림만큼이나 애매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누런 바탕에 빨간색(혹자는 빨간바탕에 누런색이라고 할지도)  오른손바닥을 그려놓고는 제목이랍시고 붙여놓는다는 것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이라니. 뭘 말하려는거지. 특정단어를 삽입한다거나 주의주장성 문구를 삽입하는 것도 아니고, 뭔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수식어를 제목으로 붙여놓는다니. 그것도 서로 어울리지도 않는 것을. 어쩌면 제목을 너무 잘 붙인건지도 모르겠다. 그냥 한 눈에 보기에 뭘 말하는지 모르겠는 저 긴 제목과 빨간 오른손바닥은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바로 그 느낌이야. 이 책을 읽고 나와 같은 '멍함'을 느꼈다면 다시 한번 책을 덮고 제목과 표지사진을 보라고. 딱 그거지 않아?

  소설의 배경은 미국의 911 테러 사태라고 하는데, 절대로, 네버, 절대로, 네버, 소설의 배경이 911사태에요 라는걸 모른 채 본다면 절대로 911을 떠올릴 수 없을테다. 단지 미리 알고 봤기 때문에 소설의 중간중간의 대화 속에서 911 사태를, 또 뒤에 나와있는 연속만화와 같은 사진들을 후루룩 훑어보면서 911을 떠올릴 뿐이다. 911 사태는 전 세계인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미국에 대한 적대적인 사람들은 어떤 쾌감을, 다른 한편으로 또 죄없이 죽어나간 수많은 개인들에 대한 애도의 감정을), 지금 생각해도 CNN 화면에 비춰진 두 비행기의 추락과 소리없는 아우성은 끔찍하지만, 이 소설에선 전혀 그런 냄새조차 맡을 수 없을게다.

  911 사태로 높은 빌딩에서 어떻게 죽어갔을지 모르는 아버지를 잃은 어린 소녀의 성장일기라고 하면 그나마 소설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게다. 왼손바닥엔 예스, 오른손바닥엔 노라고 써있는 사진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럴 목적이 있었던건지 아니면 그냥 디자인상인지 모르겠지만, 표지그림에는 분명 오른손바닥이 그려져있고, 그렇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NO 일터. 무엇에 대한 NO일까. 그날의 보지 못한 악몽을 부정하는 것? 아버지의 죽음을 부정하는 것? 아니면 뭔가 또다른 것에 대한 부정. 이 모든 것들이, 이 책 속에 들어있는 모든 것들, 제목하며, 표지그림하며, 안에 삽입된 수많은 흑백사진들 하며, 또 소설 표현 기법하며, 그러한 모든 것들이 다 하나의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면 난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모두 우연이고, 별다른 메세지를 품고 있지 않다면 - 내가 보기엔 그것이 이 소설과 어울린다 - 이 책에 가벼운 키스를 해주고 책장에 고이고이 넣어둘테야. 가끔씩 꺼내 표지그림을 보고선 또 그 애매모호한 감정을 가질테지만. 아 다시 보니 뒷표지에는 왼손바닥이다. 그렇다면 별 의미 없는거.

  그랬다. 살만 루시디와 존 업다이크와 같은 그들의 작품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이름만 들어도 거대한 그네들의 찬사와 각종 매체와 저널들의 찬사를 받고 있는 이 소설, 불과 나보다 두 살 많은 조너던 샤프란 포어라는 이 작가, 부럽다. 얘도 또 철학전공이야. 나도 쓰고싶다. 예전엔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 따위는 안해봤다. 그런데 그런데 언젠가 나는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그것은 이네들과 같은 한편의 뛰어난 작품을 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굳혀지고 있다. 스위스 철학자 알랭 드 보통, 이젠 미국 철학자 조너던 샤프란 포어, 다음엔 또 누구. 그저 막연한 기대와 희망.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필드보다 명민하고, <양철북>의 오스카보다  사랑스러운 아홉살 소년의, 슬픔과 사랑에 관한 퍼즐 같은 이야기." 라는 뒷페이지의 삽입문구는 이 소설이 어떤 것인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역시나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도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필드였으며-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소녀는 콜필드 만큼이나 세상에 부정적이고 툭툭 혼잣말로 욕설퍼붓는 까칠한 녀석은 아니다 - 또 어떤 장면에서는 <어린왕자>를 떠올리기도 했다. <어린왕자> 속의 여우와 왕자의 대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 길들인다는 것에 대해. <호밀밭의 파수꾼>보다 어렵고 두루뭉실하며 <어린왕자>와는 그것을 제외하고는 동떨어져있는 듯한 느낌. 마땅히 어떤 페이지에 밑줄을 긋고 싶다기보다, 그저 소설을 쭉 읽어내려가며 가슴에 담아두고픈 사랑과 슬픔에 대한 한편의 편평한 이야기.

  알 수 없는 제목이었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은 마지막 장을 덮은 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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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6-11-05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당신은 믿을 수 없겠지만 >이란 책 제목만큼이나 긴 제목이군요..^^;;

마늘빵 2006-11-05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 책은 뭔가 또 궁금해지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