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 - 전2권 세트
발터 뫼르스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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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터 뫼르스란 작가를 알게 된 것은 차모니아 4부작 중 <꿈꾸는 책들의 도시>를 통해서였다. '책'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환타지 소설을 쓴 것도 신기했지만, 그 내용 또한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네 책방의 환타지  소설과는 그 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런 책은 처음이었다. 그 때의 그 신선함이란. 차모니아 4부작 중 또 한편이 번역되었다.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 발터 뫼르스는 역시나 이 책에서도 독자들의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만들어준다. 아직 읽지 않은 차모니아 4부작의 나머지 작품들에도 흥미가 가는 것은 지금 읽은 두 작품이 내게 안겨준 신선한 자극에 기인한다.

  발터 뫼르스의 환타지를 즐기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다. 처음에 지루하다고 해서 포기하지 말 것. 에이 이게 머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너무 등장인물들이 많아서 적응하기 힘들어, 등등등의 불만들. 사실 그렇다. 900쪽이 넘는 이 방대한 분량의 환타지는 초반에 등장인물의 캐릭터 묘사와 배경, 환경에 대한 역사적 개괄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일종의 지금까지 우리가 머리 속에 지니고 있던 모든 사물에 대한 편견을 지우는 작업이다. 집은 당연히 출입문이 있고, 안에 들어가면 화장실과 방과 부엌이 있을테고, 환기를 위해 창문도 있겠지, 사람이란 눈 두개, 코 하나, 귀 두개, 입 하나, 그리고 목, 머리, 몸땡이, 팔 다리로 이루어진 동물이지, 돼지는 꿀꿀 거리며 밥을 많이 먹는 코가 납작한 귀가 쫑긋 서고 짧은 네 다리는 짧아서 뒤뚱뒤뚱 거리는 그런 동물이지, 등등의 이런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발터 뫼르스의  소설을 읽음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설 초반의 그런 길고 긴 새로운 등장인물과 환경, 역사에 대한 설명 부분을 인내를 가지고 읽을 필요가 있다.

  초반의 인물묘사를 지나고 나면 이야기는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 왜냐면 이미 우리의 머리 속엔 백지 상태에서 소설읽기에 꼭 필요한 지식들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 제대로 익히고 나면 이야기는 매우 재밌게 진행된다. 간혹 우리가 지워버린 우리의 일상의 지식의 흔적들이 새로운 등장인물의 생김새와 행위묘사에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한다. 아 뭐야, 그때 나왔던 바로 이 놈은, 현실 속의 이 동물이잖아! 하하하. 뭐 이런 즐거움 이랄까.

  루모는 볼퍼팅어 종족이다. 마치 우리가 알고 있는 쉽게 볼 수 있는 그 동물과도 생김새가 닮아있는 이 녀석은 우리처럼 학교에서 국어, 수학 수업도 받고, 검도와 복싱 등의 무술 훈련도 받는다. 꼬마 녀석, 아직 이성에 눈뜨지 않았다. 여자와 남자가 어떻게 다른지, 왜 그런 구분이 필요한지 그에겐 인식이 없다. 그러다 필 꽂혔다. 아 이쁘다. 소설의 제목 <루모와 어둠 속의 기적>에서 볼 수 있듯 주인공 루모는 볼퍼팅어 종족을 위해 뭔가 대단한 기적과 같은 일을 해낸다. 위기상황마다 잠재된 능력을 발휘하며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그들을 구원해내는 그는,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영웅은 아니다. '앉으나 서나 언제나 당신 생각'이지만 그녀 앞에서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이 녀석, 고백해 고백해 사랑한다고, 너를 좋아한다고. 그러나 쉽게 고백하면 재미 없잖아. 어렵게 어렵게 힘들게 나오는 그 한마디를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볼퍼팅어라면 누구나 은띠를 찾아 헤맨다. 은띠는 바로 여기있다. 뭔가 대단한 보물단지가 아니다. 너의 마음 속에 있다. 이제 한 명(?)의 볼퍼팅어가 되어 소설에 빠져들 일만 남았다. 자 당신은 이제 볼퍼팅어다.

  하나 더. 신비스럽고 재미난 차모니아 4부작을 엮어낸 작가 발터 뫼르스는 독일에서 온전히 공교육의 테두리 안에서 자라나진 않았다. 그는 고 2때 학교를 자퇴하고선 이런저런 일들을 전전하다 만화가, 작가의 길을 걸으며 성공한 인물이다. 정규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그가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어쩌면 제대로 된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아직 날이 어둡거나 추운데도 집을 나서야 하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에 학교를 중퇴했노라 말했다. 그는 스스로 "순수한 상상이라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현실에서 자극을 받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리얼리스트다"라고 말하며, 이 같은 대작을 쓸 수 있었던 자신의 상상력의 풍부함을 '일상적인 현실'의 공으로 돌리고 있다. 그렇다. 작가는 현실 세계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뭔가를 창출해 내는 인물이다. 작가가 사는 세계도 독자가 사는 사는 세계와 다르지 않고, 결국 같은 환경에서 같은 사물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간접적으로 나마 상상력의 풍요를 느끼고 싶다면 여지 없이 이 책을 손에 들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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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엘리자베스 히키 지음, 송은주 옮김 / 예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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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저기 클림트 열풍이다. 요 몇년전부터 시작된 클림트의 인기는 최근 개봉한 영화 <클림트>를 통해 꾸준한 상승세를 타고 있다. 클림트에 관한 책들도 많이 나왔다. 그간 나왔던 작품집이나 캘린더 말고도 2005, 2006년에 새롭게 나온 책들만 해도 '클림트'라고 검색했을 때 나오는 리스트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대략 그게 관한 책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2001년 정도로 볼 수 있다. 유일하게 딱 한권 만이 1998년 출간이다. 그러니 2001년부터 시작된 그의 인기는 2006년인 지금까지 장장 6년에 걸쳐서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클림트로 검색했을 때 가장 많이 팔린 책은, 다빈치에서 나온 <클림트, 황금빛 유혹>이지만 2002년에 출간되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2006년 5월에 출간된 예담의 <클림트>가 가장 빠르게 독자의 손에 들어가는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책은 예담에서 나온 <클림트>이며, 이 책의 판매량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하려한다.

  클림트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은 선택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이 책은 클림트의 진짜 생애도, 작품 세계도, 그와 관계한 여성의 삶도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아니 거꾸로 오히려 이 책은 그 모든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책의 저자가 밝혔듯이 소설이다. 이 책은 소설 <클림트>이다. 작가의 머리 속에서, 작가가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해서 그의 생애를 허구의 세계 속에서 재현해본 것이다. 티비에서 실제 범죄 사건을 재현한 드라마라고 이해하면 될 듯 하다. 하지만 재현 드라마는 가상의 실제를 보게 해주긴 하지만 어느 것도 정확히 알려주지 못한다. 더군다나 이 소설은 가상의 실제를 그대로 재현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추측성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만으로 엮어 인물 클림트와 같은 책을 내는 것이 그를 제대로 알길 원하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소설 간간히 삽입된 그의 그림과 그에 대한 가상의 설명은 그나마 이 책에서 뭔가를 얻을 수 있는 작은 부분이다. 본문을 보느니 차라리 중간중간 끼어있는 이 부분을 보는 것이 훨씬 낫겠다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한정되어있고, 한정된 시간 내에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하는 고민은 늘상 있기 마련. 한권의 책을 고르더라도 지적인 희열을 주든가, 확실하게 웃음을 선사하든가, 아니면 내면에 침잠하여 나를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주거나 기타 등등의 어떤 확실한 무엇인가를 제공해주어야 할텐데, 이 책은 그 어떤 것도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실패작이다. 영화 <클림트>를 보고 그에 대해 알고 싶어 손에 쥔 책이었으나 내게 아무런 도움이 주지 못한, 시간만 빼앗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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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7-13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깃, 했는데 그랬군요. 유명세를 타서 어처구니 없는 내용을 엮는 것만큼 황당한 것도 없지요? 그런데 클림트는, 99년, 2000년만 해도 자료가 한국에는 그닥 없더니 월드컵을 전환점으로(월드컵과는 무관하겠지만 시기가 그래요) 여기저기 책들이 많이 나오는 추세입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여기저기서 클림트가 나오는걸까요.

마늘빵 2006-07-13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와 친밀한 한 분은 그의 그림 중 하나가 경매가 최고치를 기록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이야기합니다만, 글쎄요. 정확한 원인을 모르겠어요. 클림트에 관한 책 다 검색해봐도 사실 그래요. 그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어쩌면 이 책도 읽는 이에 따라서는 느낌이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전 사실이 아닌 것을 마차 사실인양 꾸미고 조작해서 실제했던 '그'를 만들어내는 거 같아 불쾌했어요.

하늘연못 2006-08-17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지족 2009-06-18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어쩐지 쪽수가 많더라니... 사진은 몇장인지 알려주지 않구!
 
장미의 이름 읽기 - 텍스트 해석의 한계를 에코에게 묻다
강유원 지음 / 미토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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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장미의 이름>과 관련해서 봐야 할 책들로 저자 움베르트 에코가 직접 쓴 <장미의 이름 창작 노트>와 더불어 이 책을 손꼽을 수 있다. <장미의 이름 읽기>라는 이 책은 철학박사 강유원이 쓴 것으로, 그는 젊은(?) 시절부터 소설 <장미의 이름>에 대한 텍스트 읽기 모임을 통해 꼼꼼히 검토해왔다. 그리하여 <장미의 이름>의 저자 이윤기씨의 최초 번역본의 문제를 지적했고, 재차 번역함에 있어서 오류를 수정할 수 있게 도와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 강유원 씨가 그에 그치지 않고 <장미의 이름 읽기>라는 책까지 내놓았다.

  '텍스트 해석의 한계를 에코에게 묻다'라는 부제를 안고 있는 이 책은, <장미의 이름>에 대한 수많은 개인들의 자의적인 해석에 대한 경고와 논리적 사유 태도를 가지고 텍스트를 대할 것을 강조하는 강유원씨의 <장미의 이름>에 대한 사유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에코는 <해석의 한계>라는 책을 통해 "텍스트가 합리적 개념 규정과 그 규정에 따른 논리적 배열에 따라 해석되어야 할 것임을" 강조했다. "생동하는 세계에 대한 해석을 내놓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면 적어도 텍스트와 텍스트의 대화만이라도 제대로 해내는 게 학문하는 이들의 과제임을 이러한 경고와 요구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것이며, 모든 텍스트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면 학문적인 생산은 물론 일상적인 의사소통까지도 불가능해진다" 강유원은 이어 "<장미의 이름>은 논리적 사유 태도를 가지고 읽어야 할 텍스트"라고 이야기한다. 이미 완결되어 독자 앞에 던져진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은 독자 개인의 몫이지만 텍스트를 해석하는데 있어도 나름의 법칙과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텍스트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하여 텍스트를 아무렇게나 찢고 이어붙이고 하며 만신창이로 만들어놓는 세태에 대한 강유원씨의 경고라고나 할까. 이 책은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 <장미의 이름>에 대한 해석의 문제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책은 아닌게다.

  강유원은 소설 <장미의 이름>의 목차에 따라 살펴보며, 각각의 장면들에서 부연설명이 필요한 부분들, 그리고 제대로 해석하기 위한 조언을 서술해나가고 있다.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부연설명이나 각 장에서 살펴볼 수 있는 주제에 대한 사유들을 펼쳐나간다. 소설 <장미의 이름>만으로 부족한 이들을 위하여, 또 소설이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한 좀더 깊은 사유를 원한다면 에코의 <장미의 이름 창작 노트>와 강유원의 <장미의 이름 읽기>를 순서대로 일독하길 권한다. 더불어 영화 <장미의 이름>도 함께 본다면 두배의 재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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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창작노트 - 양장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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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자는 자기 작품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해석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소설을 쓰지 말 일이다. 소설이라는 것은 수많은 해석을 발생시키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가 작품을 해석하지 않는다는 이 고결한 원칙을 지키는 데엔 한 가지 장애가 있으니 그것은 모든 소설에는 제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움베르트 에코는 자신이 쓴 <장미의 소설>이라는 소설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과 의문이 난무하자 이에 도움을 주고자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라는 책을 써냈다. 그러나 그가 말했듯이 작가는 자기 작품을 해석해서는 안된다.이미 완결한 소설은 하나의 텍스트로서 독자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것은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다. 독자는 내던져진 텍스트를 접하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파악하고 해석한다. 많은 독자들이 동일한 텍스트를 접하기 때문에 내용에서 빚어지는 커다란 견해차이는 없겠지만 이 소설은 충분히 많은 질문을 독자에게 던져놓았고, 독자 스스로 그것을 생각하도록 열어두었다. 논쟁이라고까지 할 건 없지만 해석의 여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셈이다.

  작가가 유일하게 텍스트에 해석을 가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에코가 지적했듯 소설의 '제목'이다.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많은 의문을 불러왔다. 왜 제목이 장미의 이름인가. 장미가 가지고 있는 서양 중세의 여러가지 의미와 또 '장미'가 아닌 '이름'에 부여되는 해석학적 문제들. 그것을 도라 이름 불렀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도가 아니다, 와 같은 문구도 이름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 터. 셰익스피어는 "이름은 별 것이 아니다. 사물의 본질 그 자체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라고 한 바 있다. 베르나르도 "어떤 사물에 제멋대로 붙여진 딱지에 지나지 않는다." 라며 셰익스피어의 견해와 같이 하고 있다. 장미의 이름에서 '장미'는 덧없다. "강력하고 매력적이고 마력적인" 이름 '장미'. 그것 역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미의 이름'이란 어쩌면 이름의 덧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런지. 사물은 제 각기 이름을 가지고 있다. 책상은 책상이요, 연필은 연필이요, 하늘은 하늘이지만, 그것은 갓 태어난 개새끼에게 '뚱띠' 와 '아롱이'라고 이름 붙인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하늘을 밥이라 하고, 밥을 똥이라 하며, 똥을 선물이라고 한다면 일상생활에서 언어소통의 어려움의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그것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름의 덧없음'과는 또다른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 어찌 되었건 이미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그 자체만으로 많은 해석의 문제를 불러왔다. 작가는 벌써 이렇게 제목을 통해 작품에 해석을 가하고 제목에 대한 해석의 논의를 끌어냄으로써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텍스트는 그 자체로 독자에게 던져져야한다. 제목은 어쩔 수 없다해도.

   작가의 텍스트에 대한 침묵은 독자에게 텍스트를 잘못 해석할 기회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텍스트를 잘못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런지도 모른다. 애초에 '잘' 과 '잘못'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것의 차이가 있다면 이는 이미 텍스트의 해석에 대한 정답이 따로 존재한다는 전제를 바닥에 깔게 된다. 독서란 바로 이것이다. 텍스트의 해석. 하나의 소설이 엄청나게 많은 독자의 손에 쥐어지고 독자는 각자 소설을 읽으며 나름의 의미를 찾는다. 즐긴다.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해석, 그것이 바로 '독서'다. 에코는 그렇게 말한다. "작품이 끝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 죽음으로써 그 작품의 해석을 가로막지 않아야 한다"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 대한 <장미의 이름 읽기>라는 책을 내놓았지만, 이것은 해석의 차원에서 낸 것이 아니다.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토록 하기 위해 낸 책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텍스트에 대해 모범 해석을 내놓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잘'과 '잘못'은 생성된다. 하지만 에코의 이 작업은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이해를 '제대로 시키기 위한 것'과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정답을 상정한 데 비해 후자는 그저 각자의 해석에 풍부한 자료를 제공할 뿐이다. 이 책은 <장미의 이름>을 읽고 난 뒤에 쏟아지는 수많은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위한 책이다. 그러나 해석은 하지 않고.

  제목과 의미, 집필 과정의 기술, 중세, 가면, 누가 말하는가, 행보, 독자, 소설의 재미 등등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나 과정,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여러 주제들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장미의 이름>을 다 읽고 난 뒤, 많은 의문점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이 책을 집어들 수 밖에 없으며, 이 책은 충분한 대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곁가지 이야기들을 제공함으로써 더 깊은 사색의 장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것은 추리소설이자 역사소설이자 철학소설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는 이 책으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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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7-13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해석의 즐거움도 가치가 있겠지만요, 저같은 독자는 어려운 책은 이렇게 저자가 뭔가를 내놓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요. 제가 옳게 읽은 건지 헷갈려서 말입니다&&
 
장미의 이름 - 상 - Mr. Know 세계문학 15 Mr. Know 세계문학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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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어보지는 않았어도 책 제목만큼은 못들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추리소설이다. 그러나 이토록 무게감 있고 가벼이 보지 못할 추리소설도 따로 없을 것이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 소설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고, 이 책을 산 사람이 많아도, 이 책을 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는 감독이 영화를 설명하며 그런 말을 했다. 사실 이 소설에 등장하지도 않는 부분(영화에만 있는)에 대해서 움베르트 에코에게 편지를 써서 그 부분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고 말 한 독자(?)도 있었다고 한다. 영화 <장미의 이름>은 봤어도, 소설 <장미의 이름>은 사놓고 보지 않은 것이다. 영화와 소설이 정확히 일치 하지 않으니 원작 소설을 보지 않은 채 영화만을 가지고 <장미의 이름>을 논하는 것은 위험하다.

  세계적인 지성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히는 움베르트 에코. 그는 정말 천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다재다능하다. 엄청난 지식을 소화해내고 많은 글을 생산해내는 다작가이지만, 글의 질적인 측면에서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글을 쓰는 작가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한 권의 책을 내놓는 부류가 있고, 글쓰기를 글읽기 하듯 다작을 하는 부류가 있다. 아무래도 전자의 글은 좀더 깊이가 묻어나게 마련이고, 후자의 글은 깊이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움베르트 에코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솜씨를 보인다. 유럽의 유명 언론에 칼럼을 쓰는가 하면, <장미의 이름>과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남기기도 하고, 본업인 기호학자로서의 이론가이기도 하며, 동시에 철학과 문학과 역사와 미학의 전문가이며 이 분야에서도 많은 글을 토해내고 있다. 중세철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컴퓨터도 잘 다룬다. 더불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는 물론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까지 능숙하다. 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학자다. 그가 쓴 책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번역되어 있다.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논문 작성법 강의> <미의 역사> <소크라테스 스트립쇼를 보다> <포스터 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철학의 위안> 등 일일히 언급하기도 힘들 정도다.

   <장미의 이름>은 그의 여자친구의 권유로 재미삼아 시작해 본 작품이다. 누구는 재미삼아 쓴 작품이 이 정도이니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고. 본래 그는 이 이 작품의 제목을 <장미의 이름>으로 잡지 않았다. <수도원 살인 사건> <아드소의 수기> 와 같은 혹은 그와 비슷한 제목을 붙이려다 갑자기 떠오른 것이 <장미의 이름>이었다. 제목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그것이 주는 어떤 비밀스러움과 중세적인 분위기가 소설을 대표할 수 있다고 믿었던게다. 서양에서 '장미'는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장미 전쟁>에서의 장미, <그대는 병든 장미> 에서의 장미,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는 장미이다>에서의 장미, <장미 십자단>에서의 장미 등등. 후에 제목을 붙이고,  베르나르의 '속세의 능멸을 위하여'의 싯구절 '어디에 있느뇨'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에코는 밝힌 바 있다. 아벨라르는 '장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통해, 언어가 ㅔ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존재했지만 사라진 것을 드러내는지 설명했다. 제목을 붙이고 나니 <장미의 이름>에서의 '장미'의 존재는 매우 알쏭달쏭한 하지만 한편으로 깊은 의미를 지닌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에코가 우연히 접하게 된 어떤 중세의 책자가 이 소설의 발단이었다. 그는 실제 기록된 사건을 토대로 하여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여나갔다. 중세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당연히 중세를 배경으로 한 수도원 살인사건의 소설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고, 라틴어 지식 등 그가 가진 다른 재능들도 이곳에 집적되었다. 그 누가 이런 소설을 쓸 수 있겠는가. 에코가 아니면 안된다. 이 소설 속에는 중세 수도원의 분위기와 역사, 그리고 아리스텔레스의 시학에 관한 내용 등 풍부한 지적경험이 녹아있다. 하나의 어려운 고대, 중세의 철학자의 1차 서적을 읽는 듯 어렵기도 하다. 무슨 소설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앞부분의 그 역사와 배경에 대한 길고 긴, 지루하기까지 한 글은 출판사에서 잘라내자는 제의까지 했으나 에코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장면이 없다면 소설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덕분에 독자는 900쪽에 달하는 두 권 짜리(한글판)의 지루하고 어려운 소설을 읽어야만 했다. 이 책을 내가 접한 것이 이번이 두번째. 처음 접했을 땐 도통 무슨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용 파악 조차 하기 힘들었다. 중세에 대한 지식도, 고대에 대한 지식도 가진 것이 없는 채로 이 지적고통과 지루함을 안겨주는 소설을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다 읽긴 했다만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는 그런 경험이었다. 지금은 다행히 '완전히' 라고는 못하지만 내용파악과 그 의미를 해독했다고 생각한다. 추리소설을 읽으며 이것을 '즐김'의 대상이 아닌 '해독'과 '이해' 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우습지만.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윌리엄 수도사. 그는 매우 근대적인 사람이다. 안경과 나침반을 사용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 위에 사건을 조사하며, 이성을 사용한다. 하지만 수도원의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그와 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믿음, 신, 구원 등 철저히 기독교적 교리에 의한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사건을 바라본다. 그 극단에 있는 이가 베네딕트 수도회의 베르나르 귀이다. 화려한 언변과 찍 소리 못할 카리스마로 순식간에 한 수도사와 여인을 악마와 마녀로 둔갑시키는 그에게 아무도 대적할 수 없다. 사건을 바라보는 또다른 인물 아드소. 아직 10대인 아드소는 윌리엄 수도사를 따라다니며 세상을 배운다. 이 소설은 이 어린 아드소가 어린 시절 윌리엄 수도사의 곁에서 겪었던 사건을, 윌리엄의 나이가 되어 과거를 회상하며 서술한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

  다양한 측면에서 이 책을 바라 볼 수 있다. 이성과 신앙, 과학과 종교, 중세 수도원의 역사와 갈등, 마녀재판, 금해야 할 것과 금지된 것들, 책의 가치, 도서관의 역할, 사랑, 지식, 기호와 텍스트, 사물의 본질, 앎과 지식 등등.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사색하려면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매번 반복되는 독서를 해야 할 터이다. 너무나 많은 주제들이 집적되어 일일히 다 살피지 못하는, 수많은 지적체험으로,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뭔가 뿌듯하면서 머리가 가득찬 느낌과 동시에 아무 것도 알게 된 것이 없는 듯 벙찐 모습을 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매력이다. 두 권의 이 책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직도 그 때의 그 느낌이 묵직하게 나를 눌러온다.

 

 ***
 1. 신화학자 이윤기 씨는 이 책을 86년 처음 번역하고, 이후 여러차례 손을 보며 재차 번역을 하며 틀린 부분을 고쳤다. 또 이윤기 씨의 이 수고에는 철학자 강유원의 도움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이 텍스트를 공부하며 원전번역의 잘못을 지적한 책자를 만들어 출판사 측에 전달해줬고 이윤기 씨는 이를 바탕으로 번역을 시도하였다.

 2. <장미의 이름>을 통해 철학공부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도 재밌는 작업일 듯 하다. 기호와 텍스트의 측면에서 해석학을, 또 소설의 사건의 중심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또 소설의 배경이 된 중세 기독교와 철학을 신학을, 또 이성과 신앙, 과학과 종교의 관점에서 과학철학과 신학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을 듯 하다. 900장 짜리 두 권이라는 책이 주는 무게감은 이 소설 속에 들어있는 갖가지 지식의 양념이 주는 무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터이다. 다른 묵직한 책보다 이 두 권의 책을 바라봤을 때 느껴지는 무게감은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일게다.  

3.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때는 내가 좀더 내 머리 속에 철학지식이 쌓여있기를, 그리고 이를 토대로 많은 철학적 고민들을 했길 기대한다. 미래의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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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몇 구절을 첨부한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이 없더라." (서문) (상권 p23) 

들판에 가을이 오면 꽃이 시들어 꽃대에서 사라져 버리듯이, 인간 또한 그렇게 사라져 버릴 터인즉, 인간의 외양만큼이나 덧없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느냐 (보에티우스) (상권 p37) 

진정한 앎이란, 알아야 하는 것, 알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야. 알 수 있었던 것, 알아서는 안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 윌리엄 수도사) (상권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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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마니아 2006-07-12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호 이윤기 씨가 번역한 거였군

치유 2006-07-13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보니 다시 떨림이 있네요..참 두근 거리며 봤던 몇년전의 기억이예요..특히 장서관 살필때는..저도 다시 한번 읽어 봐야 겠어요..

마늘빵 2006-07-13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촬리 / 응 이윤기 씨 번역. 86년 초판때는 오류가 많았다는데 지금은 다 개선됐다지.
배꽃님 / ^^ 아 정말 어렵게 재밌게 읽은 책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집적되어있었어요. 철학적 주제들, 중세의 숭고하고 비밀스런 분위기, 아리스토텔레스, 책, 도서관 등등. 나중에 다시 보고 싶어요.

체다카 2006-08-25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윤기씨 유명세에 비하면 번역이 영 맘에 들지 않았어요. 이단논쟁 부분이나 주석 그리고 전체적인 번역문체상의 껄끄러움이 많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시간이 나면 꼭 영역판이라도 구해 읽고 싶은 책이랍니다. 구경 잘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