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 위한 철학통조림 - 고소한 맛 1318을 위한 청소년 도서관 철학통조림 4
김용규 지음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9월
구판절판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빠진 미성숙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숙함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무능력함을 말한다. 이것의 원인은 이성의 부족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결단과 용기의 부족함에 있다. 때문에 이러한 미성숙은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용기를 가져라! 자신의 고유한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야말로 바로 계몽의 좌우명이다."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中-17쪽

첫째, 참된 지식의 근거를 이성에 두었다는 것. 둘째, 직관에 의해 얻어지는 제일원리를 인정한다는 것. 셋째, 제일원리로부터 모든 참된 지식을 차례로 연역해 내는데, 그것들이 결국 하나의 정합적인 체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공통점)-22쪽

첫째,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나온다. 둘째, 우리의 정신 안에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본유관념이나 원리는 없다.
(로크, 버클리, 흄의 공통점)-22쪽

우리는 오직 경험을 통해 사물에 대한 감각들을 받아들이는데, 그 감각들이 텅 빈 우리의 정신에 반영된다. 그 결과로 우리의 정신이 얻는게 사물에 대한 관념인데, 이것이 우리가 외부 세계에 대해 아는 지식의 전부이다.
이것은 우리가 마치 '사과'하나를 거울 앞에 가져다 놓으면 그 사과가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우리의 정신이라는 거울은 자신에게 비친 사과를 관념으로 얻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의 정신을 '빈서판'보다는 '빈거울'에 비유하는게 더 나을 것 같다.
(로크, 버클리, 흄의 공통점) -25쪽

"우리는 관념을 가지는 것 외에 어떤 지식도 가질 수 없다." (로크) -25쪽

"경험에 의거한 어떠한 논증도 과거와 미래 사이의 유사성을 증명할 수 없다" (흄)-29쪽

우리의 모든 지식은 판단의 형식을 취하며, 판단에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 두 가지가 있다.
분석판단이란 '모든 물체는 연장(공간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는 물체의 성질)을 갖고 있다.' 나 '삼각형은 세 변을 갖고 있다'와 같이 술어 개념이 이미 주어 개념에 포함되어 있어서, 경험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오직 주어진 개념의 분석만을 통해 술어 개념을 이끌어낼 수 있는 판단이다. 때문에 분석판단은 선천적으로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진다. 술어가 주어를 설명한다고 해서 '설명판단'이라고도 부른다.
종합판단이란 '모든 물체는 무게를 가진다' 나 '이 사과는 빨갛다'와 같이 술어 개념이 주어 개념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내릴 수 없는 판단을 말한다. 이런 판단은 후천적이며 당연히 개별성과 우연성을 갖고 있다. 술어가 주어에 새로운 개념을 더한다고 해서 '확장판단'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니까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는 분석판단이지만, '나의 이웃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는 종합판단이다.
(칸트의 인식론 정리)-30-31쪽

과학과 수학의 판단들이 수학의 판단들처럼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지려면 결국 '선천적'이어야 하며, 우리의 경험과 맞아떨어지려면 '종합판단'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식이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지면서도 경험과 맞아 떨어지게 하는 방법, 즉 우리의 지식이 이성과 경험 모두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 둘을 종합하여 지식이 '선천적 종합판단'이 되게 하면 된다. -32쪽

"인간의 인식에는 단지 이 두개의 근본적인 줄기만이 있다. 이 줄기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뿌리에서 발생했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감성과 오성이다. 감성에 의해서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며, 오성에 의해서 대상이 사유된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34쪽

감성이란 우리의 정신이 감각(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등)을 통해서 대상들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오성이란 감성을 통해 받아들인 내용들을 정리하여 개념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34쪽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그러므로 '개념을 감성화하는 것'(즉, 개념에 의해 그 대상을 직관에 부여하는 것)은 '직관을 오성화하는 것'(즉, 직관을 개념 아래 넣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 이 둘의 종합에 의해서만 인식이 나올 수 있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36쪽

참된 지식은 이제 '실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정신이 구성한 '현상에 대한 지식'이다. 즉 객관적 지식일 뿐이다. -46쪽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질서와 규칙성은 우리 자신이 집어넣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혹은 우리의 마음이 질서와 규칙성을 집어넣지 않았더라면 이것들은 자연 속에서 발견될 수 없을 것이다."
(칸트, <순수이성비판>)-51쪽

모든 지식은 '사실을 통해 입증', 곧 실증되어야 한다. 따라서 실증할 수 없는 종교적 또는 형이상학적 지식은 무의미하다. 또 지식의 목적은 진리를 알아내려는 데에 있지 않고,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데에 있다. 때문에 우리의 지식은 이론적으로 무한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비트겐슈타인과 검증주의 中) -82쪽

"우리는 과학적 세계 파악을 두 가지 모습에 의해 본질적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첫째는 경험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이다. 지식은 오히려 경험에서 유래한다. 경험은 직접 주어진 것에 의존한다. 경험이 정당한 과학 내용의 범위를 정한다. 둘째로 과학적 세계 파악은 특별한 방법, 곧 논리적 분석으로 특징지어진다. 과학적 노력의 목표는 논리적 분석을 경험적 질료에 적용함으로써 통일과학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 <비엔나 학단의 과학적 세계 파악> 中)-89쪽

"한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 명제를 '참'으로 만드는 특별한 상황과 '거짓'으로 만드는 특별한 상황을 정확히 지적할 수 있어야만 한다. '상황'이란 경험의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경험이 명제의 '참'과 '거짓'을 결정한다. 즉 경험이 명제를 검증한다."
(슐리크, <경험의 새로운 철학> 中)-93쪽

"철학적인 사항에 관하여 씌어진 문장과 질문의 대부분은 거짓이 아니라 비의미하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질문에 우리는 도대체 대답할 수 없고, 단지 그것들의 비의미성을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 <논고>, 4.003) -94쪽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사실의 그림을 그린다. ...... 그림은 실재의 모형이다. 그림에서 그림의 요소들이 대상들에 대응하낟. 그림은 그 요소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림은 사실이다."
(비트겐슈타인, <논고> 2.1-2.141) -97쪽

"세계는 모두 사례들이다.'
"세계는 사물들의 총합이 아니고 사실들의 총합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논고> 中)-102쪽

사회다윈주의는 다윈의 진화론의 두 가지 원칙, 즉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사회학에 받아들임으로써 탄생한 이론이다. 즉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경쟁을 통해 사회적으로 부적합한 사람들, 예컨대 장애인이나 정신병자 또는 극빈자들 같은 사회적 약자 등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131쪽

포퍼는 어떤 설명적인 보편적 과학이론도 검증(또는 귀납적 방법)에 의해서는 그 무한정성 때문에 완전히 증명될 수 없지만, 그 반증은 가능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반증이란 단 하나의 '반대적 사례'에 의해서도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137쪽

데카르트가 시를 뿌리고 칸트가 거둔 합리적인 열매인 '객관적 지식'이라는 말은 '언제 누가 보아도 그렇다고 인정되는 지식'을 뜻한다. "빨간 사과가 실제적으로 빨간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우리는 모두 그것을 빨갛게 인식한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이 사과는 빨갛다"라는 내 생각과 달리 "이 사과는 파랗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자. 그러면 나는 당연히 그가 틀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객관성을 믿는 합리적 인간에게 '다르다'는 것은 곧 '틀리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 선의에서라도 - 그것을 바로잡아 옳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합리성->객관성->획일화->지배'라는 연결고리로 이어지는 근대성의 특징이다.-169쪽

"진리란 과연 무엇인가? 유동적인 한 무리의 은유, 환유, 의인관들이다. 간단히 말해서, 시적 수사학적으로 높여지고 위엄 있게 치장하고 장식되어 이를 오랫동안 사용한 종족에게는 확고하고, 교훈적이고,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적 관계의 총체이다. 진리는 환상이다."
(니체,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허위에 대하여>)-170쪽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연구할 때에 현재의 관점, 곧 과거에서 본다면 '사후적 관점'에서 과거를 이해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다. 우선, 현재의 유리한 관점에서 과거 과학자들의 사상을 뒤돌아본다면, 그 사상이 본래 가진 본질을 그대로 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하게 된다. 더욱 나쁜 것은,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엉뚱하게 생각했나?' 와 같은 생각을 갖게 되어 현재의 과학지식이 그 전 시대의 것보다 더 우월하다는 생각과 역사가 어떤 획일적인 방향으로 진보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쿤의 '아하체험'을 통해 알아낸 사실)

-172쪽

포퍼는 실용주의는 '참'과 '유용성'을 혼동하고 있다고 했고, 러셀과 무어는 '거짓'도 때로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참'도 경우에 따라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서, 이 이론은 도덕적으로도 반대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우둔하다고 평가했다.
-190쪽

로티가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배운 것은 철학이 진리를 탐구하는 작업이 아니라 각각의 언어 게임 안에서 사용된 언어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쿤으로부터 배운 것도 역시 과학이 객관적 지식의 탐구가 아니고 과학자 사회가 공통적으로 인정한 '합의', 곧 패러다임을 이끌어가는 '활동'이라는 점이었다.
-191쪽

"우리의 긴념에 관한 질문은 그것이 실재에 관한 것이냐 현상에 관한 것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가장 좋은 행동 습관이냐 아니냐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아는 한 어떤 신념이 '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밖의 어떤 대안적 신념도 우리가 아는 한 더 나은 행동 습관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로티, <상대주의 : 발견하기와 만들기> 中)

-193쪽

로티의 '유대성의 철학'이 제시하는 '희망'이란 '인류가 승리할 것이라는 생각에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내적 본성에 전념한다면 항상 우리의 세계관, 우리의 도덕 이상, 우리의 예술과 같은 것이 햇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확실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 인간적 진보를 인류를 위해 미리 준비된 장소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으로서 생각하지 않고, 보다 관심있는 사물을 행하고 보다 관심 있는 인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생각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197쪽

누구에게나 똑같이 파악되는 하나의 객관적 세계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각각의 생물체가 구성하는 수많은 '비누방울'과 같은 다양한 환경 세계들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환경 세계 사이에는 어느 것이 더 '참되다'거나 더 '객관적'이라는 기준이 전혀 없다. 각자에게는 자기가 구성한 환경 세계가 참되고 객관적인 세계이다.
(윅스퀼이 연구로부터 주장하고자 하는 것) -231쪽

인식이란 -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 인간이 어떤 사물에 대하여 갖는 참된 개념이나 그것을 얻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이때 인식이라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인식주체라 하고, 인식되는 사물을 인식객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과정을 통해 얻어진 기호적(언어나 수식) 생산물이 곧 지식이다.
이와 달리, 인지란 본래는 사람이나 동물이 지각, 기억, 상상, 판단, 추리 등을 하는 것이나 그 과정을 뜻하는 심리학적 용어였으나 오늘날에는 인지과학 이라는 학문의 발달과 함께 보다 폭넓게 쓰인다. 즉 사람이나 동물뿐만 아니라 컴퓨터에 의해 구성된 인지 시스템 등이 어떤 자극을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함으로써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일련의 정보처리 과정을 가리킨다.
(마투라나의 인지론과 관련하여)-240쪽

'괄호 없는 객관성'이란 칸트의 구성주의가 보장하는 객관성이다. 즉, '나에게 빨간 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빨갛다'라고 생각하는 객관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을 부정하거나 배척하는 것을 포함한 객관성이기도 하다.

'괄호 친 객관성'은 마투라나의 급진적 구성주의가 보장하는 객관성이다. 즉 나에게 빨간 것은 단지 나에게 또는 나와 같은 인지 시스템을 가진 존재에 한정하여(또는 괄호 쳐서) 빨갛다고 생각하는 객관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 모두에게 타당한 지식을 알았다고 주장할 수 없고 무수하게 다양한 세계와 그 세계에서 타당한 지식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의 주장을 - 역시 괄호 쳐서, 하지만 충분히 -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하는 객관성이다.
(마투라나의 인지론과 관련하여)
-251쪽

"언어의 통일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언어의 섬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들은 각각 서로의 규칙 체계에 의해서 지배되고, 어떤 것도 다른 것으로 번역될 수 없다."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적 조건> 中)-252-253쪽

"...... 누구나 다 아는 이 세계는 오직 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다른 이들과 함께 내놓은 '어느 한' 세계임을 깨닫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그리고 우리가 다르게 살 때만 세계가 변할 것이라는 것을 알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앎의 앎은 우리를 얽어맨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면, 더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마치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투라나, <인식의 나무> 中)-257쪽

"우리의 세계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내놓은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다른 이들과 다투더라도 '그들과 계속 함께 살야 하는 한' 자신만의 확실한 어떤 것을 진리라고 고집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을 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과 함께 살고 싶으면 그것이 아무리 마땅치 않게 보인다고 해도, 그들에게 확실한 것 또한 '우리의 것만큼이나 정당하고 타당함'을 인정해야 한다. ...... 이런 행위를 가리켜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좀 약하게 표현하면 일상생활에서 내 곁에 남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투라나, <인식의 나무> 中)-258쪽

윤리와 지식에 대한 마투라나의 입장은 "무릇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라는 그의 아포리즘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함'과 '앎'을 각각 행위와 경험, 곧 '세계를 내놓은 행위'와 '세계를 인지하는 경험'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과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이라고도 표현했다. 그렇다면 "무릇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 라는 아포리즘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세계를 내놓은 해위'와 '세계를 인지하는 경험'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 즉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과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투라나의 인지론에서 지식과 윤리가 분리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함'과 '앎'이 서로 반복하여 순환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를 구성해 내놓으면 '그렇게' 구성된 세계를 경험하며, '그렇게' 구성된 세계를 경험하면 다시 '그렇게' 세계를 구성해 내놓는다는 말이다. 달리말해, 우리가 '그렇게' 존재하면 세계가 우리에게 '그렇게'나타나고, 세계가 우리에게 '그렇게' 나타나면 우리가 다시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투라나의 인지론에서 지식과 윤리가 서로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이유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함'과 '앎'의 이러한 순환구조가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윤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함'과 '앎'의 순환은 당연히 그것을 결정한다. 즉 '세계를 내놓는 행위',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이 선하면 선순환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악하면 악순환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260-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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