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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나의 도시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평점 :
내 인생 스물 여덟해. 책을 읽은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으며, 그중에서도 소설을 읽은지는 더더욱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를 향해 최고의 찬사를 날리고 싶다. 이 책 이전에 먼저 그녀의 단편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고 완전 푹 빠져버렸더랬는데 - 솔직히 <달콤한 나의 도시>도 최고지만 그녀의 단편집이 나는 더 마음에 든다 - 이 책을 통해 그녀는 내가 찜한 소설가 명단에 올랐다. 내 명단에 오른다고 그다지 명예가 되는 것도 자부심을 느낄 것도 없지만 여기에 오르면 나오는 즉각즉각 다 구입한다.
마치 유치한 순정만화를 보는 듯한 책표지와 그에 딱 어울리는 소설 제목하며, 그 내용까지 삼박자를 갖추었다. 게다가 겉표지를 딱 들추는 순간 비록 72년생으로 나보다 7살이나 많지만 되려 나보다 더 어려보이는 - 그럼 내가 늙었다는거야 그녀가 젊어보인다는거야 - 뭔가 머뭇머뭇한 듯 순식간에 찍혀버린 것 같지만 그 와중에 살며시 미소짓고 있는 정이현의 사진. 반해버렸어.
스물 아홉. 평균결혼연령은 통계를 낼 때마다 지맘대로 왔다리갔다리 하지만 이 정도의 나이라면 결혼을 적어도 한번은 생각해봤을만한 여자의 나이가 아니던가. 아니 남자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나이라면 마찬가지일터. 이 소설은 사랑과 연애와 결혼에 관한 현실적인 이야기이자 솔직한 이야기다. 지금 오늘 사랑과 연애와 결혼은 더 이상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사랑따로, 연애따로, 결혼따로' 가 어쩌면 오늘날의 남녀 이성간에 있을 수 있는 '친구'를 제외한 친밀한 관계의 양식일 터다. 어떤 남자랑 연애하고 싶고요, 어떤 남자랑은 결혼하고 싶어요. 사랑은 조금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이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애매어가 되었기 때문일 터다. 첫사랑에게 차이고 나서 사랑이란 뭘까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더랬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지만 사랑하진 않는 것 같다, 고 말 한 순간부터 - 어쩌면 그것은 그녀가 내게서 마음이 떠났음을 표현하고 헤어짐을 선고하기 위해 지어낸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와 헤어진지 아주 오랜 후에야 들었지만 - 나는 좋아함과 사랑함의 차이에 대해 고민했다. 어릴 적 연애와 사랑과 결혼을 일치시키지 않는 이들에 대해 혐오감을 품었고, 그네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더랬지만, 지금은 그네들이 이해가 되고, 어쩌면 '그네들' 속에 나도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의 주인공들은 당연스럽게도, 연애와 결혼을 분리시켜 생각하고 있으며, 첫째, 하고 싶은 사람과 둘째, 하고 싶을 때 셋째, 안전하게 하자. 라는 섹스의 규칙까지 세워놓는다.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과, 도 아니고, 하고 싶은 사람과 하고 싶을 때, 라니. 그것이 오늘날 많은 이들의 사랑법이고 굳이 부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것은, '예전보다 많은' 이들이 이쪽으로 옮겨왔거나, 아니면 예전엔 숨겨졌던 모습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지, 사랑법은 사람 개개인마다 모두 다르다는 것, 이건 인정하고 넘어가야 한다.
몇차례의 연애와 이별을 반복한 나로서는, 스무살의 풋풋한 사랑은 이제 기대할 수 없다. 사랑과 연애와 결혼을 분리시켜 생각한다는 그 자체가 가능한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될터이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 그것이 사랑인지 좋아함인지 모르겠지만 - 머뭇머뭇 거리며 편지도 건네지 못하고 몇날며칠을 가슴앓이하는 그런 수줍은 나는 이제 없다. 아직 고백보다 고백받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나로서는 소위 말하는 작업을 걸기란 어렵다. 확실히 연애의 숫자가 하나 둘 늘어날수록, 그것은 처음의 그것보다 순수하지도 뜨겁지도 불안하지도 않다. 정말, 결혼은 때가 되어 만나는 사람과 한다는 것이 맞는 말인양, 사랑하는 사람보다 결혼하고픈 여자를 찾게 되는 것이 나이들어가며 느끼는 자연스러움이며, 사랑하고픈 여자와 결혼하고픈 여자는 분명 다르게 다가온다. 사랑해서 누군가를 사귀다가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이런저런 조건들이 눈에 들어오고, 굳이 그것들에 크게 신경쓰지는 않지만, 아무리 작더라도 고려대상이 되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디 나뿐이겠느냐.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에 등장하는 스물 아홉의 인생을 살고 있는 그녀들의 삶이란 것도, 결국 남자를 만나며 이 남자는 어떻고 저 남자는 어떻고 하는 품평회를 거쳐 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현실의, 정이현의 소설 속의 사랑법이다.
"일부일처제 사회의 위대한 규칙 한 가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결혼하는 건 아니지만, 결혼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해야 한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사랑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이 가진 무언가를 사랑할 수도 있으며, 그 사람의 무엇을 사랑하는지 모르면서 사랑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맞선에서 만난 비뇨기과 의사를 대관절 '왜' 사랑하느냐는, 재인을 향한 유희의 질문은 애초부터 성립하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결혼하는 건 아니지만, 결혼하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규칙. 그러나 전자의 사랑과 후자의 사랑은 과연 같은 것일까? 읽으면 읽을수록 후자의 사랑은 전자의 사랑보다 더 반경을 넓게 잡는다. 저 멀리 들판을 뛰어 여기, 에 말뚝을 박아놓고 여기까지가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다시 또 뛰어간다. 저 멀리로. 날 왜 사랑해? 너는 걔를 왜 사랑하니? 라는 물음만큼이나 대답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하지만 전자의 사랑의 의미로서 이런 질문을 할 수는 있지만, 후자의 사랑의 의미로서 이런 질문은 정이현의 말마따나 성립불가능하다. 왜 사랑하는데, 이유가 없다. 전자든 후자든 이유는 없지만, 전자는 그것을 표현하기 어렵다는 말로서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후자는 어떤 대답이든 다 대답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유가 없다.
소설은 여자와 남자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순정만화나 눈물 질질짜는 멜로영화에 등장하는 사랑법과는 다르다. 차라리 <달콤 살벌한 연인>의 사랑법 <광식이 동생 광태> 사랑법에 더 가깝다고 할까. 어떤 것이 현실적이고 어떤 것이 이상적인 연애고 사랑법이라고는 말 못한다. 세상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참으로 많은 남녀가 사랑하고 있으며, 참으로 많은 남녀들의 사랑법이 다양하게 존재하니깐. 무엇이 현실적이며 무엇이 이상적이고, 무엇이 그르며 무엇이 바람직하다, 라고 결코 말 할 수 없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나와 같은 사랑법으로 나를 사랑해주기를,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사랑에 대해 저마다 한 가지씩 개인적 불문율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문제는, 자신의 규칙을 타인에게 적용하려들 때 발생한다. 자신의 편협한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기준을, 타인에게 들이대고 단죄하는 일이 가능할까. 사랑에 대한 나의 은밀한 윤리감각이 타인의 윤리감각과 충돌 할 때, 그것을 굳이 이해시키고 이해받을 필요가 있을까. 유희가 만나는 남자가 이혼남이든 유부남이든 수도승이든 내가 터치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한 다스의 남자를 만나든 한 두름의 남자를 만나든 유희 식의 윤리로 재단되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여자와 이혼한 과거의 남자친구와의 섹스를 친구에게 이야기하며 실력이 어쩌느니, 예나 지금이나 섹스를 너무 못해 지금까지 자신이 남자와 관계하며 구축해온(?) 거 다 허물어뜨리고 그 남자에게 맞춰 하향평준화한다느니, 꼭 미적분 다 떼고 일차방정식 푼다느니 하는 그런 섹스에 대한 노골적이고 솔직한 수다와 농담들은, 매우 감각적이고 가볍고 유쾌하고 달콤하지만, 이 달콤한 정이현식의 야한 수다들은 그것으로 족하진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테지만, 이 두꺼운 달콤한 수다를 쭉 훑어본 뒤에는 '사랑이란?' 이 머리 속에, 가슴 속에 남는다. 깔깔 큭큭 재밌게 읽은 뒤에 남는 것은 나의 과거에 지나갔던,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그녀들에 대한 생각과, 지금 나를 사랑하는, 내가 사랑하는 그녀에 대한 생각. 아 좋다. 정말 좋다. 기분이 꿀꿀하고 우울해지는 날, 연애와 사랑으로 가슴앓이하는 날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다시 또 생각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