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논문작성법
고려대학교 출판부 엮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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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느덧 2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고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논문을 써야하는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지난 학기부터 느껴왔던 부담감은, 좀처럼 그 무게를 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한번 필 받으면 쭉쭉 밀고 나가겠다는 나의 계획은, 한달 두달 시간만 축내며 마지노선을 향해 간다. 딱히 무엇을 써야겠다는 어떤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시점에서 논문은 매우 부담스럽다. 그저 졸업을 위한 힘겨운 코스로서 마주할 것인가, 아니면 문제의식을 토대로 밑바탕 작업을 끝낸 후에 논문을 쓸 것인가. 당연 후자가 바른 선택의 길이겠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후자의 선택은 졸업 시기를 늦추는 결과를 불러온다.

  어쨌든 논문은 써야겠고, 대략 무엇에 대해 쓰겠다는 생각도 있지만,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는 나로서는 퇴근 후의 시간들은 달콤한 휴식으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매일매일이 이러니 언제 책을 보고, 언제 글을 쓰겠느냐. 핑계라면 핑계고, 이유있는 항변이라면 항변이다. 일단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대략 어떤 작업을 할 것인가를 계획해야 할 것이고, 그 순서에 맞추어 야금야금 진행해야 할 것이다. 

  고려대학교에서 나온 <새로운 논문작성법>은 나름 이에 충실한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논문쓰기를 앞두고 무엇을 해야할지 막막한 이들을 위해, 또 구체적인 어떤 작업을 해야할 것인지 모르겠는 이들을 위해, 논문작성방법을 익히려는 이들을 위해 적합한 책이다. '논문'은 학문은 하는 이들이 익혀야 하는 글쓰기의 규칙을 담고 있다. "논문이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학문의 발전에 공헌하고, 나아가 인류의 지식의 총화에 무엇인가 보탬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는 문구에도 작게나마 충실해야 할 것이지만, 업적을 내건 그렇지 않건 논문은 학문을 하는 이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글쓰기의 과정이다.

  전공 교수님 한분은 십수년 논문을 작성하다보니 이제 나름대로의 비법이 생겼다고 하시지만 논문을 처음 쓰는 이로서는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없다. 부담감을 덜어내기 위해서는, 첫째, 내 스스로가 만족하는 논문을 쓸 것, 둘째, 인터넷에 내놓아도 얼굴 빨개지지 않을 정도의 질은 담보할 것, 의 조건을 충족시켜야한다. 이 정도만 되어도 성공이라고 하겠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논문은 네 가지의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정확성, 객관성, 검증가능성, 가독성. 정확성은 논문에 실리는 통계나 인용된 인명, 표제 등등이 정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문 내용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선이라 할지라도 이런 부분에서 정확하지 않으면 논문에 대한 신뢰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한글맞춤법에 맞게 쓰는 것은 물론이고, 점 하나까지도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  "객관성은 사실과 증거가 논문을 뒷받침해야 하고, 집필자의 주관적인 견해나 자료가 바탕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편견, 선입견, 감정은 금물이요 오직 진리를 위해 성의껏 작성해야 한다. 검증가능성은 다른 이가 이를 재현할 수 있도록 기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출처, 방법, 주제에 대한 접근방법 등이 명시되어야 한다. 가독성은 간결하고 명료하게 읽기 편하도록 작성해야 함을 의미한다. 

  대략 이러한 요건들에 충실하게 작성되면 글쓰기의 면에서는 무리가 없다 하겠다. 유념해야 할 것은, 이것은 권유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라는 점이다. 작성요건 뿐 아니라 이 책에 나와있는 출처 다는 법, 각주 작성, 인용법 등등의 모든 내용은 논문작성의 필수다.  모든 해당 항목에 충실했을 때 논문은 최소한의 논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되며, '좋은 논문'을 쓰는 것은 작성하는 개개인에게 달려있다. 작성법을 어느 정도 익혔다면 이제 펜을 들자.  

 * 이 책의 저자는 '고려대학교 출판부'로 되어있는데, 확실한 저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설마 출판부 직원들이 쓰지는 않았을테고, 그렇다면 누가. 96년에 나온 <논문작성법>을 토대로 하여 보완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의 저자도 역시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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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4-14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해 지네요.. 이런 종류의 책 몇권 봤는데, 에코의 책만한 것이 없던데.. 정말 구체적 논문 작성에 도움이 되나요? ^^

마늘빵 2007-04-15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코 책 저도 봤는데, 가물가물해요. 이 책 참고문헌에 에코 책도 포함되어있더군요. 서울대 논문작성법 책이랑 이화여대 책도 참고문헌에 있던데요?

BRINY 2007-04-15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히 무엇을 써야겠다는 어떤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시점에서 논문은 매우 부담스럽다.->무척 공감가는 말이여요. 저는 3번재 쓰는 논문인데도 어째 점점 아이디어와 열정은 고갈되어 가는 중...자격증 따려고 시작한 공부라서 그런가봐요.

다락방 2007-04-1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대학 졸업논문 쓸 때 정말 너무 너무 신경을 써서 말이죠. 그렇다고 잘 썼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이책저책 짜집기를 했더랬어요. 정말 부끄러운 논문이었죠. 제가 그때 이 책을 읽었다면 논문을 잘 쓸 수 있었을까요? 흐음. 논문, 정말 싫어요.

마늘빵 2007-04-16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브라이니님 / 세번째 논문이라고요? 헙. 그렇담 대학원을 세개요?
다락방님 / 저도 그리될 공산이 높습니다. -_- 그럼 안되는데. 쩝.
 
지식을 위한 철학통조림 - 고소한 맛 1318을 위한 청소년 도서관 철학통조림 4
김용규 지음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9월
구판절판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빠진 미성숙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숙함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무능력함을 말한다. 이것의 원인은 이성의 부족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결단과 용기의 부족함에 있다. 때문에 이러한 미성숙은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용기를 가져라! 자신의 고유한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야말로 바로 계몽의 좌우명이다."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中-17쪽

첫째, 참된 지식의 근거를 이성에 두었다는 것. 둘째, 직관에 의해 얻어지는 제일원리를 인정한다는 것. 셋째, 제일원리로부터 모든 참된 지식을 차례로 연역해 내는데, 그것들이 결국 하나의 정합적인 체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공통점)-22쪽

첫째,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나온다. 둘째, 우리의 정신 안에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본유관념이나 원리는 없다.
(로크, 버클리, 흄의 공통점)-22쪽

우리는 오직 경험을 통해 사물에 대한 감각들을 받아들이는데, 그 감각들이 텅 빈 우리의 정신에 반영된다. 그 결과로 우리의 정신이 얻는게 사물에 대한 관념인데, 이것이 우리가 외부 세계에 대해 아는 지식의 전부이다.
이것은 우리가 마치 '사과'하나를 거울 앞에 가져다 놓으면 그 사과가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우리의 정신이라는 거울은 자신에게 비친 사과를 관념으로 얻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의 정신을 '빈서판'보다는 '빈거울'에 비유하는게 더 나을 것 같다.
(로크, 버클리, 흄의 공통점) -25쪽

"우리는 관념을 가지는 것 외에 어떤 지식도 가질 수 없다." (로크) -25쪽

"경험에 의거한 어떠한 논증도 과거와 미래 사이의 유사성을 증명할 수 없다" (흄)-29쪽

우리의 모든 지식은 판단의 형식을 취하며, 판단에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 두 가지가 있다.
분석판단이란 '모든 물체는 연장(공간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는 물체의 성질)을 갖고 있다.' 나 '삼각형은 세 변을 갖고 있다'와 같이 술어 개념이 이미 주어 개념에 포함되어 있어서, 경험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오직 주어진 개념의 분석만을 통해 술어 개념을 이끌어낼 수 있는 판단이다. 때문에 분석판단은 선천적으로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진다. 술어가 주어를 설명한다고 해서 '설명판단'이라고도 부른다.
종합판단이란 '모든 물체는 무게를 가진다' 나 '이 사과는 빨갛다'와 같이 술어 개념이 주어 개념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내릴 수 없는 판단을 말한다. 이런 판단은 후천적이며 당연히 개별성과 우연성을 갖고 있다. 술어가 주어에 새로운 개념을 더한다고 해서 '확장판단'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니까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는 분석판단이지만, '나의 이웃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는 종합판단이다.
(칸트의 인식론 정리)-30-31쪽

과학과 수학의 판단들이 수학의 판단들처럼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지려면 결국 '선천적'이어야 하며, 우리의 경험과 맞아떨어지려면 '종합판단'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식이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지면서도 경험과 맞아 떨어지게 하는 방법, 즉 우리의 지식이 이성과 경험 모두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 둘을 종합하여 지식이 '선천적 종합판단'이 되게 하면 된다. -32쪽

"인간의 인식에는 단지 이 두개의 근본적인 줄기만이 있다. 이 줄기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뿌리에서 발생했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감성과 오성이다. 감성에 의해서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며, 오성에 의해서 대상이 사유된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34쪽

감성이란 우리의 정신이 감각(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등)을 통해서 대상들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오성이란 감성을 통해 받아들인 내용들을 정리하여 개념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34쪽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그러므로 '개념을 감성화하는 것'(즉, 개념에 의해 그 대상을 직관에 부여하는 것)은 '직관을 오성화하는 것'(즉, 직관을 개념 아래 넣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 이 둘의 종합에 의해서만 인식이 나올 수 있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36쪽

참된 지식은 이제 '실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정신이 구성한 '현상에 대한 지식'이다. 즉 객관적 지식일 뿐이다. -46쪽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질서와 규칙성은 우리 자신이 집어넣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혹은 우리의 마음이 질서와 규칙성을 집어넣지 않았더라면 이것들은 자연 속에서 발견될 수 없을 것이다."
(칸트, <순수이성비판>)-51쪽

모든 지식은 '사실을 통해 입증', 곧 실증되어야 한다. 따라서 실증할 수 없는 종교적 또는 형이상학적 지식은 무의미하다. 또 지식의 목적은 진리를 알아내려는 데에 있지 않고,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데에 있다. 때문에 우리의 지식은 이론적으로 무한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비트겐슈타인과 검증주의 中) -82쪽

"우리는 과학적 세계 파악을 두 가지 모습에 의해 본질적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첫째는 경험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이다. 지식은 오히려 경험에서 유래한다. 경험은 직접 주어진 것에 의존한다. 경험이 정당한 과학 내용의 범위를 정한다. 둘째로 과학적 세계 파악은 특별한 방법, 곧 논리적 분석으로 특징지어진다. 과학적 노력의 목표는 논리적 분석을 경험적 질료에 적용함으로써 통일과학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 <비엔나 학단의 과학적 세계 파악> 中)-89쪽

"한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 명제를 '참'으로 만드는 특별한 상황과 '거짓'으로 만드는 특별한 상황을 정확히 지적할 수 있어야만 한다. '상황'이란 경험의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경험이 명제의 '참'과 '거짓'을 결정한다. 즉 경험이 명제를 검증한다."
(슐리크, <경험의 새로운 철학> 中)-93쪽

"철학적인 사항에 관하여 씌어진 문장과 질문의 대부분은 거짓이 아니라 비의미하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질문에 우리는 도대체 대답할 수 없고, 단지 그것들의 비의미성을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 <논고>, 4.003) -94쪽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사실의 그림을 그린다. ...... 그림은 실재의 모형이다. 그림에서 그림의 요소들이 대상들에 대응하낟. 그림은 그 요소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림은 사실이다."
(비트겐슈타인, <논고> 2.1-2.141) -97쪽

"세계는 모두 사례들이다.'
"세계는 사물들의 총합이 아니고 사실들의 총합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논고> 中)-102쪽

사회다윈주의는 다윈의 진화론의 두 가지 원칙, 즉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사회학에 받아들임으로써 탄생한 이론이다. 즉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경쟁을 통해 사회적으로 부적합한 사람들, 예컨대 장애인이나 정신병자 또는 극빈자들 같은 사회적 약자 등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131쪽

포퍼는 어떤 설명적인 보편적 과학이론도 검증(또는 귀납적 방법)에 의해서는 그 무한정성 때문에 완전히 증명될 수 없지만, 그 반증은 가능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반증이란 단 하나의 '반대적 사례'에 의해서도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137쪽

데카르트가 시를 뿌리고 칸트가 거둔 합리적인 열매인 '객관적 지식'이라는 말은 '언제 누가 보아도 그렇다고 인정되는 지식'을 뜻한다. "빨간 사과가 실제적으로 빨간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우리는 모두 그것을 빨갛게 인식한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이 사과는 빨갛다"라는 내 생각과 달리 "이 사과는 파랗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자. 그러면 나는 당연히 그가 틀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객관성을 믿는 합리적 인간에게 '다르다'는 것은 곧 '틀리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 선의에서라도 - 그것을 바로잡아 옳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합리성->객관성->획일화->지배'라는 연결고리로 이어지는 근대성의 특징이다.-169쪽

"진리란 과연 무엇인가? 유동적인 한 무리의 은유, 환유, 의인관들이다. 간단히 말해서, 시적 수사학적으로 높여지고 위엄 있게 치장하고 장식되어 이를 오랫동안 사용한 종족에게는 확고하고, 교훈적이고,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적 관계의 총체이다. 진리는 환상이다."
(니체,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허위에 대하여>)-170쪽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연구할 때에 현재의 관점, 곧 과거에서 본다면 '사후적 관점'에서 과거를 이해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다. 우선, 현재의 유리한 관점에서 과거 과학자들의 사상을 뒤돌아본다면, 그 사상이 본래 가진 본질을 그대로 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하게 된다. 더욱 나쁜 것은,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엉뚱하게 생각했나?' 와 같은 생각을 갖게 되어 현재의 과학지식이 그 전 시대의 것보다 더 우월하다는 생각과 역사가 어떤 획일적인 방향으로 진보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쿤의 '아하체험'을 통해 알아낸 사실)

-172쪽

포퍼는 실용주의는 '참'과 '유용성'을 혼동하고 있다고 했고, 러셀과 무어는 '거짓'도 때로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참'도 경우에 따라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서, 이 이론은 도덕적으로도 반대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우둔하다고 평가했다.
-190쪽

로티가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배운 것은 철학이 진리를 탐구하는 작업이 아니라 각각의 언어 게임 안에서 사용된 언어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쿤으로부터 배운 것도 역시 과학이 객관적 지식의 탐구가 아니고 과학자 사회가 공통적으로 인정한 '합의', 곧 패러다임을 이끌어가는 '활동'이라는 점이었다.
-191쪽

"우리의 긴념에 관한 질문은 그것이 실재에 관한 것이냐 현상에 관한 것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가장 좋은 행동 습관이냐 아니냐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아는 한 어떤 신념이 '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밖의 어떤 대안적 신념도 우리가 아는 한 더 나은 행동 습관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로티, <상대주의 : 발견하기와 만들기> 中)

-193쪽

로티의 '유대성의 철학'이 제시하는 '희망'이란 '인류가 승리할 것이라는 생각에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내적 본성에 전념한다면 항상 우리의 세계관, 우리의 도덕 이상, 우리의 예술과 같은 것이 햇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확실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 인간적 진보를 인류를 위해 미리 준비된 장소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으로서 생각하지 않고, 보다 관심있는 사물을 행하고 보다 관심 있는 인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생각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197쪽

누구에게나 똑같이 파악되는 하나의 객관적 세계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각각의 생물체가 구성하는 수많은 '비누방울'과 같은 다양한 환경 세계들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환경 세계 사이에는 어느 것이 더 '참되다'거나 더 '객관적'이라는 기준이 전혀 없다. 각자에게는 자기가 구성한 환경 세계가 참되고 객관적인 세계이다.
(윅스퀼이 연구로부터 주장하고자 하는 것) -231쪽

인식이란 -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 인간이 어떤 사물에 대하여 갖는 참된 개념이나 그것을 얻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이때 인식이라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인식주체라 하고, 인식되는 사물을 인식객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과정을 통해 얻어진 기호적(언어나 수식) 생산물이 곧 지식이다.
이와 달리, 인지란 본래는 사람이나 동물이 지각, 기억, 상상, 판단, 추리 등을 하는 것이나 그 과정을 뜻하는 심리학적 용어였으나 오늘날에는 인지과학 이라는 학문의 발달과 함께 보다 폭넓게 쓰인다. 즉 사람이나 동물뿐만 아니라 컴퓨터에 의해 구성된 인지 시스템 등이 어떤 자극을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함으로써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일련의 정보처리 과정을 가리킨다.
(마투라나의 인지론과 관련하여)-240쪽

'괄호 없는 객관성'이란 칸트의 구성주의가 보장하는 객관성이다. 즉, '나에게 빨간 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빨갛다'라고 생각하는 객관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을 부정하거나 배척하는 것을 포함한 객관성이기도 하다.

'괄호 친 객관성'은 마투라나의 급진적 구성주의가 보장하는 객관성이다. 즉 나에게 빨간 것은 단지 나에게 또는 나와 같은 인지 시스템을 가진 존재에 한정하여(또는 괄호 쳐서) 빨갛다고 생각하는 객관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 모두에게 타당한 지식을 알았다고 주장할 수 없고 무수하게 다양한 세계와 그 세계에서 타당한 지식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의 주장을 - 역시 괄호 쳐서, 하지만 충분히 -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하는 객관성이다.
(마투라나의 인지론과 관련하여)
-251쪽

"언어의 통일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언어의 섬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들은 각각 서로의 규칙 체계에 의해서 지배되고, 어떤 것도 다른 것으로 번역될 수 없다."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적 조건> 中)-252-253쪽

"...... 누구나 다 아는 이 세계는 오직 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다른 이들과 함께 내놓은 '어느 한' 세계임을 깨닫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그리고 우리가 다르게 살 때만 세계가 변할 것이라는 것을 알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앎의 앎은 우리를 얽어맨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면, 더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마치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투라나, <인식의 나무> 中)-257쪽

"우리의 세계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내놓은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다른 이들과 다투더라도 '그들과 계속 함께 살야 하는 한' 자신만의 확실한 어떤 것을 진리라고 고집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을 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과 함께 살고 싶으면 그것이 아무리 마땅치 않게 보인다고 해도, 그들에게 확실한 것 또한 '우리의 것만큼이나 정당하고 타당함'을 인정해야 한다. ...... 이런 행위를 가리켜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좀 약하게 표현하면 일상생활에서 내 곁에 남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투라나, <인식의 나무> 中)-258쪽

윤리와 지식에 대한 마투라나의 입장은 "무릇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라는 그의 아포리즘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함'과 '앎'을 각각 행위와 경험, 곧 '세계를 내놓은 행위'와 '세계를 인지하는 경험'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과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이라고도 표현했다. 그렇다면 "무릇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 라는 아포리즘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세계를 내놓은 해위'와 '세계를 인지하는 경험'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 즉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과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투라나의 인지론에서 지식과 윤리가 분리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함'과 '앎'이 서로 반복하여 순환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를 구성해 내놓으면 '그렇게' 구성된 세계를 경험하며, '그렇게' 구성된 세계를 경험하면 다시 '그렇게' 세계를 구성해 내놓는다는 말이다. 달리말해, 우리가 '그렇게' 존재하면 세계가 우리에게 '그렇게'나타나고, 세계가 우리에게 '그렇게' 나타나면 우리가 다시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투라나의 인지론에서 지식과 윤리가 서로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이유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함'과 '앎'의 이러한 순환구조가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윤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함'과 '앎'의 순환은 당연히 그것을 결정한다. 즉 '세계를 내놓는 행위',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이 선하면 선순환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악하면 악순환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260-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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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논문작성법
고려대학교 출판부 엮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1년 6월
품절


논문이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학문의 발전에 공헌하고, 나아가 인류의 지식의 총화에 무엇인가 보탬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개념이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1쪽

학위논문은 연구자의 능력 과시를 그 기능의 하나로 하기 때문에 완벽한 방증,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한 연구사적인 고찰, 충분한 자료의 제시 등 연구자에게 보다 많은 노력과 분석적인 자세를 요구하는 것이 상례이다. -5쪽

우선적으로 논문에는 독창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독창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소재의 새로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다루어진 소재라도 기술 방법이나 관점 또는 결론으로 이끄는 방식이 새로우면 독창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논문에서는 조사, 연구해서 알아낸 사실과, 이에 대한 연구자 자신의 비평이나 평가와 요구된다. 즉 다른 사람의 저술이나 견해를 비판 없이 옮기거나, 입증되지 않은 개인적인 견해를 주장하는 것 혹은 출처를 밝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저술을 인용하는 것은 논문을 읽는 독자뿐만 아니라 연구자 자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6쪽

번역물은 일차자료가 아니다. 번역이라는 행위는 그 내용이 다른 언어로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번역자의 의도나 사고가 반영될 수 밖에 없는 창조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번역물이 원래의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번역자의 사고가 번영되기 때문에, 이것 역시 일차자료를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이차자료일 뿐이다. 따라서 번역물에만 의존해서는 정확한 논문을 쓸 수 없다. 만약 '퇴계의 사상'에 관한 글을 쓴다면 그가 저술한 책을 직접 읽을 수 있는 한문 실력이 갖추어져야 한다. 퇴계의 모든 저술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할지라도 원문을 직접 읽을 수 없으면 퇴계에 대한 좋은 논문을 쓸 수 없다. -40쪽

1) 논문은 창의적이어야 한다. 예술적 창의성과 달리 학문적 창의성은 '새로운 표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표현이 가리키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나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 방법'에서 드러난다. 결국 새로운 표현이라 하더라도 결코 표현의 기법에 관한 문제만일 수 없고 새로운 발견을 향한 학문적 열의와 문제 의식 그리고 연구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천착이 사실상 논문의 학술적인 창의성의 전제가 된다. 그러므로 학술논문에서는 집필자의 창의적인 대목이 논문의 중심이 되는 위치에 오도록 서술해야 한다.

2) 사고의 연속성을 유지해야 한다. 여러 가지 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리하여 체계적으로 논리를 펼쳐 나가는 것은 논문 집필의 핵심이며, 최초의 발상에서부터 마지막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일관된 사고가 이어지지 않고서는 학문적 주장으로서의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최초의 착상을 얼마나 흔들림 없이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58쪽

인용의 원칙
1) 권위 있는 이론이나 주장, 또는 표현을 제시함으로써 자기 논리의 타당성, 정당성을 뒷받침한다.
2) 남의 이론이나 견해와 자기 주장과의 차이점을 밝힘으로써 역시 자기 논리의 저당함과 정확함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삼는다.
3)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학설이나 견해가 있을 때 이를 비교, 대조함으로써 자기의 주장을 전개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다. -61쪽

직접인용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필요하다.
1) 원문의 표현이 아니고는 다른 적나 표현을 찾을 수 없을 때
2) 원문을 그대로 제시하지 않으면 독자가 그릇된 해석을 하게 될 염려가 있을 때
3) 자기의 것과는 상충되는 견해를 더욱 뚜렷하게 노출시키고자 할 때 -62쪽

인용부분 전체는 지문의 좌측기선에서 우측으로 두세 자 들여앉힌다. 이른바 들여쓰기가 필요하다. 또한 이 때의 인용부분은 지문보다 행간을 좁히며, 특히 글자 크기를 지문보다 작은 것으로 하는 것이 관례이다. 인용부분을 지문과 분리해서 처리할 때 특히 유의할 것은 따옴표(" ")를 붙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63-64쪽

인증과 주
1) 주석은 인용문의 출처를 밝히기 위하여 사용한다.
2) 주석은 증거 자료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사용한다.
3) 주석은 본문의 내용에 대해서 확장의 가능성을 제시하는데 사용한다.
4) 주석은 본문의 내용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데에 사용한다. -68쪽

논문의 문장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1) 논문 문장은 평이해야 한다. 현학적이고 난삽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그 논문을 읽을 사람도 없을 뿐더러 그 논문이 학계에 기여할리 만무하다.

2) 논문 문장은 간결해야 한다. 논문은 명제와 논거로 되어 있다. 이들이 명료하지 않으면 논지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 때문에 논문의 문장은 가능하면 하나의 문장에 하나의 중심 사상을 담는 경제적이고 간결한 것이 좋다. 형용사나 부사와 같은 수식어의 남용은 가능하면 피해야 한다. 아울러 본문의 내용은 논지 전개에 꼭 필요한 것들만을 엄선해서 쓰고 불가피한 경우 주석, 인용, 부록 등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3) 논문의 문장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이성에 토대를 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표현만이 요구될 분, 지나친 감정의 노출이나 수사적인 표현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울러 단정적인 표현이나 최상급의 평가는 피하는 것이 좋다. 아뮐 확정적인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가능한 한 개연성을 주장하는 정도에 머무는 것이 좋다. 상대방을 지칭할 때 존칭을 써서는 안 되며, 자신을 지칭할 때는 3인칭을 써서 자신을 객관화해야 한다.

4) 논문의 문장은 정확해야 한다. 논문은 설명적인 글이다. 따라서 설명이나 논증과 같은 설명적인 진술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 묘사와 서사와 같은 창작적인 진술 방식을 사용하여 함축적이고 내포적인 표현을 해서는 안 된다. -68-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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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위한 철학통조림 - 담백한 맛 1318을 위한 청소년 도서관 철학통조림 3
김용규 지음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9월
구판절판


지식이란 우리가 '어떤 것들에 대해 정당한 근거를 갖고 그것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전문용어로는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라고 정의한다. 정당화란 '어떤 것을 믿기 위해 충분한 근거를 대는 것'이고, 참 이란 '사실과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17쪽

"진리는 없다. 있어도 모른다. 알아도 말할 수 없다." (고르기아스)-53쪽

첫째, 우선 상식에 속하는 의견을 하나 골라잡은 다음
둘째, 그 의견이 거짓이 될 수 있는 경우가 없는지 따져보고
셋째, 그런 경우가 발견되면 그 의견을 새롭게 고치는데
넷째, 이 일을 예외가 발견되지 않을 때까지 계속한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에 관해)-83쪽

"오직 비판의 길만이 열려있다." (칸트)
"철학자란 항상 상식이 아닌 것을 체험하고 보고 듣고 의심하고 희망하고 꿈꾸는 사람이다." (헤겔)
"철학은 그냥 두면 거의 애매하고 혼란된 사상을 명료하게 하고 명확하게 한계 짓지 않으면 안된다." (비트겐슈타인)-85-86쪽

만일 어떤 사람이 슈퍼컴퓨터가 세상의 모든 '꽃'을 알아볼 수 있게 하려고 세상에 있는 모든 종류의 꽃을 - 거의 불가능하지만 매우 어렵게 - 데이터베이스에 입력시켰다고 하자. 그런데 실수로 그 중 하나라도 데이터베이스에서 빠지면, 슈퍼컴퓨터는 그 꽃만은 꽃으로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다르다. 어린아이들은 누구나 엄마가 몇 종류의 꽃을 보여주며 "이게 꽃이란다"라고 알려주면, 그 다음 어느 시점부터는 아무리 처음 보는 꽃이라 해도 그것이 꽃임을 곧바로 알아본다. 왜 그럴까?
그 이유를 플라톤의 상기론으로 설명하면 간단하다. 아이는 몇 종류의 꽃만 보면 망각의 강에서 잊어버렸던 '꽃의 이데아'를 '재기억'해내고, 그 다음부터는 '꽃의 이데아'가 들어있는 사물들을 볼 때마다 즉각 그것이 꽃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어린아이에게 "꽃은 아름답다"라고 가르쳐 줄 필요가 없다. 아이는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몇 종류의 꽃을 보면 잊었던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다시 기억해 내고 "아! 아름답다."라고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럴듯하다. -116-117쪽

"유럽 철학의 가장 믿을 만한 특징은 그것이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
"사상가들이 아직도 글을 쓰고 논쟁하는 모든 것은 플라톤에서 비롯되었다. 플라톤이 철학이고 철학이 플라톤이다." (에머슨)-123쪽

"있는 것을 있지 않다고 하거나 있지 않은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이 거짓이요, 있는 것을 있다고 하거나 있지 않은 것을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 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 "그렇게 있는 것을 그렇게 있지 않다고 하거나 그렇게 있지 않은 것을 그렇게 있다고 하는 것이 거짓이요, 그렇게 있는 것을 그렇게 있다고 하거나 그렇게 있지 않은 것을 그렇게 있다고 하는 것이 참이다." -150-151쪽

"참과 거짓은 사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좋은 사물이 참되고, 나쁜 사물이 거짓인 것이 아니다. 참과 거짓은 오직 우리의 사고 안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52쪽

"어떤 동일한 것이 다른 어떤 동일한 것에 어떤 동일한 관계를 맺으면서 동시에 맺지 않을 수 없다."
"서로 모순되는 진술이 동시에 참일 수 없다."
"같은 것에 대해 긍정하면서 동시에 부정할 수는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르거나 동일하다."
"이것은 가장 높고, 안전한 원칙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에서 모순율에 대해)-154쪽

베이컨은 지식의 목적이 '인간의 상황을 낮게 만들고' '인간 지배권의 범위를 확장하기' 위함이라고 선언했고, 데카르트도 '실생활에서 유용할 수' 있는 '실천적인 철학'을 원했다. 그 다음으로는 진리를 찾아가려는 우리의 정신을 흐리게 하는 편견과 선입견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를 위해 한 일이 베이컨은 '네 가지 우상'을 깨트리는 것이었고,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까지도 의심해 보는 '방법적 회의'였다.
반면 두 사람 사이의 차이점은, 베이컨이 '경험'을 중요시하는 전통에 서 있었다면, 데카르트는 '사고'를 중요시하는 전통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식을 얻는 방법도 베이컨이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귀납법을 내세웠다면, 데카르트가 사고를 바탕으로 한 연역법을 내세웠다. -191-192쪽

정리하자면, 연역법이란 전제로부터 결론이 필연적으로 나오는 논증법이며, 귀납법이란 전제로부터 결론이 확률적으로 또는 가능적으로 나오는 논증법이다. 또한 연역법은 전제의 내용 가운데서 결론을 얻기 때문에 전제가 '참'이면 결론이 무조건 '참'이라고 하여 '진리 보존적 논증법'이라고 한다. 이와 달리 귀납법은 전제의 내용을 확장시켜 결론을 얻기 때문에 전제가 참인 경우라 해도 결론이 단지 '확률적으로 참' 또는 '가능적으로 참'이라고 하여 '진리 확장적 논증법'이라고도 한다. -204-205쪽

"나는 주의 깊은 정신 앞에 드러나는 또렷한 것을 명백하다고 한다. 이것은 대상들이 그것을 보는 눈에 충분히 강하게 작용하여 나타날 때, 우리가 대상을 명백하게 본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 다음 매우 또렷하고 다른 것들과 판이하게 달라 그 자신 안에 명백한 것 이외의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 것을 분명하다고 한다."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246-247쪽

첫째, 내가 자명하게 그러하다고 알고 있지 않은 어떤 것도 참된 지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리하여 조심스럽게 판단하고, 조급한 판단이나 편견을 피해서, 나의 정신에 명백하고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은 것은 결코 나의 판단 속에 포함시키지 않고, 내가 의심할 수 없는 것만 포함시키겠다.
둘째, 내가 검토하는 각각의 문제들이 지니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문제를 되도록 작게 나누어 검토한다.
셋째, 나의 생각을 질서 있게 유지한다. 그러기 위하여 가장 단순하고 알기 쉬운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단계적으로 차츰 복잡한 것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올라간다. 그리하여 본래는 아무런 순서도 없는 것들에게 마치 어떤 순서가 있는 것처럼 질서를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아무것도 빼놓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하여 어떠한 경우라도 세분하여 분석한 것들을 전체적으로 재조합하고 재검토한다.
기하학자들은 매우 간단하고 쉬운 논증을 연속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가장 어려운 증명을 해결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나는 이런 방법으로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서로 연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사람들이 참되지 못한 것을 진리라고 인정하지 않도록 주의만 한다면, 그리고 어떤 것을 다른 어떤 것에서 연역해 내는 데에 필요한 순서를 지키기만 한다면, 세상에는 우리가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먼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도저히 발견할 수 없을 만큼 깊이 감추어진 진리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248-2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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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 노자 : 道에 딴지걸기 지식인마을 6
강신주 지음 / 김영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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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과거의 지평(선입견)을 수정, 보완해야 한다는 가다머의 주장을 주체 중심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체는 새롭게 만날 타자에 대해서 근본적인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과거의 성심을 철저하게 폐기해야 한다는 장자의 주장은 타자 중심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체의 연속성은 새롭게 만날 타자에 따라 근본적으로 다시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32쪽

장자에 따르면 몸을 가지고 사는 인간은 항상 어떤 특정한 삶의 문맥에 처해 살아가는 존재다. 이 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특정한 삶의 문맥에 처해 살아가며, 그 문맥과 소통하는 데 근거하는 구성된 마음을 지닐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완성된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이나 모두 성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치 때가 낀 거울이나 맑은 거울이나 항상 무언가 비추듯이 말이다. 다만 완성된 사람은 타자와 얽히는 특정한 삶의 문맥에서 구성된 마음을 다른 삶의 문맥에 폭력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삶의 문맥에서도 타자와 소통하기 위한 허심(虛心)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33-35쪽

장자가 문제 삼고 제거하려는 것은 성심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을 작동시키는 성심을 절대적 표준으로 삼는 사태'를 문제 삼는다. 장자는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은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부정하려는 것은 '특정한 성심을 표준으로 삼는 고착된 자의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착된 자의식과 무관한 성심, 즉 임시적 자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성심은 인간의 유한성에 기인하는 자연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37쪽

이처럼 장자에게는 두 종류의 자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첫째는 그가 부정적인 것으로 보아 제거하려고 한 것으로서, 과거 의식을 자의식의 기준으로 집착하는 고착된 자의식이다. 둘째는 인간이 사회에서 산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에서 유래하는 임시적 자의식이다. 임시적 자의식은 구체적인 사태마다 새롭게 구성되는 자의식이다. -40쪽

이렇게 우리 삶은 항상 타자와의 무매개적인 소통을 전제로 영위되고, 오직 이런 무매개적인 소통을 통해서만 변화되어 생성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소통을 인식론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먼저 삶이 이루어지는 실존적 사태로 소통을 이해해야 한다. 타자와 소통함으로써 지금 나 자신으로 만들어지고, 앞으로도 전혀 생각지 못한 타자와 만나고 소통함으로써 전혀 생각지 못한 나로 생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소통의 긍정은 공존과 공생의 긍정과 연결되고, 비움으로 상징되는 깨어남은 이런 본래적 존재 양식으로서의 복귀를 의미한다. -43쪽

'알 수 없다'는 경험 또는 실존 상태는 자신만의 판단을 중지하게 만들고,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강제한다. 스스로 판단할 수 없으니, 이제 타자의 움직임에 따라 자신을 새롭게 조율할 수밖에 없다. 장자는 이것을 인시(因是)'라고 부른다. -57쪽

'저것'과 '이것'이 대립하지 않는 경우를 '도의 지도리(道樞)'라고 부른다. 한번 그 축이 '원의 중앙(環中)'에 서게 되면, 그것은 무한히 소통하게 된다.

'저것(彼)'과 '이것(是)'이 대립하지 않는 것을 기호로 나타내면 '저것=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것'과 '이것'의 관계를 장자의 경우 'A=-A'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 공식은 분명 모순이다. 따라서 'A=-A' 라고 표현하는 상황에서는 모든 판단을 유보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A'라는 것인가, '-A'라는 것인가? 이처럼 장자가 제안하는 '판단중지'의 상태는 기존의 형식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언어와 그에 따라 작동하는 사유의 분멸 작용이 불가능해지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 논리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에게는 이 공간이 인정하기 힘든 불편한 곳이다. 장자는 이런 불편한 '판단중지' 상태에 있을 때만 타자와 소통하는 삶의 공간을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59-60쪽

타자와 차이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동일성'을 무너뜨리는 어떤 힘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관조의 대상이나 풍경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삶의 차원에서 사건으로 나에게 닥쳐온다. 내면과 외면이라는 구조 속에서 결코 포착되지 않는 그 무엇이 바로 타자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면과 외면이라는 동일성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예측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이 타자다. 자신의 아이처럼 귀하게 키운 새끼호랑이가 어느 날 자기 손을 물 수 있다. 그렇게 타자의 타자성은 우리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흔적을 남긴다. -75-76쪽

진정한 의미의 타자와 차이는 자신의 동일성을 파괴하는 그 무엇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타자가 지닌 타자성은 내가 다른 주체로 생성될 수 있게 하는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관조의 풍경이 아닌 타자성을 가진 진정한 의미의 타자는, 어떤 공백이나 의미의 결여로만 나에게 나타나는 그 무엇이다. 내가 어떤 주체로 생성될 것인지 예측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77쪽

노자에 따르면 모든 개체는 고립적이고 자족적인 실체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가득 차서 아무것도 채울 수 없는 그릇은 이제 더는 그릇일 수 없다. 어떤 사람도 들어갈 수 없이 가득 차 있는 방은 이제 방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릇은 다른 것을 담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비어 있어야 한다. 방은 사람이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비어 있어야 한다. -132쪽

재분배는 통치자가 직접 만들어 낸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압도적인 폭력을 내세워 남에게서 배앗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계속되는 재분배의 목적은 단지 안정된 수탈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노자 당시 수탈의 유일한 대상이 농민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국가가 왜 농민을 위해 관개사업이라든지 토지정리 사업같은 대규모 공적 사업을 시행하였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계층이 자본자이기에, 국가에서 가장 보호해야 할 존재도 역시 자본가일 수 밖에 없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폭력에 따른 수탈과 재분배 기능을 수행하지만, 은혜와 선물이라는 겉모습으로 다가와야 한다. 은행에서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처럼 자애롭게 재분배를 수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은행에서 투자금을 거둬들이는 경우, 채무자 스스로 약속을 이행한다는 겉모양이 유지되어야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177-178쪽

뇌물의 논리와 선물의 논리를 가르는 기준은 사실 대가에 대한 기대 또는 기억 여부에 있다. 내가 타자에게 무엇을 뇌물로 주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내가 준 그것에 대한 대가를 항상 기대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뇌물을 받은 타자가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즉 그 사람이 대가로 나에게 무엇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다면, 내가 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선물이 되고 만다.
반대로 타자가 내게 무엇을 뇌물로 주었다고 해도 내가 그것이 뇌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내가 이제 상대에게 무엇을 대가로 주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렸다면, 상대의 뇌물은 아이너리하게도 나에게는 선물이 된다. -180쪽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거나 받을 때 그것을 뇌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뇌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연인 관계는 바로 채권, 채무 관계로 변질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랑하는 사람이 알고 있듯이, 사랑은 채권, 채무 관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 오히려 채권, 채무 관계를 잊어야만 다가오는 것이다.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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